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53화 (353/608)

제353화

“좋습니다. 그런데 동행한 사람이 무사 한 명뿐인 것 같네요. 이곳까지 온 건 그대들뿐입니까?”

“아, 아닙니다. 어머니와 유모도 함께 모시고 왔습니다. 근처에 있는 지온 마을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이 근방은 곧 위험해질 테니 모두 진영 안으로 데려오도록 하세요. 그대들이 머물 막사를 마련하게 하겠습니다. 어디 보자. 위치는…… 세리크 경의 막사 옆이 좋겠네요.”

“황공……예?”

감동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아니카가 이사나의 마지막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도를 모를 수가 없을 만큼, 많은 의미를 담은 위치 선정이었다. 친위대가 모두 웃음을 터트리는 것과 동시에 케이와 아니카의 얼굴도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두 사람을 짓궂게 응시한 이사나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으면 좋겠군요.”

* * *

“슈텔 남작이 회유에 응했습니다.”

그날 밤 올라온 경과보고는 모두를 만족스럽게 했다. 슈텔 남작은 황제군이 아니카를 보호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 두말없이 회유에 응했다. 붉은 매의 보고서엔 그가 이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는 개인적인 첨언이 적혀 있었다. 이사나가 입술 끝을 올렸다.

“잘됐군.”

“예. 그를 회유한 건 정말 큽니다. 슈텔 남작은 사령부 회의에도 참석하는 요직의 인물입니다. 이로써 지금의 붉은 매로는 파악하지 못했던 기밀 정보에도 접근할 수 있게 됐습니다.”

보고하는 케이의 얼굴이 밝았다. 완벽한 계획도 잘못되려면 걷잡을 수 없이 꼬이기 마련인데 이번엔 다소 모험을 걸었는데도 일이 잘 풀릴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는걸. 포상은 케이, 그대로 하지.”

“……폐하, 놀리지 마십시오.”

“아아, 미안하다. 내 우직한 기사에게 첫 봄날이 찾아왔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해서 그만. 그대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을 줄 알았거든.”

“정말 미안하게 여기시는 건지 심히 의심스러워지는 말씀이지만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어쨌든 보고를 계속 들어주십시오. 일단 슈텔 남작이 몇 가지 정보를 넘겼습니다. 요즘 그쪽 사령부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건 무슨 말인가?”

“수도에서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대공이 연회에서 귀족들을 학살하려 했다고 합니다. 실패 후에 잠적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보고서를 읽어내려 가던 케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사나 역시 느긋한 표정을 거두고 얼굴을 굳혔다.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군.”

“그쪽도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웨칸 공작이 바로 수습해서 말이 크게 퍼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다만?”

“최근 대공과 연락이 원활하지 않은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세트니오 백작이 상황 파악을 위해 수도로 사람을 보냈다더군요. 이에 관련된 사항을 슈텔 남작이 더 자세히 알아보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수도에 심은 정보원 쪽은?”

“오늘 아침까진 별다른 소식이 없었습니다. 사실이라면 지금 연락이 오는 중일 테니 하루는 더 기다려봐야 합니다.”

실재하는 연락 수단 중에서 가장 빠른 건 마석으로 만든 통신구다. 하지만 구매 비용이 비싼 데다가 사용할 때마다 마력을 주입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그다지 보편화 된 방법은 아니었다. 특히 지금 같은 전시엔 서로의 진영에 통신을 방해하거나 도청하는 장치를 심으려고 하므로 안전한 방식으로 전서구를 더 선호했다. 실제로 얼마 전 황제군의 특수군인 ‘비둘기’가 대공군 진영 안에 마력의 흐름을 방해하는 마석을 깔아둔 참이었다. 그들이 대공과의 연락이 원활하지 않게 된 것엔 그 이유도 있을 터였다. 이사나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생각에 잠겼다.

“연회라면, 엘이 참석했다는 연회를 말하는 건가.”

“혹시 그 소문에 엘 님이 관여하신 걸까요?”

“그럴지도.”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모르겠군요. 엘 님과 연락 수단을 정해두지 않은 게 두고두고 아쉽습니다. 설마 일정이 이렇게까지 길어지실 줄은. 이럴 때 저희 쪽에서 먼저 연락을 드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정령을 수도까지 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엘 님을 이쪽으로 소환하는 것도 안 된다고 하셨죠.”

이사나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환엔 항상 같은 양의 마나가 필요하다. 정령왕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건 상관없으나, 정령사 쪽에서 그를 부르려면 처음 소환했을 때와 같은 양의 마나를 써야 했다. 이사나의 정령술은 꾸준한 노력 덕분에 이제 남부럽지 않을 수준까지 올라섰다. 물의 정령사는 물론, 현존하는 인간 정령사를 모두 통틀어도 가장 강하다고 자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가 엘과 계약한 과정은 수많은 요행이 따랐고, 말 그대로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다시 시도하면 마나 소모가 너무 심해서 자칫 심장 마비가 올지도 몰랐다. 이미 엘은 떠나기 전에 그 부분을 연신 당부해 둔 상태였다. 그 경고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시큐엘을 몇이나 다룰 수 있는 폐하께서도 조심하셔야 한다니. 정령왕이 정말 대단한 존재이긴 한 것 같습니다. 그런 분이 저희 편에 있다는 게 가끔은 믿어지지 않기도 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일단은 상황을 좀 더 지켜보는 게 좋겠다. 우리 선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거라면 엘 쪽에서 연락을 주겠지.”

“네, 알겠습니다. 그동안 저희도 알아볼 수 있는 만큼 알아보겠습니다.”

“보고는 이걸로 끝인가?”

“아닙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뭐지?”

“카터스 제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현자 다니멜 말입니다.”

“아.”

이사나는 언젠가 자신을 찾아왔던 검은 로브의 남자를 떠올렸다. 카터스 제국 황실 수석 마법사이자 얀 아카데미의 교수이며 황태자의 스승. 그는 황태자가 가출한 사실을 알았음에도 그 사실을 황실에 알리지 않고 그의 행방을 남몰래 수소문하고 다녔다. 황태자를 찾으면 연락해 달라며, 그가 간곡하게 부탁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가 있었지. 완전히 잊고 있었어.”

“네, 그런데 조금 주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

“그가 황태자의 귀국 조치를 돕겠다는 뜻을 비쳤습니다. 반려성의 문제가 제국 간의 분쟁으로 번지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합니다.”

의아하게 바라보던 이사나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황태자를 만난 이후 어떤 정보도 다니멜에게 알린 적이 없었다.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황태자의 귀국을 언급하는 건 시사하는 의미가 많았다. 한동안 손끝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던 이사나가 곧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태자는 지금 뭘 하고 있지?”

* * *

카터스 제국 최고의 명문으로 알려진 얀 아카데미는 보조강사조차 아무나 뽑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학부생에게는 제 능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영원히 졸업장을 주지 않는 냉혹한 학교였으며, 교수와 강사진도 주기적으로 연구 성과를 보이지 않으면 단칼에 자르는 매정한 직장이었다. 학자 세리엄은 그런 처절한 환경에서 10년을 넘게 버텨낸 불지의 강사였다. 악독한 총장의 눈칫밥 속에서, 쥐꼬리만 한 연구비와 월급에 매달려가며 꾸역꾸역 버텨왔던 나날은 언제 돌이켜도 몹시 고단한 시간이었다. 얼마나 더럽고 치사했던지, 처음 박차고 나왔을 땐 아카데미 쪽으로는 소변도 보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요 며칠간 그 시절을 간절하게 그리워하고 있었다. 납치되었다 돌아온 이후로 막사 안에서 두문불출하는 황태자 라온휘젠 때문이었다. 그는 먹지도 않고 온종일 잠만 자는 일상을 보내는 중이었다. 몸이 안 좋다는 이유였지만, 세리엄을 포함하여 진실을 아는 이들은 그가 앓는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설마 하스 그 녀석이 첩자였을 줄이야.’

세리엄은 혀를 끌끌 찼다. 일행 중에서 가장 조용하고 소심하던 그가 설마 첩자일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와 늘 함께 다니던 다이도 몹시 큰 충격을 받았다. 하물며 황태자의 상심이 얼마나 클지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세리엄과 아셀, 하스와 다이. 넷으로 이뤄진 이번 여정의 수행원들은 라온휘젠이 직접 엄선하고 또 엄선하여 고르고 골라 자신의 사람으로 삼은 이들이었다. 그가 얼마나 주변인을 경계하는지 알고 있는 만큼, 지금 느끼고 있을 상실감과 배신감도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저렇듯 며칠째 앓기만 하는 걸 가만히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전하, 식사는 하셔야죠.”

“…….”

“그렇게 아무것도 안 드시면 몸이 상하십니다.”

“……나가.”

“전하, 그러시지 말고, 제발.”

“나가라고 했다.”

며칠째 진전없는 공방이 이어졌다. 세리엄과 다이가 번갈아가며 어르고 달래도 황태자의 태도는 변할 줄 몰랐다. 은근히 냉정한 성격인 아셀은 몇 번 위로해 보다가 그가 꼼짝도 하지 않자 그냥 자리를 떴다. 저러다 괜찮아질 테니 무시하라고 했지만, 세리엄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황태자는 끌어안고 사는 상처가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 이번 사건이 그의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쐐기를 박았을지도 몰랐다. 그가 이대로 벽을 두른 채 영원히 갇혀 지내게 될까 봐 걱정이었다.

“태자의 몸이 많이 안 좋습니까?”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세리엄이 펄쩍 뛰어올랐다. 황급히 돌아본 그는 그곳에 서 있는 금발의 청년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부릅떴다.

“화, 황제 폐하!”

“내가 놀라게 한 모양이군요.”

“아, 아닙니다. 폐하께서 어쩐 일로 이곳까지…….”

당황한 세리엄이 허둥지둥 안쪽을 곁눈질했다. 다행히도 그렇게 요지부동이던 라온휘젠이 몸을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그라도 황제의 방문마저 무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세리엄은 안도하면서도 긴장했다. 이 두 사람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였다.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상태인 황태자가 얼마나 무례한 언사를 내뱉을지 몰라 온 신경이 곤두섰다.

“오랜만입니다, 황태자. 혹시 내가 쉬는 걸 방해한 겁니까?”

“아닙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런 누추한 모습으로 인사드려서 죄송합니다.”

“내가 멋대로 방문한 거니 신경 쓰지 마세요. 요즘 식사를 통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몸이 많이 안 좋은 거라면 군의를 부를까요? 진료를 제대로 받아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염려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오가는 대화는 예상과는 다르게 평이했다. 세리엄은 다시금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알기로 라온휘젠이 황제 앞에서 이렇게 온건한 반응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황제도 뜻밖이었는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웃었다. 라온휘젠은 모르는 척했으나 표정이 머쓱해지는 것까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세리엄은 옆에 있던 다이와 서로 호기심 어린 시선을 교환했다. 그 모습을 눈치챈 라온휘젠이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눈짓을 보내왔다. 당장 나가라는 뜻이었다. 모르는 척 버티고 서있자 시선이 점점 더 살벌해졌다. 그래도 두 사람은 꿋꿋이 버텼다.

“태자와 둘이서 할 말이 있습니다. 잠시 자리를 비켜 주겠습니까?”

상황을 정리한 건 이어진 황제의 목소리였다. 아무리 두 사람이 담대해도 황제의 말을 거역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쫓겨나듯이 막사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화를 듣지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막상 나오고 나니 숨통이 트였다. 막사 앞에 쪼그리고 앉으면서 둘은 여전히 놀라 있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세리엄 님, 보셨습니까? 태자 전하가 웬일로 황제 앞에서 날을 안 세우시네요.”

“그러게. 며칠 굶어서 가시가 빠지신 건가?”

“그 가시, 저희한테는 잘만 세우시던데요.”

“어, 그러게……?”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두 사람은 조금 전에 했던 생각을 다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내일은 해가 두 개 뜰 모양이었다.

수행원들이 나가고 둘만 남은 막사 안은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상대가 먼저 운을 떼길 기다리던 라온휘젠은 갑자기 자신의 이마에 닿는 손길에 흠칫 놀랐다. 얼떨떨해져서 고개를 들자 아무렇지 않게 이마를 짚은 이사나와 눈이 마주쳤다.

“?!”

“아, 열은 없군요. 안색이 나빠 보이진 않는데, 그래도 혹시나 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아프지 않습니다.”

“식사를 거르면 병자로 생각하기 마련이죠. 그게 가장 알아보기 쉬운 징후 아닙니까? 투쟁이 필요할 때거나, 아플 때가 아니라면 식사를 거르는 일은 흔하지 않으니까요.”

“……이젠 거르지 않겠습니다.”

“잘 생각했습니다.”

손이 떨어진 후에도 이마에 온기는 그대로 남았다. 생경한 감각에 라온휘젠은 어색한 표정으로 손을 꼼지락거렸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마를 짚어서 열을 재는 건 어릴 때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열이 날 정도로 앓은 적도 별로 없었지만, 일단 황족인 자신의 몸에 선뜻 손을 댈 수 있는 이가 별로 없었다. 댈 수 있는 이들은 하루에 한 번 마주치기도 쉽지 않았다. 물론 자주 보는 관계였더라도 그들 역시 직접 열을 재보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황족은 피를 나눈 혈육에게도 약점을 보여선 안 되는 존재였다. 당연히 아픈 티를 내색해서도 안 됐고, 그걸 드러내는 행동을 미숙하게 여겼다. 철이 들기도 전부터 라온휘젠은 늘 자신의 몸 상태를 스스로 점검했다.

참기 힘들 정도로 아플 것 같으면 궁의를 불러 진찰을 받았다. 진맥은 마도구를 활용해서 이뤄졌기에 그때에도 접촉은 거의 없었다.

먹어본 요리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평소였다면 이런 사소한 행동에조차 질시의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예전만큼 날이 서지 않았다.

“폐하께선, 이런 식으로 체온을 재시는군요.”

그냥 나직하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그러자 이사나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해한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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