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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352화 (352/608)

제352화

“그대는 슈텔 남작 가의 여식이던가요?”

“예, 폐하. 아니카 드 슈텔이라고 합니다. 강건하신 모습을 뵈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긴장했는지 정중하게 답하는 목소리 끝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아니카는 몹시 당황한 상태였다.

그녀가 기억하는 황제의 마지막 모습은 연약한 소년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훤칠한 청년이었다. 너무 많이 변해서 한순간 몰라볼 뻔했다. 한창 성장기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괄목할 만한 성장이었다. 성인의 태가 나기 시작하니 대공과도 닮은 것 같았다. 숙부와 조카의 관계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두 사람이 혈연이라는 사실을 오늘처럼 크게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그대가 케이, 세리크 경의 가족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들었습니다만.”

“사, 사실입니다. 백작님의 가족분들은 모두 무사하십니다.”

“그게 정말이오?”

다급히 이어진 외침에 아니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웬투스 지방 루멘 영지에 돌아가신 고모할머님께서 물려주신 작은 별장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모셨습니다. 주기적으로 오가는 보부상 편으로 남몰래 소식을 살폈는데 얼마 전까지도 다들 잘 지내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고모할머님이 그 별장을 제게 주신 건 아버님도 모르는 일이라 보안은 자부할 수 있습니다.”

설명이 이어질수록 케이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그의 얼굴 가득 강렬하게 떠오르는 안도감과 기쁨을 보며 아니카의 가슴도 같이 벅차올랐다.

이사나 역시 안도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대가 세리크 경의 가족들을 보호한 겁니까?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을 텐데 어떻게 알고 대처한 겁니까?”

“……아버님이 요즘 황성의 분위기가 수상하다고 말씀하신 걸 들었습니다. 곧 내란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고요. 새벽에 문득 잠에서 깼는데 황성 쪽에서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 내려오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곧장 백작가로 가서 그들을 대피시켰다는 겁니까?”

아니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은 간단했지만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과정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한창 자고 있던 백작가의 사람들은 아니카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금방 일어나지 못했다. 무례한 방문이라며 난색을 표하는 이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도 수월하지 않았다.

짐을 챙길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리 챙겨나온 자신의 패물을 떠넘기다시피 건네주고, 제가 타고 온 마차를 타고 가게 했다.

반대로 자신은 백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를 타고 나가 거리를 질주했다. 간발의 차로 도착한 병사들은 마차의 문장만 보고 그녀가 탄 마차를 따라왔다.

그들은 한참 동안 빙빙 맴도는 추격전 끝에 자신들이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덕분에 그녀가 도피를 도왔다는 정황이 드러났지만, 그날의 선택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용케 살아남았군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습니다. 지나는 길에 우연히 백작가의 마차와 마주쳤는데, 그들이 바꾸자고 해서 바꾼 것뿐이라고요. 하지만 제가 귀족이 아니었다면 통하지 않을 변명이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다들 믿지는 않았습니다.”

이사나는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니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쉽게 믿기 힘든 내용이긴 했지만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아니카와는 황성의 연회장에서 종종 마주치는 편이었다. 그때마다 늘 차분하고 고요한 모습이었던 걸로 기억했다. 허튼 말을 입에 담는 성정은 아니었다.

“엘이 보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줄 수 있겠습니까?”

“예, 폐하. 연회장에서 엘라 미칼란이라는 영애를 뵈었습니다. 그녀가 폐하를 뵙는 법을 일러주었습니다. 엘이 보냈다고 하면 아실 거라고 했습니다.”

“엘라 미칼란?”

처음 듣는 낯선 이름에 이사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름이야 적당히 지어낸 가명이라 쳐도 연회장이라는 장소가 뜻밖이었다. 이사나는 고심 끝에 물었다.

“혹시 그 여인이 푸른 머리카락이었습니까?”

“아뇨, 금발이었습니다. 푸른 눈동자이긴 했습니다만.”

“금발? ……모습이 어떠했죠?”

“아주 아름다운 영애였습니다. 남매와 함께 연회에 참석했는데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외모였습니다.”

“……그럼 맞을 텐데.”

“예?”

“아닙니다. 아, 그렇군요. 혹시 이마에 푸른색 보석이 박힌 서클렛을 착용하고 있진 않았습니까? 얇고 투명해 보이는 푸른색 장갑을 끼고 있었다거나.”

“아아, 네, 맞습니다. 영애의 드레스와 아주 잘 어울리는 장신구였던지라 기억이 납니다.”

“드레스…….”

대강 상황을 깨달은 이사나의 표정이 아련해졌다. 엘이 수도로 먼저 떠난 지 벌써 며칠이 지난 뒤였다. 지금까지도 대공이 죽었다는 소식이 없어 의아했는데, 꽤 복잡한 상황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도 이쪽의 상황을 살펴 좋은 소식을 보낸 것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마침 소식이 도착한 시기도 몹시 적절해서 미리 이럴 줄 알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엘, 너는 항상 우리를 구하는구나. 가슴 속을 뭉클하게 채우는 감각에 이사나는 잠시 두 눈을 감았다.

“폐하?”

“아아, 그대의 말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대의 부친인 슈텔 남작은 대공의 군에 들어간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건 아버님의 뜻이 아닙니다. 제가 백작님의 가족분들을 도피시킨 것이 알려져 어쩔 수 없으셨습니다. 딸을 살리기 위한 출정이었습니다.”

“흠. 그대는 왜 그렇게까지 했습니까? 세리크 경과 그 정도로 친분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그것이…….”

막힘없이 대답하던 아니카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줄어들었다. ‘아, 그렇군.’ 목까지 빨갛게 달궈진 그녀의 모습에 이사나는 이번에도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챘다.

케이도 퍽 당황한 눈치인 걸 보아 숙맥은 아닌 것 같았다. 이사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루멘 영지에 사람을 보내야겠군요. 위치를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폐하.”

“좋습니다. 내 기사들은 모두 들으라.”

“하명 하십시오, 폐하!”

그 순간 분위기가 일변하며,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친위기사들이 경례 자세를 취했다. 그 절도있는 광경에 아니카가 얼어붙은 동안 이사나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이 순간부터 슈텔 가문의 아니카 영애를 황제의 은인으로 대우한다. 그녀는 언제든지 나와 독대할 수 있으며, 군의 보호를 요청할 수 있다. 모두 그녀의 신변을 보호하고 각별하게 신경 써야 할 것이다.”

“예, 폐하! 명 받듭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하늘을 찌르듯이 울려 퍼졌다. 이어서 이사나가 다시 아니카를 바라보았다.

“아니카 영애, 원하는 것을 말하세요.”

“예, 예?”

“그대는 목숨을 걸고 내 기사를 도왔습니다. 황제의 기사를 도운 공헌을 가볍게 넘어갈 수는 없죠. 그대의 용기는 길이 높여질 것이며, 무엇으로든 보상받을 겁니다. 내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주변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입만 벙긋거리고 있던 아니카가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크게 심호흡했다.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겸양을 떨 상황이 아니었다. 아마도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이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카의 눈빛이 단호해졌다.

“아버님과 오라버님에게 용서를…… 슈텔 가문의 사면을 구합니다.”

“가문의 사면이라.”

“감히 황제 폐하를 반하는 무도한 무리의 편에 섰으나, 그건 단지 딸을 살리기 위한 원치 않는 선택이었습니다. 부디 그의 안타까운 부정(父情)을 살펴주십시오.”

간곡한 호소와 함께 아니카가 허리를 숙였다. 거의 엎드리다시피 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이사나가 턱을 가볍게 쓸었다.

간곡한 호소와 함께 아니카가 허리를 숙였다. 거의 엎드리다시피 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이사나가 턱을 가볍게 쓸었다.

“슈텔 남작이 대공의 편에 섰으나, 그 여식의 공헌이 있으니 이 전쟁이 끝나도 슈텔 가는 존속될 겁니다. 허나 영애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닌 것 같군요.”

“화, 황공합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영애는 부친을 얼마나 신뢰합니까?”

“그야 물론…… 전부 신뢰하고 있습니다.”

“흐음, 세리크 경.”

“예, 폐하.”

오가는 대화를 긴장한 얼굴로 지켜보던 케이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이사나의 두 눈에 곧 선명한 빛이 돌았다.

“예정이 조금 틀어지겠지만 어쩔 수 없네요. 붉은 매를 움직이죠.”

“붉은 매를 말입니까?”

“그들더러 슈텔 남작과 접선하게 하세요. 여식이 이쪽에 있다는 걸 알리고 회유를 권해 보죠. 그가 응하면 붉은 매로 편입하게 합니다.”

“……!”

케이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전쟁에서 정보는 승패를 가르는 열쇠나 마찬가지다. 상대에 대해 파악할수록 전황이 유리해지다 보니 첩자란 늘 부산물처럼 따라붙는 존재였다. 그들을 색출해 내는 게 중요한 만큼 상대 쪽에 얼마나 많은 첩자를 붙이는지도 중요했다. 붉은 매는 이쪽에서 대공군 진영에 심어둔 첩자였다. 때가 이를 때까지 온전히 숨어 있다가 적기에 기습하는 것이 그들이 부여받은 임무다. 슈텔 남작과 접선을 시도해서 일이 수월히 풀리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반대로 그가 회유에 응하지 않으면 이쪽의 패만 드러내는 결과가 될지도 몰랐다. 지금 이사나가 한 말은 작전 실패를 감수하겠다는 의미와 마찬가지였다.

“명을, 받듭니다.”

대답하는 케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감수하는 바가 크다는 건 그만큼 이사나가 이번 일을 높이 사고 있다는 뜻이었다. 고작 수하의 가족을 도왔을 뿐인데, 자신의 은인으로 여기고 막대한 손해까지 감당하려 한다. 그가 제 사람의 목숨값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 순간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난 적이 없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제 주군이라는 사실에 케이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지켜보던 다른 친위대들도 감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어디든 뛰쳐나가 함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이 그들의 사기에 활활 불을 지폈다.

그 사이에서 아니카는 완전히 얼어 있었다. 오가는 대화 내용을 통해 그녀도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한 상태였다. 다만 그녀가 받은 충격은 조금 다른 부분이었다. 붉은 매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황제에게 속한 군대일 것이다. 그곳에 편입된다는 건 슈텔 가문을 황제군의 소속으로 두겠다는 의미였다. 단순히 사면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황제를 도운 가문 중 하나로 영광을 얻는 자리에 속하는 것이다. 그저 아버지와 오라비의 목숨을 건사할 수 있으면 족하다 여겼던 아니카로서는 감히 생각지도 못한 영예의 자리였다.

“폐, 폐하.”

자신이 지금 딛고 있는 것이 땅인지, 하늘인지. 숨을 쉬는 방법조차 잊은 기분이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니카를 향해 이사나가 빙긋 웃었다.

“남작이 자의로 출정한 게 아니라는 영애의 말을 믿어 보겠습니다. 한번 기회를 주도록 하죠. 그가 영애가 아는 그대로의 부친이라면 나와 함께 승리의 주역으로 환궁 길에 오를 겁니다. 그러나 만약 거부한다면, 어쩔 수 없이 포로 신세가 되겠군요. 영애와 약속한 바가 있으니 목숨을 거두진 않겠습니다.”

“황공, 황공합니다, 폐하! 황공합니다!”

간신히 참고 있던 눈물이 끝내 왈칵 터져 나왔다. 아니카는 거의 오열하듯이 흐느꼈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지만 그 모습을 흉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드세요. 그대는 황제의 은인으로서 당연한 보상을 받은 겁니다. 이왕이면 우는 것보다는 웃는 얼굴을 하는 게 나도 더 기쁠 것 같군요.”

그녀를 진정시킨 건 이사나였다. 넌지시 달래는 말에 눈물을 그친 아니카가 겨우 고개를 들자 그가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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