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51화 (351/608)

제351화

‘그러고 보니 한 번 돌아간 적이 있었지.’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시벨리우스는 묘한 기분으로 아셀을 바라보았다. 증명을 위해서라고는 하나 잠시나마 인간의 모습을 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것도 강요가 아닌 본인의 의지로 바꾼 건 처음이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이미 시작된 건지도 모른다. 아셀의 몸에 일족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상종할 일은 결코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차라리 평범한 인간이 호기심으로 접근하는 거였다면 좋게 대해 줄 수 있었겠지만, 그가 유니콘의 후예인 이상 하는 행동마다 거부감만 들 뿐이었다. 심지어 저를 가장 괴롭게 만든 형의 후손이다. 눈앞에서 목숨이 위험에 처해도 신경 쓰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인연의 힘은 묘하게도, 절대 불가능할 것 같던 일을 벌어지게 했다. 마주칠 때마다 치솟던 거북함이 이젠 이렇게 함께 앉은 상태에서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힘든 시간을 혼자 잘 버텨온 것도, 수업을 잘 따라오는 것도 기특했다.

이런 자신이 생소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래도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결코 쉽게 마음을 열지는 않았을 것이다. 변할 수 있었던 건 그때보다 마음이 너그러워졌기 때문이다. 이제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너 호구야? 왜 저런 취급을 하는데 아무 말도 안 해?>

불타는 듯이 응시하던 눈동자가 떠올랐다. 눈부신 금발에 짙은 녹안을 지닌 이는, 그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좋은 향기를 지니고 있었다. “난 엘이라고 해.” 그가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면서 악수를 청하던 순간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광경 중 하나다.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화내주던 이였다. 자신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그를 통해 처음으로 배웠다.

그와 꼭 같은 얼굴과 이름을 지닌, 또 다른 엘 또한 소중한 존재였다. 그는 못되게 군 자신을 기꺼이 용서함으로써 용서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이사나와 알리사처럼 좋은 아이들을 만나게 된 것도 전부 그 덕분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마족이 생각보다 괜찮은 놈들이라는 것도 평생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내가 너였다면 처음부터 헷갈리지 않았어.>

“…….”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밉살맞은 목소리에 시벨리우스는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상기할 때마다 돌이라도 얹은 듯이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조금은 담담하게 넘길 수 있게 됐다. 처음 들었을 땐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죄책감인지 불안감인지 알 수 없는 그것. 이제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지독한 상처만 남긴 과거의 잔여물.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놀랐던 그 날.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재회한 땅의 정령왕은 여전히 밉살맞은 꼬마였다. 그래도 엘뤼엔과 함께 서 있던 그 모습은 언젠가의 광경을 떠올리게 해서 가슴이 뭉클했었다. 싫은 표정을 지을 게 뻔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둘이 반가웠다니. 내가 정말 변하기는 한 모양이야.’

시벨리우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라면 장로를 만나도 좋게 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 웃으며 인사하면 오히려 그쪽에선 제가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다시금 실소를 터트린 그가 식사나 마저 하려던 때였다.

-……스.

문득 느껴진 울림에 시벨리우스가 동작을 멈췄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를 보고 거의 식사를 마친 알리사가 물었다.

“왜 그래, 시벨 씨?”

“으음. 혹시 지금 누가 나 부르지 않았어?”

“그래? 난 못 들었어.”

“저도 못 들었습니다.”

알리사에 이어 아셀도 어리둥절해 하며 대답했다. 가만히 집중하는 시벨리우스를 따라 두 사람도 숨을 죽였지만, 사방은 쥐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했다.

“이상하다. 내 이름이 들린 것 같았는데.”

“누가 밖에서 시벨 님 얘기라도 한 게 아닐까요? 시벨 님이 저희보다 청력이 좋으시니까요.”

“흠, 그런가.”

“이럴 때 엘 님이나 다른 분이 계셨다면 판별해 주셨을 텐데 아쉽네요.”

“뭐, 날 찾는 거면 곧 기별이 오겠지.”

시벨리우스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밖으로 나가볼까 했지만 굳이 식사하던 중에 움직일 만큼 궁금한 건 아니었다. 사실 거의 스쳐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던 터라 실제로 소리였는지 아닌지조차 확실하지도 않았다. 슬슬 식사를 마친 병사들이 막사를 정리하기 시작할 때인데, 거기서 울린 소리를 착각한 걸지도 몰랐다.

이후로 같은 감각이 또 일거나 찾아오는 이는 없었기 때문에, 곧 그 일은 금방 뇌리에서 지워졌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의 시작이었다.

* * *

오전부터 시작된 황제군의 진군이 멈춘 건 늦은 오후 무렵이었다. 언덕 너머 높게 둘러쳐져 있는 웅장한 성벽의 모습이 그들을 맞이했다. 수도를 방어하는 최후의 관문인 마틴성이었다. 그 너머에도 상비군이 존재하고 있지만, 규모 면에서나 병력 면에서나 마틴성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대공군의 가장 큰 병력인 웨칸 공작의 기병대도 그곳에 있었다. 사실상 황제군과 대공군의 마지막 격전지가 될 터였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폐하.”

“네, 형님. 그렇네요.”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모든 게 다 끝날 겁니다. 어긋났던 것들이 전부 원래대로 돌아갈 차례입니다.”

이사나와 함께 전방을 바라본 카웰 공작은 격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짐하듯이 건네는 말에 이사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중군은 선발대와 합류한 상태였고, 나머지 후발대도 내일 새벽 무렵이면 도착할 예정이었다.

“비둘기들이 보급로 몇 군데를 끊어놨으니 다들 사기가 떨어졌을 겁니다.”

“……오늘 저녁은 연회를 열죠. 가능한 한 떠들썩하게. 고기를 굽는 게 좋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젤로 자작에게 도움을 청해 봐야겠군요. 그가 다루는 바람의 정령이라면 저쪽 놈들에게 생생한 소리와 냄새를 전달해 줄 테지요.”

의도를 깨달은 카웰 공작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이사나도 같이 웃었다. 나이 차는 있을지언정 제법 손발이 잘 맞는 사촌이었다.

황제가 자신의 막사에서 납치당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후였지만 황제군의 사기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애초에 그 사실을 아는 이가 얼마 되지 않았다. 혼란이 벌어질 것을 우려한 친위대가 상황을 철저히 은폐했기 때문이다. 이사나가 귀환한 후에도 역시 같은 이유로 알리지 않고 지나갔기에 카웰 공작마저 모르고 있었다. 납치된 기간이 짧은 데다가 그 시간이 새벽 대이기도 해서 무마하기도 쉬웠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부에서까지 손을 놓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사나는 결코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예정된 연회가 한창 벌어지는 시간, 황제의 막사에 친위대가 들어섰다. 양팔이 밧줄로 결박된 두 남자를 압송한 모습이었다. 끌려온 두 남자는 며칠간 씻지도 먹지도 못한 것처럼 행색이 몹시 초라했다. 그들은 막사에 들어오자마자 무릎 꿇려졌다. 저항 없이 몸을 굽힌 이들이 두려운 기색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의자에 앉아 있는 이사나를 발견하곤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때까지 이사나는 서류만 훑어보고 있었다. 그는 무릎 꿇은 두 사람 쪽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고하라.”

“동부 엘더 영지 출신인 리암 남작과 그의 종자인 길버트입니다.”

기사가 답하는 것과 동시에 납작 엎드린 남자들이 벌벌 떨었다. 그제야 서류에서 시선을 뗀 이사나가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진영 한가운데서 벌어진 대담한 납치였다. 일을 도모한 이는 라온휘젠 황태자의 짐작대로 그의 수행원 중에 있었다. 두 명의 호위 무사 중에서 말수가 적어 유난히 존재감이 없었던 자로, 황태자가 무사히 귀환하자 곧바로 도주를 시도함으로써 스스로 정체를 드러냈다. 붙잡힌 즉시 목숨을 끊는 바람에 심문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외부인인 그가 혼자서 완벽한 동선을 짜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이에 내부에 또 다른 동조자가 있다고 판단, 첩자를 색출하는 작업이 은밀하게 이뤄졌다. 끌려온 이들은 사건 당일 탈영을 시도한 혐의로 붙잡힌 자들이었다.

“이들이 쓰던 막사와 소지품에서 외부와 밀통한 증거를 찾아냈습니다. 당일 황태자 일행과 알리사 님께 거짓 정보를 흘린 병사가 남작의 사병이라는 것 또한 이미 확인을 마쳤습니다. 이들의 평소 교류 관계에서 행적이 수상한 자들을 우선 추려 감시를 붙여 둔 상태입니다.”

시벨리우스가 납치된 일행을 추적하는 동안, 친위대 대장인 케이는 진영 안의 움직임부터 파악했다. 막사에 없는 자와 있는 자를 가려내게 했고, 본래 있어야 할 위치나 진영 밖을 조금이라도 벗어난 자가 있다면 우선 보고하라고 명했다. 덕분에 사병들과 함께 몰래 빠져나가려던 리암 남작을 잡아들일 수 있었다. 한동안은 친위대가 황제를 찾느라 정신없을 거라 판단한 그의 패착이었다.

“애석하게 됐습니다, 남작. 그렇게 급히 달아나려고 할 게 아니라 조금 더 상황을 지켜보지 그랬습니까. 그럼 곧장 꼬리가 밟히는 일은 없었을 텐데요. 그래도 결국은 들통났겠지만.”

이사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황제의 모습에 남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탈영 시도가 적발된 즉시 그대로 끌려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수레에 며칠간 갇혀 지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엔 분노한 황제에게 고문을 당할까 봐 두려웠지만, 속을 알 수 없는 무심한 반응도 두렵긴 마찬가지였다.

“폐, 폐하.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협박을…… 협박을 받았습니다.”

“협박?”

“수도에 여동생 가족이 살고 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그들을 죽인다고 했습니다.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남작은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그는 온화하고 다정한 황제의 성정에 어떻게든 희망을 걸어보려 했다. 그러나 돌아온 건 얼음처럼 서늘하고 무감한 시선이었다. 평소 알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냉정한 군주의 모습에 남작은 변명하던 입을 다물었다.

“적과 내통하고도 자비를 구하다니 우습군요. 그대들은 탈영을 시도한 것만으로도 이미 즉결처분 감입니다. 지금 그대들이 내게 구해야 할 건 목숨 따위가 아닙니다.”

“폐, 폐하.”

“동생 가족이 염려되었다면 좀 더 현명한 선택을 하지 그랬습니까. 협박당하는 사실을 내게 은밀히 알려 올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을 겁니다. 지금 남작의 변명은 날 그만큼 신임하지 못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습니다.”

“…….”

“명예를 지킬 마지막 기회를 주겠습니다. 전부 아는 대로 대답하는 게 좋을 겁니다. 이 전쟁이 끝난 후, 그대들의 목을 반역도들과 함께 효시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리암 남작의 두 눈이 빛을 잃고 흐려졌다. 벗어나지 못할 미래를 깨달은 자의 눈이었다. 그는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이내 입술을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하문하십시오, 폐하.”

* * *

취조는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리암 남작은 처음부터 버릴 패로 쓰였는지 쓸 만한 정보는 거의 갖고 있지 않았다. 지시를 전달한 자, 그와 주로 접선하던 장소, 그 방식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그나마 지시한 쪽이 어떤 이름으로 불렸는지 파악한 정도가 유일한 수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리야, 라고 했었지.’

연거푸 되짚어 봐도 기억에는 없는 이름이었다. 납치 당시 마차를 호송하던 무리도 그곳에 소속된 이들일 터였다. 이미 그들의 시신은 전부 거두어 조사를 마쳤다. 친위대의 보고에 따르면, 그중 세 명이 어깨에 같은 형태의 문신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사람의 눈을 연상시키는 문양으로, 지옥의 신이자 복수의 신이기도 한 크라제의 상징 문양이었다. 대륙에는 크라제의 신전이 없으니 신도일 리는 만무하고, 그의 문양을 일리야라는 단체가 상징으로 삼은 것 같았다. 마신의 성기사들을 사병처럼 부리는 대공이지만, 그가 또 다른 사병을 키우고 있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병사라기보다는 암살자에 가까워 보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자들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바로 형을 집행하겠습니다.”

심문이 끝난 후 두 사람을 내보낸 케이가 말했다. 이사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그를 바라보았다. 리암 남작이 애원할 때부터 그의 표정은 유난히 굳어 있는 상태였다.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기에 이사나의 기분도 가라앉았다.

“케이, 가족의 행방은 찾았나?”

“……아직 찾는 중입니다.”

“……그렇군.”

황제의 친위대는 각지에서 선별한 이들로 구성된다. 지역 간의 통합과 인재발굴을 도모하는 한편으로, 지방의 대영주들을 견제하고 감시하기 위한 황실의 오랜 방침이었다. 그렇기에 친위대 기사는 가족과 떨어져 단신으로 수도에 올라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대장인 케이는 처음부터 수도 태생이라 식솔도 모두 수도에 있었다.

모든 일이 시작된 그 날. 멀리 떨어져 사는 다른 친위대의 가족들은 화를 면했지만, 케이의 가족은 내란의 한복판에 고스란히 떨어졌다. 황제를 보호하는 것에 집중한 그는 제 가문까지 살필 겨를이 없었다. 종자를 보내 도피하라는 소식을 전한 것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제대로 닿았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나중에서야 수소문해 봤지만 들려온 건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소식이었다. 대공에게 끌려간 건지, 혹은 무사히 탈출한 건지, 자세한 상황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전쟁 초반엔 그에게도 리암 남작처럼 가족을 빌미로 협박하는 서신이 오곤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무시로 일관하고 서신을 전달한 이를 색출해 내자 어느 순간부터 접선 시도가 완전히 끊겼다. 이사나가 리암 남작을 더 단호히 대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염려하지 마라. 다들 무사할 거다.”

“예, 걱정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정말 가족이 인질로 잡혀 있다면 이미 대공군 쪽에서 그들의 시체를 성벽에 내걸었을 것이다. 그들은 치르는 전투마다 패전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지금쯤 약이 바짝 올랐을 그들이 가치가 없는 인질을 살려 둘 리가 없었다. 그래서 케이는 자신의 가족이 살아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폐하, 알렉입니다.”

그때 막사 밖에서 기척이 느껴지며 친위대 기사인 알렉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가를 받고 들어온 그는 무척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저어, 폐하. 그리고 대장. 사람이 찾아왔는데 한번 만나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 찾아왔다고?”

“예. 저, 그게…… 엘 님이 보내셨답니다.”

생각지 못하게 등장한 이름에 이사나와 케이의 눈이 동시에 동그래졌다. 그 장면이 웃기다고 생각하면서도 알렉은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이어질 대사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금 심호흡한 후, 케이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의아해진 케이가 왜 그러냐는 시선을 보낼 때였다.

“그…… 대장의 가족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고 합니다.”

* * *

아니카 드 슈텔. 무가의 외동딸로 자란 그녀는 지금 인생에서 가장 혼란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연회장에서 만난 신비로운 소녀 덕분에 잠시 멀어졌던 이성은 자택에 도착한 순간에 다시 돌아왔다. 정신이 들고 나니 오늘 처음 만난 소녀의 무엇을 믿고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는지,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왠지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선 안 될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인생을 거는 도박을 해 보기로 했다. 소녀의 말대로 바로 짐을 꾸리고, 어리둥절해하는 어머니와 유모를 독려해 수도를 떠나 지온 마을에 도착했다. 그러자 정말로 황제군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며칠 후 황제군 진영의 병사들이 마을을 찾아와 촌장에게 피난을 떠날 것을 권한 것이다. 소녀가 알려준 대로, 정확히 삼 일째가 될 무렵이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마을 사람들이 부리나케 피난 짐을 꾸리는 동안, 아니카는 반대로 황제군을 찾아갔다. 앞을 가로막는 보초병에게 신분을 밝히고 황제를 알현하고자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망설인 끝에 그녀는 이번에도 소녀가 일러 준 방법을 썼다. ‘엘’이 보내서 왔노라 전해 달라고. 그러자 마법이 펼쳐진 것처럼 굳게 가로막고 있던 창이 거둬지며 앞이 트였다. 심지어 황제의 친위대가 그녀를 직접 맞이하러 나왔다. 그들 대부분이 익숙한 얼굴이라 몰라볼 수가 없었다.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조금씩 피어나던 희망의 싹이 순식간에 부풀어 수풀을 이뤘다. 그 믿음은 그대로 보답 받았다. 알현을 청하고 허가를 기다리고 있을 때, 누군가 막사에서 튕기듯이 달려 나왔다. 그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아니카는 두 손을 끌어모아 입을 가렸다.

‘아, 세상에…….’

간절히 바라던 기적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케이는 거의 날 듯이 뛰어나갔다. 막사를 나선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건 두 명의 남녀였다. 귀족인 여인과 그녀를 호위하는 무사로 보였다. 그중 여인의 모습이 왠지 낯익었다. 케이는 곧 그녀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슈텔 영애?”

“……세리크 백작님.”

여인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는 그녀의 두 눈이 금방이라도 울 듯이 일렁거렸다.

“영애가 어떻게 여기에…….”

“정말…… 정말 살아계셨군요.”

격정을 감추지 못한 얼굴에서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케이는 당황하면서도 의아해했다. 슈텔 남작과는 같은 무인이다 보니 평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딸인 아니카와도 종종 인사를 나눈 편으로, 다른 귀족 여인들보다는 가까이 지낸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슈텔 남작은 대공군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곧 격전을 앞둔 마틴성 안에 슈텔 남작과 그의 후계자가 속해 있다는 정보도 입수했다. 이제 다시는 좋은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에 내심 씁쓸해했었다. 그런데 정작 그의 딸인 아니카가 황제군을 찾아오다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살아계셔서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연신 눈물을 훔치는 그녀를 보고 케이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카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건 충분히 알았고, 그 마음이 고맙기도 했다.

하지만 무인으로서 말보다는 몸으로 하는 대화에 더 익숙한 그는 이럴 때 어떤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몰랐다. 특히 울고 있는 여인을 달래는 법은 전혀 알지 못했다.

“낯익은 영애로군요.”

때마침 굳어 있는 그의 등 뒤에서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막사에서 뒤따라 나온 이사나였다. 황제의 등장에 아니카가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예의를 갖췄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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