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50화 (350/608)

제350화

거친 숨소리와 함께 루세프의 입이 벌어졌다. 카노스의 옷깃을 붙잡고 있던 그의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다. 비틀거리면서 물러선 후에도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시벨리우스가…… 살아 있다고?”

“아, 맞아. 시벨리우스. 그런 이름이었어.”

“말도 안 돼. 그 녀석은 죽었다고 들었는데……. 인간들의 전쟁에 끼어들었다가…… 마법사에게 당해서 손 쓸 새도 없이 절명했다고…….”

“명계에서 사망 장부는 확인해 봤고?”

“……찾지 못했어. 육체는 흔적도 없이 불에 녹아 사라졌고, 영혼은 차원의 틈에 빠졌다고 들었어. 그렇게 되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잖아. 그래서 우연히 발견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네. 차원 틈에 봉인되어 있었으니.”

“봉인이라니…….”

“글쎄. 자세한 거야 그 녀석이 죽었다고 네게 고한 놈한테 물어보면 되지 않겠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루세프의 새파란 눈동자에 잠시 빛이 번뜩이다 사라졌다. 싱글거리는 카노스의 웃는 얼굴은 평소 그가 가장 싫어하던 것 중 하나였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대강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 것 같았다. 루세프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내 창조물이라고 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기분. 나도 잘 알지.”

“…….”

흥얼거리듯이 이어지는 카노스의 음성에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지난날 마족들이 사고를 칠 때마다 어떻게든 해 보라며 그를 닦달했던 기억이 아련하게 스쳤다. 덕분에 머릿속을 가득 채운 흥분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루세프는 한층 차분해진 상태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아우성에 시달리고 난 것처럼 진득한 피로가 느껴졌다.

“……정말 시벨리우스가 살아 있는 거라면 내가 느끼지 못한 건 어쩔 수 없어. 그 아이는 자신의 혈통을 부정해. 일족에 대한 자긍심도, 가족애도, 하다못해 신앙심조차 없지. 힘을 폐한 글렌 보다도 존재감이 없어서 예전부터 살피기 힘들었어. 당연히 룬의 힘도 각성하지 못했고. 그러니 연락책으로 삼으려 해도 불가능해.”

“그걸 어떻게 해 봐. 일단 살아 있다는 건 알았으니 네 쪽에서 강제로 길을 만드는 방법도 있잖아.”

“하지만 그러다가 그 아이까지 형처럼 미쳐버리기라도 하면…….”

“창조신인 네가 겁을 먹으면 곤란하지. 강압적으로 하란 게 아냐. 천천히 빗장을 두드려 봐. 아마 가능성이 있을 거야. 예전엔 단단한 갑옷을 두르고 살았을지 몰라도 지금은 상당히 말랑해졌을 테니까.”

“무슨…… 말이야?”

어리둥절해져서 되물은 말에 카노스가 웃었다. 서로 알아온 수많은 세월 중에서, 지금만큼 부드럽게 웃는 그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지켜보던 이들이 자기도 모르게 넋을 잃은 동안, 카노스는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꽤 좋은 친구를 만났거든.”

* * *

시벨리우스의 하루는 식사 준비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늘은 흔치 않게도 보급품에 해산물이 들어와 있었다. 긴 전투에 지쳤을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클리프 상단에서 보낸 깜짝 선물이었다. 마법을 이용한 보존 방법이 발달하면서 육지에서도 해산물을 접하는 게 어렵진 않았지만, 값이 비싸 즐겨 먹을 수 있는 편은 아니었다. 병사들이 열광하는 만큼, 오랜만에 시벨리우스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선은 두툼하게 잘라 깨끗하게 손질해 두고, 발라낸 뼈와 머리는 갖가지 채소와 함께 볶다가 뭉근히 끓여 육수를 만들었다. 이어 손질해 둔 생선을 양파, 토마토, 마늘과 함께 볶다가 육수와 허브를 넣고 다시 오랫동안 끓였다. 그렇게 완성된 진한 생선 수프에 홍합과 낙지 등을 넣고 팔팔 졸일 땐 지켜보던 이마다 군침을 삼키기 바빴다.

시벨리우스는 어느 정도 요리가 마무리되면 적당히 근처에 있는 이에게 맛을 보게 하는 습관이 있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 예상대로 그가 접시에 요리를 덜어내자 다들 목을 길게 빼고 눈에 띄기 위해 안달했다.

시식의 행운은 가장 키가 작은 막내 취사병에게 돌아갔다. 모두가 뚫어지게 주시하는 가운데, 막내 병사는 육수가 잘 스며든 생선과 새우살을 숟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떴다. 마치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이 경건한 자세였다. 입에 넣자마자 그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때?”

“크으! 크으으! 완전! 완전 맛있습니다! 저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생선 스튜는 처음 먹어봅니다!”

호들갑스러운 막내 병사의 극찬에 다른 병사들도 본인이 먹은 것처럼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정작 요리사인 시벨리우스는 피식 웃어넘겼다.

“과장하긴.”

“아닙니다! 진짜 맛있습니다! 블루 엘프는 해산물이 주식이라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 겁니까? 생선인데 하나도 비리지 않네요! 대체 무슨 마법을 쓰신 겁니까?”

“마법일 리가. 그냥 백포도주를 넣어서 비린내를 잡으면 돼.”

“으으, 그게 제 눈에는 마법이나 다름없습니다. 방법을 알아도 저는 잘 안 된단 말이죠. 아무튼 오늘도 입이 호강하네요. 전 군에 오면 먹을 거로 엄청 고생할 줄 알았거든요. 설마 참전하길 잘했다고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만족했다면 다행이네.”

“네! 제가 말씀드렸던가요? 시벨 님은 요리의 신의 축복을 받고 계시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거 있기는 한 신이야?”

진심 어린 칭찬을 싫어할 사람은 없는지라 시벨리우스는 어이없어하면서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나자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부리나케 달려들었다. 배식이 이뤄지는 동안 시벨리우스 역시 미리 챙겨둔 식사를 들고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알리사와 아셀은 아직 한창 자는 중이었다. 식탁 위에 쟁반을 내려놓은 그는 늘 그래 왔던 것처럼 굳게 잠긴 방문들을 두드려 일행을 깨웠다.

“알리사, 아셀. 다들 일어나. 식사 시간이야.”

부르는 소리에도 고요하던 안쪽은 몇 번 더 두드리고 나서야 기척을 내기 시작했다. 음식을 먹기 좋게 차려놓을 때쯤 각자 방문이 열리며 알리사와 아셀이 부스스한 얼굴로 나왔다.

“하암,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좋은 아침, 시벨 씨. 으음, 맛있는 냄새.”

“둘 다 좋은 아침. 어서 와서 앉아.”

걸어오는 동안 그나마 정신을 차린 아셀과는 달리, 알리사는 의자에 앉은 후에도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다. 시벨리우스는 스튜를 한 숟가락 떠서 헤매고 있는 알리사의 입에 넣어주었다. 무심코 병아리처럼 받아먹은 알리사가 눈을 번쩍 떴다.

“우와, 이거 뭐야? 엄청 맛있어!”

“생선 스튜야. 괜찮아?”

“정말 최고야! 아, 믿을 수 없어! 시벨 씨는 어쩜 이렇게 못하는 요리가 없어?”

찬사를 터트리는 그녀의 옆에서 아셀 역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완전히 정신을 차렸는지 둘 다 눈빛이 또랑또랑했다.

“시벨 씨, 나한테 장가오지 않을래?”

“저한테 오셔도 됩니다.”

“둘 다 헛소리하지 말고 식기 전에 얼른 먹기나 해.”

“응, 잘 먹을게!”

“잘 먹겠습니다!”

우렁찬 외침과 함께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스튜를 먹기 시작했다. 맛있다는 말이 빈말은 아닌 듯 다들 정신없이 삼키는 모습이 거의 흡수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시벨리우스도 곧 제 몫의 스튜를 한입 떠먹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제법 맛이 괜찮았다. 문득 취사병이 극찬하며 했던 말이 다시 떠올라 그는 픽 웃었다.

“신의 축복이라…….”

“응? 뭐라고 했어, 시벨 씨?”

“아니, 아무것도 아냐.”

웃으며 얼버무린 후 시벨리우스는 다시 천천히 식사를 이어갔다. 이런 맛을 내기까지 얼마나 걸렸더라. 지금이야 처음 만들어 보는 요리도 그럭저럭 먹을 만한 수준으로 만들게 됐지만,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타거나 설익는 건 기본이고, 공짜로 줘도 안 먹을 쓰레기에 가까운 결과물도 천지였다. 먹고 토할 뻔하거나 배탈이 난 적도 있었다. 지금 그가 가진 요리 솜씨는 가상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신의 축복이라니. 글쎄, 그런 게 있기는 한가. 어느새 가라앉은 기분에 자조하는 마음이 차올랐다.

<가여우신 분. 당신은 버림받았습니다.>

애달픈 울림을 담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벌써 까마득히 오래된, 첫 기억이 시작된 지점이다. 아주 크게 앓고 일어났던 것 같다. 악몽인지 뭔지 이상한 꿈을 꿨었는데 기억나지 않았다. 눈을 뜨자 모두가 침통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그에게 장로는 뭔가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좀처럼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고개를 저었더니, 그가 서글픈 얼굴로 말했다. 넌 유일한 가족에게 버림받았노라고.

어렴풋하지만 형이 있다는 사실은 기억했다. 장로가 한 말은 그 형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린 나이에 수장의 자리에 올랐다는 그의 형은 유니콘의 창조신 루세프의 각별한 총애를 받은 룬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을 사랑하게 됐고, 그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걸었다.

<마녀 같은 여자였습니다. 순수한 글렌 님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에게 마음을 내주셨죠. 고작 인간인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서 일족을 등한시했습니다. 하나뿐인 어린 동생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그는 결국 스스로 모든 힘을 버리고 떠나는 길을 택했다. 일족의 자랑이던 룬이 가장 수치스러운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자신의 기억이 사라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철모르는 어린 동생이 형을 찾으려고 할까 봐, 그가 마지막 남은 룬의 힘으로 기억을 직접 지워버렸다고 했다. 형제의 인연을 끊어버리기 위해. 두 번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솔직히 그랬든 말든 별로 아무렇지 않았다. 어차피 기억도 거의 나지 않는 형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건 실감이 나지도, 충격을 받을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일족들이 제게 요구하는 것들은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그들은 하나뿐인 룬의 혈통이 제 형처럼 망가질까 봐 극단적으로 경계했다. 가는 곳마다 철통 같은 감시와 간섭이 이어졌다. 사방이 트였을 뿐인,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시벨 님, 당신은 절대 그렇게 되시면 안 됩니다. 당신은 형님보다도 더 훌륭한 룬이 되어야 합니다.>

<글렌 님에 대해서 알아보시는 건 그만두십시오. 당신에게 하등 좋을 게 없습니다.>

<글렌 님은 이 시기에 벌써 룬의 힘을 각성하셨습니다. 당신도 분발하셔야 합니다.>

<뭘 하시는 겁니까? 어서 룬이 되어 루세프 님을 뵙게 해달란 말입니다! 글렌 님은 접신한 상태를 며칠 동안 유지할 수도 있으셨습니다!>

<글렌 님은……!>

사사건건 책잡는 말과 비교하는 말들도 따라붙었다. 형처럼 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도 형처럼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모순의 시간이었다. 루세프가 신전을 거두면서 그와의 교류가 요원해지자, 일족들은 시벨리우스의 각성에 더 집착했다. 그가 강신할 수 있게 되면 루세프의 분노도 풀어질 것이라고. 형이 만든 업이니 그 동생이 끊어내야 한다고 했다. 지긋지긋한 억압과 굴레가 그를 옭아맸다. 숨이 턱턱 막히고 온몸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아직도 힘을 각성하지 못하는 겁니까? 당신은 가족만이 아니라 루세프 님께도 버림받은 모양이군요.>

<신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룬의 혈통이라니. 쓰레기보다 쓸모없는 것을.>

잔인한 말을 비수처럼 꽂으면서도 항변의 기회는 주지 않는다. 부족한 부분만큼 다른 걸 잘하려고 애썼지만, 다른 방식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다. 일족에게 그의 존재는 강신에 필요한 인형이었을 뿐이었다. 루세프를 불러내지 못하면 쓸모없는 존재. 강신이 가능해진 후에는 그저 그 역할로만 쓰일.

그걸 깨닫고 나니 모든 것들이 무의미해졌다. 내키지 않아도 꾸역꾸역 따라가던 것들에 극렬한 거부감이 일어나 어느 순간부터는 혐오감만 느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자신의 삶을 갉아먹는 좀이었다. 혈통도, 일족도, 신도.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도.

“시벨 씨?”

“……어, 응?”

부르는 음성에 시벨리우스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알리사와 아셀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먹다 말고 왜 멍하니 있어?”

“아아, 별거 아냐. 잠시 실없는 생각이 떠올라서.”

“실없는 생각 어떤 거?”

“그냥 어릴 때 생각이야.”

무심히 대답하다가 시벨리우스는 움찔했다. 여기까지 답하면 흥미가 떨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두 사람이 더 초롱초롱한 눈길을 보내오고 있었다.

“시벨 씨 어릴 때 이야기 궁금하다. 어릴 때도 블루 엘프 모습이었어?”

“으음, 아니. 그때는 그냥 인간의 모습이었어. 원래 유니콘의 기본 현신 모습은 인간의 형태거든.”

“그럼 언제부터 블루 엘프로 변하기 시작한 거야? 아니, 왜 블루 엘프 모습으로 바꾸기로 한 건데?”

“글쎄. 마을에 블루 엘프가 놀러 온 적이 있었어. 아마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었나 봐.”

“그랬구나.”

정확히는 일족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모습을 하고 싶었던 것뿐이지만. 그런 씁쓸하기만 한 진실은 숨기기로 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날이 갈수록 형을 닮아간다는 말도 듣기 싫었다. 그런 참에 마을을 방문한 블루 엘프는 그에게 탈출구를 알려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은발과 청안은 유니콘 일족에겐 룬의 혈통만이 지니는 고귀한 상징이었으나, 블루 엘프 일족에겐 누구나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흔한 색이었다. 블루 엘프가 되면 그의 특별함도 한순간에 평범한 것으로 변했다. 장로가 제 모습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악착같이 유지하고 다녔다. 지금은 이 외관에 너무 익숙해져서 다른 모습을 할 생각도 없지만, 그땐 거의 오기였다. 이젠 원래 모습이 어땠는지 본인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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