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9화
페르데스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모습을 빤히 살폈다. 루세프는 무용담이 많은 신이었다. 특히 천마 대전 때 그가 천신의 검이 되어 마신과 반목한 이야기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당시 가장 많은 피해를 일으킨 마왕과 마공작들을 집요하게 추적해서 전부 다 죽인 것도, 앞장서서 마계의 소멸을 주장한 것도 그였다. 덕분에 그 후로 한동안 카노스를 피해 다니느라 중간계를 전전했지만. 포장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그 또한 혁명가의 도피 생활이라 여기며 일화 하나하나를 추앙했다. 최근엔 잠잠히 지내고 있는 것 같으나, 이름만 듣던 신을 직접 마주하는 건 조금 기묘한 기분이었다. 군신 관계에 가까울 것이라 여겼던 천신과의 관계가 생각보다 스스럼없다는 점도 꽤 흥미로웠다.
“안 먹어?”
“……아뇨. 잘 먹겠습니다.”
멀뚱히 돌아오는 시선을 받고서야 너무 오랫동안 바라봤다는 걸 자각한 페르데스는 바로 고개를 내렸다. 과실을 한입 베어 물자 달콤한 과즙이 입안 가득 퍼져 나갔다. 제법 단단한 과육이 혀에 닿는 순간 그대로 사르륵 녹았다. 페르데스는 조금 눈을 크게 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른했던 몸에 활력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놀라는 게 재밌었는지 옆에서 루세프가 가볍게 웃는 것이 느껴졌다.
“이번에 들어온 신입이 너지? 죽음과 망자의 신 페르데스?”
“네, 맞습니다.”
“만나서 반가워. 난 루세프야. 망자의 직함을 같이 받은 상급신은 처음이네. 앞으로 그쪽을 전부 총관하게 된다는 건데 너도 편히 살기는 글렀구나. 뭐, 지금도 딱히 편한 상황은 아니지만. 신이 되자마자 이런 꼴 겪어서 심란하지?”
“아닙니다.”
“그래? 난 짜증 나 죽겠는데. 선과를 이만큼이나 가져오라니, 미친 거 아냐? 천 년에 한 개가 열릴까 말까 한 과일이라고! 신력을 거의 다 쏟아부었어.”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말도 마. 도망치기도 전에 붙잡혀서 저항도 못 했어. 엘뤼엔인가? 저주와 형벌의 신이라는 그 녀석은 일찌감치 튀었다며? 상급신 중에서 이 난국을 피해간 건 그놈 하나뿐이야. 처음부터 행보가 범상치 않더라니. 대체 어떻게 눈치를 깐 거지?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좀 친하게 지내는 건데.”
어디까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화법에 페르데스는 침묵했다. 딱히 반응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는지 루세프는 계속 투덜거리기에 바빴다.
“솔직히 웃기지 않아? 무슨 혈당 보충해 가며 밤샘 작업하는 인간도 아니고. 선과까지 먹여가면서 신력을 착취하는 꼴이라니.”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니 어쩔 수 없지요.”
“뭐, 그거야 그렇지만 말이지. 쯧,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성공해야 할 텐데 말이야. 이렇게까지 했는데 실패하면 진짜 눈물 날 것 같아.”
한탄이 담긴 말에 페르데스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실패는 어디까지나 최악의 가정이지만, 반드시 성공한다는 법도 없으니 가능성은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래도 실패한다고 생각하면 일단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억울해서가 아니라 이어질 결과가 불러올 파장 때문이었다.
“정화진이 실패하면 바로 소멸진으로 넘어가겠군요.”
“음, 아마도.”
“그럼 그 부분은 어떻게 되는 건지…….”
“뭐가 말이야?”
“소멸에 필요한 희생자 말입니다. 아직 지원자는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아, 뭐. 그거야…… 강제 선출로 가겠지.”
루세프가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었다. 희생자에 관한 내용은 상급신들 사이에선 아무래도 무거운 주제일 수밖에 없었다. 신의 삶이 지겨워져서 스스로 신적을 지우는 경우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상급신이 그런 선택을 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더구나 이 경우엔 희생하는 신이 어떻게 되는지도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정보가 부족한 상황이다 보니 선뜻 나서려는 자가 없는 것도 당연했다.
“선출 방식을 운명의 시계에 맡겼다는 건 알고 있지? 라데카가 시련의 방에서 나올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조만간 시계를 역순으로 돌릴 거야.”
“……그렇군요.”
의미를 파악한 페르데스가 얼굴을 굳혔다. 라데카의 운명의 시계가 가리키는 예언은 추상적이고 유동적이지만, 그 결괏값을 두고 시곗바늘을 역순으로 돌리면 다른 방향으로 틀어진다. 예언이 강제로 완성되도록, 운명이 주도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적임자를 찾는 경우 굳이 선출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필요한 때가 이르면 운명의 쳇바퀴가 알아서 적임자를 끌어들일 테니까. 적임자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게 될 수도 있고, 우연히 휘말리게 될 수도 있다. 강제이되 강제로 여겨지지 않는, 신들의 방식다운 처리였다.
다만 시계를 역순으로 돌리는 건 운명의 여신인 그녀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라 몹시 고통스러운 수련을 거쳐야 했다. 때문에 라데카는 예언을 한 이후로 내내 성역 중 하나인 시련의 방에 들어가 있었다. 그녀가 그 안에 있는 동안이 자원자를 받는 마지막 유예 기간이기도 했다.
한번 강제로 만들어 낸 운명의 흐름은 다시 돌이키지 못한다. 이 기간이 끝나면 다른 방식을 강구할 기회도 더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페르데스의 표정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그 모습을 본 루세프가 피식 웃었다.
“뭐, 그쪽은 걱정할 필요 없지 않나? 다른 조건은 몰라도 마지막 예언과는 관계없잖아. 부모라는 단어가 해석에 따라 갈리기야 하겠지만. 운명도 양심이 있다면 설마 이제 막 신이 된 바람을 끌어들이진 않겠지.”
“제가 되는 걸 걱정하는 건 아닙니다. 단지 누가 희생될지 알 수 없는 이 상황이 조금 불편한 것뿐.”
“난 이편이 더 나은 것 같은데. 직접 투표하기도 그렇잖아? 누가 되는지 알고 있어 봤자 서로 찜찜하기만 하지.”
“그렇기야 합니다만…….”
“그리고 미리 근심할 건 없어. 그 역순의 값은 악신의 소멸진을 짜게 되는 경우에나 발동할 테니까. 애초에 그럴 일이 없도록 정화진이 성공하면 그만이야. 그걸 위해 지금 우리가 사활을 걸고 전부 매달리고 있는 거잖아?”
운명의 시계는 ‘악신의 소멸에 적합한 희생자를 찾는다’는 전제하에서 움직였다. 역순으로 돌려도 이 전제는 그대로 유지되며, 일종의 절댓값이었다. 그러므로 전제가 성립되지 않으면 예언 자체가 무효가 될 것이다. 그제야 페르데스의 얼굴도 조금 편해졌다.
“그렇네요. 다들 이렇게 애쓰고 있으니 분명 좋은 결과를 얻을 겁니다.”
“바로 그거야. 뭐, 설마 카노스가 주도할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섀넌을 종용해서 정화진을 만들게 한 데다 성실하게 참여하고 있다니.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나 몰라.”
“악신에 대한 경각심 때문이겠지요. 아무래도 그분 산하의 마족이 벌인 일이기도 하니 책임감을 느끼신 게 아니겠습니까?”
“뭘 모르는군. 카노스 방식다운 책임감은 악신을 소멸시키는 거지. 이렇게 정화진까지 만들 생각은 안 해. 그 녀석이라면 귀찮게 정화진을 만드느니 아무나 잡아서 던져버리라고 할 성격이거든.”
“그건…… 마신을 너무 매몰차게 보시는 것 아닙니까?”
“이것도 과분한 평가야. 그놈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놈인데.”
“내가 어쨌다고?”
대화를 중단시킨 건 그 틈을 파고 들어온 낮은 목소리였다. 신나서 떠들던 루세프가 경직된 채 히끅, 이상한 숨소리를 내뱉었다. 페르데스 역시 긴장해서 고개를 들었다. 새카만 눈동자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노스.”
내뱉은 음성은 신음에 더 가까웠다. 엉거주춤 일어나는 루세프를 따라 페르데스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굳어 있는 얼굴들을 가만히 주시하던 카노스가 빙긋 웃었다.
“그렇게 놀랄 거면서 왜 내 험담을 하는 걸까. 가만히 보면 취향이 참 나쁘단 말이야, 루세프.”
“험담이라니, 사실을 말한 건데. 그냥 네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놀란 것뿐이야.”
“흐음,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떠들어 대는 건 네가 말하는 정의에 안 맞지 않나?”
“상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해. 내 정의는 약자를 위한 거라서. 오히려 너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떠들어대서 경고를 해 줘야지. 그래야 순진한 놈들이 걸려서 애먼 고생하지 않을 거 아냐.”
“하여간 대답은 참 잘해.”
“무력에 굴복해서 할 말을 삼키는 건 성격에 맞지 않거든.”
처음부터 끝까지 당당한 대답이 이어졌다. 강자에게 굴복하지 않는 정의의 신다운 모습이었다. 단지 그의 몸짓도 그것을 반영하느냐고 한다면, 그건 조금 달랐다. 빙긋 웃은 카노스가 그 점을 지적했다.
“그런데 시선은 왜 피해?”
“그야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니까!”
“…….”
잠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불안한 기분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페르데스가 평소의 무심한 표정을 회복한 순간이었다. 말없이 시선을 회피하는 그녀를 향해 카노스가 말을 건넸다.
“앞으로 얘랑 놀지 마, 망자의 여신. 같은 바람 출신이라 친근하게 여겨지는 건 알겠지만 안타깝게도 얜 변종이거든. 괜히 어울리다가 나쁜 물 들라.”
“웃기지 마! 누가 누구더러 나쁜 물이래? 여기서 너만큼 나쁜 물도 없어!”
“날 똑바로 바라보고 다시 말해 봐.”
“그건 못 해. 난 용기와 방종은 구분하거든.”
“그래. 그래서 내가 널 예뻐하지.”
“미친.”
얼굴을 왕창 찌푸린 루세프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보기보다 험악한 관계는 아니구나, 페르데스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롱당하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천마대전 때 대놓고 반목한 관계치고는 매우 원만한 모습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묻자. 진짜 무슨 생각이야? 왜 네가 정화진 만드는 일을 주도하고 있는 건데?”
“그게 왜 궁금할까? 내가 나서서 손해 볼 건 없을 텐데. 오히려 모두에게 이득 아닌가?”
“장난하지 말고!”
“딱히 별다른 목적은 없어. 다들 내 말은 국수처럼 말아먹기 바쁘니 어쩌겠어. 자애롭고 인자하며 위대하신 내가 수습을 해 주는 수밖에.”
“……그거 웃으라고 하는 농담이야?”
“진담인데?”
농담이었어도 기분이 상했을 루세프는 이어진 대답에 얼굴을 더 찌푸렸다. 때마침 다른 이가 말을 걸어오면서 대화는 자연스럽게 중단됐다.
“카노스, 돌아오셨군요.”
다가온 이는 섀넌이었다. 무난히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상당히 힘든 상태였었는지, 선과를 먹은 그는 조금 전보다 한층 안색이 편해져 있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살피던 루세프는 새삼 선과 하나 먹지 않았는데도 멀쩡한 카노스를 돌아보며 혀를 찼다. 저런 괴물 같은 신력을 가진 이가 하필이면 저 녀석이라니, 주신이 뭔가 실수해도 단단히 실수한 게 틀림없었다.
“정령계에 가신 일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다들 유희 중이라고 들었는데 본계에 머무는 왕이 있었습니까?”
“아아, 미네르바가 있더라고. 용건은 전부 전달했어.”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안도하는 섀넌과는 달리 루세프의 표정은 반대로 일그러졌다. 네 명이나 되는 정령왕 중에서 카노스와 만난 게 하필이면 미네르바라니! 상황이 우습게도 본인을 포함하여 섀넌과 페르데스까지, 마침 카노스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이 전부 미네르바 출신이었다. 이쯤 되면 미네르바에게 뭔가 액이 낀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난 이만.”
얼른 이 자리를 떠나야겠다 싶어진 루세프가 몸을 돌릴 때였다. 단숨에 공간 이동을 하려는데 강한 힘이 그의 뒷덜미를 붙들었다. 기겁해서 돌아본 루세프는 어느 때보다 화사하게 웃고 있는 카노스와 눈이 마주치자 오한을 느꼈다.
“뭐, 뭐야! 왜 이래!”
“할 말 있으니까 기다려.”
“무슨 할 말?”
“너도 들었다시피 정령왕들이 다들 아크아돈에 내려가 있거든. 이제 미네르바도 자리를 비웠을 테니 연락이 요원해질 거야. 하지만 이번 일은 정령왕들과의 연계가 매우 중요해서 말이야. 아크아돈 상황을 살피면서, 신계와 정령왕들 사이에서 연락책을 할 만한 이가 필요해. 이왕이면 사건의 중심지에 있을수록 좋겠지.”
“그걸 나더러 어쩌라고?”
“때마침 그런 역할로 매우 적합한 녀석이 있는데, 네 산하거든.”
“그게 무슨…….”
“룬의 혈통이 아직 남아 있더라?”
온몸으로 귀찮은 기색을 드러내며 버둥거리던 루세프가 그 말에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저항을 멈추면서, 카노스도 붙잡고 있던 그의 옷깃을 놓았다. 루세프의 얼굴은 완전히 굳은 채였다.
“지금 뭐라고 했어? 누가 남아 있다고?”
“룬의 혈통. 네 소중한 천마 말이야.”
“……말도 안 돼. 천마의 피는 글렌 형제가 죽은 이후로 완전히 끊겼어.”
“그래?”
“그래! 뭘 모르는 척이야! 네 빌어먹을 마왕이 글렌을 죽였잖아!”
그때를 생각하면 루세프는 지금도 속에서 불이 끓었다. 중간계에서 벌어진 일인 데다가, 마족 하나가 개인적으로 벌인 일을 두고 그가 직접 보복을 가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마신의 궁처에 항의 서한만 보내고 마무리한 일이었다. 물론 카노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더 화가 났었다. 그날의 분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루세프는 자기도 모르게 카노스를 노려보았다. 그의 도전적인 시선을 마주한 카노스는 그저 피식 웃었다.
“뭐, 그 일은 나도 유감이긴 해. 하지만 그땐 이미 그 녀석 스스로 룬의 힘을 폐한 뒤 아니었나? 카류안 때문에 피가 끊겼다고 우기는 건 곤란하지.”
“그건…….”
“게다가 형제라면서 형 쪽만 얘기하는 것도 너무하지 않아? 나머지 한쪽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치미는 화를 이기지 못한 루세프가 결국 카노스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놀란 섀넌과 페르데스가 만류했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그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형형한 눈으로 쏘아보는데도 카노스는 느긋하기만 했다.
“반응을 보니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나 보네. 이거야 원. 갈 길이 좀 멀겠어.”
“뭐?”
“그 동생 쪽 말이야. 내가 얼마 전에 만났거든.”
“……!”
“사지육신 멀쩡한 모습이었지. 언급도 되지 않는 지금 이 상황이 무척이나 안타까울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