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48화 (348/608)

제348화

“이번 바람은 경계심이 별로 없네. 엘만 순둥이인 줄 알았더니.”

그래서 이어지는 말을 들었을 땐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그때까지 가물가물하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제야 인지하지 못한 위화감이 하나둘씩 느껴지기 시작했다. 기대어 있는 품이 엘이라기엔 지나치게 넓었다. 부축하고 있는 팔과 손도 훨씬 길고 큰 편이었다. 미네는 고개를 들고 자신이 기대어 있는 이를 확인했다. 바다처럼 새파란 머리카락을 가진 이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자리에 전혀 다른 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미풍에 넘실거리는 새카만 흑발과 그보다 더 짙은 흑안이 시야에 들어왔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안녕.”

“…….”

미네는 침착하게 몸을 떼어내고 뒤로 조금 물러섰다. 혹시 아는 얼굴인가 재확인을 했으나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굽니까?”

“에이, 반응이 그게 다야?”

별로 당황하지 않는 그를 보고 상대는 퍽 실망한 듯했다. 가벼운 분위기였으나 미네는 경계심을 세웠다. 웃고 있어서 부드러운 것처럼 보일 뿐 제대로 보면 상당히 차가운 인상이었다. 무엇보다 왕의 고유 영역에 멋대로 들어왔는데 자신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를 경계할 이유는 충분했다.

“다시 묻겠습니다. 누굽니까?”

“누구인 것 같아?”

“질문을 계속 회피하면 대화 의지가 없다고 판단하겠습니다. 용건이 있어서 찾아온 걸 텐데요. 이대로 그냥 추방당하고 싶습니까?”

“살벌해라. 아깐 귀여웠는데.”

“그건 잠시 다른 이로 착각했던 거니 잊어주면 고맙겠습니다. 멋대로 가까이 오기에 당연히 정령왕들일 거라고 생각한 탓입니다.”

“와, 정령왕이면 경계 안 하는 거야? 이번 세대는 사이가 좋은가 봐. 엘의 영향인가? 한 명이 이렇게 큰 변화를 일으킬 줄은 몰랐는걸?”

흑발의 남자는 화제를 딴 길로 트는 쪽에 재능이 넘치는 것 같았다. 양손으로 꽃받침을 한 얼굴이 눈앞에서 부담스럽게 반짝거렸다. 미네는 불편함을 내색하는 대신 그의 말을 신중하게 되새겼다.

“조금 전에도 엘을 언급했었죠. 엘과 아는 사이입니까?”

“알지. 우리 엄청나게 가까운 사이야.”

“그렇습니까?”

“내가 엘의 시조거든.”

“…….”

내내 변화 없이 무미건조하던 미네의 표정이 처음으로 구겨졌다. 정령왕 앞에서 그 조상이라는 말을 뻔뻔하게 내뱉는 남자가 도저히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경계심이 더 짙어졌지만 흑발의 남자는 만면에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질색하는 반응을 진심으로 즐겁게 여기는 것 같았다.

성격이 무척 나쁜 신이구나. 판단을 내린 미네는 다시금 차분하게 상대의 모습을 살폈다. 왕의 영역에 소리 없이 들어온 걸 보면 상급신이 분명했다. 가만히 있어도 존재감이 상당한 데다가 전체적으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처음 닿았을 때 무심코 청량감이라고 느꼈던 기운이었다. 하지만 다시 보니 그건 차디찬 한기였다. 삼켜지면 누구라도 그대로 얼어붙을 것 같은.

미네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깊이 파고들수록 아찔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잠시 힘을 헤아려 보려 했을 뿐인데 새카만 암흑 속을 더듬는 것 같았다. 이런 권능을 지닐 수 있는 신은 몇 되지 않았다. 엘에 대한 언급까지 포함하여, 그의 정체는 곧 하나로 좁혀졌다.

“……마신이군요. 당신이 카노스입니까?”

엘퀴네스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이는 태초의 엘퀴네스인 마신뿐이다. 물론 정령왕은 핏줄로 이어지는 개념이 아니니 굳이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얘기였다. 어떤 정령왕도 선대를 조상으로 여기지 않았고, 그건 미네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대 남자―마신 카노스가 직접 언급하지만 않았다면 연상해서 생각해 볼 일도 없었을 터였다. 정작 그렇게 말한 본인도 후대를 자손으로 여기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냥 일부러 자극적인 표현을 쓰길 즐기는 것뿐이다. 역시 성격이 나쁜 신이라고, 미네는 다시금 그에 대한 판단을 확고히 굳혔다.

“흐음, 역시 정령왕쯤 되면 속일 수가 없다니까. 힘을 갈무리하고 있는데도 이렇게 금방 눈치를 채니, 원.”

“마신이 제겐 무슨 용건입니까?”

아쉬움이 역력한 카노스를 무시한 채, 미네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본능이 그를 오래 상대해선 안 된다고 경고한 지 오래였다. 최대한 빨리 대화를 마무리하고 돌려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다행히 카노스도 그리 용무를 끌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바람에게만 용건이 있는 건 아냐. 근데 와 보니까 한 명뿐이네. 뭐, 다들 바빠 보이니 대표로 들어주면 좋겠어.”

“요즘 상황이랑 관계된 일입니까?”

“맞아.”

예상한 대답에 미네는 자세를 바로 했다. 악신의 주술과 관련하여 신계 쪽에서 조치가 있을 거라는 건 이미 짐작한 바였다. 설마 마신이 직접 올 줄은 몰랐지만, 사안의 엄중함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일단 이것부터 확인해 줘.”

카노스가 손바닥을 펼쳐 허공을 가볍게 쓸었다. 그 손길에 따라 포가 떠지듯 단면이 잘려 나왔다. 팔랑거리면서 떨어지던 그것은 미네가 받아들자 곧 새하얀 종이로 변했다. 안쪽엔 글자와 그림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복잡한 형식으로 짜인 도면이었다.

“요즘 신계에서 설계 중인 정화식이야.”

“정화식? 소멸시키는 게 아닌 겁니까?”

“궁극적으로는 그게 목적이지만 지금 상태에선 감수할 피해가 너무 크거든. 우선은 정화부터 시도할 거야. 다행히 시간에 맞춰서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아. 완료하는 즉시 시작할 예정인데, 그 전에 이쪽의 협력을 구해야 할 게 있어.”

“뭘 하면 됩니까?”

“아크아돈 쪽에 우리가 짠 틀을 고정할 방진이 필요해. 방위마다 하나씩 거대한 마나 기둥을 세워야 하거든. 아크아돈은 정령왕 소관이니 그 부분을 전부 일임할게.”

미네는 천천히 도면을 살폈다. 낯선 구조와 형식이 주를 이뤘지만 단락마다 설명이 자세하게 첨부되어 있어서 이해하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마신이 직접 작성한 건 아니겠구나. 미네는 아무렇지 않게 진실을 탐색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건지 알겠습니다. 이건 드래곤의 협력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드래곤 로드와 상의해 보겠습니다.”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상황이 더 나빠진 것 같으니까.”

답하는 음성은 가벼웠으나 담고 있는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미네는 얼굴을 굳히고 아크아돈 쪽을 살폈다. 대기를 감싸고 있는 기류가 이상했다. 무언가 불순물이 섞인 듯한 불쾌한 감각이 느껴졌다.

“아크아돈의 차원막이 손상됐군요. 마계와 연결되었네요.”

“아아, 그러게 말이야. 덕분에 난처하게 됐어.”

전혀 난처하지 않은 얼굴로 카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거의 없었으나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미네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그는 곧 아무렇지 않게 씩 웃었다.

“시기적절하게 찾아간 정령계에서, 때마침 만난 정령왕이 다른 누구도 아닌 미네르바라니. 이런 걸 두고 운명이라는 거겠지?”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난 사실 약속을 잘 지켜. 의외로.”

“그렇습니까.”

“정말이야. 주신의 이름을 걸고 한 서약은 못 어기거든.”

“……그건 누구도 어길 수 없는 거 아닙니까?”

“응, 그래선지 다들 나와 약속할 땐 꼭 서약을 원한단 말이야. 그래도 이번엔 빠져나갈 틈이 있을 것 같아. ‘피해를 입힐 경우’라고, 전제를 명시해 뒀었거든. 내가 생각해도 난 참 기특해.”

“……?”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이해를 못 하겠다. 미네는 그저 눈만 깜빡거렸다. 애초에 이해를 구하기 위함은 아니었는지 카노스는 그저 눈을 휘어 접을 뿐이었다.

“미네르바, 몰이에 관심 없어?”

* * *

신계에서 가장 화사한 궁처가 꽃과 색의 신인 프라워스의 궁처라면 가장 어두운 건 명계의 신 섀넌의 궁처다. 대부분의 신의 궁처는 웅장한 궁전의 형태지만, 그의 궁처는 버려진 흉가처럼 다 쓰러져 가는 저택의 모습이었다. 근방은 시커먼 늪지로 채워졌고 사시사철 검은 구름과 안개가 자욱했다. 정원이 있기는 했으나 이파리 없이 가지만 앙상한 나무에 회색 식물들 일색이라 음침함을 부각하기만 할 뿐이었다. 망령이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이 광경을 두고 일부는 찬사를 금치 못했지만, 대체적으로는 꺼리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런 이유로 섀넌의 궁처는 방문객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애초에 섀넌 본인도 명계에 머무는 일이 더 잦다 보니 실제로도 거의 버려진 궁처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최근 들어서는 악명이 더 깊어지기까지 했다. 저택 안에서 기이한 신음과 통곡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섀넌이 지옥으로 보낼 악령들을 저택 안에 가둬둔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터무니없는 괴담이었지만 실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아주 헛소문도 아니었다. 다만 갇힌 대상이 악령이 아니라 신들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현재 그의 궁처는 상급신들 사이에서 무덤이라고 불렸다. 들어가면 시체가 된다는 의미에서다. 그 이름에 걸맞게, 저택 안쪽은 입구부터 홀까지 널브러진 신들로 가득했다. 흡사 시체 밭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 한가운데서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더는 못해!”

악을 쓰며 몸을 일으킨 이는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머리 색을 지니고 있었다. 훤칠한 키와 건장한 체격 때문에 얼핏 남신처럼 보였으나 그녀가 여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평소 추종자들로부터 성스럽다고 칭송받는, 푸른 보석을 머금은 것 같은 은색의 눈동자가 지금은 흉흉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그 새끼한테 그냥 악신 되라고 해! 어차피 이래도 개판이고 저래도 개판이야! 놈이랑 싸우다 죽나 여기서 정기를 다 뽑히고 죽나! 결과가 똑같다면 차라리 싸우다 죽을래! 이렇게 죽는 건 싫어!”

“죽는다니. 엄살이 심하군요, 이오웬. 고작 신력 좀 소모한다고 죽지 않습니다.”

태초의 이프리트이자 신족의 창조신. 천신 이오웬의 투정 아닌 투정에 한창 방진을 그리던 섀넌이 어이없어하며 대꾸했다. 이오웬은 더 발끈해서 소리쳤다.

“고작이라니! 지금 고작이라고 했어? 몸에 남아나는 힘이 하나도 없는데 그게 어디가 고작이야? 몇 날 며칠 가둬두고 신력만 주야장천 뽑아가다니! 우리가 무슨 마나석이나 발전소인 줄 알아?”

“뭐, 용도는 딱히 다르지 않은데요.”

“에이씨! 이럴 땐 겉으로라도 듣기 좋게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듣기 좋아야 할 게 뭐 있습니까. 피차 다 아는 처지에.”

“아무튼! 주위를 봐! 다들 뻗기 직전이라고! 마나석 취급을 하더라도 회복할 시간은 줘야 할 거 아냐!”

그 말에 섀넌이 차분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는 이마다 모두 퀭한 시선을 보내왔다. 단호한 섀넌조차 차마 외면하기 힘들 정도로 처절한 눈빛이었다.

“……으음, 확실히. 다들 안 좋긴 하군요.”

“그러니까 쉬게 해달라고!”

“알았습니다. 잠시 휴식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정말? 정말이지?”

“네, 정말입니다. 어차피 지금은 카노스도 자리를 비웠으니까요.”

그 순간 화색이 된 이들이 그대로 우르르 쓰러졌다. 한계 직전까지 몰린 이들에겐 이미 환호성을 내지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가 마음 놓고 대(大)자로 뻗은 가운데, 페르데스도 한구석에 앉아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녀는 거의 마지막에 합류한 참이라 그나마 다른 이들보다는 상태가 나았다. 그래도 한동안은 몸을 일으키거나 걷지는 못할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입술을 벙긋할 기력도 없었다. 눈앞에서 멀쩡하게 움직이고 떠드는 섀넌과 이오웬이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 마신 카노스 역시 자리를 비우기 직전까지 아무렇지 않게 움직였었다. 심지어 그는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힘을 소모했음에도.

“이야, 완전히 처참하네.”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녀가 벽에 기댄 채 묵묵히 현기증을 견디고 있을 때였다. 눈을 뜨자 무언가가 불쑥 들이밀어졌다. 처음 보는 자가 그녀에게 복숭아처럼 생긴 과일을 내밀고 있었다. 그는 투명할 정도로 깨끗한 은발을 지닌 남신이었다. 선명한 파란 눈동자가 몹시 강렬했으나 길게 처져 있는 눈꼬리 덕분에 전체적으로 인상이 서글서글했다.

“받아.”

“……?”

“선과야. 피로를 푸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아…… 감사합니다.”

놀란 페르데스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짜냈다. 선과는 신계에서도 귀한 과일이었다. 신이 취하면 몸을 치유하고, 동물은 영물로 만들며, 인간이 먹으면 이능을 얻게 되는 영약 중의 영약. 그러나 그걸 내미는 남신의 표정은 흔한 간식을 내주는 것처럼 단조롭기만 했다. 조심스럽게 받아든 페르데스가 머뭇거리는 동안 은발의 남신은 주위를 돌아다니며 다른 이들에게도 선과를 하나씩 건넸다. 쓰러져 있던 이들이 그를 알아보고 왜 이제 왔냐며 타박했지만 별로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자비하게 걷어차거나 욕설을 내뱉는 둥 거친 행동으로 응징을 가했다. 그 태도는 이오웬 앞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으아, 드디어 왔구나! 살았다. 근데 왜 하나뿐이야? 더 없어?”

“한 명당 한 개씩이야.”

“그런 게 어딨어!”

“어디긴. 여깄지.”

“치사하게.”

“닥쳐.”

최고신을 향한 말투로는 불손한 대사가 거침없이 이어졌다. 지켜보던 페르데스는 움찔했지만, 정작 당사자들이나 그 주변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이미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뜻이었다.

이윽고 모든 용무를 마친 그가 다시 페르데스가 있는 쪽으로 돌아와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선과를 한입 깨물어 먹는 그에게서 희미한 바람 냄새가 풍겼다. 그가 미네르바 출신이라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페르데스는 그의 정체를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선과가 자라는 ‘치유의 도원’은 신계에 존재하는 13개의 금역 중 하나였고, 그 안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이는 관리자 한 명뿐이었다. 그리고 도원의 관리자는 처음 정해진 이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정의와 분별의 신 루세프. 유니콘 일족의 창조신이자, 무신이라 불리는 상급신이 바로 그 이름의 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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