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7화
“안 나가?”
아스의 심드렁한 태도에 무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렇다 할 대답은 없었으나 단언을 부정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이미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먹물처럼 새까만 흑발도, 핏물처럼 붉은 눈동자도 그제야 새삼스럽게 눈에 밟혔다. 마족이 흑발에 적안의 특징을 지닌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다만 그리 특별한 조합도 아니다 보니 보편적으로 연상하지 않을 뿐이다.
마신을 섬기는 스왈트 제국에선 마족을 적대적으로 여기진 않았으나 두려운 존재로 여기긴 마찬가지였다. 겁먹은 무리는 황급히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카리브디스가 팔을 들어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돌발 행동에 모두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스 역시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마족인 그대가 전…… 대공을 방해해도 괜찮은 건가?”
“그게 왜?”
“대공은, 마왕의 계약자다.”
주위에서 다시금 숨을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공이 마왕의 계약자라는 사실은 그동안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었다. 그걸 알고 있던 건 카리브디스와 지금은 죽고 없는 로아네즈 황후뿐이다. 그렇기에 아스를 응시하는 카리브디스의 표정은 딱딱할 수밖에 없었다.
“마족은 왕의 뜻에 절대복종하고, 그 계약자를 보호한다고 알고 있다.”
“맞아.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
재밌어하며 되물은 말에 카리브디스의 시선이 더 차가워졌다. 다른 이들 역시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카리브디스와 거리를 두고 섰던 이들이 오히려 그의 뒤쪽에 바짝 붙었다. 그 반응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스가 곧 깨달음을 얻었다.
“아아, 알겠다. 첩자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거구나. 내가 마족이라서.”
“…….”
“혹시 그래서 다들 가만히 있는 거야? 그럼 곤란한데. 난 너희를 여기서 내보내야 해. 그러기로 한 거니까 끝까지 완수할 거야. 첩자 아니니까 안심해도 돼.”
“그걸 어떻게 믿지?”
“너 꽤 건방지네.”
아스가 재밌다는 듯이 웃자 지켜보던 이들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입술은 호선을 그리고 있는데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무기질처럼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은 붉은 눈동자에 섬뜩한 오한마저 일었다. 카리브디스도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당혹감을 느꼈다. 마족이라 해도 저렇게 작으니 고위 마족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은근히 보내는 기세에 손끝이 다 저릿저릿했다. 제대로 붙으면 몇 수나 막아낼 수 있을지 선뜻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달아오른 긴장감에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팽팽해졌다. 그러나 의외로 한발 물러난 건 아스 쪽이었다.
“할 수 없으니까 말해 줄게. 마왕의 명이 최우선인 건 맞지만 절대적인 건 아냐. 그보다 상위 명령이 있거든.”
“상위 명령?”
“마신의 명령.”
“……!”
“마족은 그 어떤 명도 마신의 뜻보다 우선으로 두지 않아. 하물며 네가 마왕이라 알고 있는 그자는 감히 마신의 권위에 도전했고. 이젠 왕도 무엇도 아냐. 그가 자격을 잃었으니 대공의 위치도 달라졌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했어?”
“……이해했다.”
“그럼 이제 가.”
아스로서는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주는 기회였다. 만약 이번에도 거부하면 더는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카리브디스도 그가 보내는 경고를 읽었다. 얌전히 받아들인 그가 먼저 걸음을 옮기자 눈치를 보던 이들이 서둘러 뒤를 따라나섰다. “각하, 기다려 주십시오! 대체 이게 다 무슨 말입니까?” “대공 전하가 마왕의 계약자라니요? 설명해 주십시오, 각하!” 따라가는 내내 다급한 질문이 연이어졌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스는 입구에 서서 무리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봤다. 딱히 그들을 걱정해서라기보다는 마지막까지 성의를 보였다는 변명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의 다정한 대부는 분명 인간들이 무사히 떠났는지 안부를 확인할 것이다.
하늘은 아직도 달밤이 한창이었다. 그만 돌아갈까 하다가 아스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펴보았다. 왠지 조금 전부터 이상할 정도로 몸이 가벼웠다. 실내에선 바로 깨닫지 못했는데, 밖에 나오니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대기에 마기가 섞이고 있어.’
아스는 고개를 들었다. 뚫어지게 바라본 하늘에 희미한 비틀림이 보였다. 뭔가 문제가 생긴 걸까. 어쩌면 조금 전의 지진과 연결된 문제인지도 몰랐다. 생각에 잠긴 아스가 얼굴을 찌푸릴 때였다. 근처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싶더니 누군가 홀연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처음 보는 낯선 남자인데,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가 지닌 흑발과 붉은 눈동자를 확인한 아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마족.
중간계에서, 그것도 아크아돈에서 동족을 만나는 건 흔한 경험이 아니었다. 상대도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 놀라움은 곧 탄성으로 바뀌었다.
“아니 이게 웬 횡재야. 동족의 기운이 느껴지기에 동료인가 했더니, 아직 유체잖아?”
“…….”
“이번 시기의 알은 전부 다 망가졌다고 들었는데, 살아남은 게 있었나? 아무튼 운이 좋구만. 미안하지만 꼬마, 네 생존 운도 여기까지인 것 같구나. 널 잡아서 내 마력 증강의 양분으로 삼겠다!”
호기로운 선언과 동시에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솟아올랐다. 아스는 자신을 향해 내뻗어지는 공격을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것만으로 피했다. 예상과는 다른 흐름에 당황한 마족 남자가 얼굴을 굳혔다. 그제야 위기를 감지한 것 같았지만 이미 돌이키기엔 늦은 상태였다. 다음 순간 빠르게 움직인 아스가 그의 눈앞으로 이동했다. 놀란 숨을 삼킬 겨를도 없이, 마족은 자신을 잡아당기는 힘에 속절없이 사로잡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아악!”
요란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는 곧바로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그저 시도에 그쳐야 했다. 아스가 그의 가슴을 한쪽 발로 밟아 눌렀기 때문이었다. 필사적으로 꿈틀거리면서도 그는 제게 가해지는 힘을 좀처럼 뿌리치지 못했다. 경악한 눈동자에 두려움이 깃드는 걸, 아스는 무감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상대의 힘을 읽어내지도 못할 만큼 형편없는 눈썰미에, 공격 속도도 느리다. 저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 하는 걸로 봐선 별 볼 일 없는 하급 마족이었다. 위협이 될 대상은 아니었지만, 거슬리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너, 계약자가 없네. 소환된 것도 아닌데 여긴 어떻게 넘어왔어?”
“그, 그러는 넌 뭐야? 유체가 어떻게 이런 힘을……!”
“대답.”
가슴을 누르는 압력에 힘이 더해졌다. 앓는 소리를 내지른 마족 남자가 기겁해서 외쳤다.
“구, 구멍이 뚫려 있었어!”
“구멍?”
“그래! 소집 나팔이 울렸고, 부르는 감각에 이끌려가 보니 허공에 입구가 있었어! 그래서 넘어왔을 뿐이야!”
“소집 나팔?”
“난 모르스야! 모르스는 다 그 소리를 들었을 거야! 아마 점점 더 많이 넘어올걸?”
후자의 내용은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대충 돌아가는 상황은 알 것 같았다. 차원 막이 파손된 건지, 마계와 아크아돈이 연결된 듯했다.
“더 자세히 말해봐.”
“이, 일단 이것 좀 치워줘! 아프다고!”
다시금 앓는 소리가 칭얼거렸다. 다 큰 성인이 엄살을 부리는 게 마뜩잖았지만, 아스는 일단 그를 누르고 있던 다리를 거뒀다. 그 순간 빈틈을 노린 마족이 눈을 빛냈다.
‘지금!’
벌떡 일어난 그가 다시금 사나운 손톱을 세우며 기습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이럴 때 급습하면 제아무리 무시무시한 소년이라도 당황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공격이었을 텐데도 저를 바라보는 눈빛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과 동시에, 등에서 타는 듯한 격통이 일었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단숨에 내리꽂힌 감각이었다.
“커헉!”
피를 토한 그가 얼빠진 얼굴로 돌아보았다. 흔들리는 시야에 자신을 공격한 자의 모습이 보였다.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그 정체는 더 뜻밖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상대의 머리칼이었다. 달빛에 비친 머리색은 얼핏 검은색으로 보였으나 자세히 보면 달랐다. 짙푸른 밤바다를 섞어놓은 듯한 남청빛. 마족 중에서 저 색을 지닐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북공작 데자크? 하지만 저 얼굴은…….’
죽어가는 와중에도 그는 머릿속을 사로잡는 위화감에 눈을 감지 못했다. 어째서 동공작인 데르온이 저 머리 색을 가지고 있는 걸까. 거기까지가 그가 한 마지막 생각이었다.
“주군.”
잠시간 죽은 마족을 내려다본 데르온이 곧 시신에서 창을 거둬들였다. 그가 원하는 대로 형태를 바꾸는 무기가 순식간에 증발하듯이 사라졌다. 이어지는 그의 정중한 경례에 아스는 가벼운 고갯짓으로 화답했다.
“늦었네, 부하.”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뭡니까?”
널브러진 시체를 바라보는 데르온의 시선은 싸늘했다. 그는 엘이 지시한 사항을 지키기 위해, 연회장에서 탈출시킨 인간들을 정문까지 무사히 데려다주고 오던 참이었다. 다만 수월하게 제단의 결계를 부순 아스와는 달리, 관련 정보가 전혀 없던 데르온은 자신이 결계에 갇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조차 오래 걸렸다. 알아차린 후에 파훼하는 과정 역시 쉽지 않아서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힘을 쏟아부어야 했다. 덕분에 신경이 온통 예민해진 상태였는데, 그 와중에 아스를 공격하는 마족을 발견하니 그대로 눈이 돌았다.
감히 귀하디귀한 제 하나뿐인 주군을 공격하다니! 씹어 먹고 데쳐 먹기도 부족한 놈이 아닌가! 좀 더 처절한 고통을 줬어야 했는데 순간적으로 욱해서 단숨에 죽여 버린 게 실수였다. 분을 참지 못하고 이글거리고 있는 데르온을 보며 아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몰라. 그냥 지나가는 마족 일(1).”
“그냥 지나가는 마족 일이 어떻게 아크아돈에 들어왔답니까? 계약자도 없는 놈 같은데요.”
“아크아돈이 마계랑 연결됐나 봐.”
“아, 그렇……네?”
뒤늦게 반문한 데르온이 눈썹을 크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완전히 굳어진 건 이어진 말을 들었을 때였다.
“소집 나팔이 울렸다는데. 그게 뭐야?”
“……지금 소집 나팔이라고 하셨습니까?”
“방금 죽은 걔가 그랬어. 자기가 모르스라던데.”
대답을 듣자마자 데르온은 자기도 모르게 시체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역시 그냥 죽이는 게 아니었다. 뼈아픈 후회가 다시 일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 대신 그는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카류안 그 빌어먹을 자식이 정말 끝까지…….”
“왜? 모르스가 뭔데?”
“마왕의 특수군입니다.”
“특수군?”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그림자 군대입니다. 관련 문서는 대관식을 치르신 후에 왕의 서재에서 열람하실 수 있을 겁니다. 모르스는 평소엔 각지에 흩어져 지내다가 소집 명령이 떨어질 때만 운집합니다. 마왕으로 지내는 동안 단 한 번만 소집할 수 있고, 일단 소집이 떨어지면 한 가지 명령이 자동으로 시행됩니다.”
“무슨 명령?”
“나팔이 울린 장소로 가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말살할 것.”
“……!”
아스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 말은 즉, 곧 마계에서 군대 규모의 마족이 아크아돈을 말살하러 넘어온다는 의미였다. 이번에 만난 자는 하급 마족이었지만, 모든 모르스가 하급 마족일 리는 없었다.
“걘 이제 왕 아니잖아. 근데 어떻게 명을 내려?”
“아직 새로운 마왕의 증표가 나타나지 않았으니까요. 권한을 완전히 상실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
“각오하셔야겠습니다, 주군. 과거 천마 대전도 이 소집 명령으로 발발했습니다.”
“부하는 좋은 거 아냐? 싸움 좋아하잖아.”
“좋아하죠.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아스를 향해 데르온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실은 천마대전 이후에 카노스 님이 말입니다. 한 가지 공표한 사실이 있습니다.”
“?”
“마계 안에서 너희끼리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 단, 다른 세계로 모르스를 넘어가게 해선 안 된다. 그걸 어기면 마계를 없애버리겠다고, 말입니다.”
“……뭐?”
“어쩌면 저희가 마지막 마족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얼거리는 데르온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아련했다. 멍하니 듣고 있던 아스의 얼굴이 왕창 찌푸려지는 순간이었다.
* * *
단잠을 깨운 건 두 뺨을 간질이는 낯선 기척이었다. 미네는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상태에서 얼굴을 찌푸렸다. 아직 또렷하지 않은 감각 속에서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무언가가 자신의 위를 덮다시피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엘? 아니면 트로웰이나 이프리트일까요.’
바람의 영역에 선뜻 들어와 그의 잠을 깨울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미네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흐릿한 감각을 천천히 일깨웠다. 눈을 깜빡거렸으나 좀처럼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블레스터를 정화하느라 힘을 너무 많이 소모한 게 문제였다. 이제 시작 단계라 앞으로도 한동안은 계속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괜찮아?”
꾸물거리고 있는 그를 보고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가 물었다. 장난기를 머금은 듯한 경쾌한 음성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네는 그 음성이 매우 기분 좋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일어나기 위해 무심코 팔을 뻗자 상대가 선뜻 부축해 왔다.
“많이 피곤한가 보네. 깨워서 미안한걸.”
“우웅, 괜찮습니다아…….”
“괜찮은 목소리가 아닌데?”
“아닙니다아…….”
끌어당기는 반동에 따라 미네는 자연스럽게 상대의 품에 안겼다. 생각했던 것보다 단단한 감촉 속에서 산뜻한 청량감이 감돌았다. 엘이구나. 상대의 정체에 확신이 서자 미네는 더 마음껏 품에 파고들었다. 정령왕들을 가족으로 생각하는 엘은 저보다 더 늦게 태어난 미네를 동생처럼 여겼다. 이런 응석 정도는 부려줘야 그가 더 기뻐할 것 같았다. 예상대로 조금 멈칫하긴 했으나 상대는 곧 미네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기분 좋은 손길에 미네의 기분도 덩달아 좋아졌다. 남을 기쁘게 하려던 시도가 오히려 자신에게 보상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