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46화 (346/608)

제346화

“흐음. 그게 벌써 이렇게까지 힘을 키웠나.”

“괘, 괜찮아, 엘뤼엔?”

“보다시피. 뭔가 시도했던 건 알겠는데, 차원 막은 어쩌다 깨진 거지?”

“나도 잘 모르겠어. 갑자기 이상한 빛기둥이 올라가더니…….”

“빛기둥? 아아, 여기 흔적이 있군.”

중얼거리는 엘뤼엔은 여전히 담담해 보였다. 이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거나 나를 책망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 용기를 얻어 나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저기, 이제 여기도 바이톤처럼 되는 거야?”

“설마. 그냥 일시적인 현상이다. 아크아돈은 이미 정령계의 주관할 영역이라 다른 대차원엔 귀속되지 않아. 깨진 부분은 알아서 복구될 거다. 그래도 며칠은 걸리겠지만.”

“하아, 그렇구나.”

불행 중 다행인 소식이었다. 그러나 안도감이 이는 것과는 별개로 마음은 더 우울해졌다. 얼굴이 어두웠는지 엘뤼엔이 내게 의아한 시선을 보내왔다.

“왜 그런 표정이지?”

“……아무래도 내가 일을 더 크게 만든 것 같아. 대공을 이용해서 전 마왕을 끌어내려고 한 것뿐인데,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좀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허무하게 놓친 데다가 차원 막 까지 깨질 줄은…….”

“계획대로만 풀린다면 애초에 이 일은 카노스 선에서 끝났겠지. 네가 자책할 건 아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엘.”

엘뤼엔의 대답에 이어 트로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언제 웃음을 멈춘 건지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다가와 있었다.

“오히려 그자의 계획을 망친 것 같은데? 오늘이 작전 개시일이었는데 실패한 거잖아. 상등품의 제물이 그렇게나 많았으니 그대로 진행했다면 정말로 주술이 완성됐을 거야. 그럼 고작 차원 막이 문제가 아니었겠지. 마지막에 그자를 놓친 걸 네가 나선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절대 그렇지 않아. 아마 네가 그 상황에서 다른 대처를 했더라도 그자는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달아났을 거야.”

어떻게 된 일인지 그는 설명한 적도 없는 부분까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네가 그때 나서지 않았다면 라피가 위험했을 테니까. 저 녀석 저래 봬도 상당히 감동한 모양이야. 솔직하게 고맙다는 말도 못 하는 어리숙한 녀석이지만 엘이 이해해 줘.”

“젠장, 내 생각 읽지 마!”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라피스가 얼굴을 왕창 찌푸렸다. 그렇게 쥐 잡듯이 화부터 내더니 사실은 감동했던 모양이다. 트로웰이 아니었다면 평생 모르고 있었을 일이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다만 가만히 있다가 봉변을 당한 셈인 라피스는 불같이 화를 냈다.

“왜 남의 생각을 멋대로 읽어?”

“그냥 들린 거야.”

“개소리하지 마! 내가 그렇게 허술한 줄 알아?”

“개소리?”

“네가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니까!”

“그렇다고, 개소리?”

“화나서 한 말이잖아! 그런 건 좀 그냥 넘어가!”

두 사람은 연신 투덕거렸다. 분위기는 당장 세상이 멸망할 기세로 험악한데 오히려 둘의 관계는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세상 무서울 것 없이 구는 라피스가 트로웰한테는 조금 굽히고 들어간다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저런 걸 보면 확실히 대부는 대부였다. 흥미진진하게 관전하고 있는데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엘뤼엔이었다.

“네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

“다른 건 신경 쓰지 마라. 그거면 충분하니까.”

무심코 옷자락 끝을 꼭 움켜쥐었다. 멍하니 올려다보자 그가 부드러운 손길로 다시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생했다, 아들.”

이어진 목소리가 너무 달아서 울고 싶어졌다. 힐난을 들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다정한 위로를 받으니 가슴이 붕붕 뜨는 것 같았다.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아들. 낳은 정도, 키운 정도 없는 내게 그는 어떻게 무한한 신뢰를 보낼 수 있는 걸까. 그 애정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과분한 대접을 받아도 되는 건지를 생각하면 여전히 겁이 났다. 기특한 짓은커녕 늘 사고만 치는 아들이라 더 그럴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그를 제대로 아버지라고 불러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몇 번 말한 적은 있었지만, 그런 걸 불렀다고 할 수는 없었다. 카노스가 부추겼을 땐 모르는 척하기 바빴는데, 자각하고 나니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저기…….”

“왜 그러지?”

“아, 아무것도 아냐. 하하.”

바보, 멍청이, 넌 진짜 구제 불능이야.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시선이 마주치면 급격히 용기가 떨어지니 문제다.

“그나저나 어떻게 둘이 같이 오게 된 거야?”

자학하는 단어들을 속으로 곱씹는 와중에도 어색해지지 않기 위해 질문을 건넸다. 그러자 처음으로 엘뤼엔의 표정이 흔들렸다. 왠지 조금 당황한 듯한 모습이라 나는 도리어 의아해졌다.

“조금, 사정이 있었다.”

“사정?”

“별일은 아니다.”

“엘뤼엔이 방향치가 됐거든. 헤매고 있는 걸 내가 발견했어.”

대답을 이은 건 이번에도 트로웰이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눈을 동그랗게 떴더니 엘뤼엔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그가 보내는 강렬한 시선에 트로웰이 딴청을 피우듯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부작용일 뿐이야.”

“부작용이라니? 무슨 부작용? 혹시 어디가 안 좋은 거야?”

내가 물러나지 않고 집요하게 추궁하자 엘뤼엔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화내려나 긴장하던 것이 무색하게도 그는 옷 안에서 뭔가를 꺼내 보였다. 긴 줄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목걸이였다. 검은 가죽끈에 오묘한 빛깔을 지닌 붉은 돌이 감겨 있었다. 왠지 비슷한 걸 어디에선가도 봤던 것 같았다.

“신물이라는 거다. 이걸 소지하면 중간계에서도 시간제한 없이 있을 수 있지.”

“어? 그럼 계속 여기 있을 수 있다는 거네?”

“그래. 단지 원래 내 것이 아니다 보니 나와 파장이 맞지 않아. 그래서 감각이 조금 둔해진 것뿐이다. 네가 걱정할 정도는 아냐.”

“원래는 누구 건데?”

“카노스.”

대답을 듣고서야 카노스가 비슷한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얼핏 스쳐봤던 거라 단번에 생각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루카르엠으로 지낼 수 있었던 것도 저 목걸이 덕분이었구나. 내심 궁금했었는데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마신이 빌려준 거야?”

“아니. 뺏었다.”

“……그래도 돼?”

“뺏긴 놈이 멍청한 거지.”

대답하는 말투에 코웃음이 섞였다. 엘뤼엔이 대체로 냉정한 편인 건 맞지만 유독 카노스한테는 더 가차 없다고 느껴지는 건 내 착각만은 아닐 거다. 물론 그가 한 짓이 있으니 충분히 이해는 갔지만.

“이사나가 납치됐었다고?”

내가 모르던 비화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엘뤼엔이 이곳에 내려온 건 벌써 한참 전이었다. 그동안 개별적으로 행동하며 나를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곳에 오기 직전에 함정에 빠진 이사나를 구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공이 택한 상등품의 제물에 이사나 일행도 포함되어 있었던 거다. 다행히 모두 다친 곳 없이 구조되어 무사히 진영으로 돌아갔다는 듯했다.

“하지만 진짜 위험한 건 지금부터야. 차원 막을 깨트린 걸 보면 의도한 바가 있다는 거겠지. 균열이 크지 않아서 지금은 이곳에만 영향을 주고 있지만 곧 전체적으로 퍼져 나갈 거야. 조금 전 같은 상황이 전국적으로 일어날 거라는 뜻이야.”

트로웰의 설명이 무슨 뜻인지는 바로 이해했다. 사람들이 마물로 변할 거라는 예고였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대공이 마신관들에게만 마목의 씨앗을 심어놨을 것 같진 않았다. 군대 쪽은 당연할 거고, 일반인 중에도 퍼져 있을지 몰랐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손을 써놨는지는 모르겠지만 큰 혼란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마족들이 넘어오는 것도 경계해야 해. 그자가 마왕의 자격을 상실했다는 걸 아직 모르는 자들이 많을 거야. 한동안은 그에게 충성할 가능성이 커. 그들이 시간벌기를 도와주겠지.”

“으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어서 나가봐야겠어. 마목의 씨앗도 내가 제거할 수 있겠지?”

“가능하긴 하겠지만, 그걸 다 찾아내려고?”

“일단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냥 변화하면 한꺼번에 쓸어버리는 게 더 빠르지 않겠어?”

“피해자 중에 무고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가능하면 전부 살리고 싶어.”

트로웰이 나를 빤히 응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왠지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묘했다. 평소보다 조금 가라앉아 있는 듯한. 그에게서 거의 느껴보지 못한 냉기였다. 내가 뭔가 실언을 했나?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는데 그걸 눈치챘는지 트로웰이 곧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저기, 엘.”

“응.”

“엘.”

“응……?”

“엘.”

“……트로웰?”

“그냥, 불러보고 싶었어.”

“…….”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어떠한 예감이었다. 가만히 숨을 삼키자 트로웰의 입가에 서려 있던 미소도 천천히 지워졌다. 수많은 감정을 담고 있는 눈이 나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미안. 지금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어. 내가 관여할 수 있는 것과 없는 부분이 있는데 이건 후자거든. 사실을 밝히면 넌 인과를 궁금해하겠지. 난 대답을 피하지 않을 거야. 그게 너한테 괜찮을 거라고 장담하지 못해. 아니, 틀림없이 견디지 못할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응, 지금은 모르는 게 좋아.”

“트로웰. 대체…….”

“엘, 넌 내 가족이야.”

“…….”

“널 정말 좋아해. 처음부터 쭉 그랬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건 절대 변하지 않아. 그것만은 알아줬으면 해.”

부드럽게 말한 그가 내 어깨를 툭툭 다독이곤 먼저 걸어나갔다. 지나가면서 그가 장난을 치듯 라피스의 다리를 툭 걷어찼고, 느닷없는 횡포에 라피스는 온갖 짜증을 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나는 계속 입 안에서만 맴돌고 있던 질문을 꿀꺽 삼켰다.

트로웰, 혹시 너도 그를 기억해 냈어?

그가 정말로 존재하는 사람이었어? 시벨리우스가 했던 말이 다 맞는 거야? 네가 아는 엘도, 이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됐어?

물어보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어떤 대답을 하든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없었으니까. 트로웰은 이미 경고했고, 나는 그 선을 넘어설 자신이 없었다.

가만히 서 있는 내 머리 위로 다시금 엘뤼엔의 온기가 내려앉았다. 여전히 눈물이 날 만큼 다정한 온기였다. 그 손길에 온전히 위로받을 수 없었던 건 그냥 나만의 문제였다. 내가 너무도 초라한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 * *

콰지직―지이이익!

강하게 움켜쥔 채 위에서부터 아래로 잡아 뜯어 내리자 거친 소음이 울렸다. 공간이 일렁인다 싶더니 손 안에 걸리는 감각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 아스는 두 손을 가볍게 털어냈다.

결계의 생성 지점을 찾아내는 것도, 그것을 없애는 것도 전부 처음 해 보는 일이었지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결계가 있다는 전제를 두고 찾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였다면 갇혔다는 사실을 인지하기까지도 시간이 꽤 걸렸을 것이다. 인간이 이런 결계를 칠 수 있다니, 제법이잖아? 아스는 대공의 힘을 재평가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무리가 불안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끝났어. 이제 가도 돼.”

지상으로 나가는 입구를 가리키자 무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집으로 데려다주라고는 안 했으니까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할 터였다. 이후의 일들은 저들이 알아서 감당할 몫이다. 사실 아스로서는 이곳까지 안내해 준 것만도 상당한 인내심이 필요했다. 조금 전 사방을 뒤흔드는 지진이 일어났다. 제단이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이 분명한 진동이었고, 이후에 공기의 흐름이 미묘하게 달라진 참이라 마음이 몹시 초조했다. 설마 무슨 일이 생겼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서 돌아가서 대부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그러나 그가 인솔 중인 인간 무리는 눈치가 없었다. 떠나라는 신호를 줬음에도 선뜻 움직이지 못하던 이들 중에 한 여자가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섰다. 여인이라기엔 아직 앳된 얼굴을 한 소녀였다. 아스는 그냥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저 귀찮아서였지만 그걸 허락의 뜻으로 해석한 소녀가 크게 심호흡했다.

“당신들은 대체 누구죠? 알바토 왕국에서 왔다는 건 거짓말인 거죠?”

“응, 맞아.”

“대체 정체가 뭐죠? 왜 저희를 구해준 거예요? 누가 당신들을 보낸 건가요? 당신들은 대공 전하가 뭘 하려고 한 건지 알고 있는 거죠?”

다그치듯 쏟아지던 질문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무심하게 듣고 있던 아스가 빙긋 웃었기 때문이었다.

“너, 거짓말 잘하네.”

“네, 네?”

“하나만 물어본다고 했었잖아. 이미 하나 넘었어.”

질문하던 소녀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노골적인 면박에 수치심이 솟았지만 차마 내색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보다 작은 소년에 불과한데 어째선지 그가 무서웠다. 연회장에서 아무렇지 않게 접근하고 말을 걸었던 것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눈을 똑바로 마주 보는 것조차 고역으로 느껴졌다.

“그대는 마족이군.”

굳어 있는 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담담한 사람은 한 명뿐이다. 그가 내뱉은 말이 일으킨 파장은 컸다.

“마, 마족?”

모두가 경악하는 가운데, 아스는 이채 어린 눈동자로 자신의 정체를 짐작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금발의 남자 역시 무뚝뚝하게 응시해 왔다. 이름이 카리브디스라고 했던가.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인간이라는 게 놀라울 만큼 상당한 기력을 지닌 자였다. 이 정도면 동공작 시절의 데르온과도 충분히 견줄 만했다(본인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태생적으로 한계가 분명한 인간이 이 정도로 발전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재능은 오히려 그가 더 앞서는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참 신기했다. 물론 딱 그 정도의 관심인지라 흥미는 오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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