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5화
그는 아직 상황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경고를 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그 앞으로 튀어나갔다. 찰나의 순간, 주문을 외우고 있던 라피스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는 것이 보였다.
“미친!”
즉시 시동을 멈춘 그가 나를 붙잡고 빠르게 자리를 굴렀다. 콰직! 간발의 차이로 새카만 액체가 우리가 있던 자리를 덮쳐들었다. 바닥을 완전히 태우고도 깊은 구멍을 낼 만큼 지독한 용액이었다. 혀를 차면서 고개를 드는 순간, 근처에 쓰러져 있던 대공의 몸에 무언가가 덮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흐려지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런!’
낭패감에 황급히 일어나 제단 쪽을 살폈다. 거의 다 끄집어내졌던 검은 덩어리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마법이 중단되면서 그대로 줄행랑을 친 것이다. 마법진도 전부 망가진 채였다. ‘그’가 달아나면서 부순 것이 분명했다.
“아, 놓쳤다.”
“지금 그게 네가 할 소리냐!”
허무해져서 중얼거린 말에 라피스가 버럭 소리쳤다. 쏘아보는 눈빛이 사나워서 나는 조금 움찔했다. 화를 내는 그의 모습은 자주 봤지만 이렇게 진심으로 분노한 듯한 표정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너 미쳤어? 네가 왜 거기서 끼어들어?”
“……아니, 난 널 구하려고…….”
“그게 아니라! 왜 네 몸으로 막으려고 하냐고! 저건 이미 악신에 가까운 힘이야! 너라도 무사하지 않다는 거 몰라? 운 나쁘면 역소환 되는 게 아니라 그냥 소멸할지도 모른다고!”
“아, 그래?”
“그래, 라니? 지금 그딴 태연한 대답이 나와?”
아니, 나도 좀 놀라기는 했다. 설마 그 정도로 강력한 위력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어쩐지 엄청 위험한 느낌이더라니. 그때 라피스가 순발력을 발휘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어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도 널 구했잖아. 내가 그때 안 나섰으면 넌 피할 생각조차 못 했을걸?”
“그걸 말하는 게 아니거든? 너에 대한 태도가 문제라고!”
“나에 대한 태도?”
“전부터 묻고 싶었던 건데. 너, 혹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냐?”
“…….”
그게 무슨 말이냐고, 바로 웃으며 묻지 못했던 건 왠지 속이 서늘해졌기 때문이다. 정말로 말문을 잃을 줄 몰랐다는 듯 라피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는 게 재미없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당황해서 그래. 내가 그렇게 보여?”
“어. 되게 삶에 애착이 없는 놈 같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사는 느낌?”
“그런 건 아닌데……?”
“아닌 놈이 그렇게 쉽게 목숨을 걸어?”
“어, 으음, 뭐랄까. 난 정령왕이잖아. 어지간한 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인 것 같고.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건 양심에 꺼려지니까 그런 거지.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덜하기도 해. 알다시피 난 전생이 있으니까. 한 번 죽어 봤더니 별거 아니더라고. 게다가 다음 생을 알고 있기도 하고. 그래서…….”
“그래서 죽어도 괜찮다?”
아니, 꼭 괜찮다는 건 아닌데. 말끝을 흐리자 그의 눈빛이 더 사나워졌다.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인가 싶었지만 나는 머쓱해져서 어깨를 으쓱였다. 대체 왜 구해 주고도 이런 타박을 들어야 하는 건지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그 생각을 읽었는지 라피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어쩌다 이런 거랑 엮여서는…….”
“헐, 말이 좀 심하다? 계약해달라고 한 건 너거든?”
“시끄러. 그냥 계약 관계였으면 차라리 상관없었겠지.”
무슨 소리인가 멀뚱히 눈을 깜빡이다 나는 그 의미를 곧 알아차렸다. 그냥 계약 관계였으면 상관없을 텐데 지금은 상관이 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그냥 계약 관계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친구라는 거구나. 헤헤 웃었더니 라피스의 표정이 더 못마땅하게 변했다.
“웃음이 나오냐? 넌 진짜 언젠가 그 성격 때문에 한번은 호되게 당할 거다. 그때 가서 후회나 하지 마.”
“그럼 네가 지켜주던가.”
“이제 아주 날 부려먹겠다는 소리가 당연하지? ”
짜증스럽게 내뱉은 후 그가 제단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대충 분풀이를 끝마치고 나니 이제야 마법진의 상태에 신경이 미친 것 같았다.
“젠장, 아주 가루를 만들어 놨구만. 복원은 안 되겠어.”
“그럼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거야?”
“알겠냐. 처음부터 불완전하게 구동하는 거라고 했잖아. 여기까지 진행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운이야.”
“큰일이네. 이제 어떡하지…….”
대공도 사라졌으니 이제부터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짐작할 방법이 없었다.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문득 제단 아래 속에서 뭔가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이게 뭐지? 가까이 가서 들여다봤더니 하얀빛이 점멸하듯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라피스.”
“뭐.”
“뭔가 이상한 게 있는데?”
“뭐?”
얼굴을 찌푸리며 다가온 그에게 내가 본 것을 가리켰더니 단숨에 표정이 변했다.
쿠웅!
그 순간 지축이 뒤흔들리는 것처럼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균형을 잃고 넘어지려는데, 제단 안에서 강렬한 빛이 솟구쳤다. 그건 지붕을 단숨에 뚫고 올라섰다. 쨍그랑, 어디선가 파열음이 들린 것 같았다. 한기가 일었는데, 그에 비해 왠지 몸은 조금 더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갈피가 잘 잡히지 않았다.
“뭐, 뭐야.”
“……아, 빌어먹을.”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당황하고 있는 내 옆에서 라피스가 욕설을 내뱉었다.
“차원 막이 깨졌어. 마계와 연결된 것 같은데.”
“뭐?”
“마계의 것들이 무작위로 넘어오게 됐다고.”
헐?
그러니까, 아크아돈과 마계가 연결됐다고? 그 바이톤이라는 곳처럼?
당황해서 입을 벙긋거리고 있는데 곧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마신관들의 몸이 꿈틀거리더니, 곧 하나둘씩 새카만 괴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존이 육체가 갈라지고,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기괴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이 절로 찌푸려질 만큼 혐오감이 이는 광경이었다.
“저게 뭐야…….”
“마계의 기운에 영향을 받아 마물화 되는 것 같네. 뭔가 조치해 둔 건가?”
라피스의 말을 들으니 떠오르는 광경이 있었다. 카노스를 아직 루카르엠이라고만 알고 있었을 때. 그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에 다수의 마신관에게 쫓긴 적이 있다. 그때도 눈앞에서 사람이 괴물로 변하는 광경을 봤었다. 당시 루카르엠이 했던 말도 똑똑히 떠올랐다.
<아수라라고 불리는 나무의 열매죠. 피를 먹여 각인시킨 후에 숙주의 몸에 넣으면, 그 속에 가만히 잠복해 있다가 주인이 원할 때 숙주를 마물로 변화시키는 마목입니다.>
“마목.”
중얼거린 말을 들었는지 라피스의 표정도 굳었다.
“키이익!”
“크에에엑!”
그 사이 완전히 마물로 변한 마신관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전에 경험했던 마물보다도 속도가 더 빨랐다. 물론 얌전히 당해 줄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그대로 놈들을 날려버릴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렇게 그들이 지척에 이르렀을 때였다.
콰직! 파지직!
“키에엑!”
“……?”
별안간 눈앞에서 번개가 터지는가 싶더니 마물들이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녹았다. 단 한 마리도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는 매서운 공격이었다. 라피스가 한 건가 싶어서 봤는데 그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사이에 일이 참 재밌게 돌아가는군.”
이어진 목소리에 덜컥 몸이 굳었다. 이런 곳에서 들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목소리였다. 멍하니 돌아본 곳엔 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찬란한 금발을 늘어트린, 아름답고 청아한 남신의 모습이.
“……엘뤼엔?”
작게 중얼거린 말에 반응하듯, 그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오랜만이다, 아들.”
* * *
이건 말도 안 돼.
심장이 있다면 견디지 못해 터져버렸을지도 모른다. 눈앞의 모습이 지나치리만치 비현실적이라 혹시 환상을 보고 있는 건가 싶었다.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는 내게 그가 두 팔을 벌렸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나는 곧바로 그를 향해 달려갔다. 매달리듯 안기는 나를, 단단한 두 팔이 당연하다는 듯이 받았다. 부드러운 품속에서 좋은 향기가 풍겼다. 그를 닮은, 물을 흠뻑 머금은 듯한 백합 향이었다. 옷깃을 붙잡자 손 안 가득 선명한 촉감이 전해졌다. 그제야 비로소 실감이 들었다.
“진짜 엘뤼엔이다.”
“그래.”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네?”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가슴을 가득 채우는 안정감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토닥이는 손길이 기분 좋아서 더 꼭 끌어안았더니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된 거야? 혹시 나 만나러 온 거야?”
“그럼 내가 여길 올 이유가 또 있을까.”
“그렇구나. 나 보러 왔구나.”
가슴이 간질간질해져서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이렇게 마음껏 기뻤던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갑갑한 공간에서 겨우 벗어난 것처럼 숨이 트였다. 날 부드럽게 바라보던 그가 조금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 못 보는 동안 취향이 바뀐 것 같군. 나름대로 어울리긴 한다만.”
“응? 취향?”
“호칭을 다르게 할 걸 그랬나? 혹시 바꾸길 원한다면 말해라.”
“……응?”
“난 딸이라도 상관없으니까.”
“대체 무슨 소리를…….”
잠깐, 그러고 보니 나…… 드레스 입고 있었던가?
깨달음은 불시에 찾아왔다. 황급히 시선을 내리자 역시나 찰랑거리는 물빛 드레스가 보였다. 형체를 벗었다가 다시 구현하면서 머리 색은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의상은 바꾸지 못했다. 따로 착용하는 물품은 다른 규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내 몸의 일부에 속하게 할 수는 있어도 마음대로 변형하는 건 불가능했다. 사라지게 하려면 직접 벗거나 분해하는 식으로 제거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지금까지 내내 그럴 틈이 없었다.
“아니, 엘뤼엔. 이건…….”
일단 변명하려는 나를 엘뤼엔이 가만히 응시해 왔다. 다 이해한다는 듯한 그 눈빛에 식은땀이 흘렀다. 단언컨대 그 어떤 순간도 지금만큼 아찔하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어 내게 닥친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려는데, 엘뤼엔의 뒤편에 또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밤하늘보다 더 짙은 검은 머리카락과 신비로운 황금안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상황에서도 몰라볼 수가 없는, 엘뤼엔 못지않게 반가운 존재였다. 동시에 지금만큼은 보고 싶지 않은 존재이기도 했다.
“트, 트로웰?”
“안녕, 엘. 음…….”
내가 알아보고서야 앞으로 걸어 나온 트로웰은 곤란한 듯이 웃고 있었다. 나를 힐끔 살핀 그가 이내 무언가를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옷 잘 어울린다. 예뻐.”
“…….”
차라리 비웃어 줬다면 마음이 더 편하지 않았을까. 세상 다시 없을 진지한 표정만 봐도 그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는 게 느껴져서 발끈할 수가 없었다. 되레 그의 기대감에 부응할 수 없어 죄책감마저 들었다.
“이제 여성체로 지내기로 한 거야? 어쩌다가 그런 결심을 했어?”
“아, 아냐! 내가 좋아서 이렇게 입은 게 아니거든?”
“그럼……?”
“이거 그냥 잠깐 위장한 거야. 여기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그렇지, 라피스?”
이 순간 유일한 희망은 동지가 있다는 거였다. 그러나 돌아본 현실은 그리 순탄하게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소녀였던 그가 어느새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붉은 머리칼에 붉은 눈동자, 훤칠한 남성의 모습인 데다가 평범한 여행복 차림이었다. 입고 있던 화려한 드레스는 어떻게 했는지 이미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배신자! 원망의 시선으로 바라봤더니 그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내가 누구 때문에 드레스를 입은 건데, 책임감 따위는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표정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트로웰이 그런 나를 자못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위장한 거였구나. 난 또 누가 드레스를 선물했는데 해명할 기회가 없어서 할 수 없이 그냥 입은 줄 알았지.”
“어? 그게…….”
“아니다. 밝히려고는 했는데 옆에 있던 녀석이 혼자 입기 싫다고 해서 차마 거절하지 못한 건가?”
“……트로웰, 다 알면서 그러는 거지.”
“미안.”
그제야 트로웰이 폭소를 터트렸다. 한번 시작하면 쉽게 그치지 않는 웃음보가 발동했는지 아예 주저앉기까지 했다. 문제는 그 모습이 딱히 얄밉게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그래, 한 사람이라도 즐거우면 그걸로 된 거지. 피식 웃은 후에 옷차림을 바꾸고 있는데 옆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엘뤼엔이 제단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
잠시 외면하고 있던 차가운 현실이 다시금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뜻밖의 재회가 반갑긴 했지만 속 좋게 웃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카류안과 대공을 놓쳤고, 차원 막이 부서졌다. 생각만 해도 초조해지는 이 실태를 이제부터 실토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목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꽤 요란하게도 치렀군. 죄인을 잡으려고 한 건가?”
“죄인?”
“주신의 관할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자는 그렇게 부른다. 나로선 그 호칭조차도 과분하다 싶지만.”
엉망으로 망가진 제단과 바닥의 그을음을 내려다보는 엘뤼엔의 눈빛이 서늘했다. 그가 손으로 제단 위를 가볍게 쓸었을 때였다. “끼야아악!” 귓가를 긁는 듯한 기이한 소음과 함께 새카만 덩어리가 불쑥 튀어 올랐다. 갈고리처럼 뻗은 기류가 그의 손을 잡아먹을 듯이 감싸려 들었다. 깜짝 놀라서 얼굴을 굳히는데, 엘뤼엔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아무렇지 않게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파지직, 전류가 튀는 소리가 울리며 그를 공격하던 기류가 그대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