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4화
“큭!”
일반인이라면 그대로 혼절하고도 남았을 충격인데, 소드 마스터답게 그는 울컥 피를 토해내면서도 견뎌냈다. 그 와중에도 놓치지 않은 검에서는 여전히 푸른 검기가 생생했다. 돌무더기를 밀치고 일어나는 그의 몸에서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그가 다시 자세를 잡는 걸 본 대공의 눈빛이 더 짜증스럽게 변했다. 직후 카리브디스의 발밑에서 바람이 이는 것 같더니 곧 그가 자리를 박차고 도약했다. 꽤 벌어져 있던 대공과의 간격이 단숨에 좁혀졌다. 푸른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인간이 이런 속도를 낼 수 있다는 게 솔직히 조금 놀라웠다. 기척을 감추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싶더니. 블레스터가 그를 선택했기에 바람을 다뤘던 것이 아니라, 애초에 그가 바람을 다룰 수 있는 자였기에 블레스터의 선택을 받았던 거다. 작정하고 추격하던 데르온조차 놓쳤을 정도다. 아마 속도로 그를 따라잡을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이번엔 상대가 너무 나빴다. 기습만큼이나 빠른 공격이라도 닿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공작의 검은 대공의 근처에서 강제로 멈췄다. 철판도 두부처럼 베어낸다는 검기도 대공으로 솟아나고 있는 기류는 뚫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삼켜져 가고 있었다. 이변을 느낀 카리브디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뒤로 물러서려 하는데 검이 꼼짝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붙잡힌 검날이 천천히 녹아가고 있었다. 카리브디스는 서둘러 검을 버리고 검기 자체를 검날처럼 만들었다. 그러나 그 힘 또한 대공의 힘에 고스란히 삼켜졌다. 마주한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간 교차했다. 카리브디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대공이 미소 지었다.
콰지직! 쿠웅!
이후로는 거의 일방적인 시간이었다. 대공은 느긋하게 팔짱을 낀 상태에서 카리브디스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무형의 기운이 채찍처럼 휘어지며 카리브디스의 몸을 아무렇지 않게 유린했다. 스치기만 해도 생채기를 내는 기운이 아예 옭아매고 파고드니 전신에 성한 구석이 남지 않았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됐다.
“커흑!”
가쁜 숨만 내쉰 채 축 늘어진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다는 핏덩이에 더 가까웠다. 그 모습을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본 대공이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러지? 패기와는 다르게 영 맥이 없는걸? 조금 더 버텨봐야 하는 거 아닌가? 이건 너무 싱거운데 말이야.”
“전…하…….”
“영웅이라는 찬사를 하도 들으니 네가 정말 뭐라도 된 줄 알았나? 무엇이든 전부 다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참으로 유감이야. 네 그 대단한 능력도 내겐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진작 알려 줬어야 했는데.”
“전하……!”
꿈틀거리던 그가 대공을 향해 기었다. 잡고 놓치지 않으려는 듯, 필사적으로 손을 뻗는 모습은 그 자체로 애원에 가까웠다. 그게 불쾌했던 걸까. 정색한 대공이 카리브디스의 목을 움켜쥔 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카리브디스는 저항했지만 그를 제압한 힘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경지에 오른 자라도 숨을 쉬지 못하면 죽는다. 부족해진 호흡에 단숨에 창백해진 얼굴을 보며 대공은 느긋하게 웃었다.
“차라리 조금 더 빨리 깨닫지 그랬나. 그럼 어쩌면 날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나도 그렇고, 네 아들이 될 뻔한 그 아이도 말이야.”
그 말에 버둥거리던 카리브디스가 저항을 멈췄다. 그가 멍한 얼굴로 대공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알고 있잖나. 파이런. 잃고 난 뒤에는 전부 늦어버린다는 걸.”
달콤한 말을 건네는 것처럼, 대공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넌 아무것도 구하지 못해.”
그건 언어로 이루어진 독이었다. 스며든 즉시 핏줄을 파고들어 심장까지 단숨에 태워버리는 지독한 독. 카리브디스의 눈동자가 탁해지며 빠르게 빛이 식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그 모습에 대공이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카리브디스를 움켜쥐고 있는 힘이 더 뚜렷해졌다. 목을 부러트리려는 거다.
나는 반사적으로 제단 쪽을 바라보았다. 마법진의 빛은 이미 완전히 잠잠해진 지 오래였다. 다시 기회를 노리려면 주술이 재발동하는 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눈앞의 상황을 외면하는 게 옳았다. 어차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카리브디스도 악당 편에서 나쁜 짓을 했던 자였다. 똑같은 놈들끼리 싸우는 것까지 내가 관여할 필요는 없었다. 멋대로 뛰어든 그가 무모했던 거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 아저씨한테 갈래요.
젠장.
의식한 순간 나는 곧바로 대공의 힘을 끊어냈다. 붙잡고 있던 힘이 끊어지자 결박이 풀린 카리브디스가 그대로 바닥에 추락했다. 풀려난 쪽도 묶었던 쪽도 모두 얼굴을 굳혔다.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듯, 대공이 뒤로 물러서려고 해서 나는 그 팔을 붙잡았다. 흠칫 놀라는 순간에 맞춰 모습을 드러냈더니 그의 눈이 더 크게 부릅떠졌다.
“너는……!”
신음을 내뱉은 것도 잠시, 그가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붙잡히지 않은 쪽 손이 뭔가를 꺼내려는 게 보였다. 연막탄 같은 것을 던져 도주할 틈을 만들려는 것 같았다. 카리브디스는 상대했으면서 내 앞에선 상황을 두고 볼 틈도 없이 바로 달아날 수부터 두다니. 정말 눈치 하나는 기막히게 빠른 자였다.
물론 그가 움직이는 것보다 내가 조치하는 게 더 빨랐다. 나는 물을 움직여 대공의 심장을 일시적으로 마비시켰다. “컥!” 헛숨을 삼킨 그가 하얗게 눈을 뒤집은 채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제아무리 잘난 힘을 가졌어도 육체의 마비는 이기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축 늘어진 그를 멀찍이 던져 벽면에 처박았다. 다분히 의도를 담아, 카리브디스가 당했던 방식 그대로였다. 단지 버텨냈던 그와는 다르게 대공의 육체엔 타격이 클 터였다. 이 정도면 반나절은 정신을 못 차릴 게 분명했다.
“대공 전하!”
“뭐, 뭐하는 놈이냐!”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마신관들이 대경실색해서 내게 검을 겨눴다. 갑자기 나타난 나도, 대공이 쓰러지는 현 상황도 전부 이해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주저앉아 있는 카리브디스도 당혹감을 드러내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한숨을 내쉰 다음 제단 쪽을 바라보았다. 그때까지도 그곳에 누워 있던 남자가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쯧, 아무튼 쉬운 길을 가는 법이 없지.”
그때쯤 라피스와 아스도 몸을 털고 일어섰다. 그들이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는 걸 보고 마신관들이 다시금 눈을 부릅떴다.
“너희는 도대체…….”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입씨름하는 것도 귀찮아진 내가 모두를 일시에 기절시켰기 때문이다. 몰려 있던 이들이 낙엽처럼 우르르 쓰러지자 라피스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 와중에도 죽이지는 않는단 말이지. 타고나길 소심한 건지, 아직 화가 덜 난 건지.”
“시끄러. 이제 어떡해?”
“알 게 뭐야. 내가 사고 처리 전담이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라피스는 제단의 마법진을 꼼꼼히 살피고 있었다.
“일단 추적은 해 볼게.”
“가능하겠어?”
“주술 형식은 마지막까지 확인했으니까 따라가 볼 수는 있어. 그래 봤자 흉내 내는 수준이라 성공할 거라는 장담은 못 해. 기대는 하지 마.”
라피스가 한발 물러선 대답을 하는 건 기억하기로 이번이 처음이다. 이 녀석도 겸손한 화법을 쓸 줄 안다고 감탄할 때가 아니었다. 이건 거의 글렀구나. 본능이 내린 결론에 터져 나오는 탄식을 삼키며, 나는 아스를 돌아보았다.
“아스, 사람들 좀 부탁할게. 데리고 나가면서 탈출구를 확보해줄래? 아마 지금은 나가는 길이 나타나지 않을 거거든.”
기특한 아이는 내가 하려는 말을 바로 이해한 것 같았다.
“우리, 결계에 갇혔어?”
“맞아. 시작점을 찾아서 부술 수 있겠어?”
“음, 알았어. 해 볼게. 근데 얘들 아직 못 움직이는데.”
“아, 그렇지. 잠시만 기다려.”
대답과 함께 제단에 누워 있던 남자에게 치유술을 썼다. 몸이 움직이자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바짝 웅크렸다. 주위를 둘러봤더니 마침 제단 앞에 그릇이 놓여 있었다. 아마 심장을 받아 두기 위해 준비해 둔 그릇 같았다. 나는 연회장에서 했던 것처럼 그 안에 치유력을 담은 물을 채운 다음, 남자에게 건넸다. “치료제니까, 사람들한테 먹여요.” 눈앞에 갑자기 들이 밀어진 그릇을 보고 움찔하던 남자가 이어진 말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래도 눈치는 있는 편인지, 그는 내가 다시 한번 시선을 주기 전에 허둥지둥 일어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잠시간 응시하다가 나는 카리브디스를 돌아보았다. 그때까지 그는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카리브디스라고 했죠?”
말을 걸자 그가 차분한 시선으로 응시해 왔다. 그늘진 보라색 눈동자가 생기라고는 전혀 없이 여전히 탁하기만 했다. 온몸이 피투성이인 상태라 더 시체처럼 보였다. 쯧, 나는 가볍게 혀를 찬 후 그의 몸에 치유술을 불어 넣었다. 상처가 빠르게 나았지만 그는 별로 놀라지도, 감탄하지도 않았다. 아마 어느 정도는 내 정체를 짐작하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단지 왜 자신을 치료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사람들이 깨어나면 당신도 같이 여기서 나가요.”
“……전 여기 있겠습니다.”
“위험할지도 몰라요. 난 당신까지 신경 쓸 여력 없고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죽을 작정이에요?”
“…….”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멍한 시선이 기절한 대공을 향해 있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지만 지금 여기서 당신이 죽겠다고 하면 난 엄청 짜증 날 것 같거든요? 당신 하나 구하겠다고 중요한 계획도 망쳤으니까 책임지고 살아줘야겠어요.”
카리브디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이 왜 굳이 저를 구하려 하냐고 묻는 듯했다.
“나도 딱히 당신을 구하고 싶어서 구하려는 건 아니에요. 단지, 그 애가 당신을 좋아하니까요. 기다리고 있다는 걸 뻔히 아는데 죽게 놔둘 순 없는 것뿐이에요.”
“……그 애?”
“레이요.”
“……!”
굳게 다물어져 있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뒤늦게 의미를 파악한 얼굴에 동요가 점점 짙어져 가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역시 그땐 레이를 보지 못했구나. 그가 모르고 있었던 거라 다행이었다. 보살필 아이를 남겨 두고 대공과 동반 자살하려는 거였다면 정말 화났을 테니까.
“레이……가?”
“살아 있어요. 당신이 아는 모습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살아, 있다고…….”
“아버지가 되어 준다고 했다면서요.”
혼란을 감추지 못하던 그가 숨을 멈췄다. 나는 눈만 깜빡이고 있는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 약속을 지켜요. 어기면 용서 안 할 거예요. 이제 와서 무책임하게 버리면 절대 그냥 안 둬. 살아생전 내내 편히 살지는 못할 거고, 죽어도 지옥까지 따라가서 날 기만한 값을 치르게 할 거야. 내 말 알았어요?”
“어, 어디 있습니까? 레이는,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그가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넋이 나가 있는 것 같은 얼굴을 보니 내 협박은 거의 들은 것 같지도 않았다. 그게 조금 괘씸했지만 죽은 생선 같은 얼굴로 앉아 있는 것보다는 훨씬 봐줄 만해서 참았다. 먹물처럼 잠겨 있던 눈동자에도 어느새 빛이 감돌고 있었다.
“집으로 가요.”
“……집.”
“당신 집이요. 아들이 아버지 집에 있지 않으면 어디에 있겠어요?”
카리브디스는 잠시간 아무 말도 잇지 않았다. 먹먹한 건지 충격을 받은 건지, 뭐라 형용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고맙, 습니다.”
그래도 그가 희미하게 내뱉는 말 만큼은 분명하게 들렸다.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손을 휘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동안 가만히 서 있던 그에게서 공기의 일렁거림이 느껴졌다. 아마도 내게 허리를 굽혀 인사한 것 같았다.
기척이 멀어지는 걸 느끼고 돌아보니 그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비에서 깨어난 자들이 합류하는 그를 보며 주춤거렸지만 그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직후 아스의 인솔에 따라 모두와 함께 걸어갈 때도 그 모습에 다른 생각은 보이지 않았다. 쓰러져 있는 대공 쪽에 시선을 주거나 걸음이 잠시 멈추는 일도 없었다.
끝까지 흔들림 없는 올곧은 시선이, 앞으로 그가 걸어나갈 길을 보여 주는 듯했다. 한때 대공의 개라고 불린 남자는 이제 완전히 사라졌음을. 저곳에 있는 남자는 그저 평범한 한 아이의 아버지일 뿐이라는 것도.
그는 이제 괜찮았다. 그라면 틀림없이 레이를 잘 지켜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시작한다.”
모두가 떠난 후 라피스는 제단에 다가가 마법진 위에 손을 얹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걸 신호로 그가 눈을 감고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둥그런 마법진들이 펼쳐지듯이 떠올랐다. 제단에 새겨진 마법진 위에도 붉은빛이 번져나갔다. 곧 그 위에 기묘한 문자들이 떠오르면서, 마력이 단숨에 팽창하는 게 느껴졌다.
“큭!”
그 순간 주문을 읊던 라피스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잠시 균형을 잃는가 싶더니 입에서 붉은 피가 울컥 터져 나왔다.
“라피스!”
놀라서 다가가려 하자 그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그런 중에도 그는 계속 수식을 계산하고 있었다. 긴장한 채로 그 모습을 주시하고 있으려니 제단 안에서 조금씩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까드득, 까드득.
그건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단단한 표면을 긁는 듯한 소리였다. 마법진 속에서 검은 아지랑이 같은 것이 조금씩 일렁거리더니, 제단을 가른 채 넘실거리듯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건 매우 새카만 손이었다. 기괴하리만치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달린.
“윽…….”
본능적인 거부감에 얼굴이 먼저 찌푸려졌다. 이윽고 균열이 점점 벌어지면서 검고 탁한 덩어리가 점점 올라섰다. 석유 찌꺼기를 모아 둔 것처럼 더러운 형태였다. 가까이 있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은 악취가 퍼져 나왔다.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려는데 덩어리 속에서 무언가가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눈동자도, 그 무엇도 없었지만 뚜렷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게 누구야. 뜻밖의 손님이 있었군?
“……!”
그 순간 낮은 음성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소름이 돋는 듯한 기분에 온몸의 감각이 곤두섰다. 이건 위험해. 본능이 내게 경고했다. 섬뜩한 살기가 단숨에 대상을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서인지 그게 노리고 있는 것이 누군지 선명하게 느껴졌다.
라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