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3화
마차에서 내린 대공은 여느 때처럼 혼자 별궁 안으로 들어섰다. 입고 있는 겉옷을 벗어 걸어둔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서재로 향하는 거였다. 별궁에 오면 항상 책부터 읽곤 했기 때문에 여기까지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안으로 따라 들어가려 순간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불투명한 기운을 통과하는 감각이었다. 본성에서 벗어났을 때 느꼈던 공기막 같은 것이, 이곳에서도 똑같이 느껴졌다. 처음은 우연이라 할 수 있어도 두 번이나 같은 감각이 반복되는 건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설마 이거…… 결계인가?’
생각이 미치기 무섭게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이아스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연회장에서도 보지 못했던가? 언제부터 보이지 않았지?
원래 자연체의 정령은 결계에 영향받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미 상식을 무시하는 결계를 여러 번 경험한 바 있었다. 라피스가 날 소환했을 때와 카노스가 함정을 팠을 때. 둘 다 내 힘과 가깝거나 그보다 더 강한 결계였고, 그런 곳엔 자연체의 정령들도 들어오지 못했다. 그 정도로 강한 결계는 외부를 위장할 수도 있다. 아마 의도적인 광경을 연출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예를 들어, 서재에서 우아하게 책을 읽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라거나.
“…….”
혹시나 싶어 정령의 눈을 써봤더니 내가 보는 것과 전혀 다른 광경이 보였다. 내 눈앞에 있는 대공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인데, 나이아스들은 그가 책장에서 책을 고르는 중인 걸로 인지했다. 실제로는 결계 안에 들어오지도 못한 상태인데, 들어왔다고 착각할 만큼 뚜렷한 환상을 보고 있는 거다.
같은 장소에서 전혀 다른 광경이 동시에 펼쳐졌다.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동안 대공이 책장 어딘가를 손으로 짚었다. 그러자 우르릉 소리가 울리며 책장이 밀려나듯 양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열린 문처럼 벌어진 공간 사이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이아스들에게 보이는 그는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 소파에 앉는 중이다.
……빌어먹을.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제야 모든 상황이 뚜렷해졌다. 온종일 지켜본 건 아니었지만 틈날 때마다 살펴왔다. 아니, 수상한 기미가 보이면 정령들 쪽에서 즉각 상황을 알려 오도록 해 놨기 때문에 종일 감시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레이가 험한 꼴을 당할 때까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떻게 내내 감시를 피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정답이 허무할 정도로 간단했다. 설마 인간인 그가 이렇게 강한 결계를 칠 수 있었을 줄이야.
마왕의 계약자이긴 하지만 그는 인간이니 경계할 필요까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령 계약과 마찬가지로, 마족과의 계약도 결국 공급자와 수요자가 정해져 있는 관계였다.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아 수요자 쪽도 능력이 발전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 봤자 어린 마족 수준이어야 했다. 그런데 대공은 그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아무래도 마왕이 무슨 짓을 해 둔 모양이다.
정말 보기 좋게 농락당했구나.
그리 오래 유지되는 결계는 아니었다. 처음 연회장에 들어갈 때나 슈텔 영애를 배웅할 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었다. 주변을 떠도는 나이아스를 본 기억도 있었다. 아마 천향주를 가져왔던 그때, 본격적으로 일을 치르기 직전에 펼쳤을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수법으로 현장을 감춰왔을까. 내가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오늘 이 상황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방비하지 못한 채 악신의 각성을 마주해야 했겠지.
주먹을 꾹 움켜쥐었더니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혼란한 의식 속에서 나이아스들이 두려워하는 게 느껴졌다. 이곳에 있지는 않지만 내 감정을 공유하는 존재들이다 보니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알게 된 것 같았다.
‘괜찮아. 너희들 탓이 아니야. 너희에게 화나지 않았어.’
나이아스는 보이는 그대로 전달했을 뿐이다. 잘못한 건 그들에게 보이는 광경이 환시일 수도 있다는 걸 간과한 나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전쟁터가 불안했어도, 한 번이라도 자리를 비우고 직접 확인하러 왔어야 했다. 내가 괜찮다고 안심하고 있는 동안 무고한 아이들이 비참한 죽음에 내던져지고 있었다. 그 절벽의 동굴 안에서 쓰레기처럼 쌓였던 시신들이 떠올랐다. 연고지를 찾을 수도, 무덤을 갖춰줄 수도 없어, 한꺼번에 화장한 것이 고작이었다. 어쩌면 그들 중 일부는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 사이 계단 아래로 내려간 대공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문이 다시 닫히기 전에(닫혀도 상관은 없지만) 나는 그 뒤를 따라나섰다. 비밀의 문 안쪽은 둥글게 파인 통로가 끊임없이 빙글빙글 이어지는 구조였다. 지하였지만 양쪽 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램프가 밝혀져 있어 크게 어둡지는 않았다. 처음엔 울퉁불퉁한 흙길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벽돌로 포장된 길이 나오기 시작했다. 곧 그 앞에 거대한 철창이 내려진 입구가 나타났다.
“때가 오리라.”
대공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철장이 소리 없이 위로 올라갔다. 입구를 통과해 조금 더 걸어가니 넓게 트인 공간이 펼쳐졌다.
“전하, 어서 오십시오.”
안으로 들어서는 그를 새카만 후드를 쓰고 있는 무리가 맞이했다. 그들 모두 검은 로브에 붉은 휘장을 걸치고 있었다. 익숙한 복장이라 정체를 몰라볼 수가 없었다. 아직 남아 있는 마신의 사제들이었다. 물론 신의 문장도 받지 못한 가짜 사제들이겠지만.
이미 예상했던 광경이라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그런 것보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그 너머의 광경이었다. 공간 한가운데 돌로 깎아 만든 제단이 놓여 있었다. 거구가 누워도 충분할 만큼 거대한 크기였다. 어디서부터 들어오는 건지 알 수 없는 달빛이 그 위를 비추고 있었다.
나는 마치 이끌린 것처럼 그 앞으로 걸어갔다. 가까이에서 본 제단은 검붉은 사념이 핏덩이처럼 덕지덕지 눌어붙어 있어 본래의 색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평소라면 건드리고 싶지도 않았겠지만 왠지 그 안에서 기이한 기운이 느껴졌다. 역겨움을 참고 표면을 살짝 쓸어봤더니 기겁한 사념들이 내게 닿지 않기 위해 와르르 물러났다. 그제야 드러난 본래의 모습도 핏자국이 가득해 썩 깨끗하다곤 할 수 없었다. 그래도 확인하려고 했던 건 보였다.
제단 표면에 둥근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빼곡하게 가득한 문자를 전부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대충 해석하기로는 생령에 저주를 내려 기운을 추출하고 치환하는 내용이었다. 라피스가 말했던 주술의 방진이 이걸 말하는 게 분명했다.
“준비는 마쳤나?”
“예, 지시하신 대로 라문잎과 성수를 넉넉하게 준비했습니다. 혹시 정화 의식을 치르지 않았다고 해도 이제 괜찮을 겁니다.”
“좋아, 시간이 없으니 얼른 시작하지.”
대공이 두 팔을 벌리자 곧 대기하고 있던 자들이 그에게 하얀 가운을 입혔다. 그동안 다른 이들이 차례차례 수레를 끌고 들어왔다. 짐작대로 그 안엔 제물로 간택된 귀족들이 실려 있었다. 마신관 둘이서 그중 한 명을 골라 제단 위에 눕혔다. 흐으으, 눕혀진 귀족이 불안하게 눈을 굴리며 기이한 소리를 질러댔다. 왠지 얼굴이 익숙하다 싶더니 슈텔 영애에게 시비를 걸었던 남자들 중 하나였다.
마신관들이 그 입에 나뭇조각을 물리고 성수를 뿌리는 동안, 나는 라피스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워낙 눈에 띄는 외모다 보니 수많은 사람 중에서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막 수레에서 내려진 상태로, 바닥에 얌전히 눕혀져 있었다. 옆에 다가가 어깨를 툭툭 두드렸더니 가만히 누워 있던 그가 이채 어린 표정을 지었다. “왔냐?”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나는 혀를 찼다. 바로 나라는 걸 알아차리다니, 정말 눈치 하나는 기막히게 빠른 녀석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
물로 글자를 나타나게 하자 그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일단 기다려.”
―언제까지?
“저 녀석이 당하기 직전까지.”
―……그래도 돼?
“주술을 역추적하려면 진이 완전히 발동해야 해.”
어쩌겠냐는 태도에 나도 할 말을 잃었다. 아무래도 제단에 올려진 사람에게 잠시간 협조를 구해야 할 모양이다. 그나마 밉살맞은 자라서 죄책감은 덜했다. 본의는 아니지만 제대로 복수하는 기분이라 내심 후련하기까지 했다.
간단하게 의식을 마친 마신관들은 제물의 상의를 벗긴 후에야 뒤로 물러났다. 이윽고 공포로 헐떡이는 그 앞에 대공이 다가섰다. 그 손엔 백금인지 은인지 알 수 없는 새하얀 재질의 단검이 들려 있었다. 쏟아지는 달빛이 검날에 반사되어 마치 스스로 빛을 품은 것처럼 보였다. 눕혀진 이와 눈이 마주치자 대공은 부드럽게 웃었다. 곧 제 손에 죽을 이를 향해 짓는 표정으로는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았으나, 그렇기에 더 섬뜩했다.
“안심해라. 고통은 잠깐이다. 네 심장은 아주 귀하게 쓰일 것이다. 네 몸에 붙어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에 말이야.”
“크흐으!”
지금부터 네 심장을 뜯어내겠다는 말을 이렇게 우아하게 돌려 말할 건 뭔가. 뜻을 이해한 남자가 숨을 크게 삼켰다. 생존 본능으로 가득해진 육체가 필사적으로 꿈틀거렸다. 그 모습을 감정 없는 눈으로 내려다본 대공이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문이 열린다.”
쏟아지는 달빛을 한동안 음미하는 듯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 말에 반응하는 것처럼, 제단의 마법진에 푸른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플릭. 오딤.”
“알티스. 즐로바.”
“메스티.”
“콜리아.”
주문이 길어질수록 더 크게 뿜어져 나온 푸른 빛이 물결처럼 넘실거렸다. 한계까지 동공이 확장된 남자가 더 크게 몸부림쳤지만 그 모두가 아무런 의미 없는 저항이었다. 빛으로 완전히 뒤덮인 그의 몸에 마치 문신과도 같은 문양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티리오.”
그 순간 푸른 빛이 한순간에 붉은색으로 변했다. 라피스가 말하지 않아도 지금이 나서야 할 때라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이미 대공의 단검이 완전히 가슴 부근에 닿아 있는 상태였다. 이제 곧 날 끝이 피부를 파고들 터였다.
‘지금……!’
손목을 붙잡아 저지하기 위해 빠르게 손을 뻗었다. 그런데 나보다 먼저 그를 붙잡는 손이 있었다.
“?!”
놀라서 돌아봤더니 그 정체가 더 의외였다. 조금 전 뒤로 물러났던 마신관 중 한 명이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대공도 당황했는지 눈이 커진 상태였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강제로 끊긴 주술이 빠르게 빛을 잃어갔다. 대공이 이를 갈며 쏘아붙였지만, 그의 일을 망친 마신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뒤로 넘겨진 천 자락 아래, 부스스한 금발이 흐트러졌다. 그 아래 드러난 건 내게도 익숙한 남자의 얼굴이었다.
“……너!”
“다시 뵙습니다, 전하.”
표정이 굳어지는 대공을 향해 남자가 담담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당황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라 상황도 잊은 채 그 모습을 빤히 응시했다. 이 시점에서 재회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카리브디스 공작이었다.
아니, 왜 여기서 이 녀석이 등장해?
그는 본성 쪽에서 헤매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체 언제 여기까지 파고들었는지는 몰라도 내게는 달갑지 않은 돌발 상황이었다. 원래는 내가 대공을 저지하는 순간에 맞춰 라피스가 주술을 넘겨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이미 최적의 시기는 놓쳤고, 다시 시작하길 기다리자니 눈앞의 상황이 가벼운 촌극으로 끝날 것 같지도 않았다. 돌아봤더니 라피스도 어정쩡하게 일어나다 말고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징후가 매우 좋지 않았다.
“이건 또 생각지 못한 재회로군.”
한동안 굳어 있던 대공이 곧 표정을 풀었다. 그사이 한달음에 달려온 마신관들이 검을 꺼내 들고 카리브디스의 주위를 포위했다. 그들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인 대공이 찬찬히 카리브디스를 훑어내렸다.
“마지막은 꽤 인상적인 모습이었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걸 보니 그 이상한 능력은 이제 사라진 건가? 모처럼 달아난 김에 그대로 멀리 떠나는 편이 자네에겐 더 좋았을 텐데. 굳이 내 손에 죽으러 오다니, 참으로 충성스럽기도 하지.”
“……많이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제가 전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호오?”
대공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다시 나를 따르기로 한 건가?”
대화의 흐름만 보았을 땐 그게 가장 쉬운 해석이었다. 나 역시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카리브디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한 번도 전하를 배반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전하께는 배반의 형태가 되었더라도, 그래야 했던 건지도 모릅니다.”
“무슨 의미지?”
만족스럽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천천히 굳어졌다. 불쾌한 심기를 드러낸 대공을, 카리브디스가 음울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이리되신 것엔 제 탓이 큽니다. 제가 전하를 잘 보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젠 제가 전하를 멈추시게 할 겁니다.”
“멈추게 한다라…….”
“제가, 전하를 그 어둠 속에서 구할 겁니다.”
그 순간 그가 들고 있던 검에 짙푸른 빛이 맺혔다. 오라의 최종 완성형이자 소드 마스터의 상징이기도 한 검기였다. 살기는 실리지 않았으나 충분히 위협적이었고, 그렇기에 의미를 파악하기도 쉬웠다.
“날 죽이겠다?”
“저도 곧 당신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하하하!”
대공은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를 노려보는 눈빛만큼은 짐승처럼 사나워져 있었다.
“이건 정말이지……. 나만 졸졸 따라다니던 병아리 같던 아이가 그새 많이도 컸군. 여러모로 날 놀라게 해.”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 각오가 기특해서 나쁘진 않아. 하지만 말이야, 파이런. 자네는 한 가지 착각하고 있어. 나를 구하겠다고? 정말이지 허무맹랑한 망상이 아닌가. 그렇다면 더더욱 날 방해하지 말았어야지.”
“…….”
“이게 바로 날 구원하는 길인데 말이다!”
카리브디스의 눈이 부릅떠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대공으로부터 무형의 기운이 뻗어 나온다 싶더니, 카리브디스의 몸이 저만치 날아갔다. 콰직! 그가 벽면을 뚫고 처박히는 광경이 생생하게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