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41화 (341/608)

제341화

아까부터 시종이 읊는 명단에서, 유독 강조되는 부분이 있었다. 주로 선대가 어떤 활약을 했고, 그 핏줄들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지녔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구슬의 색이 선명해질수록 그 피를 지닌 귀족은 특별한 내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마법사나 주술사나 오러 유저 같은. 이능을 지녔다든가, 또는 그런 자를 선조로 둔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고 보니 곧장 옮겨지는 자들에게도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 모두 남들보다 풍부한 마나를 품고 있는 이들뿐이었다. 아무래도 펜던트는 피 속에 녹아 있는 마나의 농도를 감별하는 도구인 듯했다.

‘설마…….’

이게 정말,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겠지?

믿어지지 않다기보다 믿고 싶지 않아서 몸이 떨렸다. 천향주를 마시기 전에 라피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늘 연회에 참여한 귀족들 대부분이 미성년자라고 했었다. 더불어 공신 가문의 자제들이라고.

처음엔 그 말에 딱히 큰 의미를 담지 못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공신 가문이라는 건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자를 보유했거나 보유한 가문이라는 소리였다. 그게 학식이든, 군사력이든, 재산이든.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는 뜻이기도 했다. 덧붙여 이 세계에서 그 무엇보다도 큰 가치를 지니는 능력은 바로 마법이나 검기와 같은 ‘이능’이었다.

혼자서 수백의 역할을 하는 힘이다. 이곳의 전쟁은 이능자를 얼마나 보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승패가 크게 갈렸다. 당연하겠지만 공신 중에는 높은 확률로 이능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힘은 대부분 유전된다.

어리고 건강한 육체. 귀족으로 태어나 청결하고 유복했을 환경. ……그리고 이능의 자질을 지닌 특별한 혈통.

이보다 제물에 적합한 조건이 또 있을까.

아연한 기분으로 라피스를 쳐다봤더니 그가 이제야 알아챘냐는 시선을 보내왔다. 참고 있던 숨이 단숨에 터져 나왔다. 이 소란이 벌어진 이유를 드디어 알 것 같았다. 정말로 여기 있는 귀족들을 제물로 쓰려는 거다.

‘미쳤다, 미쳤다 했더니. 정말 단단히 미쳤구나.’

물론 대공의 마수에서 귀족들이 안전할 거라 여긴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실권을 지닌 고위 귀족은 건드리지 않을 줄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끔찍한 인면수심의 악당이라도 일정 선은 지키는 법이니까.

이 사실이 알려지면 그를 지지하던 모든 세력이 돌아설 거다. 그들이 제 자식을 죽인 자를 가만히 놔둘 리도 없었다. 권력자라는 것도 결국 적당한 상생이 필요한 자리였다. 사방이 적인 상태에서는 누구라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런데 대공은 그 선을 아무렇지 않게 넘으려 하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을 통합하여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두 가지뿐이었다. 그가 뒷감당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이거나, 그게 아니면…….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는 거겠지.’

모든 걸 내버리고 치달을 만큼, 그가 주술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악신의 각성이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거다. 이왕이면 전자이길 바랐으나 이성은 후자 쪽이 더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그걸 막을 수 있을까?

이를 악물고 있는 동안 마침내 대공의 발길이 우리 앞으로 닿았다. 그가 먼저 다가간 곳은 라피스 앞이었다.

“가장 기대하던 순서가 왔군.”

느긋하게 웃는 그를 향해 라피스가 새파란 눈길을 보냈다. 몸을 꿈틀거리며 헐떡이고 있는 그는 마치 정말로 움직일 수 없어 분한 듯이 보였다. 새삼스럽지만, 내 어설픈 쓰러짐이 스스로 부끄러워질 만큼 실감 나는 연기력이었다.

곧 가까이 다가온 시종이 그의 손에서도 피를 뽑아냈다. 인간으로 변한 상태라곤 해도 드래곤의 피다. 그것도 자타공인 천재라고 알려진. 그의 피는 닿자마자 구슬 전체를 화사한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지금까지 일어난 변색 중에서 가장 뚜렷한 변화였다.

“오오오!”

구슬을 확인한 시종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공의 얼굴에도 감탄한 표정이 떠올랐다.

“놀랍군. 이렇게 선명한 붉은빛이라니. 작은 소녀가 장정들을 간단히 제압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예상은 했지만, 역시 마법사였나? 그것도 상당히 성취가 높은 마법사로군.”

만족스럽게 중얼거리는 얼굴에 기이한 열기가 들끓었다.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석을 발견해도 그만큼 기뻐하는 표정을 짓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는 특별히 라피스를 더 주의해서 옮길 것을 지시했다. 여기까지는 예상했던 그대로인지라 감흥이 일 것도 없었다. 문제는 나였다.

“어디, 그 동생은 얼마나 대단할지 궁금해지는걸?”

“…….”

내게 닿는 대공의 시선이 짙어졌다. 라피스와 자매라고 알고 있으니 당연히 내 피에 대한 기대감도 클 터였다. 낭패감이 짙어졌다. 멀찍이 실려 가는 라피스가 내게 시선을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남의 눈에는 동생을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난 그 의미를 정확히 알아들었다. ‘어쩔 거야?’ 눈으로 묻는 말에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나도 몰라!’

‘정말 어쩌지?’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이 감별법은 내게는 통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정령왕인 나는 마나 그 자체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무엇에도 감지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이 세계를 구성하는 근원이니까.

라피스의 마나를 가져와 대체하지도 못한다. 계약 성립 조건에서, 정령왕이 계약자의 마나를 임의로 쓸 수 있는 건 소환과 형체를 구현할 때뿐이었다. 능력 발현 시에 자연적으로 소모되는 부분은 상관없지만 내가 내키는 대로 다룰 수는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피도 형체 구현에 들어가는 거라 라피스의 마나가 들어가긴 한다. 단지 워낙 소량에 불과해서 이 정도에는 구슬이 반응하지 않을 게 뻔했다. 예상대로 내 피가 닿은 구슬은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도 변색이 일어나지 않자 흥미롭게 지켜보던 대공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건 또 신기하군. 자매 쪽이 저렇게 농도 높은 마나를 지닌 마법사인데 동생은 재능이 전혀 없다는 건가?”

“어떻게 할까요?”

옆에 있던 시종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구슬에서 시선을 뗀 대공이 매우 아쉽다는 눈으로 내 모습을 훑었다. 대어를 놓친 낚시꾼 같은 표정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마비된 척하느라 말을 하지 못하는 게 천추의 한이었다. 목소리를 써도 되는 상황이기만 했어도 나도 데려가라고 부탁할 텐데!

남들은 기피하는 현장을 따라가지 못해 안달해야 하는 처지가 서글펐지만 이게 가장 무난한 잠입 방법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했고, 대공은 쓸데없는 부분에서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아쉽지만, 필요 없는 걸 굳이 가져갈 필요는 없지.”

“……!”

그가 매몰차게 내게서 발길을 돌렸다. 망연자실한 기분으로 지켜보는 동안, 그는 나머지 귀족들을 마저 검사해 나갔다. 그중에는 아스도 있었다. 마족인 아스의 피는 당연히 가뿐히 검사를 통과했다. 라피스 때만큼이나 짙은 붉은색이 드러났기에 대공이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이후 시종들에게 옮겨지면서 아스가 내게 아련한 눈길을 보내왔다. 그 시선이 내게 닿는 걸 보고 대공이 중얼거렸다.

“아아, 그러고 보니 저 소년도 동생이라고 했었지.”

“네, 그랬습니다.”

시종이 긍정하자 대공의 표정이 얼핏 흐려졌다. 이곳에 와서는 잘 느껴본 적이 없지만, 한때는 숱하게 받아왔던 시선이라 의미를 파악하는 것도 수월했다. 저건 동정의 시선이었다. 왠지 이어질 말도 알 것만 같았다.

“남매 중에서 혼자 재능이 없다니. 안됐군.”

“…….”

대공에게 동정을 받다니. 갈 데까지 갔구나, 엘.

오늘의 일을 잊지 않을 거야. 두고 봐. 점점 더 멀어지는 대공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복수심을 활활 불태웠다. 정령왕으로 태어난 이래 가장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 * *

마침내 감별의 시간이 끝났다. 회장에 있던 백여 명에 가까운 사람 중에서 거의 사십 명이 넘는 사람이 추려졌다. 처음부터 적임자만 모아두고 찾은 거라지만 실로 엄청난 숫자가 아닐 수 없었다. 최소 조건으로만 찾아도 한 번에 모으기 쉽지 않은 수일 텐데 심지어 질까지 겸비한 상등품(?)뿐이었다. 과연 대공이 이런 수고로운 연회를 벌여서까지 미친 짓을 감행할 만했다. 오히려 진작 저지르지 않고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게 용할 지경이었다.

일을 저지르는 데 전혀 망설임이 없는 걸 보면 아마 오래전부터 구상해 오던 계획이었겠지. 귀족들을 볼 때마다 탐하는 눈길을 숨기느라 고역이었을 거다.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몸을 바짝 낮추고 은밀하게 움직이며 준비한 때가 이르기만을 기다려 왔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기껏 기회를 엿보다 드디어 실행으로 옮긴 그 날이 하필이면 우리가 잠입한 날이라니. 그가 운이 없는 건지, 우리 쪽이 운이 좋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불행이 내겐 행운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새삼 재확인한 기분이었다. 여하튼 아직 제게 준비된 미래를 모르는 대공은 당장 수확한 결실을 흡족해하는 중이었다.

“동이 트려면 얼마나 남았지? 오늘 새벽은 매우 바빠지겠어. 눈치 빠른 놈들이 냄새를 맡을 수도 있으니 경비를 더 강화해라. 쥐새끼 하나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어떻게 할까요?”

시종의 질문에 대공의 시선이 회장에 남아 있는 사람을 훑었다. 처리를 고심해서가 아니라 그저 제게 보내는 간절한 눈길을 즐기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어차피 한동안은 움직이지도 못할 테지만. 부러 화근을 남길 필요야 없겠지.”

“그러시면…….”

“전부 죽여라. 아침까지는 아무도 이곳의 상황을 알지 못해야 한다.”

“명 받들겠습니다.”

“끄으윽! 커으으윽!”

차라리 의식이 없었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눈앞에서 떨어진 죽음의 선고에, 눈길로 애원하던 사람들이 절망에 찬 비명을 터트렸다. 바닥을 할퀴는 듯한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대공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어디론가 걸어가는 그의 뒤를 시종들이 종종걸음으로 따라나섰다. 뒤처리를 위해 남은 시종은 다섯 명이었다. 그들은 대공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쇳소리가 울리자 절박해진 사람들이 몸을 크게 꿈틀거렸다. 이미 체념의 눈빛을 한 이들도 있었다.

“여자들은 죽이기 좀 아깝네. 기막히게 예쁜 애들 많은데.”

“아서라. 그래 봤자 죽으면 썩는 건 다 똑같아. 흰소리 말고 시작하기나 해.”

“쳇, 나도 그냥 해 본 말이야. 아, 그래도 천천히 죽이는 건 되지? 어차피 아침까지 대기잖아.”

“너무 지저분하게 놀지만 마라. 치우기 귀찮으니까.”

“뭐야, 넌 단숨에 끝내려고?”

“누가 그렇대?”

“어차피 똑같으면서 의젓한 척은.”

한가롭게 농담을 주고받는 그들은 이 상황이 그저 놀이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살인에 대한 거부감은커녕 지금쯤 숨 막히는 공포를 느끼고 있을, 억울하게 죽어야 하는 사람들을 향한 마지막 예우조차도 없었다. 누가 그 나물에 그 밥이 아니랄까 봐. 미친 대공이 저랑 똑같이 미친놈들만 뽑아 둔 모양이었다.

“자아, 그럼 어디, 이놈부터 잘라 볼까?”

키득거리던 시종 하나가 곧 목표를 정했다. 그의 첫 희생자로 낙점된 건 짙푸른 제복을 걸친 남자였다. 집행자가 자신에게 다가서자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근처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비명을 못 듣는 게 좀 아쉽지만. 소리는 못 내도 신음은 터트릴 수 있지? 부디 최대한 날 즐겁게 해 달라고.”

미친 말을 아무렇지 않게 지껄인 시종이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예정대로라면 순식간에 내리쳐지고 사방에 붉은 피가 흩뿌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었다. 목표 지점에 닿기도 전에 이상 현상을 먼저 겪어야 했으므로.

“으악!”

시종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가 내지른 비명에 동시에 일을 진행하려던 다른 시종들도 덩달아 멈칫했다. 무심코 돌아본 얼굴들에 곧 당황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평생 구경하기 힘들 광경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으니까. 검을 쥔 동료의 손이 새하얀 성에에 뒤덮여 있는 광경을.

“뭐, 뭐야, 그건? 서리?”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나도 몰라! 갑자기 아프다 싶더니……!”

당황하며 답하던 시종이 다음 순간 눈을 부릅떴다. 성에의 얼음 결정이 팔을 타고 점점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도 경악해서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아파! 설마 지금 이거 몸으로 퍼지는 거야?”

“미, 미친! 검 때문인 거 같은데, 일단 그 검을 버려!”

“안 떨어져! 아예 눌어붙었다고!”

“제기랄, 기다려!”

그때 욕설을 내뱉은 시종 중 한 명이 빠르게 검을 내질렀다. 이윽고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얼어붙은 팔이 떨어져 나갔다. 성에가 더 옮겨가기 전에 아예 전염원인 팔을 잘라버린 것이다. 와자작! 몸에서 분리된 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는 한때 살과 피로 이뤄져 있던 물질이 낼 소리가 아니었다. 부서진 조각을 질린 눈으로 힐끗 본 시종이 자신이 구한 동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 됐……!”

과정만 봤을 땐 그의 반응속도는 무척 빨랐다. 순식간에 팔을 잘라 전염을 차단하려 한 행동 역시 칭찬받아 마땅했다. 단지 그가 몰랐던 게 있다면, 애초에 성에가 끼기 시작한 원인이 검에 있었던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그는 성에에 완전히 뒤덮인 동료를 목격해야 했다. 새하얗게 굳어 있는 몸에서 얼음 가루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

“…….”

주위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그때쯤에 나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갑자기 벌어진 기현상에 넋을 놓고 있던 이들이 내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숨을 삼켰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그들을 향해 나는 생긋 웃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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