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39화 (339/608)

제339화

“애석하게도 여전히 소식이 없더군요. 하지만 지금쯤이면 다 썩어서 뼈만 남았을 텐데 어디 찾을 수나 있겠습니까?”

“이런, 그것도 그렇군요. 발견되려면 진작 발견되었겠죠.”

“누군가 적당히 묻어준 걸지도 모릅니다. 황제의 친위대장으로 위명을 떨치던 자가 무덤도 없이 마지막을 맞이하다니, 어떤 의미에서는 애석하군요.”

누가 들어도 일부러 슈텔 영애를 자극하기 위한 내용이었다. 의도도 그렇지만 수법은 더 질이 나빴다. 더는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려는데 슈텔 영애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아니에요.”

“아니라니요?”

“화, 황제군 진영에서 세리크 백작님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러니 백작님은 돌아가시지 않으셨…….”

“영애, 지난 일이 교훈이 되지 못하신 것 같군요. 여기가 어딘지 잊으셨습니까? 그런 말은 안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아버님과 오라버니들의 노고를 무색하게 만들려고 하시는군요.”

기가 막히다는 듯 이어진 음성에 슈텔 영애의 어깨가 떨렸다. 겁을 먹은듯한 모습에 둘러싼 남자들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지만, 반대로 나는 심경이 복잡했다. 어느 정도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형태일 거라 짐작하고 있었는데, 이곳 귀족들이 대공의 야욕을 알고도 묵인한다는 게 노골적으로 느껴지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런 자들도 제 발은 저린다고, 황제군을 언급하자 표정이 변한다는 게 좀 우스웠다.

“그리고 원래 내란 중엔 별의별 소문들이 다 떠도는 법입니다. 그런 말을 일일이 담아 들으시면 어떡합니까? 이쯤에서 현실을 직시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건데, 괜한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세리크 백작은 틀림없이 죽었을 겁니다. 목격자가 있다면 그자가 잘못 본 거겠죠.”

“어째서…… 그렇게 단언하시는 거죠?”

“세리크 백작의 마지막 모습을 본 자가 그랬습니다. 마법사가 던진 파이어볼이 그의 몸 위에서 폭발했다고요. 그 정도면 이미 내장은 다 망가졌고, 심각한 화상 때문에 살 수가 없습니다. 반나절은 버텼나 모르겠군요.

“바, 바로 성수를 쓰면…….”

“성수가 전지전능한 줄 압니까? 그렇게 심한 상처는 성수로도 완벽하게는 못 고칩니다. 그런 걸 갖고 있지도 않았을 거구요. 고위 신관에게 보였다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산중에 어디서 고위 신관을 만났겠습니까?”

“하, 하지만…….”

“영애, 정말 답답하게 구시는군요. 왜 사실을 말해드리는데도 받아들이질 못하시는 겁니까? 왜요, 기적이 일어나서 세리크 백작이 벌떡 일어났을 것 같습니까? 갑자기 초월자가 나타나 치료라도 해 줬을 것 같아요? 그런 허무맹랑한 일이 현실에서 정말 일어날 것 같습니까?”

응, 맞아. 바로 그거야.

한마디 대꾸해 주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으며 나는 앞으로 나섰다. 이런 불쾌한 광경을 더 지켜보고 싶지도 않고, 슈텔 영애도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으니 이쯤에서 중재할 생각이었다. 씩씩거리던 자들이 내가 그녀를 보호하듯이 막아서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기, 이제 그만하시죠. 여럿이서 한 사람을 다그치고 있는 모습이 그리 보기 좋지 않네요.”

“아, 크흠흠. 실례했습니다, 영애.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군요. 하지만 상황을 들으시면 이해하실 겁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아뇨, 저한테 설명하실 필요는 없어요. 전 어차피 이 제국 사람도 아니고, 깊은 사정은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요. 그보다는 슈텔 영애의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아서 이만 쉬게 해 주고 싶네요.”

그러니까 이만 꺼져라. 시선으로 보낸 의미를 그들은 다행히 바로 이해한 것 같았다. 얼굴이 벌게진 상태로 물러서는 것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괜찮아요?”

아쉬운 시선이 와 닿는 걸 무시한 채, 슈텔 영애의 안색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창백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신히 참고 있지만 이미 눈시울이 잔뜩 붉어져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슈텔 영애에게 작은 소리로 말을 건넸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영애의 아버지는 대공을 지지하는 분인가요?”

“……아버님은 그저 제국을 수호하는 무인이실 뿐, 특별히 누군가를 지지하시는 분은 아니세요. 이번 출정은, 순전히 저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흠, 그래요. 그럼 빼내기는 쉽겠네요.”

“……네?”

물기를 머금은 눈이 의아한 감정을 담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전환했다.

“영애는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많이 힘들어 보여요.”

“아, 아니에요. 이제 막 온 참인데 그럴 수는…….”

“그러지 말고 그냥 내 말 들어요. 오늘 연회에는 영애 혼자서 온 거죠? 지금 저택에는 누가 있어요?”

“네? 아…… 어머님과 유모인 히센 부인과 고용인들이…….”

“그럼 고용인들은 돌려보낸 후에 바로 마차를 수배하는 게 좋겠어요. 어머님과 믿을 만한 사람 몇만 데리고 곧장 수도를 떠나세요. 짐은 최대한 단출하게, 가능하면 빠를수록 좋아요.”

“예?”

“지도 읽을 줄 알아요? 서쪽 입구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지온이라는 마을이 나올 거예요. 당분간 그곳에 있어요.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을 테니 염려하지는 말고요. 한 삼 일 정도? 길어도 일주일 안에는 도착할 거예요.”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그 마을 옆길로 황제군의 선발대가 올라오거든요.”

“……!”

당황하며 듣고 있던 슈텔 영애가 마지막 말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크게 떠진 보라색 눈동자에 기어이 눈물이 도르륵 맺혔다. 본인도 놀랐는지, 몹시 당황해하며 눈물을 닦아내는 그녀를 향해 나는 살짝 웃어 보였다.

“자초지종은 황제군을 만나서 설명하면 될 거예요. 혹시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엘이 보냈다고 말해요. 그럼 전부 해결될 테니까요.”

“여, 영애. 당신은 도대체…….”

“참고로 거기서 세리크 백작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다시금 숨을 크게 쉬는 소리가 울렸다. 진위를 파악하려는 시선이 나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당연히 내게는 그걸 피할 이유가 없었다. 경련하는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 바라본 채, 나는 조금 전부터 쭉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멋모르는 자들의 말에 상처받지 말아요. 가서 눈으로 직접 보고, 자신이 옳은 결정을 했다는 걸 확인해요.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는 것 같으니까요.”

* * *

마차에 오르는 동안에도 슈텔 영애는 계속 넋을 잃은 얼굴이었다. 아직 생각을 다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그녀를 태운 마차는 착실히 황성을 벗어나 어둠 속에 파묻혀 사라져 갔다. 이제 저택으로 돌아갈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알 수 없었다. 나를 믿고 내가 당부한 대로 따를지, 아니면 전부 무시하고 그냥 없었던 일로 할지. 어느 쪽이 되었든 내가 관여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미칼란 영애.”

배웅을 마친 후 회장으로 돌아간 내가 마주한 건 반갑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조금 전 슈텔 영애에게 노골적으로 시비 걸던 남자들이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그나마 위풍당당하던 처음에 비해, 지금은 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느꼈는지 한결 조심스러워진 태도였다.

“혼자 계십니까?”

“네, 이번엔 정말 혼자네요.”

빈정거리는 내용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는 대답에 말을 건 남자의 얼굴이 벌게졌다. 함께한 이들도 서둘러 헛기침을 했다.

“슈텔 영애는…….”

“영애라면 조금 전에 저택으로 돌아갔어요. 몸이 좋지 않은 것 같더라구요.”

이어진 질문엔 미리 생각해 둔 변명을 읊었다. 가장 무난하면서도 합리적인 사유라고 생각했는데 남자들의 판단은 달랐는지 표정이 얼핏 굳었다. 서로 돌아보는 표정에 곤혹스러움이 가득했다.

“하아, 슈텔 영애는 정말 생각이 부족한 분이군요.”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인가요?”

“오늘 연회는 대공 전하께서 반드시 참석하라고 명하신 겁니다. 오자마자 돌아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전하께서 진노하시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아프잖아요. 힘든데도 무리해서 버텼어야 한다는 건가요?”

“물론 그렇진 않습니다. 그래도 좀 더 현명한 방법이 있었을 겁니다. 휴게실에서 잠시 쉰다거나, 대공 전하께 양해를 구하고 간다거나……. 여하튼 이렇게 곧장 저택으로 돌아갈 필요까진 없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슈텔 가문은 조심해야 할 처지인데. 가문을 생각해서라도 영애가 이래선 안 되었습니다. 아무리 여인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어리석을 줄이야.”

“그 말은 좀 이상한데요. 여인은 대체로 어리석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 아니. 오해이십니다, 영애. 그런 뜻이 아니라…… 아무래도 여인은 정치에는 다소 식견이 부족하긴 하니까요. 슈텔 영애가 돌아가는 정세를 읽을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조심했을 거라는 뜻이었습니다. 하하.”

말실수를 무마하기 위해 남자들이 급히 웃었다. 적당히 넘어가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대놓고 모욕을 준 걸로도 모자라 그녀의 성별까지 비하의 근거로 삼으려는 심보가 기분 나빴다.

“그래요? 처음부터 끝까지 별로 동의할 수 없는 내용밖에 없네요. 여인이 정치에 식견이 부족하다고 누가 그래요? 제가 보기엔 슈텔 영애만큼 정세를 잘 읽고 있는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요.”

“예?”

“아직 이 제국의 황제는 대공이 아니잖아요. 진짜 황제가 돌아오면 슈텔 영애의 용기도 재평가되지 않겠어요?”

어리둥절해하던 남자들이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무섭게 굳혔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노려보다시피 강렬한 눈길이 협박하듯이 와 닿았지만 별로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추파를 섞은 느끼한 시선보다야 이쪽이 백배는 더 편했다.

“영애, 그 발언은 도가 지나치시군요.”

“아무리 외국인이라지만 말씀을 가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말투로 그들이 나직하게 경고했다. 마치 사과할 기회를 주겠다는 듯 선심 쓰는 듯한 태도라 나는 피식 웃었다. 태연한 대응에 그들의 낯빛이 다시 변했다.

“아, 미안해요.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외국인이라서요. 상황이 너무 객관적으로 보이는 바람에 본심을 숨기지 못했네요.”

“무슨 말을……!”

“이런, 또 실례되는 말을 했나 봐요. 조금 신기해서 그런 거니 이해하세요. 우리나라에서는 왕을 내쫓고 하루아침에 그 자리를 찬탈한 반역자를 순순히 따른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개념이다 보니. 제국의 귀족이라는 것도 별거 아니네요.”

“여, 영애!”

분노한 목소리가 한껏 높아지려 했다. 하지만 내가 그들을 응시하는 게 더 빨랐다. 눈이 마주치자 그들은 숨을 크게 삼키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꿀꺽, 그들 중 누군가에게서 마른침이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겁을 먹은 듯, 긴장한 눈동자들을 보고 있으려니 짜증이 자꾸 치밀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이미 입꼬리는 비쭉하게 올라가 있었다.

“싫은 소리 하기는 좋고, 듣는 건 거북하신가 봐요. 그게 아니면 본인들에게 불리한 상황은 상상하고 싶지 않은 건가? 하긴 오죽하겠어요. 지금 모습을 보니 황제가 돌아오는 게 그리 반갑지만은 않으실 것 같네요.”

“오, 오해가 있습니다, 영애.”

“……이건 우리도 어쩔 수 없는…….”

“정말요? 딱히 그렇게는 보이는데요.”

웃으며 대꾸했더니 힘겹게 변명하려던 자들이 그대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비겁함을 숨기지도 못하는 이들을 보려니 가슴속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

“침묵은 결국 묵인과 다를 바 없다는 거 알아요? 하다못해 남에게까지 강요한다면 그건 이미 동조나 다름없죠.”

“…….”

“두려움에 굴복할 순 있어요. 모르는 척 외면할 수도 있구요. 그럼 그냥 얌전히 있기라도 해요. 용기를 내는 사람까지 꺾고 짓밟아서, 자신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하지 말고.”

파랗게 질려 있던 얼굴이 탈색된 것처럼 희어졌다. 위압감을 드러내어 압박을 가하는 상태니 실제로 숨을 쉬기가 버겁기도 할 것이다. 아마 자신들도 제 반응을 이해할 수가 없겠지. 이대로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눈물 콧물부터 시작해서 온몸에서 물이란 물은 줄줄 흘리게 될 거다.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나는 잔인해지려는 충동을 애써 억눌러 참았다. 여기서 소란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자각보다는 멀찍이서 라피스가 눈짓하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엄격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눈빛이 딱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일이 어떻게 돌아가든 신경 쓸 성격이 아닌데, 지금 이 상황은 그가 구상한 계획과 어긋나는 모양이다. ……이놈들을 밖으로 유인한 후에 저지를걸. 뒤늦은 자책이 덮쳤으나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나는 아쉬움에 혀를 찬 다음 남자들에게 가했던 압력을 풀었다. 막혔던 숨이 트이자 헉헉거리던 남자들이 곧 두려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정황을 파악한 것 같지는 않고, 그저 본능적으로 내가 뭔가를 했다는 것만은 안 것 같았다.

“별로 즐겁지 않은 대화였어요. 이제 다시는 말 걸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부드럽게 건넨 경고를 이해했는지 그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흩어졌다. 상황이 종료되자 힐끔거리던 시선들도 자연스럽게 분산됐다. 그때쯤 라피스가 대화하던 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게 다가왔다. 표정은 온화한데 시선은 활활 불타고 있다. 뜨끔해져서 고개를 돌렸더니 그가 얼굴을 더 바짝 들이밀었다.

“네가 잃어버린 자아를 찾다 못해 가끔 충동적이 된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바지만 말이야. 가능하면 돌발 상황은 만들지 말지? 왜 저런 허접스러운 놈들을 상대로 힘을 빼고 있어?”

“저놈들이 먼저 날 화나게 했어.”

“화낼 게 참 많기도 하다. 그 약해빠져 보이는 여자를 여기서 내보내는 거로 해결했잖아.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나 보지?”

“……봤어?”

“봤으니까 이런 말을 하지 않겠냐?”

그건 또 언제 본 거람? 본인 일에 집중하는 줄 알았더니 그 와중에도 이쪽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주도면밀하다고 감탄해야 할지, 음침한 놈이라며 혀를 내둘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머쓱해서 우물거리고 있는 내게 라피스가 힐난의 시선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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