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38화 (338/608)

제338화

“그건 이미 알고 있거든요.”

“네? 어떻게 아셨습니까?”

“당연히 알죠. 그 사람을 감시하라고 데르온을 보낸 거잖아요.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건 곧 그 사람도 여기에 있다는 뜻이죠. 그거 말고 달리 무슨 해석이 있겠어요?”

“아, 그렇네요.”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그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분명 이런 마족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동안 겪었던 일들이 워낙 많다 보니 뭐가 그를 이렇게 만든 건지 모르겠다. 최근까지도 비교적 멀쩡하지 않았나? 내가 여장한 모습이 그렇게까지 충격적이었나?

“어쨌든 그 사람, 카리브디스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어요?”

“모르겠습니다.”

“…….”

선뜻 나온 답변이 너무나도 당당해서 처음엔 내가 잘못 들었는 줄 알았다. 황당한 심정으로 바라보자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그도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더 기척에 예민한 자더군요. 일정 거리 이상으로는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변장하고 본궁 안으로 숨어 들어가는 것까지만 확인했습니다.”

“흠. 그게 언제였어요?”

“해 질 무렵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거구요?”

“네.”

‘이건 좀 곤란한데.’

변장한 상태라면 나도 단숨에 찾아내기는 어렵다. 정령의 눈이란 것도 결국은 내가 지닌 정보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보니 내가 알지 못하는 형태는 정령들도 찾아내지 못했다. 혹시나 해서 황성 안을 대강 살폈으나 역시 짚이는 부분은 없었다. 특별히 수상한 기척을 발견하지도 못하는 걸 보면 그의 분장이 꽤 정교한 듯했다.

“일단 알았어요. 수고롭겠지만 데르온은 계속 그를 찾아봐 줘요. 발견하면 연락 주고요.”

“알겠습니다. 일은 어떻게 되어 가는 중입니까? 대공이 계획대로 나와 줄 것 같습니까? 구색 맞추기용 연회치고는 꽤 본격적으로 열린 것 같던데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저도 그게 좀 마음에 걸리기는 하는데…… 속셈은 확실히 품고 있는 것 같았어요. 우선 판을 깔아두긴 했으니 좀 더 지켜봐야죠.”

“그렇습니까. 조심하십시오. 뭐, 쓸데없는 염려로 들리시겠지만.”

“아니에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빙긋 웃었더니 데르온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갑자기 표정이 변하는 그가 이상해서 어리둥절한 눈길을 보냈더니 그가 몹시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외람되지만, 그렇게 치장하고 계실 땐 웃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네?”

“미리 대비하고 있었는데도 파급력이 상당히 크네요. 저도 모르게 설렐 뻔했습니다. 미혹의 주술이나 마력 없이도 사람을 홀릴 수 있다니, 엘 님 진짜 무서운 분이셨네요.”

“…….”

어쩌면 나는 이 마족과 잘 안 맞는 게 아닐까.

지금까지 한 번도 고심해 보지 않았던 부분이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짙은 회의감이 들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매우 때늦은 자각이었다.

* * *

데르온과 헤어지고 연회장으로 돌아갔을 땐 이미 몇 년은 지난 것처럼 지쳐 있었다. 라피스와 아스는 여전히 수많은 무리에 둘러 싸여 있는 상태라서 차마 다시 그 속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원하지 않아도 이대로 어정쩡하게 서 있으면 금방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억지로 끌려 들어갈 게 뻔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적당히 피해 있을 만한 곳이 없나 싶어 주위를 둘러볼 때였다.

“세상에, 저길 봐요. 슈텔 영애예요.”

근처에서 작은 술렁거림이 느껴지더니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막 연회장에 도착한 여인을 향한 반응이었다. 부채처럼 넓게 펼쳐진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옅은 보라색의 머리칼에 그보다 짙은 포도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아직 앳되었지만 쉽게 호감을 살 수 있을 만한 미인이기도 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껄끄러움에 더 가까웠다.

“슈텔 영애는 근신 중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슈텔 가에도 초대장이 갔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말로 왔군요.”

“수도에 거처를 둔 귀족 자제는 반드시 참석하라는 엄명이 있었잖아요. 감히 무시할 수 없었겠죠.”

“그래도 오지 않는 게 좋지 않았을까요. 그쪽에 초대장이 간 건 실수였을지도 모르잖아요. 대공 전하께서도 그녀의 참석을 기뻐하시진 않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그러게 말이에요.”

가볍게 오가는 대화만 들어도 소문이 그리 좋지 않은 사람인 것 같았다. 자신을 향해 수군거리는 분위기를 느꼈을 텐데도 슈텔 영애라 불린 여인은 그리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예 아무도 보지 않은 것처럼 회장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고, 사람들도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쟁반을 들고 다니던 시종 중 하나가 술잔을 건네준 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그걸 받자마자 거의 단숨에 마셨다. 표정은 담담했지만 이 상황이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닌 듯했다.

‘그건 그렇고, 연회에 반드시 참가하라는 명령이 있었구나.’

어쩐지, 갑자기 열린 연회인데도 사람이 많았던 이유가 있었다. 체면치레를 위해선지 과시용인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자리를 채우고 싶었던 대공이 강경수를 뒀던 모양이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황제의 군대가 거의 코앞까지 진격한 이 시국에 맘 편히 연회에 참여할 자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싶었다.

“슈텔 영애도 참 심란하겠어요. 그녀의 잘못을 덮으려고 부친과 오라비들이 전부 자진해서 출정했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연회에 참석해야 한다니.”

“그거야 어디 슈텔 영애뿐인가요. 다리켈 가의 영애도 가문의 남자들이 전부 출정했는걸요.”

“사실 수도에 있는 귀족 남성은 거의 다 출정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죠. 남아 있는 영식들은 아직 나이가 어리거나 몸이 약해서 결격사유가 있는 자들뿐이에요.”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주위를 차분히 둘러봤다. 젊은 사람 위주로 모였다고는 생각했지만 이제 다시 보니 남성들의 얼굴이 유독 앳된 편이었다. 키가 커서 성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 세계의 인간이 기본 골격이 크다는 점을 생각하면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나이가 어리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도 슈텔 가문은 선봉이잖아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위험할 거예요.”

“그거야 어쩔 수 없는 거죠. 슈텔 영애가 정말 큰 실수를 하긴 했어요.”

“맞아요. 오히려 그 정도로 끝나길 천만다행이죠. 세리크 가문에 전언을 보내 전부 도주시키다니. 슈텔 남작님이 발 빠르게 수습하지 않았다면 모두 화를 면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그대로 멸문당했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냥 그런가 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려던 나를 멈추게 한 건 다음으로 이어진 대화였다. 내용 자체도 심각했지만, 수군거림 속에서 얼핏 언급된 가문의 이름이 몹시 귀에 익었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세리크, 세리크. 이 이름을 어디서 들었더라……아! 케이 드 세리크!’

깨달음은 불현듯 찾아왔다. 이사나의 친위대, 그 대장인 케이의 성이 바로 세리크였다. 황제의 가장 든든한 아군이지만, 지금 그는 수도에서는 거의 반역자 취급을 당하는 인물일 터였다. 그런데도 슈텔 영애라는 사람이 케이의 식솔들을 도왔다고? 생각지 못한 정보에 놀란 탓에 시선이 거의 반사적으로 그녀가 있는 쪽을 향했다. 주변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하게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이 갑자기 달리 보였다. 그 순간에도 수다 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이왕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그날 일은 정말 대단하긴 했어요. 친위대 대부분이 홀로 입경해서 기사단 숙소에서 생활하는 상황이었다지만 세리크 백작은 그렇지 않았잖아요. 수도에 저택도 있고, 누이와 조카를 비롯해 딸린 식솔들도 있었죠. ‘그 일’이 벌어졌을 때 세리크 백작은 빠르게 도주했지만, 식솔들까지 챙길 틈은 없었어요. 그걸 알기에 대공 전하도 곧장 그들 일가의 체포부터 명하셨고요. 그런데 병사들이 저택에 갔을 땐 이미 텅 비어 있었다잖아요. 설마 그게 슈텔 영애의 작품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건 지금도 생각할 때마다 놀랍긴 해요. 뭐, 슈텔 영애가 세리크 백작님을 오랫동안 짝사랑하긴 했었죠. 그래도 설마 그런 위험까지 감수할 줄은 몰랐어요.”

“바보 같은 일이에요. 어차피 그렇게 해 봤자 세리크 백작은 알아주지도 않을 텐데. 백작이 지금까지 살아 있기나 하겠어요? 이미 수배령이 거둬진 시점에서 죽었을 거라는 말이 파다하던데요.”

“아직 시신이 발견되진 않았다지만 사실 살아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긴 하죠. 마지막엔 크게 다쳤다고 하던데.”

“맞아요. 치명상이었다고 들었어요.”

“…….”

가슴 속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니 수도에서 이사나를 지지하던 가문과 그 식솔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따로 알아본 적은 없었다. 친위대만 해도 가족이 있었을 텐데. 하다못해 몸종이라든가 거두고 있던 식솔이 있었을 거다. 그들 대부분 위협을 받았을 거고, 화를 면했다 해도 모질고 험난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만은 분명했다. 이사나와 친위대도 그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겠지.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한 번도 그 부분을 내색한 적이 없었다. 정말 많이 힘들었을 텐데, 그 고통을 남몰래 끌어안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쓰렸다.

정신을 차렸을 땐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슈텔 영애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자 주위에서 수군거림이 더 커졌다. 인기척을 느낀 영애가 의아한 듯이 돌아보았다가 나를 발견하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녕하세요. 혼자 무료해 보이시는데, 제가 여기 있어도 될까요?”

불쑥 건넨 말에 슈텔 영애는 당황한 얼굴을 하다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이 역력한 기색에 안심하라는 뜻으로 나는 좀 더 환하게 웃어 보였다.

“만나서 반가워요. 엘…… 엘라 미칼란이에요.”

“슈텔 가문의 아니카입니다. 처음 뵙는 분인 것 같네요.”

“네, 그럴 거예요. 전 외국에서 왔거든요.”

“아,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 외국에서 온 귀족분들이시라 들었는데…….”

“그중 한 명이 저인 것 같네요. 전 사실 그냥 따라오기만 한 거지만요.”

장난스럽게 답한 말에 굳어 있던 슈텔 영애에게서도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만에 받는 호의에 대한 기쁨과 쑥스러움이 고스란히 드러난 얼굴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천천히 살폈다. 원래 여자는 남자보다 체형이 작지만, 그런 점을 고려해도 슈텔 영애는 유독 체구가 작고 가는 편에 속했다. 청순하고 단아한 분위기를 가진, 한눈에도 정말로 약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런 몸으로 목숨을 걸고 케이를 도운 건가.

귀족이라 해서 살아남을 거란 보장은 없었을 거다.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들까지, 가문의 모든 이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많이 두렵고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그 공포를 이겨내고 신념을 고수한 그녀가 정말로 대단해 보였고, 또 고마웠다. 재물과 명예는 회복할 수 있어도 떠난 사람은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건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날 식솔들이 전부 대공에게 끌려갔다면 케이는 분명 일평생 괴로워했겠지. 그런 결말을 막아 준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들이 이곳에 이르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의 공헌이 숨어 있을까.

그 새벽, 이사나가 나를 소환했을 때만 해도 이미 수많은 친위대가 목숨을 잃은 뒤였다. 그 과정에서 죽은 사람이 비단 그들만은 아니었을 거다. 지난 시간 겪어왔을 처절한 시간이 새삼 눈앞에 선명히 그려지는 듯했다.

“저어……?”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었더니 슈텔 영애가 불안한 표정으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던 모양이다. 나는 얼른 우울한 생각을 털어내고 다시 웃어 보였다.

“아, 미안해요. 잠시 다른 생각을 했어요.”

“그러셨군요. 괜찮습니다.”

따라 웃는 얼굴에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다른 사람의 반응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모습이 눈에 밟혔다. 대공이 장악한 황성에서 대놓고 이사나 쪽을 도왔으니 당연히 좋지 않은 평을 받았을 거다. 근신 중이 아니라도 연회에 오긴 어려웠을 텐데, 강제로 참석해야 했다니. 오늘 정말 많은 용기를 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녀의 용기에 보답을 주고 싶었다.

“저기요. 할 말이 있는데…….”

“미칼란 영애, 모습이 보이지 않으신다 했더니 이곳에 계셨군요.”

그러나 조심스럽게 운을 떼는 순간, 방해하는 목소리가 먼저 이어졌다. 얼굴을 찌푸리고 돌아본 곳엔 세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라피스와 있을 때 말을 걸어왔던 무리에서 얼핏 봤던 이들이었다.

“영애를 찾아다녔습니다. 이런 곳에서 뭐하고 계십니까? 혼자서 쓸쓸하지 않으십니까?”

“네?”

“오늘 연회의 주인공 중 한 분이신데, 혼자 계시다니 안 될 말씀이십니다. 저희와 함께 가시죠.”

“…….”

혼자라니. 바로 옆에 버젓이 있는 슈텔 영애는 아예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발언이었다. 슈텔 영애의 낯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나는 일단 부드러운 어조로 답했다.

“시력이 별로 좋지 않으신 거 아닌가요? 전 지금 혼자 있지 않은데요.”

“예? 아, 이런. 실례했습니다. 이게 누구십니까? 슈텔 영애도 계셨네요.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제야 겨우 발견했다는 듯, 남자들이 능청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그렇지 않아도 창백하던 슈텔 영애의 얼굴이 더 파래지는 것 같았다.

“……오랜만입니다.”

“네, 설마 황성에서 다시 슈텔 영애를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슈텔 가에도 초대장이 갔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정말로 오셨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뭐, 하지만 잘하셨습니다. 이런 자리에서라도 잘해서 대공 전하의 마음을 풀어드리셔야죠.”

“저도 그 말에 동감합니다. 가문의 남자들이 모두 하나뿐인 딸과 여동생을 위해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영애만 편하게 계시면 되겠습니까?”

“노……력하겠습니다.”

어투만 정중했지 내뱉는 말마다 비수가 따로 없었다. 나는 급히 슈텔 영애의 안색을 살폈다. 침착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긴 했지만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손이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적당히 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였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세리크 백작의 시신을 찾았답니까?”

“……!”

내 얼굴이 굳어지는 것과 동시에 슈텔 영애의 숨이 멈췄다.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드는 것을 본 남자들의 얼굴에 야비한 미소가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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