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7화
그렇게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 어딘가에서 걸어 나온 시종 한 명이 대공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보고사항에 대한 언급이 들어가는 걸로 봐선 업무에 관계된 일인 것 같았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대공이 회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난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군. 다들 편하게 연회를 즐기도록.”
그가 떠나고 나자 멈췄던 음악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자리에 서 있던 이들도 이내 흩어지면서, 회장은 곧 처음과 같이 어수선한 분위기로 돌아갔다. 다행히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거나 접근하는 이들은 없었다. 오늘 연회의 주인공인 데다가 외국에서 온 귀족(이란 설정)이니 접근해 오는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아직까진 서로 눈치만 보는 분위기였다. 그 틈을 타 우리 역시 구석진 곳으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이동했다. 그러고 나서야 굳어 있던 몸에서 힘이 풀렸다.
“으아, 긴장했다.”
“긴장할 것도 많네.”
“그치만 귀족의 문화는 하나도 모른단 말이야. 연습도 없이 바로 실전에 돌입했는데 당연히 긴장하지.”
“난 긴장 안 했는데?”
“맞아. 넌 진짜 말 잘하더라. 가명도 즉석에서 막 지어내고.”
“이게 바로 천 배가 넘는 경력에서 우러나오는 노련미라는 거지.”
누가 도마뱀 아니랄까 봐 뒤끝이 참 길기도 하다. 끝까지 천 배에 집착하는 그를 상대하고 있으려니 절로 혀가 차였다. 그래도 이번엔 솔직히 인정하긴 해야 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정말 곤란했을 테니까. 행여 실수해도 어떻게든 무마할 수는 있었겠지만 대공에게 조금이라도 의심의 빌미를 주고 싶진 않았다. 신중에 신중을 더해도 부족한 상황인데 어설픈 실수로 발목을 잡혔다면 꼴이 참 우스워졌을 거다.
물론 지금도 연회가 한창인 만큼 안심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사방에서 쏟아지는 눈길에 피부가 따가울 정도였다. 전시품도 아닌데 구경거리가 된 기분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돌아볼 때마다 황급히 시선이 흩어지는 건 좀 재밌었다. 다가오려다가 급히 동작을 멈추는 사람도 꽤 많았다.
“꼭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는 기분이야.”
“그게 뭔데?”
“그런 게 있어.”
“넌 가끔 영문 모를 소리를 하더라.”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린 후, 라피스가 들고 있던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야금야금 비우기 시작한 잔이 어느새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옆에서 아스도 비슷한 속도로 잔을 비우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나는 힐끔 시선을 내렸다. 내가 들고 있는 잔은 처음 받았던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술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채였다.
“그거 안 마실 거면 나 줘.”
내가 잔을 들여다보고 있는 게 마실지 말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라피스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사양하지 않고 그에게 술잔을 넘겼다.
“둘 다 잘 마시네. 난 이거 맛이 좀 묘한 것 같아서 별로던데. 와인은 아닌 것 같은데 뭐지?”
“과실주야. 베릴이라고 하는 과일로 만드는 거지. 값비싼 술인데 향이 특이해서 취향을 좀 타. 너한텐 안 맞나 보네.”
“흐음, 난 이런 것보다 트로웰이 만들어준 술이 훨씬 맛있었어.”
“……미친. 야, 그런 당연한 말은 하는 게 아냐. 비교할 게 없어서 어디다 비교를 해?”
“그, 그런 거야?”
“말이라고 해? 트로웰의 특제주는 신주야. 미각이 없어도 극상의 맛을 느끼게 하는 영수(靈水)라고. 신들조차 구하지 못해 안달인 건데 베릴주 따위와 감히 비교가 가당키나 하냐? 그보다 그 녀석이 너한테 술을 줬어? 젠장, 내가 달라고 할 땐 꺼지라더니.”
“대부한테 그 녀석이 뭐냐. 그러니까 안 주지.”
“시끄러워.”
단단히 서운했는지 그가 분한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아무래도 내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그의 마음에 오지 않아도 될 파란을 일으킨 모양이었다. 설마 때늦은 반항기라도 온 건 아니겠지. 지금도 이미 충분히 건방진 성격인데 저기서 더 악화하면 재앙이 따로 없을 거다. 그런 일은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으니 제발 참아줬으면 좋겠다. 그보다 부디 아스가 저런 걸 닮지는 말아야 할 텐데. 정서가 형성될 가장 중요한 시기이건만, 주위에 본을 보여야 할 어른이랍시고 있는 게 하필 저런 거(?)라서 근심이 컸다. 불안한 마음에 돌아봤더니 쿠키를 먹고 있던 아스가 눈을 맞춰오며 방긋 웃었다. 그 티 한 점 없이 맑은 미소를 보니 절로 안도감이 일었다.
“어쨌든 베릴주라……. 연회용 술로 이걸 풀었단 말이지. 오늘 주제에 잘 맞는 술이긴 하네. 뭐, 이게 비놀인지 아닌지는 이프리트가 와봐야 알겠지만.”
“어? 이프리트라니?”
“그냥 민담 같은 거야.”
“민담?”
되물은 말에 라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에 비놀이라는 마을이 있었어. 그곳 주민들은 불의 왕인 이프리트를 숭상했는데, 정작 그가 보낸 사도를 알아보지 못해서 무참히 죽여버렸지. 그 사실에 크게 분노한 이프리트는 마을을 통째로 녹여버려.”
“헐.”
“그 뒤 폐허가 된 땅은 저주받았다고 여겨져서 수년간 그대로 방치되지. 어느 날 길을 잃은 상인이 우연히 들어가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리고 상인은 거기서 보석 광맥을 발견해. 이프리트의 힘 때문에 그 땅 일대에 거대한 보석 광맥이 형성된 거야. 그래서 상인은 부자가 돼.”
“……그래서?”
“그렇다고.”
무슨 결론이 이래? 어이없어져서 바라봤으나 라피스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기만 할 뿐이었다. 나더러 영문 모를 소리를 한다더니, 대체 누가 할 말인지 모르겠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밌게 나누고 계십니까? 괜찮으시다면 저희도 참여하고 싶군요.”
그때 낯선 음성이 우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돌아본 곳엔 화려하게 차려입은 남녀의 무리가 상기된 얼굴로 서 있었다. 왠지 눈에 익다 싶더니 내가 돌아볼 때마다 유독 자주 멈칫거렸던 무리였다. 라피스와 대화하느라 신경 쓰지 않는 동안 저들 쪽에서는 말을 걸 결심을 굳힌 모양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미올란 백작가의 차남 라크입니다.”
“전 라본 후작가의 삼녀인 이디프예요.”
“저는…….”
한 사람을 시작으로 경쟁하듯 자기소개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곳에 있던 무리도 우르르 참여하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주로 우리 쪽에, 여자들은 아스에게 몰려드는 분위기였다. 이건 곧 자연스럽게 두 개의 파를 형성하는 쪽으로 이어졌다. 물론 이 과정에 우리의 의견이 반영될 틈은 없었다. 인파가 파도처럼 밀려들더니 순식간에 휩쓸리듯이 아스가 그 속에 파묻혀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나와 라피스만 한 무리의 남자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였다. 아연한 심정으로 아스가 있는 쪽을 살폈지만 온통 여자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드레스는 부피가 크다 보니 그 틈에서는 그림자조차 찾기도 힘들었다.
“저기…….”
“네, 영애. 말씀하십시오.”
“……아뇨, 아무것도.”
기대감을 잔뜩 드러낸 얼굴을 보니 오히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걸 수줍어하는 거라 생각했는지 남자들의 표정이 더 흐뭇해졌다.
“이런 시기에 갑자기 연회가 열린다 해서 당황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영애들을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오지 않았다면 정말 크게 후회할 뻔했습니다.”
“알바토 왕국에서 오셨다구요. 제 가문의 가신 중 한 명이 그곳 출신입니다. 아주 아름다운 나라라고 들었습니다.”
“저도 학기 중에 같은 방을 썼던 친구가 알바토 왕국 출신이었죠. 꼭 한번 가 보고 싶은 나라였습니다.”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도 않는데 쉬지 않고 말이 이어졌다. 알바토 왕국을 거듭 거론하는 태도에서 어떻게든 공통 화제를 끌어내 보겠다는 집요한 의지가 느껴졌다. 정작 알바토 왕국에서 살아보기는커녕 그 존재조차 오늘 처음 알게 된 나로선 낭패감이 들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적당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동안, 라피스는 그저 말없이 술잔을 들기만 했다. 투명한 잔 속에 들어 있던 짙은 붉은색의 액체가 그의 입 안으로 삼켜지는 광경이 매우 느린 속도로 이어졌다. 그러자 한창 일방적으로 떠들어대던 남자들이 점차 입을 다물었다. 다들 어딘지 홀린 듯한 표정으로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라피스가 잔을 떼고 나른하게 웃었을 땐 사방에서 헛숨이 터져 나왔다.
“이런, 벌써 다 마셔버렸네.”
아쉬운 듯 중얼거리는 말에 멍하니 있던 남자들의 눈빛이 돌연 형형해졌다. 모두가 그에게 집중하고 있는 가운데, 라피스가 빈 술잔을 들어 보였다.
“이거 정말 맛있네요. 더 마시고 싶은데, 혹시 제게 가져다주실 분?”
그리고 이어진 건 광란의 현장이었다.
“제, 제가……!”
“아뇨, 제가 가겠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접니다! 제가 가져올 겁니다!”
“기다려 주시지요! 이건 제가!”
몰려 있던 자들이 우르르 흩어졌다. 쟁반을 들고 있는 시종을 향해 서로 손을 내뻗으며 달려가는 모습이 흡사 좀비 떼가 따로 없었다.
“…….”
평생 겪을 별꼴을 한꺼번에 몰아 당한 기분이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 내 표정이 왕창 썩어 있을 거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너 미쳤냐는 시선을 보내려니 라피스는 이미 미소를 지우고 다시 시큰둥한 얼굴로 돌아온 상태였다. “너무 쉽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인간 애송이들 다루는 거야 일도 아니긴 하지만.” 중얼거리는 얼굴에서 오랜 권태마저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대체 이 녀석은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온 건지 모르겠다. 떨떠름하게 쳐다보고 있자 그가 날 향해 휘휘 손을 내저었다.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저거한테나 가 봐.”
“저거?”
“저거.”
그가 지시한 대상이 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연회장 발코니 너머 정원 쪽에 한 사람이 서성거리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후드와 망토로 외모를 최대한 가리고 있었으나 내 눈까지 속일 순 없었다. 데르온이었다.
‘그가 여기에 있다는 건…….’
정신없던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고개를 들었더니 라피스가 얼른 가라는 시선을 보냈다. 마침 양손에 술잔을 움켜쥔 남자들이 하나둘씩 돌아올 기미를 보이는 중이었다. 슬그머니 사라지려면 지금이 적기이긴 했다.
“혼자 괜찮겠어?”
“네 걱정이나 하시지. 어차피 넌 여기 있어 봤자 그냥 뻣뻣하게 굳어 있기만 할 거 아냐. 오히려 방해돼.”
“……대체 무슨 꿍꿍이야?”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라피스가 저들을 상대하는 걸 기꺼워할 리가 없었다. 평소라면 혼자 하기 싫어서, 혹은 날 골탕 먹이기 위해서라도 오히려 거머리처럼 내게 들러붙었을 거다. 이런 식으로 날 따로 내보낼 게 아니라. 실제로 그는 무척이나 귀찮아하는 표정이었다.
“그냥.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어.”
“무슨 확인?”
“별건 아냐. 어차피 곧 결과가 나오는 거긴 한데,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자니 적성에 안 맞아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가 그렇다고 하니 별수 없었다. 아마도 조금 전에 언급했던 이해할 수 없던 민담과 연결된 내용인 건지도 몰랐다. 그가 다시 손을 휘휘 내저었고, 이번엔 나도 망설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이 자리에 있는 게 곤욕이었는데 떠날 기회를 준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마침 날 주시하는 시선도 없는 데다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틈을 타 빠르게 이동한 다음 발코니를 통해 냉큼 정원으로 내려섰다. 정확히는 데르온이 숨어 있는 곳으로.
“데르온.”
“……!”
몸을 낮춘 채 연회장을 살피고 있던 데르온은 내가 갑자기 튀어나오자 깜짝 놀란 것 같았다. 그대로 달아나려는 걸 보고 작은 소리로 불렀더니 그가 움찔해서 돌아보았다. 그러나 반가워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그에게선 오히려 경계의 기색이 더 짙어졌다. 후드 때문에 시선이 느껴지진 않았지만 싸늘한 한기와 더불어 희미한 살기마저 느껴졌다. 뜻밖의 적개심에 당황하고 있으려니 더 황당한 질문이 이어졌다.
“너 뭐지?”
“네?”
“날 어떻게 아는 거냐.”
뭐야, 설마 날 못 알아보는 거야? 돌아가는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했으나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모습을 가리고 있는 건 정작 그인데, 아예 대놓고 드러내고 있는 내가 이런 질문을 받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이름에 반응한 걸 보면 데르온 본인인 건 분명하고, 딱히 머리라든가 눈을 다친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 못 알아볼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는 말인데…….
“저기, 나예요, 데르온.”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
불쾌한 기색으로 답하던 그가 곧 천천히 말끝을 흐렸다. 드디어 내 모습이 낯익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한참 동안 뚫어지게 응시하는 걸 인내심 있게 기다렸더니 그가 곧 쓰고 있던 후드를 서둘러 걷어 올렸다. 드러난 얼굴은 드물게 얼이 빠져 있었다.
“어…… 엘 님?”
“이제 알아봤어요?”
허탈해져서 웃었더니 데르온의 눈이 더 크게 부릅떠졌다. 경악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던 그가 곧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런 꼴을 하고 계십니까?”
이런 꼴이라 미안하게 됐네요!
젠장, 역시 여장 때문에 못 알아본 거였나. 그렇지 않아도 타격이 큰 부분을 대놓고 저격당하니 충격이 더 컸다. 이왕이면 모르는 척해 주면 좋고, 가능하면 아예 관심을 두지 않길 바랐는데, 아무래도 내가 너무 큰 걸 기대한 모양이다. 남을 신경 쓰지 않는 그의 무신경한 성격에 도움도 참 많이 받았지만 이번만큼은 속이 쓰렸다. 심지어 그는 상처를 헤집다 못해 소금까지 야무지게 뿌려댔다.
“아니, 뭐 안 어울린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되레 너무 잘 어울려서 문제지.”
“아, 그래요.”
“네, 위화감이 너무 없어서 그냥 여성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화장까지 하니 더 감쪽같네요. 그러고 계시면 남성체로 볼 사람이 아무도 없겠는걸요.”
“……알겠으니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주지 않을래요.”
“하지만 진짜 해야 할 말은 아직 안 했는데요.”
“진짜 해야 할 말이요?”
“임무 보고란 표현이 더 걸맞겠군요. 그자가 이곳에 와 있습니다. 카리브디스라는 녀석 말입니다.”
이어진 음성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화제를 바꾼 건 기특한데, 논점이 어긋났다는 건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덩달아 심각해진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