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35화 (335/608)

제335화

“자, 잠깐 기다려!”

그때까지 멍하니 대화를 듣고 있던 시벨리우스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달려드는 것처럼 바짝 접근하는 그를 트로웰이 고요한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내게 할 말이라도 있어?”

“너 정말 기억 난 거야? 엘도, 나도 모두 기억하는 거야? 그런 거 맞지?”

“……글쎄, 그걸 네게 알려 줄 이유가 있을까.”

대답은 무심했으나 시벨리우스는 이미 제 생각을 확신했다. 무엇보다 응시하는 눈길이 완전히 달라진 상태였기에 몰라볼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가 오랜만에 보는 옛 종족에 대한 호기심뿐이었다면, 지금은 싸늘한 경계와 불만이 서려 있었다. 과거에 저를 보던 것과 똑같은 시선이었다.

자신의 기억이 불완전한 게 아니라는 것. 같은 과거를 공유한 자가 나타났다는 기쁨은 그의 세상을 한순간에 지옥에서 천국으로 변하게 했다. 그 상대가 세상에서 가장 밉살맞은 정령왕이라도 상관없을 만큼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엘을 만나서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설마 이상한 말을 하려는 건 아니지?”

“이상한 말이라니?”

“다른 ‘엘’을 기억해 냈잖아! 지금 엘은 가짜 취급하려는 거 아니냐고!”

“…….”

“그러지 마. 둘이 너무 많이 닮아서 당황스러운 건 이해해. 나도 그랬으니까. 네가 나와 같은 전철을 밟을까 봐 충고하는 거야. 어쩌면 말이지, 지금 엘은 그때 엘의 환생일지도 몰라.”

“……뭐?”

“네가 믿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어. 상식적으로는 말도 되지 않는 얘기니까. 하지만 정말이야. 물론 난 지금은 그게 아니라도 상관없어진 상태긴 해. 그래도 나처럼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후회라고?”

묵묵히 듣고 있던 트로웰이 가벼운 실소와 함께 그의 말을 끊어냈다. 어딘지 한심해 하는 눈빛이라 시벨리우스는 어깨를 움찔했다.

“미안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넌 그동안 머리가 좀 나빠졌나 봐.”

“……어?”

“환생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누가 누구를 닮아? 하하, ‘엘’과 그렇게 어울려 다녔으면서 고작 그런 결론을 내리다니, 기가 막힐 정도네. 하긴 그러니 ‘균열’에서 벗어났으면서도 네가 그런 상태인 거겠지만.”

“너…….”

“착각하지 마.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애초에 너와 난 처지가 전혀 달라. 물론 경험과 견문도 비교할 바 아니지.”

후회하는 게 있다면, 지금까지 이 기억을 잊고 있었다는 거다. 미리 알고 있었는데도 그렇게 속절없이 지워지는 걸 막지 못했다. 멍청할 정도로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틀어진 흐름을 당연시하며 지내왔다. 그래서 눈앞에 있는, 홀로 장막을 피해 간 행운아가 더 곱게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너였다면 처음부터 헷갈리지 않았어.”

“…….”

시벨리우스의 얼굴에서 천천히 핏기가 빠져나갔다.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동요를 여실히 드러낸 그를, 트로웰은 부드러운 미소로 바라보았다.

“안타깝게 됐어, 시벨리우스. 네가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지금 네가 얼마나 멍청한 말을 한 건지도 알 수 있었을 텐데.”

* * *

디데이의 날은 시작부터 난관을 맞이했다. 아무리 급하게 진행하는 일이라도 최소한의 준비 시간은 필요한 법. 대공이 직접 주관한다는 치하 연회는 늦은 밤에나 열릴 예정이었다. 사실 연회 초청을 받아들인 건 어디까지나 잠입이 주목적이었기에 몇 시에 열리든 그 자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안이한 판단이었는지, 당일이 되자마자 나는 바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가장 피하고 싶은 방식으로.

“계십니까?”

날이 밝기 무섭게 황성으로부터 사람들이 찾아왔다. 데리러 온다고는 했지만 당연히 느지막한 오후를 예상했던 나는 이른 아침부터 쳐들어오다시피 방문한 이들을 황당한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다짜고짜 건네주는 것을 받았을 땐 표정 관리도 되지 않았다.

“저어, 이게 뭐죠……?”

“전하께서 내리신 것입니다.”

본성의 시종장인지 뭔지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흐뭇한 얼굴로 답했다. 이 순간에도 그의 지휘하에 거대한 상자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었다. 슬쩍 들춰보는 것마다 화려한 옷과 장신구들이 가득했다.

“왜 이런 걸……?”

“오늘 연회의 주인공들께서 외국에서 오신 귀족분들이라 들었습니다. 제국의 연회에 어울리는 차림이 필요하실 것 같아, 전하께서 배려하셨습니다.”

정중하게 웃으며 답한 그가 천천히 내 옷차림을 훑어내렸다. “역시 여행 중이시라 복장이 단출하실 줄 알았습니다.” 덧붙이는 말에서 설마 그런 차림으로 오려고 했던 건 아니겠지? 라는 압박이 느껴졌다. 사실 그럴 생각이었던 나로선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사태였다.

“아…… 배려는 감사하지만요. 옷은 저희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었는데요.”

“그야 물론 준비하지 못하실 거라 생각했던 건 아닙니다. 그래도 모처럼 내리신 것이니 부디 사양하지 말아 주십시오.”

“아니, 하지만…….”

“치수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종류별로 넉넉하게 준비했으니까요. 마음에 드시는 것으로 편하게 고르시지요. 여기 있는 이들이 차림을 도울 겁니다.”

말투만 정중하지 기실 일방적인 통보나 마찬가지였다. 직후 기다렸다는 듯이 시녀들이 우르르 밀려 들어왔다. 자신들에게 전부 맡겨 달라며, 방긋방긋 웃는 얼굴들을 보고 있으려니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거절할 수도 없거니와, 거절한다 해도 오히려 예의에 어긋난다고 나올 게 뻔했다. 옷이야 까짓거 준다는 데 못 받을 거야 없지만 문제는 그 종류다. 착각이 아니라면, 얼핏 들춰본 상자마다 들어 있는 의상이 전부 드레스뿐이었다. 그렇다. ‘드레스’였다. 호기심을 드러낸 채 상자를 살피던 라피스와 아스도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챘는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기…… 남성복은……?”

“아아, 영식을 위한 옷도 당연히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 다 놓기에는 장소가 비좁은지라 다른 곳에 두었습니다. 죄송하지만 그쪽으로 이동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래요?”

“예,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자, 영식께선 이쪽으로 오시지요.”

이후의 상황은 순식간에 벌어져, 우르르 몰려나온 시녀들이 아스에게 달라붙더니 그를 데리고 썰물처럼 어디론가 빠져나갔다. 오직 아스 한 명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라피스와 함께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

“…….”

기묘한 침묵이 흐르는 공간에서 시종장이라는 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그…….”

“아니, 없어요.”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라피스가 먼저 재빨리 대꾸했다. 그리곤 곧바로 수긍하는 시종장을 향해 그만 물러나 있으라며 손을 휘젓기까지 했다. 시종장은 그 지시에 그대로 따랐고, 남은 시녀들은 능숙하게 치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종료된 상황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황당해서 쳐다봤더니 그가 세상에서 가장 얄미운 얼굴로 싱긋 웃었다.

“나, 드레스는 움직이기 불편해서 별로 안 좋아해. 이런 화려한 연회복은 두말할 것도 없지.”

“……그래서?”

“나만 입기 싫다고.”

“…….”

그렇게 말하는 그 손엔 어느새 드레스 하나가 들려 있었다. 금발에 파란 눈의 소녀가 된 이후로는 다소 청순하게 보이는 그에게 매우 잘 어울릴 것 같은 상아색의 드레스였다. “어머나, 아가씨. 안목이 정말 좋으시네요!” 가까이 다가온 시녀들이 호들갑스럽게 종알거리는 소리가 배경음처럼 이어졌다. 그 떠들썩한 현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는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 빌어먹을 도마뱀을 언젠가는 반드시 응징하고 말리라, 속으로 다짐에 다짐을 거듭한 채.

* * *

단순히 치장을 돕기만 하는 줄 알았던 준비 과정은 왠지 묘한 것투성이였다. 처음에는 준비해 온 물에 목욕하게 하더니(놀랍게도 황성에서부터 직접 목욕물을 공수해 왔다), 그다음으로는 정체 모를 차가운 차를 마시게 했다. 이후엔 씁쓸한 맛이 나는 나무 조각을 씹게 했고, 직후 커다란 나뭇가지에 물을 적셔 내 몸 여기저기를 툭툭 두드리기도 했다. 치장하는 과정에 대체 왜 이런 게 필요한가 싶었지만 이곳의 목욕 문화를 알지 못하니 그냥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엔 정체를 알 수 없는 투명한 액체를 뿌렸다. 처음엔 향수인가 싶었는데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이게 뭐죠?”

“성수입니다.”

“성수요? 그걸 왜…….”

“젊은 영애들이 즐기시는 방법입니다. 연회에서 불운이 생기는 걸 막아준다고 합니다.”

설명하는 시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귀족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미신이 있는 모양인데, 이 또한 그들의 삶을 알지 못하는 나로선 확인할 방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억지로 그런 거라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해도 찝찝한 기분이 지워지지 않았다. 정해진 순서가 있는 것처럼 진행하는 것이, 마치 차근차근 어떤 단계를 밟아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거 맞을걸.”

라피스 역시 나와 똑같은 과정을 거치는 중이었다. 시녀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그에게 슬쩍 감상을 말했더니, 그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니?”

“지금 하는 거, 정화 의식 과정이거든. 꽤 고전 형식이라 요즘은 아는 자가 별로 없겠지만.”

“정화 의식?”

“산 제물을 제단에 바치기 전에 치르는 의식.”

“……!”

방황하던 퍼즐이 순식간에 맞춰졌다. 그제야 이 수선스러운 방문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연회에 걸맞은 의상을 선물한다는 건 전부 핑계에 불과하고, 진짜 목적은 이 의식을 치르는 것이었던 거다. 어쩐지 뜬금없이 과도한 친절을 베푼다 싶더니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설마 이 의식이 주술 만족 조건에 들어가는 건가?”

“그게 아니고서야 굳이 이런 번거로운 수법을 쓸 리가 없지.”

“와…… 정말 미친 거 아냐? 진짜 노골적인 놈이네?”

“왜, 재밌구만. 이런 꼼수까지 부려서 서둘러 손을 뻗치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마음이 급한가 보네. 당장 납치하지 않고 참고 있는 게 용하지 않아?”

“넌 왜 이렇게 침착한데?”

“침착하지 못할 건 뭐 있어? 놈이 서두른다는 건 그만큼 우리 계획이 빨라진다는 거잖아. 잘된 일이지. 시간 끄는 건 딱 질색이야.”

라피스는 시종일관 태연한 기색이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느긋한 태도는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도 흐트러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 기세 덕분에 나 또한 당혹감을 누르고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또 다른 의미에서는 정신을 차린 기분이기도 했다. 잠입하려는 계획을 세우면서도 막상 실감이 나지는 않았는데, 이제 정말로 악신과의 대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현실감이 느껴졌다.

“어떡하지, 라피스? 왠지 조금 긴장돼. 우리가 잘할 수 있을까?”

“정령왕 주제에 소심하긴.”

“……소심해서 미안하게 됐다. 하지만 걱정되는 걸 어떡해. 전 마왕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거의 없고, 지금 그자가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잖아.”

“강해 봤자 아직 놈은 불완전한 상태야. 숨어 있는 걸 끌어내어 잠시 묶어두려는 것뿐이고. 이 작전도 어디까지나 고작 시간벌기에 불과해. 그 정도도 못해서야 너나 나나 초월자의 위치는 반납해야지.”

“그래도 저항이 심할 텐데. 주위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까?”

“글쎄, 최악의 경우엔 이 일대가 날아가긴 하겠네.”

“그러니까 그런 게 문제라고. 수도에 사는 인구만 몇인데. 엄청난 대형 참사잖아. 이럴 게 아니라 다들 대피하라고 해야 하지 않나?”

“얼씨구? 왜, 아예 악신이랑 한판 뜰 거라고 예고장이라도 던지시게?”

“그, 그럴 건 아니지만…….”

황당해하는 시선에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억지에 가까운 말이다 보니 변명할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우물거리는 나를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라피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왜 최악만 가정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어차피 피하란다고 해서 그대로 따를 놈도 없어. 미친놈 취급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리고 그 정도로 사태가 나빠지면 우리도 위험하긴 매한가지거든? 그 걱정은 안 들어?”

“으음, 그것도 그렇네. 혹시 그런 일이 생기면 내가 어떻게든 피해 규모를 최소화해 볼게. 라피스 넌 그 사이에 아스랑 데르온 데리고 피신해.”

“……너 말이야.”

“음? 왜?”

어리둥절해져서 바라보니 그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어딘가 불쾌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찝찝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할 말 있으면 해. 괜히 노려보지 말고.”

“아니, 됐다. 어차피 곧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될 테니까.”

“뭐? 그게 무슨 뜻이야?”

뜬구름을 잡는 것 같았던 라피스의 예언은 곧 그대로 이루어졌다. 사라졌던 시녀들이 다시 들어오면서, 나는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금방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손에 한가득 들려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의상 입으시는 걸 돕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

아연하게 바라보고 있는 내 앞에 찰랑찰랑한 드레스 자락이 풍성하게 펼쳐졌다. 이미 각오한 일이라도 막상 실전에 돌입할 때의 느낌은 또 달랐다. 한눈에 봐도 값비싸 보이는 부드러운 천 자락이 지금만큼은 무시무시한 족쇄처럼 보였다.

진정한 고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

여성의 삶은 말로만 들어봤지 실제로 경험해 본 일은 없다. 성별을 오해받아 본 적은 있지만 딱 그 정도 선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방심한 면이 있었다. 라피스한테만 입게 하자니 미안한 것도 사실이었고, 이왕이면 여성으로 보이는 게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기에도 편할 거라 생각했다. 까짓거 그래 봤자 드레스를 입는 것뿐인데, 하지 못할 건 없다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설마 옷 한 벌을 고르는 데 수없이 많은 옷을 입어봐야 할 줄은. 또 그 옷에 어울리는 장신구와 구두를 골라야 할 줄은. 심지어 그것도 모자라 화장품을 어떤 색을 써야 할지, 어느 부분의 색조와 모양을 좀 더 강조할지, 머리를 틀어 올리는 게 좋을지 푸는 게 좋을지, 부채와 리본 색을 의상에 맞출지 머리 색에 맞출지 그도 아니면 눈동자 색에 맞출지, 장갑을 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런 자잘한 것들까지 전부 세세하게 고민해야 하는 과정인 줄 미리 알았더라면. 라피스가 무슨 협박을 했건 다시 생각해 봤을 거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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