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3화
“응, 정말. 내가 아는 인간 중에서 가장 성장이 빨라. 엘이 함께한 덕분이겠지만, 그래도 본인이 노력하지 않았다면 이런 결과를 얻지 못했을 거야. 수고했어, 알리사. 정말 잘했어.”
다정한 칭찬에 알리사의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눈물이 더는 참지 못하고 결국 눈가에 그렁그렁한 구슬을 매달았다. 아마도 자신은 이 말들을 듣고 싶었던 것 같았다. 정말 잘했다고, 네가 노력해서 얻어낸 결과라고, 수고했다고, 스스로 이뤄낸 성취로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었다. 평소 일행들에게 많은 격려와 칭찬을 받긴 했지만, 워낙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일부러 배려해서 하는 말이라는 의심을 완전히 지우기가 힘들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을 상대로는 모르는 대로 위로가 되지 않았기에 항상 마음에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하고 갈증이 일었다. 그런데 지금 그 부족했던 단숨에 구멍이 채워진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자신이 바란 답을 내줄 수 있었는지, 그가 제 마음을 들여다본 것 같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아, 그건 걱정 마. 그건 들여다보지 않았어. 전부 진심으로 한 말이야.”
“……!”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알리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가슴 속을 채우고 있던 감동이 순식간에 사그라지고, 그 대신 당혹감이 차올랐다. 내가 지금 생각을 소리 내어 말했었던가? 속으로 의아해하는데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졌다. 착각이 아니라면 왠지 조금 전에도 이것과 비슷한 경험을 했었던 것 같다. 아니, 실제로 했었다. 알리사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트로웰이 빙긋 웃었다. 그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니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정령왕들은 고유 능력을 하나씩 갖고 있어.>
그건 한창 정령술의 기초이론을 공부하던 때, 이사나가 알려준 내용 중 하나였다. 알리사의 얼굴에서 단숨에 핏기가 가셨다. 왜 지금까지 그걸 떠올리지 못했을까. 트로웰의 고유 능력은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혜안’이었다. 그가 마음먹으면 다른 사람의 생각쯤은 아무렇지 않게 들여다볼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년이 바로 그 트로웰이었다.
“설마…….”
“참고로 아까 전에도 일부러 읽은 건 아냐. 너처럼 감정이 격양 되어 있으면 바로 옆에서 외치는 거나 다름없거든. 이건 나도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이번에도 트로웰의 반응이 더 빨랐다. 캐묻기도 전 먼저 이어지는 설명에 알리사는 허탈한 숨을 삼켰다. 일부러 읽은 것도 아니라는데 화를 낼 수도, 항의할 수도 없었다. 타고난 능력이 그런 것이라 어쩔 수 없다는 기분은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그래도 지고 싶지 않은 기분이라 그녀는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모, 모른 척해 줄 수도 있었잖아.”
“네가 원한다면 앞으로는 그렇게 할게.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내가 트로웰이라는 건 다 알고 있고, 내 능력이 뭔지도 이미 알고 있는데.”
“……그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반박할 수 없었던 알리사는 얌전히 전의를 상실하는 쪽을 택했다. 그 말대로 어차피 다 아는 상황인데 모르는 척한다면 오히려 더 불안해질 것 같았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확실히 인지하고 있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실수를 줄일 수도, 잘못을 정정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 알리사는 크게 심호흡 한 다음 트로웰을 똑바로 응시했다.
“한 가지만 확인하고 싶어.”
“그래.”
“아까 한 말, 정말 진심인 거지? 내가 바라는 대로 말해 준 거 아닌 거지?”
“그런 걸로 거짓말 하지 않아. 그럴 이유도 없고.”
단호한 답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제야 굳어 있던 얼굴에 화색이 다시 돌았다. 생각을 들킨다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상대는 정령왕이었다. 인간인 것도 아니고, 이곳의 사회에 속해 있지도 않으며, 다른 차원에 적을 둔 존재다. 하물며 까마득한 세월을 살아왔을 그가 저같이 어린 여자애의 생각을 신경 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시야의 전환도 무척 간단해졌다. 그 앞에서는 지나치게 솔직해지는 것뿐이라고 여기면 된다. 오히려 감추려고 속앓이를 할 필요도 없고, 오해가 쌓일 일도 없으니 편할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생각이 다 정리된 것 같네.”
“아, 응! 덕분이야. 저기, 트로웰 님? 이렇게 부르면 될까? 아, 말투도 이렇게 하면 안 되려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으니 편한 대로 해.”
가볍게 웃어주는 얼굴이 다정하기만 해서 알리사는 괜히 두근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는 첫사랑이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아름답고 상냥한 소년은 어린 눈에 동화 속의 왕자님처럼 보였다. 꿈 많은 소녀의 마음을 차지하기엔 넘치도록 충분했다. 미숙하고 어설픈 감정이긴 했지만 꽤 오랫동안 소중하게 간직해 왔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설레는 마음은 많이 흐려졌지만, 언젠가 다시 만나고 싶다는 바람은 버리지 않았다. 그가 트로웰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멀리서 스쳐 지나가는 모습이라도 좋으니 꼭 한 번은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비록 상상하던 것과 많이 다르긴 했지만 어쨌든 꿈에 그리던 그와 재회한 상황이었다. 훌쩍 자란 자신에 비해 상대의 모습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아쉬움과는 별개로, 이것도 나름대로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라 나쁘지 않았다. 이사나가 지켜본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마음이 부푸는 걸 어쩔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다음으로 이어지는 대화가 애틋한 분위기를 바꾸기 시작했다.
“그보다 알리사, 지금은 네가 먼저 신경 써야 할 게 있을 텐데. 아직 마무리가 안 된 게 있잖아?”
“으응? 무슨 마무리?”
“정식으로 인사하자고 한 거 말이야.”
그게 왜? 인사는 다 끝난 거 아닌가? 선뜻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알리사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트로웰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잘 생각해 봐. 난 네게 악수를 청하면서 내 이름을 밝혔어. 나름대로 자기소개를 한 셈이야. 그렇지?”
“어, 그렇긴 한데…….”
“자, 그럼 여기서 질문. 이럴 때 다음으로 돌아와야 하는 반응이 뭐라고 생각해? 여기서 네가 이어야 할 말은?”
“……저는 알리사입니다……?”
“응, 바로 그거야. 잘 알고 있네.”
화사한 금안이 나른하게 휘어졌다. 분명 온화한 표정이건만 왠지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알리사는 자기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죄, 죄송해요.”
“괜찮아.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지. 다음부터 틀리지 않으면 돼.”
그건 달리 말해 이번엔 처음이니까 용서한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했다. 친절한 답변 속에 녹아 있는 뜻을 알아차리자 등허리에 식은땀이 흘렀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내내 다정하고 친절한 태도였기에 무심코 그를 유순한 성격이라고 여겼었다. 정령왕이지만 수더분하기만 한 엘을 보면서 선입관이 생긴 탓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는 생각보다 많이 무서운 존재인 건지도 몰랐다.
“내가 남의 생각을 곧잘 들으니까, 정작 상대가 내 생각을 읽지 못한다는 건 종종 잊는단 말이야. 그래서 참 유감스러운 일이 벌어질 때가 많아.”
“아하하, 그렇군요.”
“응, 알리사는 부디 내 말을 잘 이해했기를 빌어.”
“…….”
천사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꽃 같은 미소가 만개했지만 더는 속지 않았다. 순진무구한 어린 시절의 추억 위에 새로운 인상이 덧칠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왕자님이라고 생각했던 존재가 사실은 몹시 엄격한 군주였다. 달콤한 로맨스 소설이 별안간 피가 낭자하는 공포 소설로 바뀐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쪽이 보다 정확한 현실이었고, 이미 깨달아 버린 이상 다시 예전처럼 생각하는 건 불가능했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소녀는 유년기의 자취와 빠른 작별을 고했다. 앞으로 겪어나갈 무수한 성장통의 단편이었다.
* * *
“저기, 근데 트로웰 님이 왜 이곳에 있는 거예요? 우리를 도와준 사람이 트로웰 님인 거예요?”
한차례 심호흡을 거친 뒤 알리사는 조심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원래대로라면 가장 먼저 물었을 질문이었는데, 휘몰아치듯 흘러가는 전개에 정신을 빼놓고 있느라 이제야 생각이 미쳤다. 물론 누가 봐도 그가 도와준 게 확실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의외로 돌아온 건 예상과 다른 대답이었다.
“아아, 난 별거 안 했어. 그냥 그쪽을 따라왔을 뿐.”
“네? 그쪽, 이요?”
“너희를 도와준 쪽. 방향치라서 차마 혼자 가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거든.”
“……네?”
“정말 죽고 싶은 건가 보지, 트로웰.”
“……!”
무슨 말인지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낯선 음성이 들렸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돌아본 알리사는 그대로 헛숨을 들이켰다. 빛이 닿지 않아 새카만 암흑으로 뒤덮인 그늘. 그 속에서 누군가가 벽에 등을 기댄 자세로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한번 인식하고 나니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훤칠한 키에 도자기처럼 청아한 분위기를 지닌 남자였다. 온몸을 덮고 있는 짙은 어둠 속에서도 그의 긴 머리카락은 스스로 발하는 것처럼 은은한 빛을 품었다. 누구든 한 번이라도 그를 본다면 자력으로는 잊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알리사 역시 어디서 그를 봤는지 한눈에 떠올렸다. 그의 정체가 무언지도.
“혀, 형벌의 신 엘뤼엔 님?”
내뱉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어 숨이 턱턱 막혔다. 트로웰을 만나면서 평생 놀랄 양을 다 써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를 향해 엘뤼엔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기만 했다. 명백히 성의 없는 태도였으나 들어야 할 대답으로는 넘치도록 충분했다.
정령왕 다음은 신이라니, 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알리사는 창백해진 얼굴로 이사나를 돌아보았다. 이미 그럴 거라 짐작한 이사나가 머쓱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엘을 만나러 가시다가, 마침 근방에서 우리의 기척을 느끼셨대.”
“그, 그래서 직접 도와주러 오셨다고?”
대답 대신 이어지는 고갯짓에 알리사가 다시금 숨을 삼켰다. 경악하는 표정을 굳이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적나라한 반응을 지켜보는 이사나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진정하라고 달래지도 못했다. 그 또한 불과 조금 전에 똑같은 기분을 겪었으니까. 아니, 받은 충격으로 치자면 오히려 그가 더 심했을 거다.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엘뤼엔…… 님?”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눈으로 받아들인 정보를 인정하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최면향 때문에 환상을 보는 건가 싶기도 했다. 사실 신이 강림했다는 것보다는 그쪽이 훨씬 현실성이 높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
“폐하? 엘뤼엔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뒤에서 이어진 라온휘젠의 질문 또한 눈앞의 이가 환상이라는 증거로만 들렸다.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저런 질문을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살짝 미간을 찌푸린 엘뤼엔이(정말 실감 나는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라온휘젠을 응시하는 순간, 상황은 단숨에 달라졌다.
“태, 태자?”
어리둥절해 하던 라온휘젠이 몸을 움찔하더니 별안간 그대로 쓰러졌다. 당황한 이사나가 황급히 그를 부축해 어깨를 흔들었지만 이미 의식이 없었다.
“그놈은 방해될 것 같아서 재웠다. 깨어나도 날 기억하진 못할 거다. 목격자를 쓸데없이 늘릴 필요는 없겠지.”
“……!”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차분한 음성에 이사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멍하니 고개를 들자 엘뤼엔이 의아하다는 듯이 마주 보았다.
“뭘 하고 있지?”
“네?”
“그 안에서 나와라. 갇혀 있는 게 더 좋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취향이 나쁘군.”
“아, 아닙니다! 나가겠습니다!”
얼음처럼 냉정한 시선을 받고서야 비로소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황급히 대답한 후 이사나는 허둥지둥 마차에서 내렸다. 다리가 흙을 밟는 것과 동시에 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찔렀다. 뼛속까지 차오르는 듯한 차가운 촉감에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역시 환상이 아닌 것 같았다. 다만 이게 어떻게 되어 가는 상황인 건지는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를 반긴 건 또 다른 익숙한 인물이었다.
“안녕. 오랜만이야.”
“……트로웰 님.”
이번엔 환상이라고 여길 수도 없었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향해 트로웰이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엘도 곁에 없는데 너무 느슨하게 지내는 거 아냐, 어린 황제님? 정령왕의 계약자라는 녀석이 이런 자들에게 붙잡히다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그가 가리키는 손짓에 따라 시선을 돌리자 보이지 않던 광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사나는 그대로 얼굴을 굳혔다. 부러진 횃불이 굴러다니는 바닥에 사람들의 형체가 어지러이 늘어져 있었다. 마차를 운송하던 이들이 분명했다. 피비린내도, 상처도 없었지만 그들이 전부 죽었다는 건 알 것 같았다. 숨이 붙어 있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죄송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정말 운이 좋았어. 마침 지나가는 길인데 네 미래가 보였거든.”
“제 미래 말입니까?”
“그래. 네가 다음 날 아침에 죽는 모습이었지. 너와 같이 붙잡힌 일행들도 전부 포함해서.”
“……!”
“엘뤼엔에게 알렸더니 선뜻 구하겠다고 하더군. 난 그냥 그를 따라오기만 한 거야.”
“엘뤼엔 님이…… 어째서…….”
“너희가 죽으면 엘이 슬퍼할 테니까.”
왜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이 와 닿았다.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 있다가 이사나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본인이 생각해도 그 이유가 납득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를 생각할 수도 없긴 했다. 결국 이 자리에 없는 엘이 모두를 살린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