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32화 (332/608)

제332화

“……리사! 알……사!”

아까부터 귓가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길에 맥없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알리사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멍하기만 했던 감각이 어느 순간부터 점차 분명해지고 있었다. 그제야 지금까지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눈꺼풀이 무거워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비단 눈만이 아니라 온몸이 뭔가에 짓눌려 있는 것 같았다.

여긴 어디야?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상태는 인지했으나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돌아가는 상황을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잃은 상태인 게 분명한데 지난 과정이 분명하지 않았다. 끙끙 앓으면서도 알리사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더라? 아아, 그래. 이사나가 찾는다는 소리를 듣고 그의 막사를 방문했었다. 입구 앞에서 카터스 황태자와 아셀을 만났지만 다 같이 부른 이유를 깊이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데 막상 안에 들어갔더니 이사나가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도 부른 적이 없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야 무언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땐 이미 사방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빠르게 흐려지는 공간 속에서 조금 이상한 냄새를 맡았던 것 같다. 그리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알리사!”

“……!”

공기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눈이 번쩍 떠졌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얼굴이 익숙하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실은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이미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안도감을 느끼자 경직되어 있던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알리사는 참고 있던 숨을 크게 토해냈다.

“이사나 씨…….”

“그래, 나야. 정신이 들어?”

반색하며 물어오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선 지 몸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전력으로 달리고 난 것처럼 탈진한 느낌이었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힘도 없어서 알리사는 눈만 간신히 깜빡거렸다.

“연기를 너무 많이 마셨어. 해독은 했지만 잠시간은 무기력한 상태가 지속될 거야. 괴로워하는 것 같아서 일단 깨우긴 했는데, 당장 움직이는 건 어려울 테니까 잠시만 그대로 누워 있어.”

그녀의 당황을 알아차린 이사나가 차분한 어조로 상황을 설명했다. 알리사는 일어나려는 시도를 그만두고 가만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직 사방이 어두운 걸로 봐선 그다지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진 않았다. 찬이슬을 머금은 눅눅한 밤의 공기,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들 너머로 별무리가 펼쳐져 있었다. 스왈트 제국의 전경은 어디를 가도 비슷비슷했지만 이곳이 낯선 장소라는 것 정도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납치를 당한 걸 테다.

그러나 어딘가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탁 트인 야외에 있었다. 재갈이 물려 있거나 몸이 묶여 있지도 않았으며, 이사나의 분위기와 표정도 평온해 보였다. 근처에서는 한가롭게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굴려 봤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 아셀과 라온휘젠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한순간 가슴이 철렁했지만 다시 가만히 보니 둘 다 곤하게 숨 쉬고 있었다. 그저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정신을 잃은 사이에 대충 잘 해결된 모양이다. 그렇다 해도 묻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우리 위험했었던 거 맞지? 시선에 포함된 의미를 읽은 이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숙부…… 대공 쪽에서 손을 썼어. 우리를 제물로 삼으려고 했던 것 같아.”

“역시. 그런데 어떻게 용케 풀려났네? 이사나 씨가 해결한 거야?”

“아니. 도움을 받았어.”

“도움?”

“응, 근처에 계시겠다고 했으니 곧 다시 오실 거야. 누군지 알면 많이 놀랄걸?”

부드럽게 웃는 얼굴이 왠지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알리사는 의아해졌다. 황제인 이사나가 누군가에게 높임말을 붙이는 경우는 흔치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아직 집중해서 관심을 가질 정도로 머리가 맑지 않았다. 뭐든 직접 보면 알게 되겠지. 귀찮아진 그녀는 대충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지금 안전하다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좋은 걸 줄게. 네게 언젠가는 도움이 될 거야.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으려니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지금보다 더 많이 어렸을 때 누군가가 그녀에게 했던 말이었다. 정신을 차리기 직전까지, 알리사는 그 음성의 주인공과 함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리운 꿈을 꿨네.’

강제로 깨어난 탓에 아직 불안정했던 의식은 하나의 파편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아주 손쉽게 과거로 빠져들었다. 새카만 흑발과 아름다운 금안이 다시금 눈앞에서 생생하게 그려졌다. 기묘하다 못해 어딘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던 소년의 분위기도.

‘……그 사람이 트로웰이라고 했었지.’

트로웰이라니.

스스로 내뱉은 단어의 무게에 놀라 알리사는 자기도 모르게 긴 숨을 내쉬었다.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하련만 여전히 그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충격을 받고 만다. 그날의 만남을 돌이켜볼수록 더 그랬다. 생각해 보면 어느 하나 특별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그는 알리사에게 정령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려준 이였다.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늘 곁에 있는 존재들이 있다고. 그들이 알리사를 매우 좋아한다는 걸 알려주었다. 옆에 붙어서 끊임없이 재잘재잘 말을 걸고 있다는 것도.

―정말 이 주위에 정령이 있어?

―그럼. 아마 이 마을의 인구수보다도 더 많을걸?

―굉장하다. 오빤 그런 걸 어떻게 알아?

―글쎄, 어떻게 아는 것 같아?

부드럽게 웃을 때마다 빛이 스며드는 눈동자가 정말 예뻤다. 아주 높지도, 그리 낮지도 않은 음성은 악기가 만들어 내는 음률 같았다. 바람이 불면 곁에 앉은 제게까지 청량한 숲 냄새가 전해졌다. 맑은 이슬에 흠뻑 젖은 흙냄새 같기도 했다. 그 다채로운 색에 취해 있느라 정작 말에 담긴 의미는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한 게 문제였을까.

그가 선물이라는 것을 갑자기 불쑥 내밀 땐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무심코 받아들이기만 했다. 그 정체가 책이라는 건 그가 떠난 후에야 깨달았다.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게 생각나서 뒤늦게 허둥지둥 뛰어가 봤지만 그땐 이미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말 그대로 신기루 같았던 만남이었다.

어쩌면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그 이후로 종종 혼자 생각해 보기는 했었다. 정말로 몬스터였을지도 모르고, 책에서나 접하던 다른 인족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이가 평범한 인간이라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그렇게 생각하긴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땅의 정령왕이라니.’

상상할 수 있는 기준범위를 너무 초과해 버렸다. 심지어 엘의 말에 의하면 그날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일부러 알리사를 찾아왔다.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았기 때문에, 훗날 정령사가 될 수 있도록 그 길로 이끌어가기 위해서. 건네준 동화책만 봐도 미리 준비하지 않고서는 갑자기 줄만 한 건 아니었다. 안에 소환 주문이 적혀 있었던 것까지 전부 안배된 거였다. 아무리 무던한 알리사라도 그게 얼마나 굉장한 일인 건지는 알았다. 세상 어느 정령사가 정령왕으로부터 직접 선택받을 수 있을까. 사방에 떠벌리고 다녀도 아무도 믿지 않을 이야기였다. 같은 정령사들조차 코웃음 치며 허풍이라고 여길 게 뻔했다. 그렇기에 더 실감이 들지 않는 걸지도 몰랐다.

땅의 정령사로서 정령왕 트로웰은 반드시 도달하고 싶은 경지에 해당하는 존재였다. 계약을 하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꼭 한 번은 만나보고 싶었다. 그걸 이루기 위해 평생을 바칠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미 만났단다. 엘을 만나기도 훨씬 전, 전혀 깨닫지 못한 방식으로. 읽고 싶은 희귀 도서를 찾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했는데 사실은 이미 책장에 꽂혀 있던 격이었다.

어쩌면 엘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을까? 그때 알리사는 과분한 공로를 혼자 독식한다는 생각 때문에 심란해하던 시기였다. 엘은 상냥하니까, 침울해진 그녀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적당한 말을 지어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절대 친절하지 않은 라피스까지 동조했던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라면 놀리려고 그랬을 수도 있다. 실제로 바로 그 뒤에 이사나와 뭔가가 있는 것처럼 은근한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았던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아무래도 정말 놀림당한 게 맞는 것 같았다. 점차 짙어지는 의심에 알리사는 얼굴을 한껏 찌푸렸다. 역시 그 소년이 트로웰일 리가 없었다.

“흐음. 그럼 뭐인 것 같은데? 역시 사람을 홀리는 몬스터?”

“끄응, 글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닌데 그건 아무래도 좀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많단 말이지. 몬스터였으면 그때 날 이미 잡아먹지 않았겠어?”

“그렇긴 하네.”

“그치? 게다가 그런 몬스터는 보통 멀리서 유인한단 말이야. 그렇게 바로 옆에 앉아서 대화까지 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

가만, 근데 내가 지금 누구랑 대화하는 거지? 그보다 내 생각을 입 밖으로 낸 적이 있었던가? 무심코 대답을 이어가던 입이 점차 다물어졌다. 반사적으로 이사나를 쳐다보자 그가 난처한 표정으로 웃었다. 둔한 감각으로도 방금 전의 목소리가 그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다. 알리사는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다른 방향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곳엔 믿기지 않는 현실이 있었다. 금안을 지닌 아름다운 흑발의 소년이, 그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광경이었다.

“안녕.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

한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주변의 모든 것들이 점멸하듯이 사라졌다. 보이는 건 오직 앞에 있는 이의 모습뿐이었다.

처음엔 눈을 뜬 채 꿈을 꾸는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눈앞의 소년은 그가 맞았다. 세상에 아무리 닮은 사람이 많다지만 이런 외모가 두 명이나 된다는 건 불가능했다. 이렇게 뚜렷한 존재감을 풍기고 있는 이가 환상일 리도 없었다. 심지어 인사까지 건네지 않았던가. ‘오랜만’이라고.

거기까지 자각하자 잠시간 멀어졌던 현실감이 빠르게 돌아왔다. 알리사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 상황을 인지한 심장이 발작하는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입이 크게 벌어진 탓에 턱 근육이 아팠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자신이 굉장히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어…… 이게 무슨…….”

뒤죽박죽으로 엉킨 머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제대로 된 단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 혼란한 마음을 이해한다는 것처럼 소년이 싱긋 웃었다.

“몰라볼 정도로 많이 커서 조금 놀랐어. 이젠 숙녀 티가 물씬 나는걸. 처음 봤을 땐 정말 작은 꼬맹이였는데.”

그렇게 말하는 당사자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키도, 체형도, 피부색도. 하다못해 머리카락의 기장마저 기억하던 것과 똑같았다. 조금 전까지 꿈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라 그 안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어떻게…….”

“음, 어쩌다 보니 라고 해 둘까. 사실은 그때만 해도 이렇게 다시 재회할 예정은 없었지만. 뭐, 이것도 다 인연인 거겠지. 엘이랑 연결된 이상 나와도 다시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어.”

“엘 님을……아는구나.”

“하하, 당연한 말을 하네.”

“저, 정말로 당신이 트로웰 님이야? 땅의 정령왕이라고?”

“네가 보기엔 어떤 것 같아?”

장난스러운 대답에 알리사는 울상을 지으며 옆을 돌아보았다. 초조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사나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소년― 트로웰의 행동이 더 빨랐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좋은 방법이 있지.” 웃으며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린 그가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 자기도 모르게 움찔한 알리사는 이윽고 자신을 향해 내밀어지는 손을 보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늦었지만 정식으로 인사할까? 난 트로웰이야.”

“아…….”

알리사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간신히 용기를 내어 손을 맞잡았다. 처음에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기만 하고 얼른 떨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따스한 체온이 전해지자 굳어 있던 얼굴이 저절로 풀어졌다. 고작 손을 잡은 것뿐인데 이상하리만치 뭉클해져서 가슴 속이 술렁거렸다. 눈물이 나도록 그립고 친근한 기분,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마음이 안정되는 감각이 온몸에 퍼져 나갔다. 들판 위에 누워 싱그러운 풀 냄새를 한껏 들이켠 것 같기도 했다.

과거 그를 만났을 때도 이런 기분을 느꼈었지만, 그게 무언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정령사가 된 지금은 선명하게 자각할 수 있었다. 그건 이 세계에 흐르는 대지의 기운이었다.

“뭐야……. 정말이네. 정말 트로웰 님이었어.”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을 억지로 진정시키려니 목소리가 떨렸다. 방심하면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 때문에 코끝이 찡했다.

“괜찮아?”

“으으, 이상해. 왜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하지?”

“내 기운과 강하게 교감해서 그래. 네가 정령사로서 성장했다는 증거야. 생각했던 것보다 성취가 더 빠르구나. 곧 클레이도 소환할 수 있겠어.”

“저,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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