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31화 (331/608)

제331화

누구에게나 살아가면서 하나쯤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알리사에게는 몇 년 전의 하루가 바로 그런 날이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언제든 선명하게 그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다. 퀴퀴하고 캄캄한 방 안에 한 여인이 누워 있는 광경이다. 여인은 앓는 사람처럼 헐떡이고 있고, 몇 사람이 왔다 갔다 하면서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마지막으로 검진한 의원마저 고개를 젓고 나자 방 안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알리사는 쭈그리고 앉아 그 모습을 우울하게 응시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알리사? 알리사, 그곳에 있니?”

“네, 엄마. 저 여기 있어요.”

더듬더듬 허공을 헤매는 마른 손을 잡아 뺨을 비볐다. 가쁘게 몰아쉬는 여인의 숨은 점차 간헐적으로 끊어지고 있었다. 철모르는 어린 나이에도 알리사는 이 현상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여인은 곧 숨을 거둘 것이다. 이후로는 두 번 다시 저 다정한 눈이 자신을 응시하는 일도, 부드럽게 웃어 주는 일도 없으리라.

“알리사, 내 귀여운 딸. 이것만은 기억하렴.”

어린 딸을 두고 가야만 하는 여인의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서렸다. 그녀는 자신이 떠난 후의 아이가 얼마나 힘들어질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엇이든 희망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넌 대지의 사랑을 받는 아이란다. 이 땅의 식물과 흙이, 너를 지키고 있단다. 그들이 너의 친구가 되어 줄 거야.”

손바닥에 닿은 그녀의 뺨은, 얼굴에서 가장 부드러운 부분이어야 할 텐데도 까슬까슬했다. 그것에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알리사는 꾹 참았다.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야.”

응, 알아요, 엄마.

고개를 끄덕이는 딸을 보며 안심한 여인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몰아쉬던 숨이 점차 뜸해지더니 어느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뺨에 닿아 있던 촉감이 점차 사라져 갔다. 힘을 잃고 떨어지는 팔을 알리사는 억지로 붙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가슴 속에서 아우성쳤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지만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굳게 감긴 눈은 두 번 다시 떠지지 않을 것이다. 알리사는 눈앞에서 식어 가는 여인의 모습을 오랫동안 하염없이 응시했다.

스물다섯 살. 아직 꽃 피울 날이 더 많은 한 여인의 가련한 삶이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어린 알리사를 든든하게 보호하던 울타리도 사라졌다.

세상사는 한 치도 알 수 없는 법이고, 사람의 가는 날이 정해져 있지는 않다. 그러나 스물다섯 살은 죽기엔 너무나 이른 나이였다.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며, 평소 이렇다 할 지병이 있지도 않았다. 갑자기 숨을 거둔 그녀의 죽음을 두고 한동안 수많은 말들이 오갔다. 평민에 하녀 출신, 그저 첩에 불과한 그녀가 백작의 총애를 받는 걸 좋지 않게 보는 이들은 너무도 많았다. 백작 부인이 시기하여 손을 썼다는 소문도 있었다. 물증만 없을 뿐 이미 심증은 확실했다. 심지어 백작 부인은 그 소문을 적극적으로 부정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백작은 사건을 밝혀내려고 하기보다는 자신과 가문의 명예를 택했다. 애초에 죽은 애첩에게 그렇게까지 애틋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마 알리사가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면,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었다면, 그녀 또한 제 어미와 같은 운명을 걸었을 것이다.

그 대신 알리사는 홀로 방치됐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덕에 본가 안에서 살 수는 있었지만 가장 후미진 방에서 지내야 했다. 백작을 비롯한 그의 혈육들과는 함께 식사하는 일도, 먼저 말을 붙이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도 알리사는 아무렇지 않았다. 유언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그녀를 지탱했다.

넌 혼자가 아니다.

그 말은 대부분 맞았다. 알리사의 곁에는 늘 식물들이 함께 있었다. 저택 안에서는 혼자였지만 그 앞을 한 발짝만 벗어나도 그녀를 반기는 친구들이 사방에 즐비했다. 꽃과 나무들은 항상 기분 좋게 만들어 주고, 웃을 수 있게 해 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그들은 그녀가 원하는 방식으로 예쁜 꽃과 향기를 피워 주었다. 누구보다 그녀의 손끝을 더욱 반기고, 어루만져 주면 보답하듯이 생생하게 반짝거렸다. 곁에서 그들이 숨 쉬는 걸 느낄 때마다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요, 엄마.

알리사는 무릎을 모아 앉은 채 가볍게 한숨을 삼켰다. 앉아 있는 언덕 아래로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울창한 수풀로 둘러싸인 평화로운 마을은 사막 한복판에 세워진 곳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울창한 녹음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가 앉아 있는 자리에도 무성한 잔디가 한가득이었다. 손을 내밀면 싱그러운 새순이 어김없이 닿았다. 바닥을 쓸자 역시나 손가락 사이로 풀잎의 생기가 전해져 왔다. 응석을 부리는 듯 달라붙는 감각에 알리사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엄마, 난 욕심쟁이인가 봐요.”

메마르게 굳은 얼굴을 한 채 중얼거린 알리사의 목소리는 서글펐다. 엄마를 잃은 작은 아이는 혼자서도 무럭무럭 자라나 몇 년 사이에 훌쩍 커졌다. 그 변화만큼 그녀를 둘러싼 상황도 시시각각 달라지는 중이었다. 친절하던 마을 사람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점차 꺼리는 시선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지나는 길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따라붙었고, 닿기라도 하면 먼지라도 묻은 듯이 호들갑스럽게 몸을 털어댔다. 그래서일까. 늘 함께해 주는 친구들이 여전히 곁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쓸쓸했다.

난 정말 혼자가 아닌 걸까? 짙어지는 외로움은 지금껏 인지하지 못했던 의문을 마음속에 품도록 만들었다. 적막함을 견디지 못해 숲과 들판을 더 자주 찾았지만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이제까지 인지하지 못한 차이만 더 확실히 자각했을 뿐이었다. 나무와 꽃들은 알리사가 슬프거나 기쁘거나 관계없이 늘 똑같은 반응만을 보였다. 그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알리사는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 같은 시각과 육체와 세계를 공유하는 자들 사이에서 그녀만이 홀로 다른 생김새를 지닌 이방인이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함께해도 결국 진정한 동류가 될 수는 없는.

한번 부정적으로 꺾인 마음은 빠른 속도로 추락하기만 했다. 그런 만큼 허망한 바람은 점점 더 커져 갔다. 화기애애하게 웃고 있는 백작가의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들 사이에서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는 자신의 자리를 확인할 때마다, 속이 바짝 타고 목이 마르는 것 같았다. 자신도 같은 언어로 교감할 수 있는 친구와 가족을 갖고 싶었다. 서로의 표정과 반응을 살피며 대화할 수 있는,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가 절실했다.

난 왜 하필 인간으로 태어났을까.

누구도 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을 입 안으로 중얼거리며 알리사는 나직하게 탄식했다. 차라리 식물로 태어났다면 좋았을 텐데. 지천에 널린 풀 한 포기 하나에 불과하더라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을 것이다. 이런 감정 따위는 평생 모르고 살 수 있었겠지. 세상에 나 홀로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이렇게 지독하리만치 고독하고 공허한 기분 따위는.

“안녕.”

“……!”

그 순간 불쑥 들려온 음성에 알리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인기척을 느끼지도 못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빙긋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을에서는 처음 보는 소년인 것 같았는데, 태양을 등지고 있는 탓에 역광이 드리워져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알리사는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때마침 바람이 불면서 소년이 가볍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변한 동작에 따라 반사되던 빛이 흐트러지며 드리워 있던 그늘이 천천히 걷히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인지한 건 소년의 피부였다. 더운 지역이다 보니 까무잡잡한 피부가 많은 편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소년의 피부는 유독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언젠가 언니들이 먹던 초콜릿이란 과자를 떠오르게 하는 색이라고, 알리사는 무심결에 생각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밤하늘을 옮겨 담은 것만큼이나 새카맸다. 하지만 빛을 직선으로 받고 있기 때문일까. 어두운 색은 대체로 칙칙해 보이기 마련인데, 소년의 검은 머리칼은 금발보다도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그게 참 신기하고 두근거려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모두가 눈동자를 발견했을 때의 충격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소년의 짙은 흑발 사이로 드러난 건 화려한 금안이었다. 순금을 그대로 녹여낸 듯한 눈동자는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가공한 보석 같았다. 그리 많은 삶을 살아온 건 아니었지만, 알리사는 저보다 아름다운 눈동자는 결코 볼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 매혹적인 눈동자가 저를 향해 웃었을 땐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을 정도였다.

“만나서 반가워. 꽤 심란해 보이네?”

부드럽게 건네지는 음성을 처음엔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했다. 그게 저를 향해 하는 말이라는 걸 깨닫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알리사가 때 늦은 경계심을 드러냈다.

“누, 누구야?”

“그냥 지나가던 사람이야.”

“……여행자야?”

근방에선 제법 큰 편에 속하는 마을이었지만, 그래 봤자 시골이었다. 한 집 건너 한 집마다 누가 사는지 훤히 다 알았다. 이 근방에서 이런 소년을 본 적은 없었다. 때문에 알리사는 소년이 여행자일 것이라 단정했다. 최근에 외지에서 큰 상단 하나가 왔다고 들었는데, 그들 일행 중 하나인지도 몰랐다. 소년도 딱히 그 추측을 부정하지 않았다.

“옆에 앉아도 돼?”

“응? 아, 응.”

무심코 옆을 비워준 후 알리사는 내심 혀를 찼다. 낯선 사람은 어른이고 아이고 경계해야 한다고 배웠건만, 너무 아무렇지 않게 곁을 내주고 말았다는 자각이 뒤늦게 들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절대 발생하지 않는 실수인데, 어째선지 소년은 상대로는 위험할 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틀림없이 저 화려한 외모 때문이었다. 미형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쉽게 방어벽을 허무는 파괴력을 지녔을 줄이야. 몬스터 중에는 아름다운 외형으로 사람을 홀려서 잡아먹는 것도 있다고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게 가능한 일인가 싶었는데 이젠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 이 오빠가 정말로 그 몬스터인 건 아니겠지?’

최근 들어 몬스터들의 습격이 잦아지는 상황이었다. 아직까지 상급 몬스터는 없었지만, 오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힐끔 돌아본 소년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킥킥거리며 웃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다 듣기라도 한 것 같은 반응이라 얼굴이 뜨거워졌다. 설마 그럴 리가 없는데도.

“조숙한 꼬마라 그런가, 이건 또 신선한 경험이네. 요정까지는 들어 봤지만.”

“으응? 뭐, 뭐가?”

“아니, 아무것도 아냐.”

가볍게 고개를 흔든 후 소년이 지긋이 응시해 왔다. 그 시선이 왠지 조금 묘해서 알리사는 다시금 부끄러워졌다.

“이렇게 보니 생각보다 더 나쁘지 않은걸. 직전까지 어쩔까 했는데……. 그래, 이제 슬슬 거둘 때가 되긴 했나. 역시 이대로 흘러가게 둬 볼까. 응, 이제 그래도 될 것 같네.”

“뭐? 무슨 말이야?”

“네가 방금 이 땅을 구했다는 뜻이야.”

“??”

“한 사람으로 인해 시작된 일이니 한 사람을 위해 끝낼 수도 있는 거겠지. 아, 그냥 혼잣말일 뿐이니까 이해하려고 할 필요는 없어.”

사실 이해하려고 해도 무슨 말인지 좀처럼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알리사는 소년에 대한 평가를 조금 정정했다. 몬스터일지도 모르는 예쁜 오빠에서, 조금 이상한 사람일지도 모르는 예쁜 오빠로. 소년도 알리사의 미심쩍은 시선을 읽은 듯했지만 별로 신경 쓰진 않는 기색이었다.

“그보다 넌 여기서 뭐하고 있었어?”

“으응? 아, 아무것도…….”

“흐음. 매일이 항상 즐겁기는 어렵지. 하지만 이렇게 북적거리는 곳에서 홀로 우울한 사색에 빠져 있다니, 조금 안타까운걸.”

“……북적거리다니?”

“주위를 봐. 나무와 풀이 잔뜩 있잖아. 이 근방에서는 이만큼 수풀이 우거진 곳을 찾기도 어려워. 너무 활기차서 정신없을 정도인데, 그렇게 느끼지 않아?”

알리사는 멍한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 이 마을을 둘러싼 숲은 근방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이곳을 보며 감탄하는 외지인은 많았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시끄럽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긴 했다. 하지만 주변을 향해 ‘북적거린다’느니, ‘활기차서 정신없다’느니, 그런 식으로 말하는 이는 처음이었다. 마치 그 하나하나를 살아 있는 인격체로 대하는 듯한 태도다. 식물들을 친구처럼 여겨 왔던 알리사도 차마 그렇게까진 하지 못했다. 두근거리면서도 왠지 지는 듯한 기분에 알리사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그래 봤자 나무와 풀일 뿐인걸. 말도 못 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뭘.”

“아아, 아직 모르는 거구나. 그걸 말하는 게 아냐.”

“……그게 아니면?”

“숲이 있는 곳엔 반드시 존재하는 것들이 있거든. 평범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정한 숲의 주민들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음성은 시문을 읊는 것 같았다. 뜻을 이해할 수가 없어 이렇다 할 반응도 하지 못하는 알리사를 향해, 소년이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들은 움직이고 말도 할 수 있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도 해. 숲의 활기는 대부분 그들이 주도하는 거야. 너라면 느낄 때가 되었는데, 자각이 더디구나. 무지가 인지를 방해하는 건가. 하긴 이곳은 너무 시골이긴 하지.”

“그게, 무슨 말이야?”

초조한 기분에 숨이 타들어 갔다. 왠지 지금이라면 본인도 모르고 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알리사는 잔뜩 호흡을 죽인 채 눈을 깜빡거렸다. 그 모습을 본 소년이 기다렸다는 듯이 웃었다.

“정령이라는 거,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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