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30화 (330/608)

제330화

“어?”

황제의 막사 앞에 도착한 아셀과 라온휘젠 일행은 그곳에서 뜻밖의 인물을 조우했다. 바로 알리사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 또한 이곳에 막 도착한 듯한 모습이었다. 당황한 라온휘젠을 대신해서 아셀이 얼른 말을 걸었다.

“알리사 님도 오셨습니까?”

“아, 응. 이사나 씨가 불렀어. 바로 좀 전에 헤어졌었는데, 다시 급하게 의논할 일이 있다나? 아셀은?”

“저희도 폐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렇구나.”

그녀에게도 전선에서 떠나라는 말을 하려는 걸까? 굳이 다 같이 모을 만한 이유가 그것뿐이었기에 아셀은 조금 의아해졌다. 이미 알리사는 몇 번이나 참전하겠다는 뜻을 밝힌 상황이었다. 그가 아는 이사나의 성격이라면 새삼 그녀를 설득하려고 할 것 같지 않았다.

일단 그들은 황제의 기사들에게 방문을 고했다. 황제는 막사 안에서 홀로 휴식을 취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안으로 들어가자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던 이사나가 들어오는 그들을 발견하고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킨 것이다.

“알리사? 아셀과 황태자 일행들까지…… 다들 무슨 일입니까?”

“예? 폐하께서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불렀다고요? 난 그런 적이 없는데요.”

“……!”

판단은 빠르게 내려졌다. 의아해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주위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을 비롯하여 황태자의 수행원들이 곧바로 주위를 경계했다. 이사나는 굳은 얼굴로 알리사를 돌아보았다. 알리사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알리사, 시벨 형님은?”

“어? 아, 미, 미안. 시벨 씨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잠시 돌아보러 나갔거든. 그냥 금방 다녀오면 될 거라고 생각해서…….”

또 혼자 나왔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이상한 기운이라니. 이사나는 낭패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유니콘인 시벨리우스가 무언가를 감지했다면 분명 좋지 않은 징후일 터였다. 알리사의 얼굴이 울상이 됐다.

“어, 어떡하지, 이사나 씨? 지금 굉장히 무서운 느낌이 들어.”

“괜찮아, 알리사. 아무 일 없을 거야. 케이! 밖에 있나!”

떨고 있는 알리사를 급히 위로한 후, 이사나가 밖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다른 때라면 즉각 대답이 와야 할 친위 대장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치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듯, 경계 밖으로 떠밀려 나온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단단히 걸렸군요.”

라온휘젠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그들 발밑으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그건 주먹만 한 크기의 새카만 구슬이었다. 데굴데굴 구르던 구슬에서 곧 새하얀 연기가 새어 나오더니 자욱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하.”

미처 정령을 부를 틈도 없었다. 상황을 자각했을 땐 이미 시야가 바닥에 닿아 있었다. 어느새 자신이 쓰러져 있다는 것을 간신히 깨달았다. 빠르게 멀어져가는 의식을 느끼며, 이사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이번엔 그도 실책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라온휘젠이 말한 그대로였다. 그들은 지금 함정에 빠진 거였다. 그것도 황제의 막사. 가장 안전하게 지켜지는 바로 그 장소에서.

짧은 시간 수많은 생각이 파고들었지만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다. 눈앞에 무언가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짐에도 저항할 수 없었다. 그는 곧 까무룩 깊은 어둠에 잠겨 들었다.

* * *

주술적인 기운이 느껴져 찾아간 일은 단순한 우발 사건으로 끝났다. 근처 마을에 사는 어린이들 사이에서 귀신을 부르는 의식이 장난으로 유행했는데, 그중에 진짜 주술이 섞여 있었던 거였다. 대충 상황을 수습해 주고 다시 진영으로 돌아온 시벨리우스는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밤이 깊어진 지 오래라 주위가 몹시 어두운 상태였다. 이런 시간에 알리사가 혼자서 갈 만한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는 별다른 고민 없이 이사나의 막사로 향했다. 앞을 지키고 있던 친위기사들이 그를 알아보고 경례해 왔다.

“알리사 님은 안에 계십니다.”

“아, 역시.”

혼자서 다니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승전이 연이어진 탓인지 최근 알리사는 지나치게 방심하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따끔하게 당부해야겠다고 다짐을 거듭하며 시벨리우스는 나직하게 혀를 찼다.

“카터스 황태자 일행과 아셀도 폐하를 함께 알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

이사나가 모두를 부른 걸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시벨리우스는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두꺼운 천개를 젖히려는 순간 그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

“……뭐야, 이거.”

“왜 그러십니까, 시벨리우스 님?”

심각한 분위기를 읽은 친위대장 케이가 곧바로 다가왔다. 기사들의 분위기가 변하면서 공기가 급격하게 팽팽해졌다. 시벨리우스는 설명하는 대신 품 안에서 주술문이 적힌 종이를 꺼내 들었다.

“베루스. 일루민. 스파오.”

그의 손바닥 위에 놓인 종이가 푸른빛을 내면서 빠른 속도로 타들어 갔다. 시벨리우스는 그걸 그대로 움켜쥐었다.

“궤(潰)!”

콰직! 그 순간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얇은 유리가 깨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실제로 깨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기사들은 영문을 모른 채 당황했다. 그러나 시벨리우스는 소리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막사를 장악하고 있던 진법이 파훼되었다는 증거였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천개를 젖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안에서부터 새하얀 연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켜보고 있던 기사들의 얼굴이 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게 무슨…….”

“숨 쉬지 마. 마취향이야.”

이어진 경고에 기사들이 서둘러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그들을 뒤로한 채 시벨리우스는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자욱한 연기로 가득한 공간 속에 이리저리 쓰러져 있는 형체가 보였다. 그러나 그들 중에 그가 찾는 사람은 없었다. 이사나와 알리사는 물론, 황태자와 아셀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주술의 기운이 낯익었다. 마을 아이들 사이에 섞여 있던 진 주술의 기운과 똑같았다. 그제야 시벨리우스는 자신이 미끼에 걸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기랄, 욕설이 저절로 치밀었다.

“시벨리우스 님.”

등 뒤에서 친위대장 케이가 굳은 목소리로 불렀다. 뒤따라 들어온 그 역시 상황을 파악하고 얼굴이 창백해진 상태였다.

“애들이 납치당했어. 수법을 보니 주술사가 있는 것 같아.”

“……두 분이 계신 방향을 알 수 있겠습니까?”

“기다려 봐.”

마침 이럴 때를 위해 평소 준비해 둔 것이 있었다. 시벨리우스는 빈 종이를 꺼내 손가락을 그었다. “베루스. 일루민.” 그가 주문을 읊기 시작하자 아무것도 없는 여백 위에 푸른색의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적(跡).”

마지막 명령이 떨어지자 종이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펄럭이며 치솟아 올랐다. 그리곤 잠시 허공을 배회하다가 막사 밖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시벨리우스가 그 궤적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알리사에게 닿을 거야. 저걸 쫓아가.”

* * *

몸이 흔들리는 느낌에 정신이 들었다. 눈을 떴으나 시야가 온통 뿌옇기만 했다. 처음엔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 팔다리와, 딱딱한 바닥의 감촉이 조금씩 주변 상황을 인지하게 만들었다. 이사나는 몇 차례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 상황은 비교적 금방 떠올랐다. 위에서 검은 구슬 같은 것이 떨어지더니 거기서 하얀 연기가 퍼져 나왔고, 이후로는 기억이 없었다. 그는 곧 자신이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가 있는 공간은 온통 덜그럭거렸고, 사방에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가득했다. 아마도 마차 같은 것에 실려 가고 있는 듯했다.

‘진영에서는 얼마나 멀어졌지? 바깥에 있던 친위대가 사태를 알아차렸을까?’

상황을 파악하니 놀랍도록 머리가 차가워졌다. 죽이지 않고 납치만 하는 것이 의아했지만, 이유가 뭐든 살아 있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살아만 있으면 형세는 언제든 뒤집을 수 있다. 물론 상황이 그에게 그리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사나는 슬쩍 시선을 내려서 아래를 확인했다. 아까부터 몸이 무겁다 싶더니 팔목에 마나를 제어하는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내가 정령사라는 걸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밝히지 않은 사실을 짐작하고 있는 건 대공뿐일 것이다. 그의 소행이라는 게 더욱 확실해졌다. 이사나는 우선 침착하게 주위를 살폈다. 고개를 들고 시선을 돌리자 근처에 눕혀져 있는 다른 인영들이 보였다. 가장 가까이로는 황태자 라온휘젠이, 그 너머로 알리사와 아셀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부러 모두를 모이게 한 뒤에 진행된 작전이었다. 혼자 납치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예상이 맞았다고 기뻐할 상황도 아니다 보니 입 안이 썼다.

라온휘젠과 알리사에게도 마나를 제어하는 봉인구가 채워져 있었다. 다행히 다들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았다. 한시름 근심을 덜고 나니 이번엔 다른 의문이 머릿속을 장악했다. 황태자의 경우 한때 제거하려던 전적도 있었던 만큼 같이 노린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됐다. 그러나 아셀을 데려온 이유만은 좀처럼 알 수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을 전부 끌고 왔다기엔 황태자의 수행원들은 보이지 않았으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아셀이 저를 방문했다는 건 그 역시 함께 부름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처음부터 그를 포함한 작전이었던 게 분명했다. 아마도 죽이지 않고 납치하는 것과 같은 이유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다. 마차 위쪽의 작은 창이 열리는 소리였다. 고개를 든 이사나는 흘끗 안쪽을 살피던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런, 벌써 깨셨군요.”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키득거렸다.

“놀랍네요. 마취향에 내성이 있다고 들어서 꽤 독하게 썼는데 말입니다. 설마 이렇게 빨리 정신을 차리실 줄이야. 다른 분들은 아마 한참은 더 깨어나지 못하실 겁니다.”

“……무슨 생각이지?”

이사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암살하지 않고 모두를 납치하는 이유를 묻는 말이었다. 상대방도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내려다보던 눈동자가 크게 휘어졌다.

“대공께선 보다 합리적인 방법으로 이 내전을 끝내고 싶어 하셨습니다.”

“합리적인 방법?”

“폐하가 그냥 죽어서 끝나는 건 재미없지요. 마침 요즘 대공께서 특별한 이능자들을 모으고 계시는 중이거든요. 정령사에 마법사라면 그 조건에 충분히 부합하는 존재고요. 심지어 유니콘의 혈통이라니. 그런 희귀한 피는 구하기도 쉽지 않죠.”

부릅뜬 눈동자가 경련했다. 이사나는 경직된 얼굴로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방금 전에 들은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숱하게 듣고,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도 했던 악행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도 소중한 친우가 그로 인해 분노하지 않았던가.

제물.

악신을 완성하기 위한 그 추악한 의식에 자신들을 바치겠다는 뜻이었다.

‘숙부. 당신은 대체 어디까지 떨어질 생각입니까.’

차마 뱉어낼 수 없는 탄식이 가슴 속에서 울렁거렸다. 망연해진 그를 겁먹은 것이라 생각했는지 창밖의 눈동자가 우쭐해졌다.

“어쨌든 더 주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아직 도착하려면 한참 남았으니까요. 창은 열어 두도록 하지요. 폐하께서 살아서 볼 수 있는 마지막 밤하늘일 테니 말입니다.”

비웃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지만 전혀 와 닿지 않았다. 이사나는 그저 숨을 크게 한 번 내쉬었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재미없었는지 조롱하는 자의 기척이 곧 멀어졌다.

“방금 저자가 한 말이 무슨 뜻입니까?”

정신을 차린 건 낮은 목소리를 들은 이후였다. 시선을 돌린 이사나는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어느새 의식을 차린 라온휘젠이었다.

“일찍 깨어났군요, 황태자. 저들 말로는 더 오래 잠들어 있을 거라고 했는데 말입니다.”

“마취향엔 어느 정도 면역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저보다 더 빨리 의식을 차리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아아, 이래 봬도 대부분의 독엔 내성이 있거든요.”

“유일한 후계자도 내성 훈련을 받긴 하나 봅니다.”

시큰둥한 대꾸에 이사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마취에서 막 깨어난 상태라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좋지 않았던 라온휘젠이 그 성의 없는 반응에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문제보다도 불쾌한 부분이 따로 있었다. 묶인 손을 들어 올려본 그는 그곳에 채워진 봉인구를 확인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억지로 힘을 가해 봤으나 그런다고 단단한 물체가 깨질 리 없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그를 향해 이사나가 나직이 충고했다.

“강제로 깨트리려 해 봤자 애꿎은 피부에 상처만 날 겁니다. 무모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가만히 있자는 겁니까? 태평하게 자라신 분이라 누군가 도와주러 올 거라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폐하, 현실은 그렇게 쉽게만 풀리지 않습니다.”

“쉽게 풀린다라…….”

“조금 전 질문의 대답이나 해 주십시오. 대공이 이능자들을 모으고 있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이제 와서 모른 척하시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폐하께선 분명 그 의미를 알고 계십니다.”

묘한 시선이 오간 후 이사나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라온휘젠의 말대로였다. 같이 납치된 데다 수상한 설명까지 들었으니 어떤 식으로 무마하든 의심을 피할 방법이 없게 됐다. 안 그래도 저에 대해 불만이 많은 황태자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이미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숨겨 봤자 상황을 악화시키기만 할 거란 판단이 떨어졌다.

“대공은 암흑 주술을 쓰고 있습니다.”

“……! 암흑 주술?”

“인간의 심장을 제물로 바쳐 악신을 만들어내는 주술이라고 하더군요. 우리를 그 주술에 사용할 제물로 잡아가고 있는 겁니다.”

라온휘젠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본인도 알 수가 없었다. 악신을 만들어내는 암흑 주술이라니! 심각한 상황은 예상했으나, 이건 그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의 사건이었다.

“그게 정녕 사실입니까?”

“애초에 거짓말을 할 거였다면 좀 더 그럴듯하게 둘러댔을 겁니다. 이런 허무맹랑한 소설 같은 이야기를 할 게 아니라요.”

“진실이로군요.”

확실히 이런 이야기는 아무도 쉽게 믿지 못할 것이다. 현실성이 너무 떨어진 나머지 정말로 진실이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라온휘젠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만났던 유카르테 대공의 모습을 떠올렸다. 가까이하고 싶은 느낌은 아니었으나 전반적으로 꽤 반듯한 인상이었다. 그 멀쩡한 얼굴로 뒤에서 이런 엄청난 일들을 도모하고 있었다는 게 소름 돋았다. 식은땀이 솟기 시작한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린 후, 라온휘젠이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카일 선황제가 크나큰 실수를 하셨군요.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분답지 않게 후환 같은 걸 남겨 두셔서 이렇게 된 겁니다. 평소 그분의 지론대로 정적은 뿌리까지 짓밟으셔야 했습니다.”

“……마치 선황제를 잘 안다는 듯한 말투로군요.”

“물론입니다, 폐하. 단언컨대 카일 선황제를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저일 겁니다.”

“그분의 아들인 나보다 그대가 더 선황제를 이해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까?”

“때로는 핏줄보다 더 강한 유대감이라는 게 있는 법이죠.”

“유대감이라.”

“유일한 후계자로서 평화롭게 살아온 폐하께선 이 기분을 결코 모르실 겁니다. 매일 먹는 음식을 의심하고, 물 한 모금도 함부로 마실 수 없는 기분을 아십니까? 형제라는 자들이 탐욕스럽게 정탐하러 오면서, 조금이라도 실수하기만을 바라는 걸 보는 기분은요? 그들의 외척이 공공연한 자리에서 모욕을 줄 때의 기분 같은 것도 당연히 모르시겠지요. 내 사람이 하루아침에 배반하고 등을 돌린다거나, 처음부터 간자였던 경우도 겪지 못하셨을 겁니다.”

“……태자는 그 모든 걸 다 겪은 겁니까?”

“아닌 것 같습니까? 가까이로는 바로 조금 전에도 겪었습니다.”

“……?”

“아셀이 유니콘의 혈통이라는 건, 그가 계속 주장했음에도 이제껏 한 번도 인정받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 그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아셀을 유니콘의 혈통이라 칭하더군요.”

의아하게 바라보던 이사나가 얼굴을 천천히 굳혔다. 유니콘의 혈통임을 곧바로 인정한다는 건 그 증거 또한 이미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아마도 시벨리우스가 유니콘으로 돌아갔던 그 현장을 보았거나, 목격한 자의 증언을 입수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건 황제의 친위대와, 황태자 일행뿐이었다.

친위대는 모두 목숨을 걸고 이사나를 지켜온 자들이었다. 그 안에 첩자가 있을 리 없었다. 그것만큼은 확신했다. 결국 황태자의 일행 중에서 누군가가 정보를 넘겼다는 말이었다. 가라앉는 그의 얼굴을 본 라온휘젠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저는 한평생 누구도 쉽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카일 선황제 또한 그러셨을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만큼은 같은 길을 걷지 않게 하신 거겠지요.”

이사나는 가만히 라온휘젠을 바라보았다. 울면서 웃는 것 같은 얼굴을, 배신당한 충격에 휩싸여 있는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처음엔 황태자의 모습만 보였는데, 어느새인가 그 위에 선황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린 시절의 선황이. 그 모습은 분노와 배신감에 얼룩져 있어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절망에 사로잡힌 얼굴이 슬픈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폐하께서는 당신이 얼마나 큰 혜택을 누리며 살아왔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계십니다.”

<이사나, 난 널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너는 나와 같은 길을 걷게 하지 않을 거란다.>

떨리는 음성 속에서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이사나는 크게 숨을 삼켰다. 후회와 비탄에 젖은 얼굴을 하면서도 그 말을 건넬 때 그는 자신이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 옳았던 것만은 아니었던 거다. 내내 그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을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자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까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요. 난 분명히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맞는 말도 아닌 것 같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아까 전에 내성 훈련을 받았냐고 물었었지요. 아뇨, 태자의 말대로 난 유일한 후계자라서 독에 대한 훈련을 따로 받은 적이 없습니다. 선황께서 일부러 금하셨죠. 안전한 자리에 있는 강건한 후계자의 위치를 강조하시기 위해서.”

“그럼 내성이 있다는 건…….”

“스스로 쌓인 겁니다.”

담담한 답변에 라온휘젠은 당혹감을 드러냈다. 독에 대한 내성이 스스로 쌓일 만한 상황이란 뻔했다. 그만큼 수시로 중독 피해를 입었다는 뜻이었다. 그 솔직한 반응을 본 이사나가 피식 웃었다.

“의외입니까? 유일한 후계자는 암살 위협을 안 받을 줄 알았나 보군요.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러했죠. 하지만 지금 내 상황을 보면 알 텐데요. 태자는 이 제국의 내란이 어느 날 갑자기 느닷없이 시작된 걸로 보입니까? 이 결과에 관여한 자가 과연 대공 하나뿐일까요?”

“…….”

“유일한 계승권자라는 건 결국 유일한 표적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선황께선 젊으셨고, 황후의 자리는 공석이었습니다. 귀족들은 선황께서 어린 아들 하나만을 의지하고 있는 걸 늘 못마땅하게 여겼죠. 일찍 죽은 황후의 소생이라 미련을 가진다고 보는 자들도 많았습니다. 저 황자만 죽으면 된다, 이런 생각을 하는 세력이 과연 아무도 없었으려고요.”

이번에도 라온휘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목돈을 들여 사들인 정보 중에서는 그런 내용이 들어 있지 않았다. 이사나 황제는 태어날 때부터 축복받은 환경에서, 선황과 주변인들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으며 자란 유일한 후계자였다. 숨 막히는 황비들의 암투도, 모든 형제들의 시기도, 그 외척 가문들의 견제도 그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시시때때로 침투하는 암살의 위협도 당연히 무관한 일이었을 터였다. 그렇다고 생각했었는데.

“전에도 비슷한 말을 했었죠. 누구에게도 쉬운 삶은 없습니다, 황태자. 마음에 증오를 품기로 작정하면 누구든 그럴 수 있을 겁니다. 나라고 나보다 쉬워 보이는 삶이 없었겠습니까?”

“……그건…….”

“하지만 내 길은 선황과 다릅니다. 다를 수밖에 없을 겁니다. 내가 그분과 다른 길을 택했으니까.”

“……!”

“난 자기 연민에 빠져서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을 놓치지는 않을 겁니다. 불행한 요소들만을 되새기며 누구보다 불행해지느니, 행복한 부분만 찾아 누구보다 행복해지는 쪽으로 갈 겁니다. 날 싫어하는 사람들이 내 삶을 망치게 놔둘 생각은 없습니다.”

라온휘젠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그저 허세에 불과하다고 비웃으면 그만인 말인데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전율했다. 이제껏 저를 짓누르고 있던 무게가 일순간에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그 이상한 해방감의 출처를 알 수가 없어 라온휘젠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악물었다.

“뭐, 그래 봤자 지금은 이 곤란한 상황부터 먼저 해결해야겠지만 말입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이사나가 묶여 있는 팔을 들어 보였다. 암울한 현실을 자각하면서, 긴장감이 감돌던 분위기가 오히려 한결 풀어졌다. 머뭇거리던 라온휘젠이 힐끔 눈동자를 굴리다가 그 손을 속박하고 있는 물체를 발견했다.

“……폐하께서도 마나 봉인구를 차고 계신 겁니까?”

“네, 보시다시피.”

“이상하군요. 폐하께서는 이능자가 아니실 텐데. 왜 이런 걸 채웠을까요?”

“아아.”

돌아오는 대답은 미묘했다. 아무 생각 없이 물었던 라온휘젠은 그 반응에 오히려 미간을 좁혔다. 별안간 그와 처음으로 마주쳤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거대하고 화려하던 물의 늑대와 함께 신기루처럼 나타났던 황제의 모습을.

“혹시…….”

덜컹! 그 순간 그들을 태운 마차가 크게 요동쳤다. 높이 울려 퍼지는 말의 비명과 함께 사방에서 검을 꺼내드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누, 누구냐!” 겁에 질린 외침이 길게 이어지기도 전에 숨이 끊어지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벌써 추격대가 온 걸까. 이사나와 라온휘젠은 반사적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게 아니고서야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잠시 시끄럽던 주변이 곧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다음 순간 마차의 문고리가 움직이더니 이내 문짝이 통째로 떨어져 나갔다. 엄청난 힘에 놀란 이사나와 라온휘젠이 긴장해서 뒤쪽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안으로 들어서던 이가 쯧, 가볍게 혀를 찼다.

“꼴이 말이 아니군.”

“……!”

짙은 그늘 때문에 보이지 않던 모습에 달빛이 들어섰다. 화사한 은빛 아래 결 좋은 머리칼이 천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단아하고 깨끗한 얼굴선을 넘어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화려한 이목구비 또한 나타났다. 한번 보면 잊히지 않는 강렬한 인상이었으나,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만날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존재였다. 멍해 있던 이사나가 신음과 함께 입을 벌렸다.

“……엘뤼엔……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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