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8화
그 모든 광경을 혀를 차며 지켜보던 트로웰이 곧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나도 이만 가야겠어요.”
“어, 어? 매튜, 너도 가겠다고?”
“네. 난 처음부터 참전은 안 한다고 했잖아요. 오랜만에 만난 게 반가워서 잠깐 동행한 것뿐.”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게다가 지금 넌 몸도 좋지 않잖아.”
“그냥 잠시 현기증이 났던 거예요. 지금은 멀쩡해요.”
“하지만…….”
“정말 괜찮다니까요. 그럼 나중에 봐요. 다들 몸조심하구요.”
본인이 괜찮다고 하는데 더는 말릴 수가 없어서 샴페인 용병들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멀어지는 뒷모습이 곧 눈앞에서 사라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꺼번에 두 사람이 빠져나간 자리가 유독 쓸쓸하게 느껴져, 그들은 모두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거참. 마음이 되게 허전하네.”
“그러게 말이야.”
“이번 일이 끝나면 개종이나 할까? 왠지 형벌의 신전을 방문하고 싶어졌어.”
“그거 괜찮은 생각이네. 마침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너희도? 나도.”
“굉장한걸. 나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우리가 한솥밥 먹고 산 지 오래되긴 했나 봐. 이렇게 뜻이 잘 맞는 걸 보면.”
마지막 이릴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이 느닷없는 심경의 변화가 형벌의 사제와 함께 지낸 덕분에 그에게 감화된 탓이라 여겼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긴 했다. 그러나 그 사제가 형벌의 신 엘뤼엔 본인이라는 것. 자신들이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신의 은총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는 것. 그리하여 영혼이 맑게 정화된 그들이 고귀한 운명을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은 끝끝내 깨닫지 못했다.
* * *
유격전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대공군은 결국 후퇴를 택했다. 한동안 지지부진하던 황제군의 진군 속도에 박차가 가해지면서, 양 진영의 전투도 한층 더 치열해졌다. 나날이 격화되어 가는 전장의 선봉엔 늘 황제 이사나가 있었다. 처음 독려 차원에서 선발에 들렀던 황제가, 다시 중군으로 돌아가는 대신 그대로 남아 전투를 지휘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수많은 이능을 보여 준 여신의 딸도 든든했지만, 누구보다 존귀한 존재가 가장 앞에 나가 있다는 사실은 병사들의 사기를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반대로 이는 대공군 쪽엔 상당한 압박이 되었다. 그들의 주인인 유카르테 대공은 내전이 가속화된 상황에서도 여전히 황궁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 검문 앞에 상비군만 두고는 이제껏 얼굴 한 번 내비친 적이 없었다. 가세하면 누구보다 큰 전력이 될 소드 마스터 카리브디스 공작조차 그저 자신을 지키는 개인 호위로 두고 있을 뿐이었다. 풍문으로는 매일 같이 산해진미를 즐기며 연회를 연다고도 했다. 그에 비해 황제는 그의 기사들과 더불어 기꺼이 최전방에 나와 있었다.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소년 황제는 전투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연히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전황이 완전히 기울지 않은 건, 대공이 게으름을 피워도 그것을 만회하는 인재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황궁의 수호령이라고 불리는 웨칸 공작을 비롯하여 위기의 순간마다 제국을 지키던 공신 가문의 수장들이 여전히 대공의 편에 있었다. 시행하는 작전마다 거듭 죽을 쑤고 있으나 세트니오 백작이 지니고 있는 군사력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어제 새벽에 웨칸 공작의 기병대가 합류했다고 합니다. 총력전을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늦은 밤까지 이어진 작전 회의에서 이사나는 심각한 얼굴로 보고서를 검토했다. 웨칸 공작은 카리브디스 공작과 더불어, 대공이 지닌 가장 강력한 패였다. 카리브디스 공작이 단신으로 천군의 힘을 내는 자라면 그는 천군을 활용해 십만 군의 역할을 해내는 장수였다. 대공의 가장 큰 조력자이자 그를 물심양면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지주이기도 했다. 사실상 그를 무너트리면 이 내전은 끝나는 거나 다름없었다.
“붉은 매 쪽의 소식은 어떻습니까?”
“모두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언제든 바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잘됐군요. 형님은 어디쯤 도착했습니까?”
“카웰 공작님은 저녁쯤에 랄프령을 지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도착하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주변 정찰을 더 늘리도록 하세요. 붉은 매는 대기하고, 비둘기들은 움직이라고 하십시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파합니다.”
“예, 폐하.”
명을 하달 받은 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자리에서 흩어졌다. 그제야 한숨을 돌리던 이사나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회의가 끝났는데도 자리를 떠나지 않은 알리사가 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알리사?”
“아니, 뭐…… 이사나 씨가 황제는 황제구나 싶어서.”
“황제인 나는 싫어?”
“누, 누가 싫대? 그냥 그렇다는 거지.”
“그렇구나. 다행이야.”
빙긋 웃는 얼굴에 알리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요즘 그는 자신만 보면 웃었다. 자신이 저의 웃는 얼굴에 약하다는 걸 알고 일부러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목소리는 왜 또 저리도 간드러진 단 말인가. 날마다 남자가 되어 가는 황제는 갈수록 요망해지는 법만 배우는 것 같았다. 물론 전부 근거 없는 오해에 불과했으나, 알리사는 제 생각을 굳건히 확신했다.
“그러고 보니 알리사, 왜 오늘은 회의에 혼자 왔어? 시벨 형님은?”
“응? 아~ 시벨 씨는 아셀을 가르치는 중이야. 바빠 보여서 그냥 혼자 나왔어.”
“그러면 안 돼. 위험하잖아.”
“바로 옆인걸 뭐. 내 천막에서 여기까지 고작 스무 발자국도 안 된다고.”
“그래도 안 돼. 다음부터는 꼭 같이 다녀. 걱정되니까.”
“별걱정을…….”
“알리사, 부탁이야.”
“알았어, 알았다고!”
“고마워.”
눈가가 스르르 풀리면서 다시금 미소가 지어졌다. 알리사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저것 봐! 역시 일부러 그러는 게 틀림없다니까!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걸까. 지켜보던 친위 기사들이 흠흠 헛기침을 내뱉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사나는 그저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이었다. 그걸 보니 혼자만 휘둘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몹시 억울해졌다. 노려보는 눈길에 움찔하는 이사나를 뒤로한 채 알리사는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부르는 음성이 따라왔지만 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정말 열 받아. 맨날 어린애 취급만 하고.’
이사나가 자신을 아끼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선봉에 서게 된 것도 알리사가 선발대를 떠나지 않겠다고 한 탓이 가장 컸다. 그녀의 가장 강력한 보호자였던 엘과 라피스가 군을 떠나게 되면서 이사나는 부쩍 예민해졌다. 시벨리우스가 남아 있긴 하지만 전처럼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게 된 모양이다. 덕분에 군의 사기가 충만해졌으나, 알리사의 입장에서는 과보호를 받는 기분이라 영 달갑지만은 않았다.
나는 왜 이렇게 성장 속도가 느릴까. 이사나는 하루마다 키가 커지는 것 같은데, 자신의 키는 여전히 그대로인 것 같았다. 또래보다 작은 손발도, 연약해 보이는 체구도 싫었다. 얼른 크고 싶었다. 훌쩍 자라서 자신도 한 사람의 몫을 제대로 한다는 걸 증명해야 했다. 그렇게 되면 지금 이 관계도 뭔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응?”
툴툴거리며 걷던 알리사는 곧 진영 아래쪽에 홀로 앉아 있는 뒷모습을 발견했다. 꽃물을 들인 듯 특이한 머리카락 색 때문에 그의 정체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카터스 제국의 라온휘젠 황태자였다. 아셀을 해임한 이후로, 그의 일행은 매우 조용하게 지내고 있었다. 얼굴을 마주할 일이 없다 보니 대화를 섞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이렇게 지나치듯 만난 것도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도 될 법한데 오늘따라 그 뒷모습이 유난히 마음에 걸렸다. 알리사는 할 수 없이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여기서 뭐 해요?”
“……!”
흠칫 놀란 황태자가 검을 움켜쥐었다가 알리사를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동요가 일었던 얼굴에서 빠르게 경계심이 흩어져 갔다. 그 적나라한 반응에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반려성.”
“내 이름은 알리사거든요? 반려성이 아니라.”
“아아, 실례했군, 레이디 알리사.”
“그냥 알리사라고 불러 줄래요? 그거, 카터스 제국에서 귀족 여성에게 쓰는 표현이죠? 그런 거 간지러워서 싫어해요. 나한테 어울리지도 않고.”
어린애 취급도 싫지만 숙녀 취급은 더더욱 사양이다. 알리사가 질색하자 라온휘젠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대는 호불호를 표하는 것에 능하군. 알폰프 여성들이 솔직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귀족 여성이 대놓고 싫다 말하는 건 처음 들어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불만이에요?”
“아니, 나쁘지 않다.”
생각보다 순순한 대답에 알리사가 찌푸리고 있던 표정을 폈다. 그게 섣부른 판단이었다는 걸, 그녀는 이어지는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하지만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은 마음에 들지 않는군. 레이디는 고귀한 여성에게 붙여지는 호칭이다. 제왕의 반려가 될 여성에게 레이디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 자격을 가질 수 없을 거로 생각한다.”
“와아, 수법 좀 봐. 일단 달래고 난 뒤에 뜻을 관철하겠다, 이거예요? 능변가라고 자랑하고 싶어요? 논리를 들먹이면 내가 아예, 그러십니까, 그럼 그렇게 하십쇼, 이럴 것 같아요?”
“왜 화가 났지? 그대가 솔직하게 말하기에, 나도 내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그래서 그 호칭으로 계속 부르겠다고요?”
“……그대가 싫다면 그만두도록 하지.”
말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낀 라온휘젠이 곧바로 항복을 선언했다. 한층 시무룩해진 모습에 알리사는 피식 웃었다. 오만하고 위압적인 황태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늘 본 그는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첫인상이 워낙 나빴던 탓에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일면이었다.
“그런데 혼자서 뭐 하고 있던 거예요? 황태자가 수행원도 없이 다녀도 괜찮아요?”
“그저 생각 중이었다. 거리를 두고 있을 뿐, 호위는 근처에 있다. 그러는 그대는 왜 혼자 있지?”
“뭐 어쩌다 보니.”
“그대의 능력을 과신하고 있군. 방심은 가장 큰 독이다. 아군 진영 안이라고 해도 안전하지는 않다. 마음에 해로운 것을 품은 자들이 어디에 도사리고 있을지 몰라. 그러니 혼자 다니지 마라.”
“당신도 그 소리예요? 그만둬요. 잔소리는 이사나 씨만으로도 충분하다고요.”
보호자 행세는 싫다. 안 그래도 이미 그 때문에 심기가 상한 상태였다. 노골적인 거부의 기색에 라온휘젠이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이사나의 이름을 언급한 건 실수였을까. 뒤늦은 자책이 밀려들었지만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 분위기가 불편하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라온휘젠은 흘끗 그녀의 표정을 살폈을 뿐 이렇다 할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잠시 멈췄던 대화도 다시 유연하게 진행됐다.
“황제와는 우연히 만난 것 같더군.”
“아, 맞아요. 이사나 씨가 지나는 길에 내가 살던 마을을 방문했었죠. 날 위험한 순간에서 구해 줬어요.”
“그런가. 말 그대로 운명적인 만남이었겠군.”
“뭐, 운명적이라면 운명적이긴 하죠.”
<전부 운명 같다고 생각해.>
언젠가 들었던 이사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사나는 운명을 불신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그녀와의 만남을 운명 같다고 말했었다. 아무런 마음의 망설임 없이 누구보다도 곧고 순수하게.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거다. 그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었다는 걸 자각했던 것이.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아 알리사는 얼른 뺨을 문질렀다. 그래서 저를 보는 황태자의 시선이 어느새 차가워져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그대가 그를 선택한 이유가 그래서인가?”
“네?”
“내게는 이제 기회가 없는 건가? 난 황제보다 더 오랫동안 그대를 기다렸다. 그대를 찾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었다. 그대가 태어나 자란 마을에도 찾아갔었지. 알고 있나? 그 마을은 그대가 떠난 이후로 완전히 황폐해졌다. 이제는 그곳에 아무도 살지 않는다.”
“무슨……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요……?”
“그래. 모두 이주하고 버려진 마을이 됐더군.”
“어, 어째서?”
“축복의 근원이던 반려성을 쫓아냈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
생각지 못한 사실에 알리사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나고 자란 마을은 그녀에겐 지긋지긋한 기억만 가득한 장소였다. 그리운 적도, 돌아갈 생각을 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잘못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그래도 고향이라고, 마을이 버려졌다는 사실은 조금 충격이었다.
“많이 놀란 것 같군.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나?”
“그거야…….”
당연히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은 예감이 좋을 뿐이지 미래를 훤히 들여다보며 예측하는 능력을 갖춘 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저런 식으로 물어보는 걸까. 당황해서 머뭇거리는 알리사를 라온휘젠은 그저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군청색 눈동자엔 이제껏 보인 적 없는 격렬한 감정이 타오르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리사는 황급히 몸을 틀어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라온휘젠 쪽이 그녀의 팔을 붙잡는 것이 더 빨랐다. 강제로 몸이 고정되는 바람에, 알리사는 억지로 황태자와 시선을 다시 맞춰야 했다. 눈을 부릅뜬 소녀를 응시하는 라온휘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도 그대를 알아보지 못했지. 그대의 가족들도, 그대를 통해 수혜를 입은 마을 사람들도, 그대를 구해 줬다는 황제도. 심지어 그대 자신조차 그랬던 것 같군. 그래, 그대를 찾아다니고 있던 건 나뿐이었다. 그대의 가치를 알아봐 줄 수 있는 것도 나뿐이다. 그대가 온전히 필요했던 건 나였어.”
“이, 이봐요.”
“그런데, 왜 내가 아니지?
붙잡힌 팔이 아팠다. 뿌리치려고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완력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느껴 본 건 처음이라 덜컥 겁이 났다. 평생 차별적인 시선 속에서 살았으나, 귀족으로 자란 덕에 알리사는 한 번도 거친 취급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이사나도, 엘도. 그녀 주변의 남자들은 늘 태도가 조심스러웠기에 더더욱 이런 일을 겪을 일이 없었다. 멀든을 불러내 방어해야겠다는 것에 곧바로 생각이 미쳤을 때였다.
“그 황제는, 어째서 모든 걸 다 쉽게 얻는 거지…….”
이어진 말에 절로 숨이 멈췄다. 알리사는 정령을 불러내려던 것을 멈추고 라온휘젠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악물고 있는 그는 몹시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강철같이 단단하게 보이던 남자가 지금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게만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니 잠시간 장악했던 두려움이 빠르게 밀려 나갔다.
“저기…….”
“쉽게 보였다면 미안하게 됐군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는 게 유감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