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7화
“뭘 봤지?”
“……모르겠어.”
“뭐?”
“생각이 안 나. 뭔가를 보긴 했던 것 같은데.”
그토록 강렬한 충격에 시달렸건만 기억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움켜잡아도 손가락 사이에서 흩어지는 사풍처럼, 처음부터 잡을 수 없는 것을 쥐려고 했던 것 같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서 트로웰은 실소했다. 그런 그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엘뤼엔이 가볍게 혀를 찼다.
“네가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는 걸 보면 악신에 관계된 걸지도 모르겠군.”
“그거 참 위안이 되는 말이네. 기분이 더 나빠졌어.”
“그래서, 엘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지?”
곧바로 이어지는 질문에 트로웰은 눈썹을 찌푸렸다. 잠깐에 불과하긴 했지만 의식을 잃었다가 이제 막 안정된 상태였다. 그런 상대에게 곧바로 제 용건부터 확인하다니. 역시 본성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이든 신이든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걸 그는 이 순간 굳게 확신했다.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 굳이 화를 자초할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엘뤼엔이 예민해질 만한 상황이기도 했다. 한동안 엘의 위치를 제대로 짚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도에 있다는 것까지는 확인했는데, 그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것 또한 드문 경험이다 보니 내색하진 않았어도 트로웰 역시 꽤 초조해져 있었다. 어쩌면 그 때문에 그런 이상한 경험을 한 걸지도 몰랐다.
트로웰은 다시금 정신을 집중하고 시야를 전개했다. 이제야 때가 이르렀음일까. 늘 허탕만 치던 시야가 다행히 이번엔 깨끗하게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낯선 광경 속에서 찾고 있던 이가 보였다. 여느 때처럼 밝게 웃고 있는 엘의 모습이.
“아, 찾았…….”
드디어 발견했다는 기쁨과 무사하다는 안도감에 그가 무심코 미소 지으려던 순간이었다. 트로웰이 웃으려던 얼굴 그대로 굳었다. 뜻밖의 상황을 마주한 듯, 당황한 기색이 그의 얼굴 위로 번져 나갔다. 그 미묘한 반응에 지켜보던 엘뤼엔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번엔 또 뭐지?”
“……엘이 금발을 하고 있어.”
“마법의 힘이라도 빌렸나 보군.”
정령왕의 머리색은 염색되지 않지만, 일시적인 눈속임 정도는 가능하다. 대수롭지 않게 상황을 판단하는 엘뤼엔과는 다르게 트로웰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엘뤼엔.”
“……?”
“엘이…… 원래 금발이었나?”
“……그 멍청한 질문에 내가 답을 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가차 없는 독설에 트로웰은 설핏 웃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한 질문이긴 했다. 엘이 금발이었냐니. 그의 머리색이 뭐였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탄생한 그 순간부터 지켜보지 않았던가. 그게 아니라도 원래 엘퀴네스는 고유색인 푸른색 머리카락만 타고났다. 트로웰이 대대로 흑발에 금안을 지니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라 새삼스럽게 확인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금발인 엘이 익숙하게 느껴진 걸까. 더구나 오랜만에 보는 것처럼 반갑기까지 했다. 분명 금발을 한 엘은 오늘 처음 보는 걸 텐데도.
머릿속을 헤엄치는 수많은 생각들 때문에, 그는 좀처럼 멍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그를 응시하던 엘뤼엔이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가급적 관여하고 싶지 않았지만, 외면할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이봐, 트로웰. 일단 말해 두겠는데.”
“음?”
“지금 그거. 엘한테는 말하지 마라.”
“……흐음?”
잠시간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트로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얼굴을 굳혔다. 보다 선명해진 금안에 황당하다는 감정이 떠올랐다.
“뭐야, 엘뤼엔. 설마 내가 그런 걸 본인에게 확인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혹시 원래 금발 아니었냐고? 너무하네. 날 그렇게까지 바보 취급하다니.”
“하지만 이미 마음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지.”
“…….”
“네가 그런 위화감을 가볍게 넘어갈 리 없고.”
“너…….”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 모를 놈들의 말에도 쉽게 흔들렸는데, 네가 하는 말이라면 더 영향이 클 거다. 그 녀석은 또 쓸데없는 생각에 빠질 거야.”
“또?”
“아무튼 난 분명히 말했다.”
끝까지 담담한 말투였으나 안에 담긴 의미는 경고에 가까웠다. 트로웰의 얼굴이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니 너, 이전에 ‘균열’이니 뭐니 이상한 말을 했었지. 대체 뭘 알고 있는 거야?”
“아무것도.”
“거짓말하지 마. 아무런 의미 없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잖아.”
“정말 모른다. 내 기억엔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래, 넌 기억해 내기 시작한 것 같군.”
“지금 무슨 말을…….”
“그건 아마도 네가 ‘트로웰’이기 때문이겠지. 너희는 처음부터 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태어나는 존재니까. 감춰진 것을 탐색하는 분야에선 나보다도 네 힘이 더 쓸 만할 거다. 그러니 궁금하다면 네가 직접 알아내도록 해. 그게 가장 빠를 테니.”
동요를 담은 금안이 흔들렸다. 풀리지 않은 의문을 담은 눈빛이 보다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엘뤼엔은 더는 관여할 마음이 없었다. 다시금 한숨을 내쉰 후, 그는 곧 붙잡힌 부분을 떼어 내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트로웰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떼어 내려는 손을 오히려 붙잡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걸 느낀 엘뤼엔이 얼굴을 찌푸릴 때였다.
“엘이 기억나지 않아?”
“……뭐?”
“안 되지, 엘퀴네스. 그래서는 안 돼. 엘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너만은 엘을 잊어선 안 되잖아.”
“너, 지금 날…….”
“네가 엘을 잊었다는 말을 어떻게 그리 가볍게 할 수 있는 거지? 그 애는 네 아들이었는데.”
“…….”
찡그리고 있던 엘뤼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대로 입을 다문 그는 트로웰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집요할 정도로 시선을 맞추고 있는 상태인데도 눈빛이 어딘가 멍했다. 조금 전까지 지니고 있던 화려하고 선명히 빛나는 금안이 아니었다. 자신을 향해 말하고 있으나,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살짝 혀를 찬 후 엘뤼엔은 붙잡히지 않은 쪽의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방심한 상태라 기습을 그대로 허용한 트로웰은 몸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에 신음했다.
“윽, 너 이게 무슨 짓……!”
“그래, 네 말마따나 엘은 내 아들이지. 난 엘퀴네스가 아니지만.”
“……!”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 앓던 트로웰이 그 말에 어깨를 흠칫 떨었다. 방금, 내가 뭐라고 했던 거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렸던 정신이 맑아지면서 인지하지 못했던 현상을 자각했다. 그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엘뤼엔, 나 지금…….”
“이제 정신이 들었나?”
물빛을 닮은 시린 눈동자를 마주하니 지나간 상황이 더 뚜렷하게 느껴졌다. 트로웰은 크게 숨을 삼키곤 두 손으로 머리를 천천히 쓸어 올렸다. 지나치게 현실성이 높게 구현된 탓에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가는 감각이 몹시 불쾌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제 몸에서 일어난 현상임에도 이해가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생각하는 걸 멈추는 게 나을 거다. 전부 쓸데없는 것들일 테니까.”
여전히 차분한 음성을 듣고서야 들끓던 마음이 차츰 가라앉았다. 물론 진정했다고 해서 머릿속을 장악하고 있는 의문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트로웰은 노려보다시피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넌 전혀 아무렇지 않은 것 같네, 엘뤼엔. 네가 말한 균열이란 게 이거였어? 확실히, 이런 건 엘에게 알릴 수 없는 내용이긴 하지.”
“알아들었다니 잘됐군. 두 번 당부하지 않아도 되겠어. 이왕 상황 판단을 한 김에 중단된 이야기나 계속했으면 하는데. 엘을 찾았다고 했나?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지?
다시금 두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고요한 공방에서 먼저 체념한 쪽은 트로웰이었다. 이미 침묵을 택한 엘뤼엔이 그에게 원하는 답을 내주는 일은 천지가 개벽해도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하릴없이 시간을 소비하느니 조금이라도 건설적인 대화를 하는 게 더 나았다.
“엘은 일행들과 대화하고 있었어. 황궁이랑 가까운 위치의 여관에서 머무는 중인 것 같았고. 머리색을 바꾸긴 했지만 별다른 일은 없어 보였어.”
“미네르바가 만든 그 정령검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거라고 했었지. 해결하는 데 상당히 오래도 걸렸군.”
“바람의 고유 힘을 나눠 가진 검이니까. 나도 그 힘을 제대로 실감한 건 이번이 처음이야. 지금이라도 회수한 게 다행인 건지도 몰라.”
씁쓸하게 답한 후 트로웰은 나직이 혀를 찼다.
지난 시간은 그에겐 고행이나 마찬가지였다. 엘이 이사나와 헤어져 수도로 떠났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까지는 어렵지 않았다. 블레스터를 회수하려고 한다는 것까지도 쉽게 파악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폭주한 블레스터의 기운은 미네르바가 분노한 느낌과 매우 흡사했다. 그 기운이 수도 전체를 장악하는데 하위 정령들이 그 안에서 제대로 활동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눈’이 닿지 않는 곳은 등불이 꺼진 밤이나 매한가지. 엘의 기운조차 거친 바람에 뒤섞여 정확히 집어내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런 현상이 며칠이나 지속됐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지만, 그쪽의 상황을 계속 확인하지 못하게 되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내 옆에서 베어 버릴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는 엘뤼엔의 존재는 더 난처하기만 했다. 지금은 신이 되었으나 한때는 그 역시 정령왕이었던 존재. 아무리 성격이 나빠도 이런 상황을 납득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단지 초반에 길 찾기를 방해하는 바람에 신용을 잃은 것이 원인이었다. 한 번 속아 준 신은 이후로는 어떤 말을 해도 순순히 믿으려 들지 않았다. 차라리 그의 감각이 멀쩡했다면 스스로 상황을 파악했을 텐데, 오로지 남에게 의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의심이 더 깊었다. 그러게 왜 마신의 신물 따위를 착용해서 고생을 사서 하느냐는 타박은 이 상황에서는 이미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의외인 건 그럼에도 그가 트로웰의 말을 적당히 따라 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여전히 황제군을 찾아가는 본래의 일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엘과의 만남을 피해야 한다는 처음의 조언을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이렇게 된 것엔 조금 다른 배경이 있었다.
“내일 새벽이라고 했나?”
“그래.”
재차 확인해 오는 엘뤼엔의 질문에 트로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모든 일정이 순조로웠다. 예정일을 앞둔 상태에서 엘의 안부도 확인했으니 시기 또한 나쁘지 않았다. 때마침 흩어져 있던 용병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대화가 자연스레 중단됐다. “매튜, 몸은 좀 어때?”, “데운 우유를 가져왔어. 이것 좀 마셔 봐.” 막내를 챙기느라 부산을 떠는 일행들 틈에서 트로웰은 어쩔 수없이 그들과 행동을 맞췄다.
“아, 사제님. 이제 곧 황제군 진영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언덕 아래쪽에서 횃불이 보이더군요.”
불쏘시개를 구하러 갔다 온 헤롤이 자신이 보고 온 사실을 전달했다. 이미 파악해 두고 있던 부분이었지만 엘뤼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앉아 있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엘뤼엔은 그들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이제 그만 각자의 길을 갈 때가 된 것 같군. 너희들은 이곳에서 밤을 보내고 내일 아침에 내려가라.”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였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샴페인 용병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예? 설마 이렇게 가시는 겁니까?”
“그래.”
“아니, 사제님. 왜 이리 갑자기…… 이미 날도 저물어 가는데요. 그냥 내일 저희와 함께 내려가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마, 맞아요! 밤중의 산길은 위험하다고요!”
앞다투어 만류하는 말들에 엘뤼엔이 피식 웃었다. 그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본 샴페인 용병들은 곧 머쓱해졌다. 전부 쓸데없는 염려에 불과하다는 건 사실 말을 꺼낸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평범한 사제가 아니었다. 마신전의 신관들과 병사들을 손짓 하나로 쓰러트린 적도 있었고, 웬만한 사람들은 음성만으로도 제압할 수 있었다. 강행군에서 지친 기색을 보인 적도 없었으며 독주를 물 대신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산에 들어가면 흔히 마주치게 되는 몬스터나 사나운 짐승들조차 그와 함께하고 난 이후부터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반대로 사냥거리로 적합한 온순한 초식 동물들은 잘도 나타났다.
처음엔 우연인가 싶었지만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알 수 있었다. 그에게는 악운이 피해 가고 행운이 찾아드는 힘이 있었다. 흡사 신의 축복으로 빚어진 듯한 그에게 밤길 따위가 위협이 될 리 없다. 단지 만류하는 건 본인들이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정이 많이 깊어진 건지. 대하는 게 어렵고 불편하기만 하던 존재였는데, 막상 헤어진다고 생각하자 안타깝고 서글픈 기분이 밀려들었다. 그들로서도 이런 감정이 드는 게 당황스럽기만 했다. 용병이란 본래 방랑하는 일이 많아 잠시 어울리다 헤어지는 관계에 익숙한 존재였다. 전선에서 만나 서로의 목숨을 맡기던 사이라도 당장 다음날이면 남이 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데 어색하기만 했던 사제가 떠나는 것이 왜 이렇게 아쉽단 말인가. 마치 어미 새를 잃어버린 아기 새가 된 기분이다. 이런 상실감을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던 탓에 샴페인 용병들은 그대로 시무룩해졌다. 그들을 돌아본 엘뤼엔이 다시금 짧게 웃었다.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아, 그래. 한 가지 좋은 걸 알려 주지.”
“예?”
“해거름을 살피려는 날에 나시크가 마넬의 품에 안길 거다. 붉은 금환이 페르마의 손가락을 장식하면 동쪽으로 가서 푸른 날개를 만나도록 해라. 너희는 좀 더 올라갈 수 있을 거다.”
눈앞에서 신탁이 떨어졌으나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때문에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실감하는 이도 없었다. 용병들이 한 일이라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그저 한없이 응시하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