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6화
“재밌지 않아? 그거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정된 거다? 누군가랑 통신하는 것 같더니 곧바로 연회를 열 거라더라?”
“그게 왜 재밌는데?”
“지금 대공 입장에선 내전이 썩 불리하게 풀리고 있는 상황이지. 민심을 살 만한 상황이 필요하긴 할 거야. 사기를 높이기 위해 좋은 일을 떠들썩하게 과장하는 건 있을 수 있다 쳐. 하지만 황실 연회가 그렇게 금방 열리는 건 줄 알아? 준비 과정에서 얼마나 할 게 많은데. 아무리 가볍게 마련해도 기본적으로 며칠은 걸리게 되어 있어. 그런데 바로 내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뭐긴. 대공이 우리를 만나려고 그만큼 몸이 달았다는 뜻이지.”
“……어?”
“제물로 적합해 보였겠지. 나이도 어려, 외모도 출중해, 살인범을 단숨에 잡을 정도로 능력도 뛰어나. 꽤 고급품으로 보이지 않았겠어? 나나 이 꼬맹이나.”
“……!”
“난 이미 비슷한 경험도 있거든. 전에 말했잖아. 제물로 잡혀갔던 적 있다고.”
표정이 굳는 것이 스스로도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반대로 라피스는 소파에 더 느긋하게 몸을 파묻었다.
“하나, 둘, 셋……. 흐음, 한 여섯 명쯤 되나. 빠져나갈까 봐 주위에 감시인도 붙여 놨군. 이쯤 되면 어떻게든 붙잡아 가겠다는 의지가 확고하게 느껴지는데. 아주 애간장이 닳고 있는 모양이야.”
재밌다는 듯 중얼거리는 말에 나도 그제야 주변을 살폈다. 정말로 근처에서 배회하고 있는 기척들이 있었다. 조금 전 돌아갔던 치안대의 기척과 크게 다르지 않은 걸 보면 그들 중 일부가 몰래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당장 대공을 잡아야겠어.”
잠시간 묻어 두었던 현실이 다시금 선명해졌다. 레이와 블레스터 문제를 처리하는 데 서두르느라 미뤄두고 있던 일을 드디어 시작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그러나 라피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연회에 가.”
“굳이 뭐하러?”
“넌 내가 왜 이제껏 그놈들 장단에 맞춰주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건데? 심심해서?”
“그야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쓸 리가 없지.”
“잘 아네.”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고 있으려니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 보니 라피스는 치안대가 아니라 근위대가 달려왔더라도 순순히 상대해 줄 녀석이 아니었다. 후환이나 뒷수습 같은 걸 신경 쓰는 성격도 아니고, 웬만한 무력은 뿌리칠 완력도 있는 데다, 이동 마법까지 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그 자리에서 달아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거다. 그런데 이번엔 어째선지 얌전히 조사에 응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호위까지 받으면서 귀환했다. 그들을 대하는 태도도 그답지 않게 정중하고 우아했었다. 마치 정말 귀족 아가씨라도 된다는 것처럼.
“대공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거든. 우리를 궁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연회를 열 수도 있겠다 싶었지. 그랬더니 정말 예상대로 흘러가더라고.”
“……라피스. 그렇게 연회에 가고 싶었어?”
“지금 장난해?”
“농담이야, 농담. 아무튼 그래서? 대공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는 것까진 알겠어. 하지만 그가 유도하는 대로 따라줘서 뭘 어쩌자는 건데?”
“놈을 활용해 숨어 있는 진범을 끌어내야지.”
“진범?”
“마왕 말이야. 아니지, 이제는 마왕이었던 녀석이라고 해야 하나?”
“……!”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에 얼굴이 굳었다. 양편에 앉아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던 아스와 데르온도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경직된 우리를 돌아본 라피스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잊은 모양인데, 이 모든 일의 배후는 대공이 아니라 그놈이야. 대공은 그저 놈이 부리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잔챙이 따위를 잡아서 뭐해? 이왕이면 머리를 노려야지.”
당연히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었던 게 아니다. 단지 마왕을 찾을 방법이 없었을 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자의 은신은 완벽했다. 대략적인 위치나 기운조차 짚이지 않는 걸 보면 아마도 결계를 쳐둔 것 같다. 어쨌거나 하급 정령들의 눈으로는 그를 찾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일단 한패인 대공부터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거다. 라피스라고 이 점을 모르진 않을 텐데 이상론을 들먹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한 가지 써 볼 만한 방법이 있어. 아마 이게 통하는 것도 지금뿐일 거다.”
“……그게 뭔데?”
“그 의식이라는 게 결국 타인의 생기를 빼앗아 흡수하는 주술이거든. 아무리 거창해 봤자 그런 종류의 주술은 기본 원리가 같아. 고정된 바닥에 방진(方陣)을 깔아야 하지. 그걸 활용하면 놈을 이쪽으로 불러낼 수 있을지도 몰라. 설령 실패하더라도 밑져야 본전일 테고.”
“한 마디로 의식 장소를 찾아야 한다는 거네.”
“그래. 하지만 거긴 놈이 보호하고 있을 거야. 지금 놈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결계를 쳐서 가려뒀겠지. 그러니 대공을 활용하자는 거야. 그 녀석은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필요한 제물을 얻으면 바로 직행하지 않겠어?”
“그 말은…….”
“우리가 미끼가 되자는 거지.”
즉, 대공에게 사로잡힌 척하자는 소리였다. 혼탁했던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확실히 꽤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성공 가능성이야 불확실하다지만 시도할 수 있는 게 있는데 활용하지 않는 건 아까웠다. 대공을 잡는 건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나는 라피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조금 의외라서. 네가 먼저 적극적으로 계획을 짜는 일은 드물잖아. 아니, 거의 처음 아닌가?”
“다른 것도 아니고 악신이니까. 그런 게 태어나는 건 나도 사양이야.”
하긴, 악신은 개인적인 일로 치부하기 어려운 존재이긴 했다. 아무리 세상 혼자 사는 라피스라도 차원의 존속을 위협하는 재앙을 모른 척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신계 쪽은 여전히 잠잠한 상태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들 쪽에서 연락이 오기만을 얌전히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이번 일이 실패하면 대대적으로 전 종족에게 상황을 알리고 대처방안을 본격적으로 모색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 전에 흩어져 있는 정령왕들부터 한 자리에 모아야겠지만.
‘근데 왠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문득 느껴지는 위화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무언가가 갑자기 없어진 것처럼, 왠지 모르게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주위를 살펴 일행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라피스와 아스, 데르온까지. 모두 빠짐없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나서야 불현듯 떠오르는 부분이 있었다.
“아…….”
“왜 그러십니까, 엘 님?”
신음을 흘리는 나를 보고 데르온이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일행들의 시선이 쫓아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사실을 확인하는 게 더 급했다.
벽면 뒤쪽을 넘어가 침실로 향했다. 유감스럽게도 드러난 광경은 예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곳에 원래 누워 있어야 할 남자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침대 바로 옆, 활짝 열린 창문이 그 이유를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도망쳤네.”
뒤따라온 아스가 상황을 파악하고 중얼거렸다. 지금의 내 심경을 고스란히 닮아 있는, 황당해하는 표정이었다. 대체 언제 깨어나서 사라진 건지. 너무 기가 막히니 오히려 헛웃음만 나왔다. 소드 마스터이니 기운을 제어하는 데 능하긴 하겠지만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기척을 죽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어쩌면 그가 내 시선을 피해 도망 다녔던 게 블레스터의 도움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의 그에겐 바람의 힘도, 보호하는 결계도 없다는 거다. 시야를 확장해서 살피자 으슥한 골목을 걷고 있는 카리브디스 공작을 곧 찾을 수 있었다. 탈출의 귀재답게 그 사이 꽤나 멀리도 간 상태였다. 공작저와는 반대 방향인 걸 보면 자택으로 돌아갈 예정은 없는 모양이다. 오히려 가려는 방향에 있는 건 황궁이었다. 그걸 확인하고 나니 머리가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대공하고는 틀어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건가.”
블레스터의 폭주가 진행된 건 레이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정신을 잃은 상황에서도 그가 대공을 생각하는 마음은 여전했었다. 이사나가 죽어야 끝난다고 여겼을 뿐, 대공을 향해 분노의 감정을 품은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이대로 가서 다시 붙잡아 와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가 무슨 계획을 갖고 있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복잡한 기분을 삼키고 있는데 상황을 파악한 데르온이 다가오며 말했다.
“일단 제가 지켜보겠습니다.”
“그래 줄래요, 데르온?”
“예, 맡겨 주십시오.”
간결한 대답과 함께 데르온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공작의 근처에 자리 잡고 감시를 시작한 것을 확인한 후에도 나는 그쪽의 상황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공작이 여전히 대공의 검이라면, 그에게 레이를 맡기는 건 곤란하다. 그가 깨어나면 그걸 가장 먼저 확인하고 싶었는데 시작부터 계획이 틀어져서 허탈했다. 이럴 때 내가 트로웰이었다면 일이 한결 편해졌을 텐데. 말하지 않는 속내를 먼저 읽어내는 그의 능력이 이 순간만큼은 몹시 부러웠다.
* * *
쏴아아―
드넓게 펼쳐진 초원에 달콤한 바람이 불었다. 춤을 추는 나뭇가지와 어린 풀잎들. 그 사이에서 멋대로 날아오르는 눈꽃을 닮은 꽃잎들의 향연. 새파란 하늘 위에서 울려 퍼지는 정령들의 맑은 웃음소리. 이미 오래전 일이 되어 버린,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웠던 황금시대.
바로 그곳에 ‘그’가 있었다.
<넌 대체 누구지?>
자신의 물음에 그가 눈을 크게 떴다가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바람에 따라 흩날리는 그의 금색 머리카락이 부서진 유리가루처럼 반짝거렸다.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아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한 번도 인간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눈앞의 그만은 달랐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 와 새삼스러운 감정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많은 것들이 달랐었다. 누구나 자신의 앞에서는 손쉽게 껍질을 벗었건만 그에 대해서만은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했다. 보이고 들리지 않는 것이 이렇게나 답답한 기분이었음을 그를 통해 처음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도 그는 특별한 존재였다. 아마도 본능적인 이끌림이었을 것이다. 홀리는 기분이 이와 비슷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은밀한 장난을 치는 어린아이처럼 한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간다. ‘쉿!’하고 짧게 내뱉은 입술이 망설이듯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어쩔 수 없지.>
<너한테만 가르쳐 줄게.>
아직 성년이 채 되지 못한 어린 미성. 그리고 점점 더 짙어지는 바람의 향기.
<……러 왔어.>
<뭐?>
놀란 표정을 짓는 자신에게 ‘그’는 또다시 미소 짓는다.
<……서도……였어.>
이어지는 진실들이 머릿속을 온통 헝클어 놓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곧 허탈하게 따라 웃었다. 아아, 그랬구나. 그랬던 거였구나. 모든 걸 깨닫고 나니 오히려 안도감이 일었다. 저도 모르게 사랑스럽게 느껴졌던 마음도, 그를 보면 결국은 풀어지고 말던 기분의 정체도 드디어 알았다. 이런 걸 알려줘도 되는 거냐고. 염려하며 건넨 질문에 그가 괜찮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상관없을 거야. 이 정도는.>
<하지만…….>
<정말 괜찮아. 그리고…….>
안심하라는 듯 그가 손을 내밀어 가볍게 어깨를 짚어온다. 마주한 얼굴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는 채다. 왠지 그 표정이 서글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전부 잊을 테니까.>
“……헉!”
가슴에서 심한 격통이 일었다. 추락하는 듯한 아찔한 감각이 전신을 사로잡았다. 트로웰은 자신도 모르게 옷깃을 부여잡고 숨을 크게 삼켰다. 균형을 잃은 느낌이 들더니 다리에서 빠르게 힘이 풀렸다. 그대로 무너지는 것을 누군가가 받아내 지탱했다.
“매튜!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뭐야, 어디가 아픈 거야?”
생전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어린 단원의 낯선 행동에 주변에 있던 일행들이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귓가에서 익숙한 목소리들을 들으니 멀어졌던 현실감이 빠르게 돌아왔다. 이마에 서늘한 손길이 닿으면서 정신이 보다 더 선명해졌다.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자 흐릿했던 시야가 천천히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야 긴 금발의 남자가 자신을 빤히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이마에 닿아 있는 손이 그의 것이라는 것도.
‘엘뤼엔.’
사람들 앞에서는 부를 수 없는 남자의 이름을 속으로 삼켰다. 아마도 쓰러지는 자신을 붙잡았던 이도 그일 것이다. 빛이 돌기 시작한 금안을 가만히 살핀 엘뤼엔이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시 현기증이 있었던 것 같군.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게 좋겠는데, 일단 불부터 피우지.”
“아, 예! 알겠습니다! 불 말이죠!”
“덮을 만한 모포와 덥힌 물도. 아니, 이왕이면 우유나 수프 같은 것이 더 나을 것 같군.”
“옙! 지금 당장 마련하겠습니다!”
주위는 숲이었고, 당장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돌려 말했지만 결국은 야영에 들어가라는 지시나 다름없었다.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일행들이 그의 요구에 맞춰 흩어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멀찍이 떨어진 것을 확인한 후 엘뤼엔은 트로웰에게 다시 시선을 보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창백했던 얼굴이 한층 안정되어 있었다.
“갑자기 혜안이 열렸나? 네가 의식을 잃다니 별일이군.”
“……그러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트로웰은 조금 전의 상황을 되짚어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는 엘뤼엔의 거듭되는 재촉(을 빙자한 협박)을 못 이겨 엘의 상황을 확인하던 중이었다. 시야를 멀리까지 전개했었는데, 머릿속이 갑자기 아득해지더니 전혀 다른 장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간혹 그가 의도하지 않아도 느닷없이 미래나 과거가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흔히 겪는 일이라 처음엔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런 현상에서 이렇게까지 정신이 혼란해진 적은 없었다. 이 정도로 기운이 소진된 것도 처음이었다. 그 자체도 매우 당황스러운데, 그보다도 그를 황당하게 만드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