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25화 (325/608)

제325화

살인마가 잡혔다니? 나는 반사적으로 침대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멀쩡히 누워 있는 공작은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범인이 이곳에 있는데 대체 누가 잡혔다는 건지 모르겠다. 나와 같은 동작을 똑같이 실행한 데르온도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사방이 온통 시끌시끌했다. 가만히 들어보니 대로에서 잡힌 살인범과 그를 붙잡은 용감한 시민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럴 때 돌아오지 않는 두 사람이 마음에 걸리는 건 그저 내가 너무 과민한 거겠지. 애써 외면하려다가도 푹 한숨이 쉬어졌다.

“확인해 보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 * *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굳이 라피스와 아스를 찾으러 나갈 필요는 없었다. 위치를 알아보기 위해 시야를 확장하기 무섭게 여관으로 돌아오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웬 사륜마차를 탄 채로, 심지어 근위대인지 경비대인지 정복 차림을 한 병사들의 극진한 호위를 받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 사실보다 나를 더 당황하게 만든 건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라피스의 모습이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달랐다.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달랐느냐 하면…….

“다 왔습니다.”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곧 도착한 마차가 여관 앞에 멈춰 섰다. 아스가 먼저 내려섰고, 그 뒤를 따라 라피스가 내렸다. 아니, 정확히는 내리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내리기에 앞서 병사가 손을 먼저 내밀었다.

“발밑을 조심하십시오.”

“…….”

앞서 내린 아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친절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라피스가 무슨 생각인지 그 손을 잡았다. 그의 화사한 머리카락이 드러나자 병사들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마치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마냥 다들 수줍어하는 기색이라 지켜보는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그 이유는 곧 명확해졌다. 이윽고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그래. 소녀였다.

“……헐.”

이미 확인했던 부분이지만 다시 본다고 해서 어처구니없는 기분이 가시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생생한 실물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니 충격이 더 컸다.

“저거…… 혹시 라피스입니까?”

나와 같은 광경을 목격한 데르온 역시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가 봐요.”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이 달랐다면 다른 사람이라고 납득이라도 해 봤을 텐데. 이목구비가 같아도 너무나 똑같으니 차마 부정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누가 봐도 남자였던 얼굴이 지금은 천생 여자로 보인다는 게 조금 많이 어이없긴 했지만. 어쨌든 저렇게 생긴 사람이 세상에 두 명일 리가 없었다.

“대부!”

차마 아는 척도 하지 못하고 지켜만 보고 있는데 아스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달려왔다. 소녀의 미모에 넋을 잃고 있던 병사들이 그 외침을 듣고 돌아보았다가 나를 발견하곤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라피스도 이쪽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피식?

네가 지금 웃음이 나오냐?

품 안에 폭 안기는 대자를 기분 좋게 쓰다듬어 주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 극진한 호위는 대관절 무엇 때문이며, 나갈 땐 훤칠한 성인 남성이던 라피스가 무슨 연유로 여자애가 되어 돌아왔는지도 도저히 모를 일이었다. 때마침 나와 그를 번갈아 바라보던 병사가 급히 이쪽으로 달려왔다. 한껏 상기된 그 얼굴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서 기분이 더 가라앉았다.

“시, 실례합니다. 혹시 이분들의 일행분 되십니까?”

“으음, 네에. 이쪽은 확실히 제 일행이 맞고. ……저쪽도 그런 것 같긴 하네요.”

“하하, 그 부분은 굳이 말씀하실 필요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닮으신 걸 보니 한눈에도 자매분인 걸 알겠는걸요. 두 분 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그래, 그런 걸로 오해할 줄 알았지.

머리와 눈동자 색만으로는 닮았다고 하는 거 아니라더니. 왜 이런 예감은 항상 들어맞는 건지 모르겠다. 아스가 대놓고 대부라고까지 불렀는데 듣지 못한 건지, 아니면 들었는데도 깔끔하게 무시한 건지. 게다가 다짜고짜 아름답다는 거는 뭐야. 지금 그걸 칭찬이랍시고 하는 거야? “푸핫!” 이제는 대놓고 폭소를 터트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라피스가 배를 움켜쥐고 웃고 있는 걸 노려보는 사이 들뜬 병사가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자매분께서 정말 대단한 일을 해주셨습니다. 경비대를 대표해 다시금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쟤가 뭘 했는데요?”

“수도의 골칫거리였던 흉악한 살인범을 체포하는 데 큰 공헌을 하셨습니다.”

“…….”

자랑하듯 밝힌 말에 나는 이번에도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뜬금없이 살인범이 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연관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하니 붙잡은 쪽이었다니.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말없이 라피스를 노려보았다. 시선을 느낀 라피스가 걸어오면서 손을 휘휘 흔들었다.

“자세한 얘기는 내가 하도록 하죠. 당신들은 이만 가보도록 해요.”

“아아, 예! 알겠습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내일 모시러 오겠습니다.”

‘모시러 와?’

이해하지 못할 말에 당황하는데 라피스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미 사전에 맞춰진 이야기인 듯, 따로 오가는 설명은 없었다.

“자매분도 함께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십시오. 같이 준비해 두겠습니다.”

경례하고 돌아서던 병사가 나를 향해 말했다. 그리곤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대로 훌쩍 말에 올랐다.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던 병력이 마차와 함께 우르르 물러나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이봐, 들었어? 외모를 보니 귀족 맞겠지? 저분들이 살인범을 잡은 거래!”

“굉장하군! 저렇게 어려 보이는 분들이!”

여관 안팎에서 현장을 구경 중이던 사람들이 그제야 마음 놓고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흘려내며 나는 라피스를 똑바로 응시했다. 머쓱해하기라도 하면 그나마 예뻐 보일(?) 텐데, 이 뻔뻔한 도마뱀은 이런 상황에서도 그저 느긋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남자일 때도 사방을 압도하던 미모가 소녀의 몸에서 발산되니 주위에서 다들 숨을 쉬지 못했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싶은 심정을 참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똑바로 설명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 * *

라피스가 설명한, 이 모든 황당한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블레스터를 유인하기 위해 흩어진 이후 그와 아스는 으슥한 골목길과 술집을 비롯한 윤락가를 중심으로 탐색을 시작했다. 번화가 위주로 돌아다녔던 나와 데르온과는 정반대의 노선이었다. 두 사람은 꽤 오랜 시간을 돌아다녔지만 딱히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나중에는 사람이 많은 쪽으로 이동해 보기도 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슬금슬금 피해 다니기만 할 뿐, 말을 걸거나 접근하는 이도 없었다. 그때쯤 아스가 한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은인이 너무 강해 보여서 못 건드리는 건 아닐까?”

“뭐, 내가 척 봐도 강해 보이긴 하지.”

라피스는 당연하게 수긍했다. 사실 나도 그 부분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게, 그는 키가 크고 짜 맞춘 듯이 단단한 체형이라 한 눈에도 무인으로 보였다. 명검이 보기에도 아름답듯이, 그 화사하고 압도적인 미모조차 강함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화려한 색을 지닐수록 독을 품고 있다는 말이 그대로 적용되는 예라고 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어딜 가도 만만해 보이는 인상이 아니었다. 아스는 이 점을 지적했다.

“공작은 어쨌든 이사나를 찾는 거잖아. 예전의 모습만 기억할 테니 강한 사람보다는 어리고 약한 쪽을 더 주시해서 노릴지도 몰라.”

“흠, 일리 있네.”

“은인의 외형을 바꿔보는 건 어때? 연령대를 대폭 낮춰본다든가.”

“그러지 뭐.”

여기까지는 나쁘지 않은 발상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문득 아스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근데 은인, 드래곤은 양성이라는 게 사실이야?”

“사실인데.”

“나 양성은 처음 봐.”

“네가 처음 보는 게 어디 그것뿐이겠냐? 태어난 지 몇 년도 안 된 놈이.”

“그럼 은인은 여자도 될 수 있어?”

“당연한 걸 왜 물어.”

“은인은 여자일 땐 어떤 모습이야?”

“그야 지상 최고의 미녀지. 아니, 미의 여신도 나보다는 안 예쁠걸.”

“와, 궁금해. 보여 주면 안 돼?”

“보여 줘?”

“응!”

“반하지나 마라.”

그리하여 라피스는 앞선 계획과 맞물려지는 최종 완성본을 내놓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어린 여성의 모습으로 폴리모프 했다는 뜻이다.

“그게 남자 모습이랑 뭐가 달라?”

“체형이 다르잖아. 목소리도 달라졌고.”

“…….”

아스가 다소 실망했다는 결과는 둘째 치고. 여하튼 이왕 외형을 바꾼 김에 두 사람은 그 모습 그대로 거리를 활보했다. 그러면서도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예상 밖의 성과가 곧 나타났다. 어느새인가 희미한 살기가 따라붙기 시작한 거다. 블레스터인지 확실치는 않았으나 누군가의 표적이 된 것만은 확실했다.

“이대로 대부가 있는 쪽으로 유인해 가자.”

이번에도 아스가 제안했고, 라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내가 있는 곳, 정확히는 데르온의 마력이 느껴지는 방향을 짚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이 으슥한 골목을 벗어나려고 하니 상대가 다급해진 듯했다. 광장 쪽으로 막 나서던 순간, 뒤쪽에서 살기가 기습적으로 튀어나왔다. 정확히는 단검을 움켜쥔 복면의 남자들이.

“생각보다는 빨랐어. 그래 봤자 꽤 어설펐지만.”

당시를 회상한 라피스의 평가였다. 어설프다고는 했으나 라피스의 입에서 ‘빠르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면 꽤 능숙한 자들이었다는 뜻이다. 아마도 탈주병이거나, 용병 출신인 것 같았다. 블레스터인 줄 알고 돌아봤던 라피스는 그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금방 파악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아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행인을 노리는 평범한(?) 강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정확히 라피스를 노리고 공격했다. 강도라면 우선 협박해서 흥정을 하려고 들 텐데, 살기가 더 짙었다. 다짜고짜 죽이려는 의도가 한눈에 읽혔다.

“야, 저건 죽이기 좀 아깝지 않아?”

“그래도 금발에 벽안이잖아. 예쁜 게 대수냐? 죽어서 썩으면 다 똑같아.”

“그건 그렇지만.”

그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피스는 곧 돌아가는 상황을 판단했다. 모방 범죄였다. 범인을 알 수 없는 연쇄 살인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웬 할 짓 없는 놈들이 범행을 따라 하기 시작한 거다. 원래도 봐줄 생각이 없던 두 사람은 그 한심한 의도에 더 불쾌해졌다. 그래서 복면 남자들을 곧바로 제압한 후, 사정없이 두들겨 팼단다. 그들이 요란하게 비명을 지르는 통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그 상황을 목격했다. 소식은 빠르게 퍼졌고, 구경꾼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환호성을 질렀다.

“연쇄 살인범이 잡혔다! 이들이 살인범을 잡았어!”

“……그렇게 된 거야.”

“…….”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파묻은 채, 라피스가 모든 설명을 끝마쳤다. 여전히 여성의 모습이다 보니 가늘고 높은 목소리가 생경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는 잠시간 말을 잇지 못하다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상황은 알겠어. 근데 그 병사들은 뭐야?”

“수도 치안대라던데. 소식을 듣고 달려오는 바람에 붙잡혔어.”

“치안대가 올 때까지 왜 거기에 가만히 있었는데? 범인들은 적당히 아무한테나 인수하고 그냥 빠져나올 수 있었을 거 아냐.”

“생각보다 너무 빨리 나타나서 그럴 틈이 없었어. 마침 살인범이 나타났다는 신고를 받고 달려가던 중이었다던데. 그 중간에서 우리가 걸린 거지.”

“…….”

나 때문이구나!

신고를 받았다는 쪽이 어딘지 알 것 같아 찔끔했다.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사람들의 등장이 늦는 것 같다 싶었다. 그게 중간에 라피스 쪽으로 빠져서 그랬던 거였구나! 눈치 빠른 라피스는 그 표정을 한눈에 간파한 것 같았다. 그의 눈이 대번에 가늘어졌다.

“너였냐?”

“내, 내 쪽은 진짜 블레스터였거든?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주변을 수습하고 뭐고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어.”

“쯧. 그래서 해결은 했고?”

“응, 제대로 회수했어. 검은 미네가 와서 가져갔고. 공작은 의식이 없는 상태라 안에 눕혀 놨어.”

현재 우리가 잡은 숙소는 이 여관에서 가장 좋은 방으로, 거실과 침실이 분리된 구조였다. 들어오자마자 곧장 거실에 자리 잡고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기에 침실 쪽에 있는 공작을 보일 기회가 없었다. 그래도 약간만 신경을 기울이면 방 안에 숨소리가 하나 더 있다는 건 쉽게 알아차리는 자들이니, 이미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예상대로 아스나 라피스나 새삼 관심을 기울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뭐, 그럼 됐네.”

결과가 좋아서인지 이렇다 할 만한 타박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소파에 몸을 파묻는 라피스를 힐끔 바라봤다. 얼굴은 똑같은데 소녀의 모습이라 그런가. 다른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그를 대하는 게 좀 더 어려워진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는 성별이 바뀐 자신을 전혀 어색해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마치 처음부터 여성이었다는 듯 태가 자연스러워서 위화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드래곤이 양성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점을 이렇게 확실히 느껴보는 건 처음이었다. 물론 조심스러운 기분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모습이 바뀌어 봤자 라피스는 역시 라피스라는 걸 금방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매우 심란한 방식으로.

“근데 아까 그 말은 뭐야? 내일 데리러 온다는 거.”

“아아, 수도를 공포에 몰아넣은 사악한 살인범을 잡았으니 공로를 치하해야겠대. 황실에서 축하 연회를 열 거라는데?”

“……왜 얘기가 그렇게 진행돼?”

대수롭지 않게 뱉은 내용이 너무나도 충격적이라 나는 그대로 얼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연회라니. 그것도 황실에서 열리는 연회라고? 황당해하는 나를 보고 라피스가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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