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24화 (324/608)

제324화

“음, 혹시 소멸하고 싶었다면 미안한데. 너 아직 소멸 못 해.”

―네?

“네 상사한테 부탁을 받은 게 있거든. 아, 예전 상사 말고 지금 상사를 말하는 거야.”

―……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진이 멍한 어조로 반문했다. 뭐라고 설명을 해 줄까 고심하고 있는데 문득 스치는 바람 속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달아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일이 복잡해지기 전에 슬슬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할 것 같았다. 그밖에 먼저 해결해야 할 기척도 있기는 했지만.

“이대로 정령계로 가져가시는 겁니까?”

때마침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데르온이 물었다. 나는 그 질문에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원래는 그러려고 했는데. 안 그래도 될 것 같아요.”

“……? 검을 회수해서 보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네, 맞아요. 근데 회수자가 직접 온 것 같거든요.”

“……!”

“그렇지, 미네?”

웃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더니 기다렸다는 듯 가벼운 돌풍이 불었다. 조금 전 내 주위를 감돌았던 바로 그 바람이었다. 이윽고 바람결을 타고 있던 새하얀 소녀가 사뿐히 내려앉는 듯한 자세로 모습을 드러냈다. 기분 좋게 부는 바람 속, 은실 같은 머리카락이 춤을 추듯이 흩날렸다.

―아…….

나직하게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눈에 소녀의 정체를 알아본 진이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신음이었다.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감겨 있던 소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 풍성한 속눈썹 밑에 자리 잡은 은백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향했다.

“안녕, 미네.”

“안녕하세요, 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달빛으로 이뤄진 듯한 소녀가 특유의 무심한 어조로 화답했다. 왠지 난처해 보이는 것 같아서 의아했는데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같은 변명을 드리지만, 염탐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하하, 괜찮아. 블레스터가 대놓고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미네가 느끼지 못할 리가 없지. 궁금해할 거라고 생각했었어.”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중한 인사를 건넨 미네가 입술을 오므리면서 눈매를 가늘게 떴다. 평소에 잘 짓지 않는 표정인 걸 보면 뭔가 의미를 담은 것 같은데, 그게 어떤 건지는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빤히 쳐다보았더니 미네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알아보시겠습니까? 눈웃음이라는 걸 연습했습니다.”

“……아, 그래?”

“네. 눈웃음을 지으면 표정이 좀 더 부드러워 보인다고 하더군요. 계약자인 아네아가 조언해 줬습니다.”

확실히 찌푸린 표정보다야 부드럽기는 했다. 절대 웃음의 종류로 보이진 않았지만.

아무리 봐도 신 걸 먹은 표정이었는데. 그게 눈웃음이었구나.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닌지 데르온도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네아라는 그 계약자도 설마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을 거다. 역시 미네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 어쨌든 입술을 모으며 눈을 가늘게 뜨는 건 눈웃음이란 말이지? 실수하면 안 되니까 잘 기억해 둬야겠다. 공식을 암기하듯 머릿속에 단단히 집어넣고 있을 때였다.

―아네아……?

누군가가 멍하게 중얼거리는 음성이 들렸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잠시 잊혔던 진이었다. 뭔가에 놀란 듯 눈을 부릅뜨고 있던 그는 미네의 시선이 제게 닿자 크게 당황하여 고개를 숙였다.

―미, 미천한 몸이 새로운 바람을 뵙습니다.

정령왕은 모두 동등한 존재지만, 하위 정령 입장에서는 직속 상관의 존재가 더 특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를 대할 때는 그나마 의연했던 진이 미네 앞에서는 완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미네는 긴장하고 있는 진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그대가 말로만 듣던 블레스터군요. 실제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상태가 더 좋지 않네요.”

―……송구합니다.

“탓하려던 건 아닙니다. 오히려 아직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아야 할 일이죠. 그러고 보니 아네아의 이름에도 반응하는 것 같더군요. 그녀를 기억하는 것도 칭찬해 주겠습니다.”

―왕께서, 아네아를 어떻게…….

“실버 드래곤 아네아는 지금 내 계약자입니다.”

동요로 굳어 있던 진의 얼굴이 천천히 풀어졌다. 그리운 기억을 떠올린 아련한 표정이었다. 미네의 계약자가 진과도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인 건가? 그것도 굉장히 친했던 인연이었던 것 같다.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다정한 표정이 되는 걸 보면. 진은 지금까지 봤던 얼굴 중에서 가장 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옛 지인의 안부를 확인하게 되어 진심으로 안도한 것 같았다.

―그렇군요. 아네아가 왕의 계약자가 되었군요. 그 아이는 늘 미네르바 님과 계약하고 싶어 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그렇습니까? 내가 알고 있던 사실과는 조금 다른 것 같긴 합니다만, 일단은 그렇다고 하죠. 혹시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다고 한 전언의 수신인이 그녀였습니까?”

―소, 송구합니다. 짐작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뭐라고 남기려 했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엇이든 내가 전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

상기되어 있던 진이 그 말에 표정을 살짝 흐렸다. 아마도 거절의 의사로 받아들인 듯했다. 하지만 미네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용건은 만나서 직접 전하는 게 좋겠습니다. 다행히 시간은 충분할 겁니다. 드래곤은 수명이 긴 종족이니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대를 바람의 영역으로 데려가 정화할 예정입니다.”

이어진 말에 진의 입이 벌어졌다.

―……예?

“그대에게 정령으로 살아갈 기회를 한 번 더 부여하겠다는 뜻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고, 아마도 꽤 많은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겠지만. 이대로 소멸하면 쌓은 업을 그대로 안고 가게 될 테니, 그대에게도 그편이 더 나을 겁니다.”

설명이 끝났지만 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이 상황 자체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불시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눈만 깜빡거리던 그가 멍하니 나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이 확인을 구하는 것처럼 보여서,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서 말했잖아. 너 아직 소멸 못 한다고.”

―……대, 대체…….

“미네가 먼저 제안한 거야. 네게 다시 이전의 생활을 돌려주고 싶다고 했어. 블레스터가 되기 전의, 자유롭던 정령으로 말이야.”

―하, 하지만 제가 어떻게 감히……. 왜 저 같은 자한테 이런…….

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자신이 감당한 무게를 알고 있는 만큼, 그는 갑자기 찾아온 행운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동요를 고스란히 드러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는데 미네가 그를 향해 걸어갔다. 왕이 제 앞에 서자 당황한 진이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덕분에 눈높이가 맞게 되니 미네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매만졌다. 흐르고 있는 눈물을 닦아내고는 걸인처럼 흐트러져 있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많이 변질되어서 완전히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확실히 진이군요. 다치고 잔뜩 곪아 있을 뿐. 틀림없는 진입니다. 내게 속한, 내 정령.”

―미네르바 님.

제게 닿는 손길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진이 당황해서 눈을 깜빡거렸다.

“처음부터 그대에게 호의적이었다고는 말하지 못합니다. 그대를 정화하기로 한 건 그저 내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진, 그대야말로 누구보다 가까운 내 가족이죠. 구제하는 것에 이유를 찾을 필요가 없었던 거였습니다.”

―아, 아닙니다, 미네르바 님! 부디 뜻을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감히 이런 은혜를 입을 자격을 가진 존재가 못 됩니다. 저는 이렇게도 비천한……!

“자격을 정하는 건 왕인 내 권한입니다. 그리고 난 그대가 내 정령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아무리 그대 자신이라 해도, 왕이 아끼는 것을 비천하게 여길 순 없습니다.”

―미네르바 님…….

“그리고, 그대가 돌아가지 않으면 기다리는 이가 서운해할 겁니다.”

-……예?

“아네아 말입니다. 내내 그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항상 그대와 어울리던 바로 그 장소에서.”

아아아― 울고 있던 진이 더는 견디지 못한 듯 눈을 감았다. 후두둑 흘러내린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렸다. 바람의 눈물은 허상이라 형태를 오래 유지하지 못한 채 그대로 빛으로 변했다. 툭툭 떨어질 때마다 그만큼의 작은 빛이 터져 나와서 주위가 반짝거렸다. 마치 별이 쏟아지는 듯한 광경이라, 나도 모르게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언젠가도 비슷한 일이 있었죠. 그대를 정화하겠다고 했을 때, 아네아도 당신처럼 펑펑 울었습니다. 그때 그녀에게 해 줬던 말을 그대에게도 해 주고 싶습니다.”

미네가 다시금 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는 아이를 달래듯, 나긋하고 단조로운 손길이었다. 완전히 무너져 내린 진이 그 아래 엎드리며 흐느꼈다.

“진심으로, 그대의 삶이 행복해지길 바랍니다.”

* * *

이후 블레스터는 검의 형태로 미네에게 인계됐다. 정령의 모습을 잃고 다시 초라한 검이 된 진을, 미네는 소중하게 품에 안아들었다.

“약속을 지켜주셨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엘.”

“별말씀을. 잘 해결돼서 다행이야.”

“네, 모든 게 엘 덕분입니다. 엘은 정말 치유의 정령왕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전에도 비슷한 대화를 한 적이 있을 겁니다. 블레스터는, 바람의 곪고 썩은 부분이었습니다. 엘이 나서 주지 않았다면 그는 그대로 방치된 상태에서 예정된 폭주의 길을 걸었을 겁니다. 나는 그를 잘라내는 걸 당연하게 여겼겠죠. 모두에게 상처만 남았을 결과를 엘이 치유해 준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 너무 과분한 칭찬을 받으니까 민망한걸. 나는 그냥 전대의 부탁을 받은 것뿐이라…….”

“그러나 그건 상대가 엘이었기에 가능한 부탁이었습니다. 제가 그랬듯이요.”

그 순간 미네의 얼굴에 선명한 미소가 그려졌다. 금방 사라지긴 했지만. 멀쩡하게 웃는 얼굴은 처음 봐서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미네, 너. 편하게 웃을 수 있었네.”

“제가 방금 웃었습니까?”

“……음, 그래. 의식하면 안 되는 거구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좋은 뜻으로 이해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말하는 걸 잊었습니다만. 금발, 잘 어울립니다.”

“응? 아하하, 고마워.”

그러고 보니 아직 금발이었지. 반나절 정도 지속된다고 했으니 사라지려면 시간이 더 있어야 했다. 머쓱해져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미네가 신기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마법입니까?”

“응. 라피스가 걸어줬어.”

“저도 아네아한테 부탁해 봐야겠습니다. 재밌어 보입니다.”

“미네라면 다른 머리 색도 잘 어울릴 거야.”

“바꾸면 제일 먼저 보여드리러 오겠습니다.”

“그래, 기대할게.”

기대감을 한껏 드러낸 얼굴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동생이 있다면 이런 기분이겠지. 한 번도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관계성을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미네를 만나면서 새로운 감정을 알게 되니 이런 것도 좋은 것 같았다. ……또 언니라고 불리는 건 사양이지만.

이윽고 작별 인사를 마친 미네가 정령계로 귀환했다. 돌아가자마자 곧바로 블레스터의 정화 작업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하니 한동안은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질지도 모르겠다.

그 뒤로는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와 데르온도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지척에 이른 걸 느끼고 부리나케 자리를 피했다. 여전히 의식이 없는 카리브디스 공작도 함께 챙겼다. 대공의 수하로 알려진 자를 데려가려니 그리 내키지 않았지만, 일단 이번 사건에서는 그도 피해자였다. 게다가 레이의 보호자이기도 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잘못돼서 레이가 슬퍼하게 되느니, 일단은 공작을 살리는 게 백번은 나았다.

이동할 만한 장소는 달리 없었기에 또다시 여관으로 돌아오게 됐다. 내가 생각해도 참 개성 없는 결정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의식이 없는 공작을 야외에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공작저로 갈 수도 없으니까. 새로운 여관을 구하자니 그건 그것대로 눈에 띌 가능성이 높았다. 그동안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정해진 거처가 없다는 게 생각보다 불편한 부분이 컸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제국 곳곳에 내 소유의 저택이나 마련해 둬야겠다. 정령왕이라서 좋은 점은 넘치는 게 돈이라는 사실이니까! 모름지기 장점이란 활용해 주라고 있는 법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중의 일이고, 지금은 여관을 은신처로 애용할 수밖에 없었다. 미동 없이 늘어진 공작을 침대에 눕힌 후 신발을 비롯해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벗겨냈다. 그다지 작은 침대가 아니었는데도 덩치 큰 공작이 누우니 그대로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군요.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요?”

“치료해 둔 거라 그렇진 않을 거예요. 정신 지배에서 강제로 풀려난 충격이 좀 컸나 봐요. 내버려 두면 곧 깨겠죠.”

“흠, 그렇군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저희만 돌아오게 되었습니다만. 아스 님 쪽에도 상황을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참, 그래야죠. 시큐엘을 보내봐야겠네요.”

나는 그 자리에서 즉시 시큐엘을 나타나게 한 후, 라피스를 찾아가 소식을 전하도록 했다. 그런데 사라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시큐엘이 금방 다시 나타났다. 왠지 난처한 표정이었다.

―죄송합니다, 엘퀴네스 님.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접근할 수 없었다니?”

―주변에 사람이 너무 많았습니다.

사람이 많았다니. 생각지 못한 이유라 당황스러웠다. 그 정도는 라피스 선에서 충분히 따돌리고 접촉할 수 있었다. 바로 일전에 전언을 보냈을 때도 그런 식으로 전달했으니까. 시큐엘도 내 의문을 느꼈는지 재빠르게 설명을 덧붙였다.

―계약자분과 시선이 마주치긴 했습니다만. 그가 그냥 돌아가라는 눈짓을 했습니다.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이거나, 그럴 의지가 없는 상태로 보였습니다.

“아스는?”

―그분도 같이 계셨습니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그 녀석들?”

어이가 없어서 데르온을 바라보자 그 역시 당황한 얼굴을 했다. 블레스터를 유인하라고 보내놨더니 아무래도 엉뚱한 일을 벌여두고 있는 것 같았다.

“제가 가서 상황을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서둘러 말한 데르온이 창문을 열고 창턱에 다리를 디딜 때였다.

“이봐! 들었어? 엄청난 소식이야!”

열린 창문 밖에서 우렁찬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여관 1층에 마련된 술집으로 뛰어 들어가며, 누군가가 내지른 소리였다.

“연쇄 살인범이 잡혔어! 드디어 그 살인마가 잡혔다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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