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3화
“…….”
미간을 찌푸리던 공작이 그 말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곧 그 눈동자에 빛이 들어오면서 기색이 단숨에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누군지 알아본 것이다.
그건 진이 차지한 의식이 공작보다 더 커졌다는 의미기도 했다. 당혹감을 드러낸 공작, 아니, 진이 재빠르게 몸을 일으키려고 해서 나는 다시 움켜잡고 있던 부분을 내리 눌렀다. “큭!” 나직한 신음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재차 바닥에 처박혔다. 여기서 얌전히 항복을 선언해 주면 더 좋았겠지만, 상대도 그리 호락호락한 성격은 아니었다. 이미 다 붙잡힌 거나 다름없는데도 그는 도주를 포기하지 않았다. 바람이 더 강해진다 싶더니 공작의 몸이 흐릿해졌다. 이번에도 왕의 힘을 쓰려는 거다.
“어딜!”
정령왕의 자존심이 있지, 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이번에도 눈앞에서 놓치면 평생 미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나는 곧바로 물을 일으켜 공작의 몸을 얽매었다. 잠시 흐릿해졌던 육체가 내 기운에 붙잡혀 다시 선명해졌다. 물론 거기서 만족할 생각은 없어서, 얼음사슬을 만들어 그의 목을 비롯한 팔과 다리, 발목까지 채운 후 바닥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흐으윽!”
온몸에 가해지는 압력이 버거웠는지 그가 거친 숨을 토해냈다. 저항하는 힘이 생각보다 거셌지만, 그를 제압하고 있는 내가 더 강했다. 시간이 좀 더 흐르자 그도 더는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버둥거리던 몸에서 차츰 힘이 빠져나갔다. 사방에 몰아치듯이 부는 바람은 여전했지만, 조금 전만큼 날카로운 느낌은 아니었다. 한층 기세가 수그러진 그를 확인한 후 나는 다시 웃어주었다.
“그 힘으로 날 공격하려고 하지 않은 건 기특한데 말이야. 이제 그만하지? 네가 그 힘을 쓰려고 할 때마다 진짜 기분 나쁘거든. 온 몸에서 소름이 돋아서 끔찍한 느낌이야. 날 그렇게 화나게 하고 싶어?”
“큭……. 절……놔……주십…….”
“아니. 놔야 할 건 네 쪽이지. 그 몸의 지배를 풀어, 진. 이만 공작을 놓아줘.”
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모처럼 기회를 줬건만 그는 내 말을 따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간절한 눈빛이 와 닿는 걸 무시한 채,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안 하겠다면 내가 강제로 할 수밖에 없어.”
정령인 진이라면 조금 더 까다로웠겠지만 지금 진은 공작의 몸으로 움직이고 있으므로 인간에 더 가까웠다. 인간에겐 쓸 수 있는 방법이 아주 많았다. 혈액의 이동을 느리게 하는 즉시, 진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경련을 일으켰다.
“커, 커흑! 커허헉!”
동공이 확장되고 벌어진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 틈을 타 손을 억지로 벌리게 했다. 그가 움켜쥐고 있는 진의 본신, 블레스터를 떼어내기 위해서였다. 마치 달라붙는 것처럼 기운이 얽혀 있는 것을 강제로 분리해서 떨어트리자, 헉― 하고 간헐적인 숨이 터져 나왔다. 이윽고 부들부들 떨고 있던 몸이 그대로 축 늘어졌다. 투명하도록 새하얗던 육체에 점차 본래의 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블레스터가 분리되면서 그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이다.
“끝난 겁니까?”
데르온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공작을 잠시간 시선으로 살핀 후, 나는 내게 붙잡힌 블레스터를 내려다보았다. 아마 상아처럼 새하얀 검이어야 할 텐데, 긴 검신이 오물이 묻은 것처럼 시커먼 검댕으로 가득했다. 느껴지는 기운도 청명한 바람이 아니라 피 냄새 섞인 사기에 더 가까웠다. 다만 전체적으로 기운이 많이 약해져 있어서 그다지 위협적인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날은 잔뜩 무뎌지다 못해 듬성듬성 이가 나가 있는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조금 전 겨룰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것 같은데. 아마도 억지로 분리된 충격 탓에 다친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못난 녀석이 더 못나게 됐네. 그러게 순순히 지배를 풀라니까. 말로 할 때 들었으면 서로 고생할 필요도 없고 좋았잖아.”
쯧쯧 혀를 차 주자 검신이 부르르 떨렸다. 이 와중에도 발끈하는 것이 가소로워서 나는 그대로 힘을 불어넣었다. 치이익, 기름이 끓는 것 같은 소리가 퍼지면서 녀석의 몸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내가 잡고 있는 부분에서부터 검 끝까지 빠르게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요동치던 녀석은 하얗게 얼어붙고 나서야 다시 얌전해졌다.
“너 정말 학습 능력이라는 게 없구나? 내가 화나게 만들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여러 번 경고하게 하지 마. 너도 아픈 건 싫을 거 아냐.”
다행히 이번엔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반발이 돌아오지 않았다. 기세도 조금 전보다 한층 수그러진 것 같았다. 진작 이럴 것이지. 만족하면서 시선을 거두는데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데르온이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음, 아뇨. 요즘 들어 엘 님이 점점 더 박력 있어지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특히 오늘 모습은 그저 탄복할 수밖에 없네요. 과연 마신께서 정하신 아스 님의 대부답다는 느낌입니다.”
“……성격 더럽다는 말을 그렇게 거창하게 하지 않아도 돼요.”
“더럽다뇨! 그저 마족의 귀감이 될 만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바로 더럽다는 거잖아!
울컥거리려는 속을 억누르고 크게 심호흡했다. 기분이 거칠어졌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다른 사람까지 내 상태를 알아볼 정도인 줄은 몰랐다. 돌이켜 보니 평소에는 잘 하지 않는 언동을 많이 하긴 한 것 같다. 화가 나서 그런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상태라서 화가 더 많이 났던 걸지도 모르겠다. 사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만큼이나 의미 없는 순서이긴 했다.
“그나저나 이게 말로만 듣던 블레스터군요. 폭주가 진행되었다고 하더니, 과연 정령검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살기가 굉장합니다. 이 정도면 수천은 잡아먹었겠네요.”
호기심을 가득 드러낸 데르온이 내 옆을 기웃거리며 검을 살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이 빠진 검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4천 년 전에 만들어진 검이니까요. 그보다 더 많은 피를 묻혔을지도 몰라요. 진작 폭주하지 않고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던 게 오히려 천운인 셈이죠.”
“한번 만져 봐도 됩니까?”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요. 얜 지금 피를 취하려는 본능이 더 강한 상태예요. 내 손에 있어서 얌전해졌지만, 다른 자가 닿으면 다시 육체를 장악하려고 할 거예요.”
“흠, 그래도 전 마족인데. 제가 이기지 않겠습니까?”
“얜 진이거든요? 저기 쓰러져 있는 남자도 정신력이라면 남부러울 것 없는 소드 마스터라고요. 상급 정령의 힘을 우습게 여기면 큰 코 다쳐요.”
“그거 꽤 도전 의식이 생기는데요?”
약간의 흥미만 담겨 있던 눈빛이 본격적으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조심하라는 당부가 오히려 쓸데없는 승부 근성을 자극해버린 듯 했다.
“뭐, 굳이 겪어 보겠다면 말리진 않을게요. 장악당하면 또 분리하면 되니까요.”
“정말이시죠? 그럼…….”
“다만 데르온의 몸이면 제압하는 게 더 어려울 테니 내가 좀 많이 거칠게 대하더라도 이해해요. 혹시 다치더라도 치료하면 되니까요. 내 치료 실력은 알죠? 숨만 붙어 있으면 살릴 수 있는 거. 머리가 떨어져 나가도 한동안은 숨이 붙어 있다고 들었는데 이 기회에 시험해 볼까…….”
“……안 건드리겠습니다.”
성큼 가까워졌던 손이 슬그머니 내려갔다. 무모해 보이면서도 결과가 뻔히 보이는 승부는 피하는 게 지극히 그다웠다. 피식 웃은 후, 나는 블레스터를 응시했다. 정확히는 그 몸을 이루고 있는 진의 영혼을.
“진, 너도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 우리 잠시 대화 좀 할까? 내가 도와주면 잠시나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네가 모습을 찾는 걸 허락할게.”
블레스터를 쥐고 있던 손을 앞으로 뻗은 후 내 기운을 실었다. 그러자 검신에서부터 바람이 일더니, 색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천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거의 투명한 형태만 남기고 빠져나간 기운들은 그대로 내 눈앞에서 뭉쳐져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어깨 아래까지 풍성하게 흩날리는 달빛의 머리칼. 그만큼이나 화사한 색감을 담은 눈동자. 수려한 얼굴 아래, 길고 곧은 남성의 체형이 차례대로 완성을 이루었다. 내가 아는 것보다는 많이 흐릿해 보였지만, 분명한 진의 모습이었다.
―물의 왕을 뵙습니다.
진이 한쪽 팔을 가슴 위까지 들어 올리는 자세를 취하며 경례했다. 정중한 인사였지만 마냥 웃으며 반길 수가 없었다. 폭풍이 정신없이 휘몰아치듯이, 진들은 대체로 씩씩하고 기운찬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진은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표정은 건조했고, 눈동자도 공허했다. 다른 진에게서 느껴지는 생명력 넘치는 활기가 그에게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바람이었다. 바싹 말라붙어 사그라지는 낙엽처럼, 그대로 소멸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제가 다시 이 모습을 할 수 있게 되다니.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기회를 내려 주신 물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저지른 무례에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아냐. 지금까지 많이 힘들었지? 고생 많았어.”
―제게 주어진 의무를 다했을 뿐입니다.
담담하게 답하는 얼굴에 지난 세월을 원망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게 오히려 더 서글픈 느낌이라 표정이 좋게 지어지지 않았다. 자꾸만 굳어지려는 얼굴을 억지로 내색하지 않으려니 더 울상이 되는 것 같았다. 진이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제가 언제부터인가 많은 것들을 잘 느끼지 못하게 됐습니다. 결례가 되는 줄은 압니다만,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물의 왕께서 지니고 계신 모습이 제가 아는 분과 다르신 것 같습니다. 혹시 제 착각입니까?
“아니, 착각 아니야. 얼마 전에 세대교체를 했거든.”
―아, 역시 그렇군요.
“응. 그리고 나만 바뀐 게 아냐. 바람도, 세대가 바뀌었어.”
―……!
그 말에 잔잔하던 진의 표정이 동요를 드러냈다. 그는 무슨 말이냐고 되묻는 대신 천천히 고개 들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정보를 실감하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 주변의 공기를 느껴 보려는 것 같았다.
―느껴집니다. 바람이…… 달라졌군요. 다른 왕의 기운이라는 걸 알겠습니다.
그리 오래지 않아 그는 내가 말한 사실을 받아들였다. 다시 눈을 뜬 진은 조금 서글픈 얼굴을 했다.
―그분께서는 드디어…… 안식을 얻으셨군요.
그럼에도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음성은 진심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그분’이 누구를 말하는 건지 모를 수가 없었다. 이 마음 착한 정령은 끝까지 미네르바를 위하는 마음만 가득한 것 같았다. 아무런 내색 없이 묵묵히 감당하고 있는 진을 보고 있으니 다시금 마음이 뭉클해졌다. 나는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 왔던 말을 꺼냈다.
“그 미네르바가 떠나면서 내게 널 부탁했어.”
―왕께서…… 저를?
“너를 많이 걱정했어. 미안하다고 전해 달라고 했어.”
―…….
전달받은 말이 의외였던 걸까. 진은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모르는 사이에 왕이 바뀌었다는 사실보다, 미네르바가 남긴 전언에 더 크게 놀란 것 같았다.
―왕께서 왜 그런 말씀을 전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감히 그런 말씀을 들을 주제가 못 됩니다. 오히려 저는 그분의 흠이자 치부였습니다. 바람의 명예를 위협하는…… 변절자와 다름없었을 것인데…….
“난 충분히 이해되는데. 네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알아. 미네르바를 도와주고 싶었던 거잖아.”
―하지만…….
“넌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가장 힘든 역할을 한 것뿐이야. 그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지난 시간 동안 충분히 괴롭고 힘들었잖아. 그러니까 이제는 편해져도 돼. 넌 그럴 자격 있어.”
그건 그를 만나면 꼭 해 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홀로 다치고 비난받는 길을 걷느라 정말 고생이 많았다고. 그러니 이제는 모든 책무에서 벗어나 편해져도 된다고. 그동안 외면받고 상처받았던 만큼, 누구라도 한 명쯤은 그런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앞으로 이어질 그의 삶은 행복한 일만 있기를 바랐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지치고 고된 기색이 가득한 정령의 모습을 보니 그런 마음이 더 간절해졌다.
―이번 물의 왕은, 무척 다정하신 분이시군요.
진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눈가에서 빛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눈물이 흘러내렸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했던 것인 듯 조금 놀란 표정을 지은 그가 황급히 눈물을 닦아냈다.
―미네르바께서는…… 어떠셨습니까?
이어진 목소리는 한층 잠겨 있었다.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그가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왕께서는…… 믿었던 연인에게 배신당하신 충격으로 많이 시름하셨습니다. 제가 아는 건 그것뿐입니다. 그 뒤로 그분은 어떻게 지내셨는지, 늘 염려되고 궁금했습니다. 그분께서는 평온하셨습니까? 외롭게 계시지는 않으셨습니까?
“……난 이전의 미네르바는 잘 몰라. 하지만 내가 봤던 그라면, 평온해 보였어. 잘 웃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미소 지었고, 모두와의 자리에도 곧잘 어울렸어. 적어도 외롭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군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진은 모든 근심을 떨쳐낸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결 나아진 표정에서, 이제야 바람의 정령다운 활기가 감돌았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나도 같이 따라 웃었다.
“질문은 다 끝났어?”
―예. 물의 왕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야 제가 맡은 소명을 끝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왕께서 괜찮으시다면 떠나기 전에 한 가지 전언을 남기는 것에 대해 허락을 구하고 싶습니다.
“응? 떠나긴 어딜 떠나?”
―예? 아, 그러니까…… 명계로요?
“누구 마음대로 명계로 가는데?”
―……저는 이제 소멸하는 거 아닙니까?
진은 오히려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항이 유독 심하다 했더니, 내가 자신을 소멸시키기 위해 붙잡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실 이대로 검의 봉인을 해지하면 내가 따로 건드리지 않아도 그는 그대로 소멸의 궤도를 걷게 될 거다. 전대 미네르바가 처음 부탁했던 내용도 그것이긴 했다. 그 뒤로 상황이 많이 달라져서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