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22화 (322/608)

제322화

금발의 나는 이런 느낌이구나. 머리카락을 조금 매만져 보고 있으려니 가슴 속이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헤헤.”

“뭘 그렇게 기분 나쁘게 웃어?”

“이렇게 하니까 나 엘뤼엔이랑 좀 닮지 않았어?”

어리둥절하게 보고 있던 라피스가 그 말에 얼굴을 왕창 찌푸렸다.

“머리랑 눈 색이 같다고 다 닮았다고 하는 게 아니거든. 왜, 이사나도 그 녀석이랑 닮았다고 하지? 그렇게 치면 지금의 나도 닮은 거겠네.”

“……쳇.”

역시 그렇게까지는 아닌가.

머쓱해지는 기분을 감추기 위해 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에 시선을 집중했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엘뤼엔과 나는 이목구비가 완전히 다른 편이었다. 빈말로도 닮았다고 하는 건 양심이 없는 것 같긴 했다.

‘그런데 묘하게 익숙한 기분이…….’

뭐지?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데르온이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모습을 보니 그때 ‘그분’이 떠오르네요.”

“네? 아…….”

무슨 말인지는 금방 깨달았다. 나는 쓰게 웃으며 거울 속의 내 모습을 손으로 쓰다듬어 내렸다.

“그렇네요. 어디서 봤나 했더니. ‘엘’이랑 닮았구나.”

비록 카노스가 연기했던 가짜였지만, 모습만은 시벨리우스의 기억을 그대로 본떴다고 했었지. 조금 들떴던 기분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미궁 속에 빠지는 바람에 억지로 묻었을 뿐, 완전히 그 존재를 잊고 있던 건 아니었다. 때때로 이렇게 기억을 되짚어 볼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나는 여전히 그가 궁금했다. ‘엘’은 정말 시벨리우스의 망상 속에 불과한 존재일까? 그게 아니면…….

‘아니, 더는 생각하지 말자. 아무렴 어때. 지금은 내가 엘이잖아.’

거울에 비친 나를 향해 중얼거렸다. 내 아들은 너밖에 없다고, 엘뤼엔이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믿었다. 시벨리우스와도 엘이 쌓은 것만큼의 유대감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설령 진짜 엘이 나타나더라도, 그가 이전처럼 나를 밀어내지 않을 거란 자신도 있었다.

……그래도 지금 이 자리에 그가 함께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시벨리우스가 지금 내 모습을 봤다면 굉장히 심란해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고 나는 또 상처받았겠지. 그런 경험은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고 미리 전전긍긍하지 말아야지. 그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 머리로는 늘 다짐하면서도 실천이 잘 되지 않는 부분을 다시금 굳게 되새겼다.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입꼬리를 씩 들어올렸다. 거울 안에 있는 내가 후련한 듯 아닌 듯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져서, 조금은 씁쓸했다.

* * *

본격적으로 블레스터를 낚기 위한 작전이 시작됐다. 사실 작전이라고 해 봤자 그저 무작정 거리를 돌아 다녀보자는 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딱히 작전이라고 할 만한 건 아니었다. 수도가 상당히 넓은 편이라는 걸 감안하면 오히려 대책이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다만 마족의 힘이 미끼를 더 강화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에 따라, 두 명씩 팀을 나눠서 행동하기로 했다.

그 결과 나는 데르온과, 라피스는 아스와 각각 한 팀이 됐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힘의 균형만을 생각한 결정이었다. 정령왕인 나야 여차하면 왕의 권능으로 블레스터를 굴복시킬 수 있겠지만, 라피스의 경우에는 그게 아니니 그쪽에 좀 더 강한 힘을 몰아주는 게 맞았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아스가 함께하는 게 더 적합했다. 이미 데르온보다도 아스가 강하다는 건 숨길 수도 없이 당연한 사실이었으니까. 물론 아스는 불만스러워했지만 말이다.

“내가 대부와 가고 싶었는데. 하지만 이렇게 해야 효율이 더 좋다면 그렇게 할게.”

투덜거리면서도 아스는 고집을 피우지는 않았다. 갓 태어날 때부터 기특하던 대자는 성장한 후에도 대견하기 그지없어서 나는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흐뭇한 기분에 실실 웃고 있자니 옆에서 데르온이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절 얼마나 괴롭히실지.”

“네? 뭐가요, 데르온?”

“아아, 별거 아닙니다. 주군이 갈수록 마족다워지셔서 대단히 감격스럽다는 뜻이었습니다.”

뜻 모를 대꾸에 어리둥절해졌지만 데르온은 그 뒤의 말을 아꼈다. 표정은 자긍심이 넘치는데 어째선지 안색은 좋지 않았다. 그보다 마족다워진다는 말은 칭찬이라고 할 수 없지……않나? 마족이 마족다워진다는 거니까 칭찬이라고 봐야 하는 건가. 왠지 돌이켜볼수록 기묘한 기분이 들어서 더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다닌 지도 벌써 시간이 꽤 흘렀군요. 슬슬 반응이 오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데르온의 말에 나는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그는 몇 시간째 사람이 많은 번화가만 골라 다니는 중이었다. 외모를 최대한 많이 노출시켜서 주변의 이목을 끌려는 생각이었다. 바람은 소문에 민감하니 분명 어디선가 숨어서 정보를 얻고 있을 거다. 이런 시기에 금발과 푸른 눈을 지닌 사람이 거리를 돌아다니면 쉽게 사람들의 화제에 오르내릴 거고, 그러다 보면 블레스터에게도 소식이 전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예상대로 내가 지나는 곳마다 사람들은 수군거리기에 바빴다. 그래서 알게 된 건데, 공작저에서 느꼈던 것보다 바깥의 분위기가 훨씬 더 심각했다. 저택 안의 사람들이 들려오는 소문에 긴가민가해하는 느낌이었다면, 이곳은 이미 현실적인 공포에 잠식되어 있는 상태였다. 원래 머리색일 땐 몰랐던 분위기가 금발이 되고 나니 확연하게 와 닿았다.

평소엔 손쉽게 호감을 사는 편인 내 외모가 오늘은 껄끄러운 눈길을 더 많이 받았다. 역병이라도 되는 듯 기겁해서 물러서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범행이 주변까지 전부 다 몰살하는 방식이다 보니, 아무래도 다들 지나치게 몸을 사리게 된 것 같았다.

거리에서나 집안에서나 금발을 편하게 드러내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모두 모자를 눌러쓰거나 안경 비슷한 것을 써서 모습을 가리고 다니기 바빴다. 내게는 잘된 일이긴 했다. 블레스터의 표적이 더 좁혀진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런 것치곤 너무 오랫동안 반응이 없긴 했지만.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람. 얼른 나타날 것이지.”

“며칠은 각오해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왕과 마주친 직후니 한동안은 숨어 있지 않겠습니까? 경솔하게 움직이면 잡힌다는 걸 알 테니까요.”

“아뇨. 평소라면 그렇겠지만 지금은 그런 이성적인 판단은 내리지 못할 거예요. 오히려 초조해져서 더 빨리 목표를 달성하려고 할걸요?”

“아,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크게 깨우쳤다는 표정을 지은 데르온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이보시오, 거기.”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봤더니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후드를 깊이 눌러써서 얼굴까지 거의 다 가린 차림을 한 남자였다. 반사적으로 그가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 것 같았다.

“저한테 할 말 있으세요?”

용건이 짐작됐지만 일부러 모른 척 묻자 남자는 끄응 하고 신음을 삼켰다. 화를 내고 싶은데 나와 데르온의 분위기 때문에 쉽게 입을 떨어트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그를 응원하듯이 응시했다. 그들의 눈길에 용기를 얻었는지 남자가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내가 웬만해서는 참견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말이오. 아까부터 자꾸 이 근방을 배회하는 것 같아서 아무래도 안 되겠소. 지금 이런 시기에 왜 머리를 가리지 않고 다니는 거요? 다들 서로를 배려하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아무런 소용이 없잖소! 당신 하나 때문에 모두에게 피해가 돌아온단 말이오!”

“머리가 왜요?”

“당신은 금발에 푸른 눈이잖소. 설마 아무런 소문도 듣지 못했소?”

“아, 뭔지 알아요. 어느 미친 녀석이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을 죽이러 다닌다는 거요?”

“그걸 알면서 그러고 있단 말이오?”

“당연히 알죠. 오히려 아니까 이러고 있는 건데요.”

“그게 무슨…….”

“그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을 노린다는 녀석을 제가 좀 만나보고 싶어서요.”

남자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벙긋거렸다.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반응을 돌아보는 대신 데르온을 응시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조금 전부터 마음에 걸리던 감각에 확신이 생겼다. 우리 둘 사이에 오가는 신호를 알아보지 못한 남자는 버럭 화를 냈다.

“살인마를 만나고 싶다니! 만용을 부려도 정도가 있지! 보아하니 젊은 날의 호기로 뭔가 해 보려는 모양인데, 그자를 잡는 건 경비대가 할 일이오! 그 살인마는 표적만이 아니라 주변인까지 전부 다 죽인다고 했소! 괜히 당신 때문에 이곳에 피해가 생기면 어떻게 할 거요? 정말 그자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흠. 그쪽도 금발에 푸른 눈인가 봐요. 그렇게 얼굴을 다 가리고 있는 걸 보면.”

“그, 그렇소! 그러니 당신도 속히 그 모습을 가려 주시오!”

“음, 그전에 확인 좀 더 해보구요.”

“뭐, 뭐요?”

“당신 머리랑 눈 색이 뭐라고요?”

“나도 금발에 푸른 눈이라고 했잖소! 미친 살인마가 노리고 있는 색이라고 해서 내가 요즘 계속 가리고 다니느라 얼마나 고생을……!”

됐다.

웃음이 지어지려는 걸 간신히 억눌렀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분위기에서 웃는 게 눈치 없어 보인다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대신에 나는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가져갔다. 한창 따지려 들던 남자가 그 동작에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나는 고개를 슬쩍 틀었고, 남자 또한 내가 응시하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그제야 발견한 것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하얀 색을 지니고 있는. 사람보다는 혼령에 가까워 보이는 남자의 모습이.

“뭐, 뭐야, 저건.”

마찬가지로 뒤늦게 알아차린 구경꾼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파랗게 질리는 얼굴들을 보아 한눈에 심상치 않은 존재라는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금발. 푸른 눈.”

새하얀 남자―카리브디스 공작의 입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있었다. 사실 그 자체가 이미 바람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래. 그게 키워드였구나.”

뒤늦은 깨달음에 쓴 웃음이 나왔다. 조금 전부터 저 단어가 언급될 때마다 주위의 기류가 미묘해지는 것이 느껴졌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 많이 언급되도록 유도해 봤는데 정말로 짐작이 맞았다. 아무래도 그는 ‘금발’과 ‘푸른 눈’이라는 말이 언급되는 장소를 주로 찾아다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공작저에서 나타났을 때도 한창 연쇄 살인범이 노리는 특징을 말하고 있을 때였었지. 여관에서 일행들과 대화할 때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 같은데. 아마 본인보다 약한 존재의 음성만 감지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은 격의 성과였지만, 이제라도 알아내서 다행이었다.

공작의 텅 빈 눈동자가 스산하게 주위를 훑다가 나를 발견하더니 날카로운 빛을 품었다. 뚫어질 듯한 시선이 내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차례대로 응시했다. 금방이라도 베어낼 듯이 선명한 살기가 닿았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내 정체는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데르온이 옆에서 자신의 마력을 강하게 풀어내는 중이라 기운이 뒤섞여 있긴 할 거다. 안 그래도 감각이 흐려진 상태니 인지하지 못할 만도 했다.

“곧 올 거예요. 데르온, 주위에 피해가 번지지 않도록 방어 좀 해 줘요.”

“네, 알겠습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눈앞에서 공작의 모습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사라졌다고 느낀 건 찰나였다. 곧바로 내 눈앞에 다시 나타났으니까.

“……!”

위에서부터 세찬 바람이 쏟아져 내렸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 그가 높이 치켜든 검을 나를 향해 내려쳤다. 피할 만한 거리도, 시간도 부족했기 때문에 나는 맞서는 쪽을 택했다. 즉석에서 물로 검을 만들어낸 후, 그대로 묵직한 공격을 막아냈다.

콰지직! 쿠우웅!

코앞에서 두 개의 검 날이 아슬아슬하게 교차했다. 둘 다 금속이 아니라서 그런지 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이상하게 울렸다. 마치 번개가 치는 소리 같았다.

실제로도 부딪힌 부분에서 잠시간 강렬한 빛이 튀었다. 터져 나온 압력에 의해 양쪽으로 거센 바람이 퍼져나갔다. 바닥의 감각이 달라진 걸 보면 땅도 같이 파인 것 같았다. 그나마 데르온이 수습을 잘해 준 덕분에 뻗어나간 기세가 사방에 피해를 끼치는 건 막았다. 아니었다면 온 지대가 파괴되고 물건들이 전부 다 날아갈 뻔했다. 덕분에 상황을 늦게 파악한 사람들이 한 발짝 나중에 술렁거렸다.

“뭐, 뭐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모두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멀찍이 떨어져 있던 하얀 남자가 어느새 내 앞에서 검을 들이밀고 있는 것도, 우리가 대치한 곳이 움푹 가라앉아 있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금발……. 푸른 눈을……죽인다.”

그러나 다음으로 공작이 하는 말은 비교적 똑똑하게 들린 것 같았다. 이미 동요하고 있던 사람들의 낯이 한순간에 흙빛이 됐다. “히이익! 살인마다!” 누군가가 비명을 지른 것을 시작으로 그들은 혼비백산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쯤에서는 차라리 달아나 주는 게 고마웠기 때문에 안도감이 들었다. 단지 경비대가 신고를 받고 달려오기 전에, 상황을 빠르게 해결해야 한다는 숙제가 떨어지긴 했지만.

검에 가해지던 압력이 떨어졌다. 살짝 뒤로 물러난 공작이 다시금 재차 공격을 이어왔다. 파직, 파지직! 서로 힘이 부딪칠 때마다 계속해서 전류가 튀었다. 날 공격하는 건 블레스터의 본체만이 아니었다. 이미 뺨을 스치는 바람조차 무기나 다름없이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피해자들이 전신에 난도질당해 죽은 것처럼 보였던 것도 이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공격을 막아내면서 조금씩 공작과의 간격을 좁혀나갔다. 이번엔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달아날 여지를 주지 않을 예정이었다.

한동안 막아내는 쪽에만 집중하다가 그가 이 패턴에 적응할 때쯤 불쑥 앞으로 치고 들어갔다. 내가 갑자기 바짝 다가선 것에 당황한 공작이 한순간 균형을 잃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멱살을 움켜쥔 다음, 다리를 꺾어 바닥에 매쳤다.

쿠웅!

바닥에 눕혀진 공작은 제게 일어난 일을 잠시 이해하지 못한 듯 했다. 멀뚱멀뚱 눈만 깜빡이고 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빙긋 웃어주었다.

“안녕, 진. 또 만나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