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20화 (320/608)

제320화

선뜻 고개를 끄덕이자 불안해하던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나는 다시금 그 머리를 쓰다듬어 준 다음 발길을 돌렸다. 왔던 길을 그대로 따라 나가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녀가 고개를 숙여왔다. 집사 루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의아해하는 걸 알아차린 듯 하녀가 곧바로 상황을 설명했다.

“집사님은 먼저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손님께 죄송하다고 전해 달라 하셨어요. 제가 정문까지 배웅해드리겠습니다.”

“아, 그냥 혼자 가도 되는데…….”

“아닙니다. 저택 안이 생각보다 넓어서 길을 잃으실지도 몰라요.”

아무리 넓어 봤자 공간이동을 하면 그만이다. 그럴 일은 없다고 답하고 싶었지만 오늘 처음 방문한 손님이 할 만한 대답은 아닌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나는 하녀의 안내를 받으며 길을 따라갔다.

“그런데 갑자기 자리를 비우시다니, 뭔가 급한 일이라도 생기셨나요?”

“죄송합니다. 공작저 내부 규정에 따라, 저택 안에서 일어난 일은 외부인에게는 말씀드릴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아, 그래요.”

뭐, 말해 주지 않으면 스스로 알아보면 되지. 딱히 수고로울 것도 없는 일이라 불쾌하지도 않았다. 저택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니 어차피 근방에 있다는 소리였다. 얌전히 입을 다물고 걸어가면서 눈에 살짝 힘을 실었다. 가볍게 주위를 의식하는 것만으로 훤하게 곳곳의 상황이 보이기 시작했다.

집사는 저택 뒤쪽 마구간 앞에 있었다. 하인들로 보이는 몇 사람과 함께한 채였는데, 왠지 다들 표정이 굳어 있었다. 마주 서서 묻고 대답하는 모습이 한창 취조 중인 것처럼도 보였다.

“목격자는?”

“없습니다.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와 봤더니 이미…….”

“그렇군. ……일단 경비대 쪽에 신고를 넣게. 뜬소문이 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네.”

“예, 알겠습니다.”

딱딱한 표정만큼이나 오가는 대화 소리 역시 매우 침울했다. 한눈에도 심각한 분위기의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한구석에 무언가가 긴 천으로 덮여 있었다. 삐죽 튀어 나와 있는 팔이라든가 머리털이 아니었더라도, 그 형체가 사람이라는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누가 죽은 건가?’

과연 집사가 손님 배웅을 미루고 급히 달려갈 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돌아가는 정황을 보니 사고가 아니라 살인 사건인 것 같았다. 시신을 덮어둔 천이 붉은 피로 얼룩덜룩했다. 난자를 당하지 않고서야 저렇게 피가 흥건히 묻어날 리 없었다.

“제기랄. 결국 이렇게 되다니…….”

하인 중 한 명이 팔뚝으로 거세게 눈물을 훔쳤다. 참고 있던 감정이 표출되자 물고가 트인 듯 다른 사람들도 모두 따라서 울기 시작했다. 집사만이 침통한 표정으로 시신이 있는 쪽을 말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살해당한 동료를 애도하는 비통한 현장이었다. 딱히 구경할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시선을 떼지 않고 상황을 주시했다. 조금 전 하인이 뱉은 말에서 묘한 위화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필’도 아니고 ‘결국’이라고 했다. 마치 이런 사건이 일어날 거라는 걸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 소문이 사실이었습니다, 루벤 님. 네이의 시신 보셨죠? 알려진 방식 그대롭니다.”

“이렇게 되면 로란도 위험한 거 아닙니까?”

“쓸데없는 소리. 아직 확실하다고 밝혀진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네이가 죽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이가 죽은 걸 어떻게 우연으로 보겠습니까? 이 녀석이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성격이 아니라는 건 루벤 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으으음.”

이어지는 대화 내용은 더 묘하기만 했다. 아무래도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죽은 사람의 정체가 더 문제가 되는 것 같았다. 자세한 상황은 알 길이 없었지만, 무언가 내가 알지 못하는 배경이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에, 에리나 언니.”

그때 귓가에서 가는 음성이 들려왔다. 건너편 집사의 상황이 아니라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나는 급히 확장해 두었던 시야를 거두고 정면을 응시했다. 맞은편 꺾어지는 복도 쪽에서 한 하녀가 불안정하게 서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꽤 귀여운 인상의 소녀였다. 앞서가던 하녀가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로란.”

불린 이름은 내게도 익숙했다. 레이가 한 번 언급한 적도 있었고, 조금 전 하인들의 대화 속에서도 등장했었다. 이름만 알던 소녀를 실제로 만나게 되니 유명 인사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로란은 겁먹은 사람처럼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에리나라고 불린 하녀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힐끗 내 쪽을 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실례되는 일이니, 로란. 보다시피 지금은 손님을 배웅하는 중이야. 할 얘기가 있으면 나중에 이야기를…….”

“어, 어떡해. 네이가 죽었대.”

“……!”

에리나가 차분하게 주의를 주었지만 로란은 용건을 기다리지 못했다. 토해내듯 뱉어진 말에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에리나가 헉하고 숨을 삼켰다. 그 솔직한 반응이 울어도 된다는 신호처럼 여겨졌는지, 로란이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정말로 네이가 죽었어. 나 어떡해, 에리나 언니. 정말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봐.”

“로, 로란. 일단 진정해. 네이가 죽다니? 그럼 사고가 났다는 게 설마…….”

“수 언니가 다음은 내 차례라고……. 그래서 다들 나랑 같이 안 있으려고 해. 나, 너무 무서워서…… 흐으윽.”

“뭐야? 수, 그 계집애가 정말……! 이런 상황에서 할 말 못 할 말이 따로 있지!”

혼란에 빠져 있던 에리나가 그 말에 분을 드러내며 이를 갈았다. 로란은 더 크게 흐느꼈고, 이번엔 에리나도 그녀를 야단치는 대신 다가가서 끌어안고 달래기 시작했다. 이미 두 사람 다 뒤쪽에 서 있는 내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다짐하듯이 연거푸 이어지는 위로를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궁금증이 더 커져 갔다. 조금 전 묘했던 대화도 그렇고, 네이라는 사람의 죽음이 로란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데, 단편적인 정보뿐이라 흐름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어차피 이대로 마냥 지켜보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나는 시선을 환기시킬 겸 그냥 대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소문이라는 게 뭐예요?”

“……!”

예상대로 두 사람은 그제야 내 존재를 상기한 듯 보였다.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는 얼굴들에 낭패감이 가득했다.

“죄, 죄송합니다. 이런 결례를…….”

“아뇨, 괜찮아요. 보아하니 상황이 꽤 심각한 것 같네요. 많이 놀란 것 같은데, 그럴 수 있죠. 그보다는 그 소문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은데요.”

“그건…….”

“소문이라는 건 이미 퍼져 있는 이야기라는 거잖아요. 그 정도는 관계자가 아니라도 괜찮지 않나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에리나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다 알려진 상황, 숨겨 봤자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기도 했다.

“그 소문을 모르시는 걸 보니 수도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나 봅니다. 며칠 전부터 내성 안에서 기괴한 살인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고 있는 중입니다.”

“연쇄 살인인가요?”

“예.”

고개를 끄덕인 에리나는 자신이 아는 것들을 설명했다. 시작은 어느 한 가게의 비극을 통해 알려졌다. 손님이 적은 편인 작은 식당이었는데, 비명 소리를 듣고 가보니 주인이 죽어 있었다고 했다. 사인은 검상. 여러 번 난자한 흔적이 몸에 남아 있었다. 피해자는 평소 여기저기 빚을 지고 잘 갚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들 돈으로 인한 원한 살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몇 시간 후, 두 번째 피해자가 발생했다. 이번엔 잡화점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여자아이였다. 마찬가지로 사인은 검상. 첫 번째 피해자와 같은 부근에 베인 자국이 존재했다. 동일범의 소행이라고 판단한 경비대는 수색 범위를 더 크게 확대했으나 몇 분도 되지 않아 세 번째 피해자가 나타났다. 그렇게 연달아 일어난 사건이 벌써 다섯 건이 넘어가고 있다고 했다.

“대체로 정해 둔 목표물만 살해하지만, 여러 사람과 함께 있을 경우엔 모두 한꺼번에 몰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목격자가 없습니다.”

“범인이 목표물을 선정한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설명만 들어보면 성별과 나이도 가리지 않는 것 같은데요.”

“정확한 건 아니지만…… 피해자들에게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공통적인 특징?”

“모두 금발에 푸른 눈이었습니다.”

“……!”

아, 그래서 로란더러 다음 차례라고 한 거구나. 나는 머뭇거리고 서 있는 금발의 소녀를 새삼스럽게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천에 덮여 있어서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죽은 네이라는 사람도 금발이었던 것 같다.

‘블레스터……가 아닌가.’

지금 상황에서 느닷없이 벌어지는 연쇄살인이라면 유력한 범인은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특정인을 노린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이성을 잃은 검에게 대상을 선정할 이지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다니면서 보이는 것들을 무작위로 죽이려고 할 테니까.

“아니지. 아직 이성이 남아 있다는 뜻인지도.”

“예?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의아한 시선에 얼른 웃어 보이자 두 여인의 표정도 편안해졌다. 그런데 그 순간, 오싹한 감각이 피부를 타고 지나갔다.

―금발……푸른 눈.

“……!”

단조롭고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마치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것 같았다. “이런, 미친!” 머리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빠르게 물의 장벽을 펼쳐내기 무섭게 묵직한 충격이 내리꽂혔다.

콰직! 콰아아앙!

“꺄아악!”

요란한 소음에 기겁한 여인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둔탁한 소리가 들린 걸 보면 폭발로 일어난 풍압에 나가떨어진 것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의 상태가 염려되었지만 지금은 그쪽을 돌아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바로 눈앞에 내가 상대해야 할 사람이 서 있었으니까. 한 손에 새하얀 검을 드리운, 카리브디스 공작이.

쏴아아―

창문도 열리지 않는 실내에 때아닌 거센 바람이 불었다. 그가 이곳에 나타난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수도 안에 파다한 소문의 주인공이 바로 그였던 모양이다.

“……하. 대체 저게 무슨 꼴이야.”

그림처럼 고요히 서 있는 모습에 욕설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본래 노란색이었던 그의 머리칼이 투명할 정도로 새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보라색이었던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전신에서는 싸늘한 바람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하면 사람이 아니라 그냥 바람의 정령으로 보였다. 블레스터와 거의 동화된 상태임이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공격이 막힌 것이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이 상황은커녕, 눈앞에 있는 내가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고, 공작님?”

뒤쪽에서 혼란스럽게 중얼거리는 음성이 들렸다. 주저앉아 있던 로란이 충격에 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령의 색을 입었어도 기본적인 체구나 이목구비는 공작 그대로였다. 이 저택의 주인이기도 한 만큼, 식솔인 그녀가 카리브디스의 외모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공작님이…… 어째서…….”

에리나 역시 그를 알아보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까지 자신의 검만 응시하고 있던 공작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초점 없이 탁한 눈이 로란을 응시하자 시린 빛을 담았다.

“금발…….”

달싹거리는 입술 안에서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로란과 에리나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그가 한 걸음 내딛자 두 여인은 숨을 그대로 멈추고 굳었다. 위급한 상황에서는 잽싸게 피하는 순발력이 필요하겠지만, 이 순간에는 달아나려 했다면 오히려 그를 더 자극했을 테니 차라리 다행인 셈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카리브디스의 행동 자체는 당황스러웠다. 로란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우선 그들 앞에 있는 나를 지나쳐야 한다. 당연히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것 정도는 판단했을 거다. 사실 나는 공격이 막히는 대로 그가 뒷걸음치다가 곧장 달아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반대로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일 뿐만 아니라 이쪽을 향해 걸음을 내딛기까지 했다.

“멈춰.”

그가 겁도 없이 걸어오는 게 황당해서 나는 일단 경고부터 했다. 그런데 그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응시하는 시선에 내가 닿지 않았다. 아무리 내가 기운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지만, 블레스터라면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직 그의 의식이 카리브디스에 더 가깝다는 의미였다. 그가 그냥 스쳐 지나가려 해서 나는 황급히 팔을 붙잡았다. 그 탓에 강제로 이동이 멈추자 카리브디스가 다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닿은 시선이 내 얼굴에 한 번, 머리카락 쪽에 한 번 머물렀다.

“푸른 머리. 푸른 눈. 넌 아냐…….”

“너 대체…….”

“황제는…… 금발에 푸른 눈…….”

“……!”

“그를…… 죽여야 한다…….”

“뭐, 이 미친놈아?”

속에서 울컥 열이 치밀어 올랐다. 왜 굳이 금발에 푸른 눈만 노린 건가 했더니, 그게 이사나를 겨냥한 거였던 모양이다. 정화고 뭐고 그냥 확 소멸시켜 버릴까? 강렬한 충동이 치솟으려는데 이어지는 다음 말이 실행으로 옮겨지는 걸 막았다.

“황제가…… 죽어야…… 끝난다.”

“하?”

“그만 죽으면…… 주군이 원래대로…… 돌아오실 거야.”

“……미치겠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숨만 쏟아졌다. 화는 나는데 그가 무슨 의도로 이런 짓을 벌인 건지 알 것 같아서 심란한 기분이 더 컸다. 이 충직한 신하는 마지막까지 대공을 믿고 싶었나 보다. 이사나만 죽으면 이 모든 일들이 전부 다 끝난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러면 차라리 정확히 목표를 노리기나 할 것이지, 그가 누군지, 어디에 있는지조차 기억하지도 못해서 그냥 무작정 돌아다니며 애먼 사람들을 살해한 거다. 폭주한 블레스터의 광기와 카리브디스의 남은 의식이 뒤섞여 만들어낸 참사였다.

“저쪽입니다! 저쪽에서 비명소리가!”

“……!”

그때 멀리서 다수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쪽의 소음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잠깐이나마 느슨해졌던 공기가 급격하게 당겨지면서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 지금까지 카리브디스는 목표 대상은 물론, 그와 함께한 사람들까지 전부 다 죽였다고 했다. 이 소란이 블레스터의 광기를 자극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비교적 얌전했던 공작의 눈에 서슬 푸른 한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마치 멈춘 동력에 스위치가 켜진 것 같았다. 선명히 달아오르는 살기에 붙잡고 있는 부분이 따끔해졌다. 기운이 날처럼 솟아나 사방의 모든 것을 베어낼 것처럼 사납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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