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9화
“루벤 할아버지!”
그를 발견한 순간 내내 굳어 있던 레이의 얼굴이 처음으로 온전히 환해졌다. 드디어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안도감이었다. 후다닥 달려 나간 레이가 품에 뛰어드는 것을 남자가 얼른 두 팔 벌려 받아냈다. 아이를 살피는 그의 얼굴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아, 세상에! 신이시여, 영광을 받으소서! 정말 레이 도련님이 맞으시군요! 이게 대체 어떻게 되신 겁니까? 그동안 어디에 계셨어요? 제가 얼마나 도련님을 찾아다녔는지 아십니까?”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아뇨, 아닙니다. 도련님이 잘못하신 게 아니에요.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작은 어깨를 부둥켜안은 남자의 몸에서 희미한 떨림이 느껴졌다. 찾아다녔다는 것이 빈말은 아니었는지, 그는 한동안 잠들지 못한 사람처럼 눈 밑이 까맸다. 거칠고 푹 꺼진 피부라든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는 차림새만 봐도 그간 겪은 마음고생을 알 것 같았다. 그건 다른 사람들의 상태도 크게 다르지는 않아서, 모두 병자처럼 안색이 퀭한데 표정만은 환했다. 그런 모습들 하나하나가 이 저택에서 레이가 어떤 위치였는지 말해 주는 듯했다. 진정으로 사랑받는 귀한 도련님이었노라고.
“도련님!”
“레이 도련님!”
감격한 사람들이 앞다투어 눈물을 쏟았다. 레이 역시 서러움을 토해내듯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내 얹힌 것처럼 묵직하던 기분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레이는 사랑받는다는 감각 속에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앞으로 이어질 아이의 인생을 조금이라도 순탄하게 이끌어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 *
“알폰프 제국 남부의 마룬 섬에서 들여온 홍차입니다.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눈앞에 내려진 찻잔 안에서 달콤한 향기가 풍겼다. 호기심에 한 모금 넘겨 보니 입안을 감도는 느낌이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웠다. 차에 대해서 잘 모르는 나도 상당히 좋은 찻잎을 썼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귀족들은 다 이런 것만 마시는 건가? 지금까지 접해 왔던 차들은 대체로 시중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기성품 위주였다. 어차피 맛을 느끼지 않다 보니 딱히 어떤 게 더 좋은지 나쁜지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재료의 질 차이가 이렇게까지 클 줄은 몰랐다. 이래서 라피스가 유난히 고급품만 고집하던 건가 싶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심리를 처음으로 정면에서 마주한 기분이었다. 아마 나도 제대로 된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 못지않게 유난스럽지 않았을까. 돌아가는 대로 이 찻잎부터 구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어쩌면 그보다 더했을지도 모르겠다.
“맛이 좋네요. 감사합니다.”
예의를 갖춰 인사를 건네자 내 반응을 살피고 있던 집사 루벤이 안심한 얼굴을 했다. 차라리 마주 앉아주면 좋을 텐데. 옆쪽에 기립한 상태에서 내가 차를 마시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니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조금 전에는 왜 앉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돌아오는 표정이 굉장히 미묘했다. 그런 걸 묻는 내가 오히려 더 이상하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럼에도 앉을 것을 요청했지만, 한사코 이런 구도가 더 편하다고 거절하는 바람에 더는 권할 수도 없었다.
‘틀림없이 날 귀족으로 오해한 거겠지.’
선이 가늘고 화려한 편인 내 외모가 귀족으로도 보일 수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이럴까 봐 용병이라고 소개했건만, 아무래도 저쪽에선 그 말을 믿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그럴듯한 용병패라도 준비해 봤을 텐데. 늦은 후회라는 걸 알면서도 입맛이 썼다. 사실 둘러댈 신분 같은 건 생각해 두지도 않았었다. 애초에 저택까지 들어올 생각은 없었으니까.
‘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
한숨을 속으로 삼키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겉에서 보기에도 화려하던 저택은 안으로 들어오니 훨씬 더 웅장한 크기를 자랑했다. 대리석으로 다져진 바닥이며 금실로 수를 놓아 짠 대형 융단과 실크로 된 커튼들. 벽면을 가득 채운 유리창과 그 위를 장식하고 있는 화사한 스테인드글라스까지. 눈을 두는 곳마다 비싸 보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유지하는 비용만도 상당할 것 같은, 제법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저택이었다.
그러나 말했다시피 나는 정말로 이 안에 들어올 생각이 없었다. 원래는 아이를 데려다주는 걸로 내 역할을 끝마칠 예정이었다. 만나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미 레이가 식구들 품에 돌아간 상황이었다. 애타게 찾던 아이가 돌아왔으니 철저하게 보호할 테고, 외부인인 나는 이쯤에서 빠져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사가 돌아서려는 나를 한사코 저택 안으로 초대했다. 아이를 발견한 경위를 보다 자세히 듣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니까, 노예 시장에서 발견하셨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정확히는 제가 아니라 제가 아는 용병단이 찾은 거예요. 의뢰를 받고 실종된 아이를 찾는 중이었는데 불법적으로 경매가 열린다는 걸 알고 현장을 급습했거든요. 그 안에서 함께 구조한 아이라며 데려왔더라고요.”
울다 지친 레이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 방으로 옮겨진 상태였다. 덕분에 나는 누구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편하게 적당한 이야기를 지어냈다. 집사 루벤은 내가 하는 말들을 두꺼운 책자 안에 열심히 옮겨 적었다. 너무 열중하고 있어서 거짓말이라는 게 미안할 지경이었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으니 눈을 질끈 감고 모른 척했다.
“레이가 충격이 컸는지 납치된 전후 상황을 잘 기억 못 해요. 그래도 보호자의 이름만은 확실히 말하더군요. 마침 제가 가는 길이라 데려다준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저한테 감사하실 건 없어요.”
“아닙니다. 여기까지 도련님을 무사히 모셔다 주신 것만 해도 몇 번을 감사해도 부족합니다. 공작님께서 계셨다면 크게 사례하셨을 텐데, 지금 출타 중이신지라…….”
“아뇨! 괜찮아요.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정말로 한 일이 없어서요. 사례는 이 차 한 잔으로 충분해요. 다른 건 주신다고 해도 받을 생각도 없고요. 그러니 신경 쓰지 마세요.”
“으음. 그러시다면 실례지만 도련님을 구해 준 용병단이 어디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그분들께라도 찾아가서 따로 감사인사를 드리고 사례하고 싶습니다.”
“네? 어, 으음. 그건 소용없어요. 아마 만나기 어려울 거예요. 의뢰를 끝마치자마자 바로 다른 의뢰를 하러 떠났거든요. 꽤 먼 곳으로 간다는 것 같았어요.”
“저런, 그건 무척 유감이군요. 그래도 일단은 단명을 알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은인 되시는 분들이 누구신지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하하, 워낙 공로를 내세우기 싫어하는 사람들이라……. 게다가 경매장 급습과 관련된 의뢰가 비공개적으로 은밀하게 수행하던 거라서요. 그래서 제가 마음대로 밝혀도 좋을지…….”
억지로 웃는 얼굴과는 달리 속으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역시 어영부영 지어낸 이야기로는 한계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아무리 요청해도 그냥 돌아갔어야 했다는 후회가 다시금 가슴을 쳤다. 그러나 이미 일은 벌어진 상태였고,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는 시도는 집사 루벤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의 표정은 점점 더 단호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습니다만, 저희들의 마음도 헤아려 주셨으면 합니다. 공작가의 체면도 있는데 이런 큰 도움을 받고 그냥 가만히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으으음. 하지만…….”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귀하는 물론, 그분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제발 말씀해 주십시오.”
“……하아, 어쩔 수 없죠. 그럼 그냥 알려드릴게요. ……인 용병단이에요.”
“예?”
“샴페인. 샴페인 용병단이요.”
미안해요, 휴센.
결국 나는 눈앞에 도래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아는 이름을 팔기로(?) 했다. 헤어진 뒤로는 소식을 알지 못하는 가장 친숙한 용병단의 이름을. 공로를 넘기는 거니까 설마 뒤탈이야 있겠냐는, 다소 태평한 생각에서 의거한 판단이었다. 설령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다들 뛰어난 능력자들이니 괜찮을 거란 믿음도 있었다. 특히 그곳엔 트로웰이 있으니까. 눈치 빠른 그라면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고 알아서 잘 수습해 줄 거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알 리가 없는 집사는 불러 주는 이름을 적어 넣기 바빴다. 한층 신중해진 얼굴을 보아하니 당장 오늘부터 사람을 수배해서 찾아볼 기세였다. 용병들이야 워낙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사람들이니 다소 거리가 많이 어긋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 거다. 그러나 마음이 찔리다 보니 안 그래도 불편하던 자리가 더 가시방석 같아졌다. 더는 머물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전 이만 가볼게요. 차 잘 마셨습니다.”
“예? 벌써 가십니까? 저녁 식사까지는 하시고…….”
“죄송해요. 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말씀드렸다시피 가는 길에 들른 것뿐이라 더는 지체할 수가 없네요.”
“그러시군요. 바쁘신 분을 붙잡을 수도 없으니……. 더 대접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도련님도 많이 아쉬워하실 겁니다.”
“대접은 충분히 받았어요. 아, 가기 전에 레이를 잠시 봐도 괜찮을까요? 자는 얼굴만이라도 보고 가고 싶어서요.”
사실 보려고 하면 얼마든지 몰래 보러 갈 수 있었지만, 서둘러 달아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연출해 본 상황이었다. 그게 퍽 마음에 들었는지 집사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2층 가장 끝에 있는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복도 양옆으로 수많은 방이 이어지는 구조였지만, 도착한 곳은 그중에서도 가장 문이 컸다. 누가 보더라도 특별한 사람이 머무는 방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배치였다. 집사는 나만 방 안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움직이는 사람이 많으면 자는 아이가 깰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덕분에 홀로 들어오게 된 실내는 커튼을 쳐둔 탓에 전체적으로 어둑했다. 탁 트인 공간 속엔 응접실과 드레스 룸을 비롯하여 티 테이블 공간까지 각자 마련되어 있었다. 이만한 규모의 대저택이니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아이 하나가 쓰기엔 지나치게 넓다는 느낌이었다. 안쪽에 놓인 침대의 크기도 덩치 큰 성인 여러 명이 굴러다녀도 거뜬할 만큼 거대했다. 바로 그 가운데에 작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레이?”
예상하지 못한 건 그 모습이었다. 당연히 잠들어 있을 거라 생각한 아이가 멀뚱히 일어나 앉아 있었다. 두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얼른 레이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 레이? 왜 울고 있어?”
얼굴을 살피며 묻자 나를 발견한 레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망설이듯 몇 번이나 벙긋거리던 입술 속에서, 이윽고 낯익은 단어가 흘러나왔다.
“……린이.”
“어? 린?”
“린이…… 안 나와요.”
“…….”
뜻밖의 말에 조심스럽게 숨을 삼켰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에 다음 말이 이어졌다.
“린은 항상 나 혼자 있을 때 불렀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도 혼자 있으면 나올 줄 알았어요. 근데 안 나와요.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아요.”
“……레이.”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럴지 모른다 생각하긴 했지만 역시 린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익숙한 장소에 돌아가서 늘 부르던 방식으로 찾으면 예전처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그 믿음이 깨지고 만 거다. 아마도 처음으로 린의 죽음을 실감한 순간일 터였다. 꼭 감은 레이의 눈에서 다시금 서러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린이 진짜로 죽었어요? 이제 다시는 못 만나요? 왜요? 나……린한테 인사도 못 했는데…….”
“…….”
“안 되는데. 린 죽으면 안 돼요. 나…… 린한테 못 해 준 게 너무 많단 말이에요. 아저씨가 린을 숨겨야 한다고 해서. 그래서 사람들 있는 곳에서는 부르지도 못했는데. 린이 목걸이에만 있는 거 갑갑해했는데. 맨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조용한 곳에서만 부르고…… 마음껏 돌아다니지도 못했는데. 예쁜 정원, 다 구경시켜 주지도 못했는데.”
중얼거리는 소리가 이어질수록 흐느낌도 더 짙어져 갔다. 숨이 넘어갈 듯이 우는 아이를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나는 레이를 꼭 끌어안았다.
“아냐. 아니야, 레이. 안 죽었어. 린은 지금도 너와 함께 있어.”
“……거짓말.”
“정말이야. 그냥 네가 린을 볼 수 없게 된 것뿐이야.”
“제가……요?”
눈물을 머금은 녹색 눈동자에 동요가 일었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린은 물의 정령이거든. 정령은 원래 이곳에 사는 존재가 아니야. 그래서 사람들한테 안 보여.”
“하지만 보였는데요……?”
“응. 그건 린이 특별한 약을 먹어서 그래. 그런데 이제 그 약효가 다 떨어졌대. 그래서 보이지 않게 된 거야.”
“진짜요? 그럼 정말 제 옆에 있어요?”
“그래. 너와 함께 있어. 누구보다도 너랑 가장 가까운 곳에.”
“그걸 어떻게 알아요?”
“말했잖아. 난 린의 가족이라고. 내 눈에는 정령들이 보이거든.”
진실만을 말했지만 진정한 답은 아니었다. 순진한 아이는 그 말에 감춰져 있는 이면을 알아보지 못했다. 굳어 있던 얼굴이 서서히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구슬처럼 떨어지고 있던 눈물도 어느새 그친 상태였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저도 다시 린을 볼 수 있어요? 저 뭐든 할게요! 아무거나 다 할 수 있어요!”
“……음, 아마 레이가 지금보다 많이 자라면. 그러면 스스로 깨닫게 될 거야.”
“깨달아요?”
“응. 린이 항상 곁에 있다는 걸.”
아마도 자랄수록 점점 인간과 달라지는 자신의 모습을 알아가겠지. 그러면 싫어도 깨닫게 될 수밖에 없을 거다. 린이 왜 사라져야 했는지. 왜 늘 함께 있다고 말해 줘야 했는지도.
그때에도 레이는 또 울게 될까. 아니면 이미 지나버린 추억이라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게 될까. 아니, 어쩌면 지금의 그리움조차 원망으로 변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게 조금 가슴 아팠다.
“그러니까…… 앞으로 한 가지만 기억해 줄래, 레이? 린은 널 정말 많이 좋아했어.”
“저도 린을 좋아해요.”
“……그래. 고마워.”
하지만 지금의 망설임 없는 대답 또한 후회가 될지도 모른다. 비관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생각이 그런 쪽으로만 기울었다. 나는 쓰게 웃으며 레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난 이만 가 봐야겠다. 다음에 또 보자, 레이.”
“다시 볼 수 있어요?”
“그럼 물론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