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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318화 (318/608)

제318화

“엄마가 죽은 거 나도 알거든요. 근데 사람들은 자꾸 엄마가 바빠서 멀리 간 거라고 해요. 그래서 알아요. 그거, 죽었을 때 쓰는 표현 맞죠?”

“…….”

솔직히 말해서, 어린아이니까 적당히 상황을 무마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날카롭게 정곡을 찔러오는 말에 변명할 말이 없어서 나는 그냥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똑똑한 아이는 그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도 알아차린 듯했다. 레이의 얼굴이 더 크게 일그러졌다.

“생각났어요. 캄캄한 곳에서…… 아저씨 친구가 나한테 누우라고 했어요. 왜냐고 물었더니 억지로 눕혔어요. 손발을 묶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어요. 린이 방해하려고 주위를 맴돌았는데……. 그 뒤로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

“린이…… 계속 불안해했었는데. 무서워하는 것 같았는데. 내가 괜찮다고 달랬거든요. 내가 아저씨 친구 따라가서 이렇게 된 거죠? 내가…….”

“아냐, 레이. 그런 게 아니라…….”

가까이 다가서려 하자 레이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올려다보는 시선에 조금 전에는 없던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레이?”

“진짜 누구세요? 린이 못 오는 거 어떻게 알아요? 진짜 엄마 친구 맞아요? 엄마 친구가 왜 여기 있어요? 거기 되게 캄캄했는데. 날 어떻게 찾았어요?”

잔뜩 움츠린 어깨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는 사람의 친구라는 사람으로부터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으니 비슷한 방식으로 접근한 나도 믿을 수가 없어진 거다. 모든 게 혼란스럽고 두려울 만한 상황이었다. 더 감추는 건 역효과인 것 같아서 나는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미안해, 레이. 내가 거짓말을 했어. 네 엄마를 아는 건 맞지만 친구는 아니야. 정확히 말하면 난 린이 불러서 온 거야.”

거짓말이라는 단어에 경직되던 아이가 다음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린이요?”

“그래, 린. 원래 이름은 나이아스야.”

“나이아스……?”

“린이랑 내가 닮았다고 했지? 그 말이 맞아. 린은 내 가족이었거든. 우연히 너희 엄마를 만났는데, 네가 너무 아파서 도움이 필요해 보였어. 그래서 내가 린을 너한테 보냈어. 목걸이 안에 넣어서.”

“……!”

흡― 숨을 삼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본 반응 중에서 가장 크게 동요하는 모습이었다. 레이는 귀신이라도 보는 듯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목걸이…….”

“그래, 목걸이. 지금도 네 목에 걸려 있는 거 말이야.”

눈짓으로 가리키자 흠칫 놀란 아이가 황급히 두 손으로 목을 더듬어 갔다. 헛손질을 반복하던 손가락이 목걸이의 메달을 찾아내곤 질끈 부여잡았다. 머물고 있던 정령이 사라져서 이제 고정되는 기능은 없지만, 일부러 떼어놓지 않고 놔둔 참이었다.

“이거…… 린이 여기에 사는 거 아무도 모르는데. 아저씨랑 나 말고는. 아무한테도 말 안 했는데.”

“그래? 그럼 이제 날 믿을 수 있겠어?”

“정말 린의 가족이에요?”

끝까지 신중한 아이를 위해 나는 가장 확실한 증거를 선보이기로 했다. 손바닥 위에 물을 만들어 떠올리는 것으로.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차가운 물이 솟아오르자 레이가 다시금 헛숨을 들이켰다.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부릅떠진 눈을 보니 정말 크게 놀란 것 같았다. 나는 생성한 물을 공처럼 둥글게 만든 다음 천천히 레이 앞으로 흘려보냈다. 둥실둥실 제 앞으로 다가오는 물공을 멍하니 바라보던 레이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그것을 매만졌다. 손이 닿는 순간 마른침을 삼키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진짜다. 진짜 물이에요. 린이랑 같네요.”

“그렇다고 했잖아.”

“그럼 진짜 린이 불러서 온 거예요?”

“응. 린이 내게 널 부탁했어. 도와달라고.”

크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울렸다. 푹 숙여진 고개 밑으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더는 슬픔을 참지 못한 레이가 흘리기 시작한 눈물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울고 있는 얼굴을 닦아주었다. 드디어 경계를 풀었는지 아이는 이제 가까이 다가가도 더는 움츠리지 않았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어떻게 하고 싶어? 다시 아저씨라는 사람한테 데려다줄까?”

“정말요? 그럴 수 있어요?”

“그럼 물론이지.”

“그러면 저, 아저씨한테 갈래요. 아저씨가 보고 싶어요. 린, 린이 죽은 것도 알려줘야 해요. 근데 아저씨는 지금 집에 없어요. 한동안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어요.”

“그래? 어디로 갔는데?”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흠, 위치는 알아야 할 텐데. 그럼 그동안 넌 어디에 있었어? 집에 아무도 없이 혼자 있었던 거야?”

“아뇨. 집사 할아버지가 있어요. 로란 누나도요. 그리고 다른 형이랑 누나들도…….”

“집사가 있을 정도면 집이 꽤 크겠구나.”

이제 보니 제법 부유한 사람이 거두게 된 모양이다. 내심 잘됐다고 생각하는 내게 레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 귀족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성도 가지고 있고요. 나한테도 그 성을 준다고 했어요.”

“그럼 집을 찾아갈 수는 있겠다. 일단 거기로 가서 집사라는 사람부터 만나자. 그 사람은 아저씨가 어디로 갔는지 알 거야. 내가 물어봐 줄게. 혹시 아저씨의 성이 뭐였는지 기억하니?”

이번에도 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솟고 있었지만 집에 갈 수 있다는 희망 덕분인지 조금 전보다는 표정이 밝았다. 안심하도록 상냥한 웃음을 지어 주면서도 머릿속이 어느 때보다도 바빠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레이를 보호자에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했었는데, 막상 상대가 귀족이라고 하니 가시가 걸린 듯 마음이 껄끄러웠다. 신분 차가 명백한 세계에서 귀족이 평민 아이를 입양하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기로 결정한 것은 아마도 레이가 ‘정령사’라는 사실을 고려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능자는 가문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는 존재일 테니까. 그래서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로 정령을 잃게 된 레이를, 그 가문에서 여전히 받아들이려고 할까?

나이아스의 힘을 품게 된 탓에 레이는 누구보다 정령에 가까워졌지만 이제 다시는 정령과 계약할 수 없었다. 정령들끼리는 서로 계약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진짜 정령이 아니므로 정작 정령의 힘을 쓰지도 못한다. 결국 아무런 능력 없는 평범한 아이가 된 셈이다.

물론 겉보기에만 그렇게 여겨질 뿐, 실제로는 특별한 점이 더 많다. 이제 막 변화가 시작된 셈이니 아마 앞으로 자라면서 점점 더 인간과는 달라지게 될 거다. 그게 어떤 형식으로 나타날지는 모르겠고, 반드시 좋은 쪽으로 발현할 거라 장담할 수도 없지만. 어쨌든 어지간한 인간들보다 뛰어난 존재가 될 거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다 해도 보호자가 원하던 양자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 없는 얘기였다. 레이의 정서를 위해 보내려는 건데 오히려 그로 인해 더 깊은 상처를 주게 되는 건 아닌지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곧 이어진 한마디를 듣는 순간 모두 머릿속에서 깨끗이 증발해 버렸으니까.

“카리브디스.”

“……!”

바쁘게 흘러가던 사고가 일시에 멈췄다. 나는 멀거니 아이를 돌아보았다. 이쪽의 동요를 깨닫지 못한 레이가 거리낌 없이 다음 말을 이었다.

“파이런 드 카리브디스. 그게 아저씨 이름이에요.”

* * *

유명인사의 좋은 점은 정보를 얻기가 쉽다는 점일 거다. 카리브디스 공작저를 찾아가는 과정은 굉장히 간단히 해결됐다. 여관 쪽에서 마차를 수배해 주었기 때문이다. 처음 마차를 오를 때만 해도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레이는 어느 순간부터 아는 길이 나오자 차츰 진정하기 시작했다. 반대로 도착할 시간이 다가올수록 나는 점점 더 심란해졌다.

카리브디스 공작이라니!

길을 떠난 지도 벌써 수십 분이 지난 상태였지만 아직도 그 이름을 들었을 때의 충격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제국에 존재하는 수많은 귀족들 중에서 설마 그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다. 같은 이름이 또 있을 리가 없는 이상, 카리브디스라면 분명 내가 알고 있는 그 공작이 맞을 거다. 대공의 오른팔이자 충신이라는 소드 마스터. 지금 내 일행들이 열심히 찾아다니고 있는 바람의 검 블레스터의 계약자 말이다.

그 공작과는 언젠가 한 번 스치듯이 지나쳤던 적이 있어 얼굴을 알았다. 사자의 갈기처럼 휘날리던 거친 머리칼. 전신이 흉기처럼 단련되어 있어서 갑옷이 따로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 남자였다. 안 그래도 사나운 분위기에 무뚝뚝한 얼굴까지 더해지니 누구도 선뜻 접근하기 힘들 것 같은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한마디로 육아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런 그가 레이를 거두게 될 줄이야. 사람을 인상만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고는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의외라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사실 걸리는 게 그것 하나만은 아니었지만.

“레이. 물어볼 게 있어. 린이 목걸이에 사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너와 아저씨뿐이라고 했었지?”

“네. 아저씨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었어요.”

선뜻 돌아온 대답에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레이가 갖고 있는 목걸이는 이사나가 준 걸로,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것이었다. 그 문양을 카리브디스 공작이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분명 누가 준 건지도 전부 파악했을 거다. 그런데 그는 사실을 밝히는 대신 은폐하는 쪽을 택했다. 집안의 식솔들에게조차 린의 존재를 함부로 공개하지 못하게 한 것 같았다.

사실 처음엔 공작이 대공에게 바치기 위해 레이를 거둔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오른팔이라는 자이니 그 또한 대공의 일에 협력하고 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레이가 겪은 험한 일들이 부정할 수 없는 증거로 보였다. 그런데 되짚어볼수록 뭔가가 다른 것 같았다. 일단 레이가 ‘아저씨’를 많이 따랐다. 이건 평소에 잘해 줬다는 말인데, 대공에게 바칠 아이라면 굳이 환심을 사둘 필요까진 없었다. 본인이 직접 데리고 살면서 보살피던 것이나 양자로 삼겠다고 했다는 것도 그렇다. 아저씨 친구라는 자가 굳이 속여서 아이를 유인한 것도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아저씨’가 카리브디스 공작이라면, 그 ‘친구’라는 사람은 설마…….’

거기까지 생각한 후, 나는 다시 급히 레이를 돌아보았다.

“널 데리러 왔다는 아저씨 친구 말인데. 혹시 그 전에도 본 적 있었어?”

“딱 한 번이요.”

“어디서?”

“집 정원에서요. 린이랑 놀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났었어요. 그 사람을 보고 아저씨가 굉장히 난처해했던 것 같아요. 인사하라고 해서 인사했어요.”

“그 사람 어떻게 생겼어?”

재차 건넨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던 아이가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예기치 못한 사태를 맞이한 사람처럼 당황해하는 얼굴이었다.

“으음. 이상하다.”

“왜?”

“그 아저씨 얼굴이 잘 기억 안 나요. 분명히 똑바로 봤는데.”

“얼굴만? 다른 것도 다 기억 안 나?”

“다른 거요? 아! 하얀 옷을 입고 있었어요. 드레스처럼 긴 옷이요. 엄마가 그랬는데요. 그런 옷은 신관이 입는 거랬어요.”

“……그렇구나.”

납치범의 정체가 명확해졌다. 설마설마했더니 정말로 대공이 직접 나선 거였다. 그러고 보니 레이는 린의 죽음을 바로 깨달을 만큼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똑똑한 아이가 모르는 사람을 선뜻 따라가려고 했을 리가 없었다. 데려다주겠다는 뻔한 수법에 속은 건 이미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저택의 정원에서 우연히 만났다면 공작 쪽에서 의도한 만남은 아닐 거다. 적어도 불쑥 나타난 대공을 보고 난처해할 만큼, 그가 레이를 거두려 했던 건 진심이었던 것 같았다. 어쩌면 그는 아무것도 몰랐던 게 아닐까.

……블레스터의 폭주가 왜 갑자기 빨라졌나 했더니.

그 모든 상황을 결합하여 도출한 결론에 입 안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왜 하필 이런 시기에 일이 벌어지나 했는데 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인과라 돌아가는 정황을 납득하면서도 믿기지 않는 마음이 더 컸다. 공작의 행보도 상당히 의외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대공이 어디까지 추락했는지 그의 악행을 재확인한 셈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를 따르는 수하의 아이까지 건드린 거다. 이제 그는 사람으로서 남아 있던 마지막 가면마저 전부 벗어던지기로 한 듯했다.

“손님, 다 왔습니다. 바로 저 앞이 공작저입니다.”

수많은 생각들로 번민에 빠져있는 동안 어느새 목적지에 닿은 마차가 이동을 멈췄다. 삯을 치르고 내리자 높게 둘러쳐진 울타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 너머로는 넓은 숲이 펼쳐져 있었는데, 이어지는 방향을 따라 쭉 올라가 보니 가장 높은 지점에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이 세워진 것이 보였다. 저택이라기보다는 거의 성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일단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말이지.’

정문이 어딘지도 알 수 없을 만큼 까마득히 이어지는 담장을 보고 있으려니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막상 도착하긴 했는데 이다음 일을 생각하면 막막해졌다. 찾아와도 공작을 만날 수 없다는 건 이미 확인된 바였고, 집사라고 해서 주인의 행방을 알 리가 없었다. 그의 소재를 파악하려면 차라리 지금 한창 블레스터를 추적하고 있을 내 일행들을 찾아가는 편이 더 빨랐다. 그래도 레이를 위해서는 지금 당장 안심할 수 있는 장소로 데려다주는 게 맞는 것 같았다.

힐끔 시선을 내려 아래를 확인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아이는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이미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이 두 손 가득 목걸이를 꼭 움켜쥔 채였다. 어쩌면 아직도 린의 부재를 실감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여기 맞아?”

불안해하는 걸 달래기 위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더니 레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정문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해 봤다. 공작저이니 대단할 거라는 건 알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도 부지가 더 컸다. 이대로는 문을 통과하는 것 자체가 난관일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염려였다.

“맙소사! 도련님! 레이 도련님!”

정문에 이르기도 전에 멀찍이에서 비명 같은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이쪽을 발견하고 달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저택 사람일 거라 짐작되는 장년의 남자였다. 그 뒤로 하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르르 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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