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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316화 (316/608)

제316화

“봉인 마법이 걸려 있군. 속에 뭐가 있나 본데. 여기에 들어가려는 거야? 이 안에 옮겨야 할 사람이 있고?”

“응. 혹시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어? 나 혼자서는 들어갈 수 있긴 한데, 마법 이동은 안 되려나?”

“까다롭긴 하지만 아예 불가능하진 않아. 그리고 못 들어갈 게 뭐 있겠어. 정 안 되면 그냥 봉인을 깨면 되지.”

“그게 가능해? 꽤 강한 봉인 같은데.”

“상급 마법이긴 하네. 뭐, 그래도 내가 풀지 못할 봉인 같은 건 없거든.”

씩 웃는 얼굴이 이 순간만큼 든든하게 보인 적이 없었다. 이윽고 라피스가 바위 위에 손가락으로 뭔가를 낙서하듯이 그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마법진을 만드는 것 같았다. 간단한 형식이나마 그가 마법진을 그리는 경우는 흔하지 않아서 나는 조금 숨을 삼켰다. 상급 마법이라고 하더니, 확실히 평소와는 임하는 자세가 다른 것 같았다.

“300에스나의 20데카. 기의 밀데시. 500의 알포라.”

놀랍게도 생전 잘 외우지도 않는 주문을 읊기까지 했다. 라피스는 그 상태에서 손바닥으로 마법진을 덮었다. 그러자 그 아래서부터 붉은 빛이 터져 나오더니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바위 표면 위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파괴.”

무심하게 응시하던 그에게서 명령 같은 한마디가 떨어졌다. 단조로운 음성이었으나, 그 효과는 전혀 단조롭지 않았다. 마치 유리가 깨어지는 것처럼 바위가 그 자리에서 금이 가더니 와르르 부서져 내렸기 때문이다.

“자, 됐어.”

가벼운 식후 운동을 한 것 같은 얼굴로 라피스가 돌아보며 말했다. 나만 대단하게 여기는 건가 싶었는데 얼빠진 데르온과 아스의 표정을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이쯤에서 생각하는 거지만 그와 계약한 건 내게 더 행운이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걸 내 입으로 말해 줄 일은 결코 없을 예정이었다.

두꺼운 바위가 사라진 자리엔 뻥 뚫린 동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차피 짐작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나와 일행들은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한밤처럼 어두웠으나 시야를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거슬리는 건 주위를 맴돌고 있는 냄새였다. 쓰레기 처리장에서나 풍길 것 같은 지독한 냄새가 온 사방에 가득 차 있었다. 악취의 원인은 오래지 않아 드러났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눈을 두는 곳마다 선명히 알 수 있을 만큼, 그 원인이 동굴 안을 한가득 메우고 있었으니까.

“…….”

“…….”

그건 부패한 사체의 산이었다. 어림잡아도 몇백 구는 되어 보이는 사체들이 질서 없이 한데 뒤섞여 썩어가고 있었다. 형체도 알 수 없이 흐물흐물해진 형태와 부위를 알 수 없는 뼈대들. 뻥 뚫린 구멍마다 구더기와 들쥐가 들끓었다. 간간이 온전한 것도 있었지만 그래 봤자 사체라는 사실이 변하진 않았다. 그러나 형태를 제대로 갖추었든 그렇지 않든, 이곳에 쌓인 사체들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골격이 현저하게 작다는 것. 대부분이 성인이 되지 못한 어린아이였다는 증거였다.

“제물의 사체를 여기다 처리하는 거였군.”

천하의 라피스도 이 광경엔 기가 질렸는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대부, 괜찮아?”

비틀거리는 나를 아스가 얼른 붙잡았다. 정작 여기서 가장 어린 건 그인데도, 눈앞의 끔찍한 광경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태연한 모습에 내심 안심하면서도 이걸 어린애한테 보여도 되는 건지 불안해졌다. 사실 우리들 중에서 가장 이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건 나인 것 같았다. 썩은 내와 사체에서 풍겨 나오는 독기에 속이 몹시 역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 돌아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는 꾹 참고 침착하게 주위를 훑었다.

“……찾았다.”

원하던 것을 찾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체들이 쌓인 산에서 조금 떨어진 구석에 한 소년이 눕혀져 있었다.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부패하지 않은 온전한 모습이었다. 천천히 걸어가 그 앞에서 멈췄다. 잠들어 있는 듯 눈을 감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역시나 익숙했다. 그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의 형태도. 틀림없이 그때 물을 주어 살렸던 그 아이였다.

“레이.”

조심스럽게 입모양으로만 아이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아이는 가슴 부근에 상처를 입은 듯, 붉은 핏자국을 지니고 있었다. 기실 아이만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모든 사체들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상흔이었다. 몸을 굽히고 앉은 다음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가슴 위를 매만졌다. 닿은 피부 위에 싸늘한 한기가 맴돌았다.

“뭐야. 그 시체를 찾으러 온 거였어?”

내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라피스가 떨떠름한 말투로 물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시체 아니야.”

“뭐?”

“시체 아니라고.”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한 걸지도 모르지. 대답과 동시에 눈가가 간지러워졌다. 한동안 멈췄던 눈물이 다시 솟아오르고 있었다.

<왕이시여, 부디 그를…….>

<제 하나뿐인 소중한 친우를…….>

간절한 바람을 담아 속삭이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득한 감각 속에서 나이아스가 내게 남긴 마지막 전언이었다.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상실감에 고통스러웠지만, 그렇기에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아이의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미동 없이 굳어 있던 몸이 크게 들썩이더니 창백하던 얼굴에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일행들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봐. 아직 살아 있잖아.”

“……뭘 어떻게 한 거야?”

“글쎄. 어떻게 한 걸까.”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사실 내가 한 일은 별거 없었다. 그저 약하디약한 결합을 제대로 이어준 것뿐이었다. 그건 내 작은 아이가 이뤄낸 결과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작은 정령과 소년은 사이좋은 친구였다. 어느 날 소년이 악마에게 끌려가 심장을 빼앗겼다. 심장을 잃은 친구를 살리기 위해, 작은 정령은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자신의 삶을 통째로 바치는 결정을.

―그 자신이 소년의 심장이 되기로.

눈물이 자꾸만 떨어져서 힘들었다. 나는 이제 막 제대로 숨을 내뱉기 시작한 아이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내가 준 힘 때문에 심장을 잃어야 했던 불쌍한 소년을 향한 탄식이자, 그 소년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한 내 가여운 정령을 애도하는 눈물이었다.

* * *

동굴 안이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던 수많은 시신들은 야금야금 번져가는 새빨간 불꽃 속에 삼켜진 지 오래였다. 피부에 닿는 공기의 온도가 달궈진 화로만큼이나 덥혀졌다. 앞으로 당분간은 꺼지지 않을 열기였다.

“이러면 됐어?”

단어 한마디로 이 모든 광경을 만들어낸 라피스가 확인을 구하듯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것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마워.”

그에게 부탁해 동굴 안을 전부 불태우게 한 건 나였다. 이 나라에는 시신을 화장하는 풍습이 없었다. 무덤도 지하에 공동을 만들어 넣어 두는 것일 뿐 완전히 땅에 파묻는 구조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건 그저 나만의 장례 절차였다. 마음 같아서는 시신을 한 구 한 구 전부 수습해 주고 싶었지만 숫자가 너무 많은 데다가 형태가 온전하지 못한 것도 많아 건드리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이대로 버려진 모습으로 썩어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짐작이긴 하지만 아이들의 연고지를 찾기는 아마 어려울 거다. 대공은 자국만이 아니라 국외에서도 희생자를 끌어 모아왔다. 국제적으로 얽혀 있는 상황이니 이번 일이 세상에 밝혀지면 스왈트는 더는 제국으로서 기능하지 못하게 될 게 분명했다. 막대한 피해보상은 둘째 치고 그걸 빌미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지배자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 땅에 사는 백성들까지 죄인의 낙인을 받는 세계였다. 앞으로 스왈트 제국민들이 받게 될 취급도 뻔했다. 아무리 이사나라도 이것만은 묻을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정식에서 대공이 저지른 죄를 낱낱이 공표할 때도 악신에 대한 건 언급하지 못했다. 그걸 옳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해하는 마음도 컸다. 이사나는 이미 그 때문에 아버지를 잃었으니까. 지금도 무거운 어깨를 더 짓누르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아이들의 넋을 달랠 수 있도록. 그 죽은 모습이 마냥 쓰레기처럼 방치되지 못하도록.

“모두 편하게 잠들길. 미안해. 무엇으로도 보상이 되진 않겠지만, 너희를 죽인 사람은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될 거야. 약속할게.”

동굴 속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던 사념들이 꿈틀거렸다. 내 말을 이해한 듯한 반응이라 쓰게 웃었다. 품 안에서 잠들어 있는 아이의 곤한 숨소리가 느껴졌다. 그것만이 이 지독한 상황 속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 * *

동굴이 완전히 전소한 것을 확인한 뒤 나와 일행들은 마을로 이동했다. 수도인 만큼 분위기가 활기찰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의외로 거리가 한산했다. 오가는 사람들도 어딘가 경직된 듯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대공이 철저하게 정보를 단속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럼에도 이곳 역시 전운의 영향이 미치기 시작한 듯했다. 여관을 잡아 아이를 눕혀 두고 나니 진득한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의자에 걸터앉는 나를 따라 일행들도 착석했다. 데르온은 잠들어 있는 레이를 연신 힐끔거리기에 바빴다. 심장을 잃고도 살아남게 된 아이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정령이 인간의 심장이 되다니. 그럴 수도 있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정확히는 심장이라기보다는 마나 덩어리죠. 그게 심장의 역할을 하는 것뿐이에요. 정령검도 만들어지는 원리는 비슷해요. 정령이 스스로의 의지로 기존의 모습을 포기하고 전혀 다른 형태가 되는 거죠. 하지만 독립된 개체인 정령검과는 다르게 신체의 일부가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힘만 남기고 모든 걸 다 버려야 해요. 자아와 영혼까지 전부.”

“결국 죽는다는 말이군요.”

“맞아요. 쉽게 할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이 아이가 나이아스를 정말 귀하게 대했나 봐요.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그럼 너도 저런 걸 할 수 있다는 말이네?”

가만히 듣고 있던 라피스가 대뜸 끼어들었다. 왠지 못마땅해하는 표정이라 의아했지만 선선히 대답했다.

“뭐, 그렇지. 근데 아마 내가 심장이 되면 드래곤의 마나 하트보다 더 강할 거야. 오히려 그 힘을 버틸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모르겠네.”

“야, 너…….”

“어? 왜?”

“……아냐, 됐어. 그냥 물어본 말에 진지하게 대꾸하지 마.”

그럼 처음부터 묻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기껏 대답해 줬더니 질문한 쪽에서 저런 태도로 나오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묘하게 불쾌해 보이는 녀석과 입씨름을 하고 싶지는 않아서 나는 잠자코 기존의 대화를 이어갔다.

“아무튼 레이는 몸 안에 나이아스의 힘을 품게 된 거나 마찬가지예요. 앞으로 평범하게 살 수는 없겠죠. 솔직히 이게 정말 이 아이를 위한 결정인지는 모르겠네요. 나이아스는 어떻게든 친구를 살리고 싶었겠지만.”

“원래도 정령사였을 텐데요. 그것과는 다른 겁니까?”

“많이 달라요. 아예 종족이 바뀐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이 아이는 이제 더는 인간이라 할 수 없을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정령도 아니지만요.”

“그렇군요.”

레이를 응시하는 데르온의 표정이 더 짙어졌다. 이쯤에서 그가 할 만한 생각이야 뻔해서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다. 성장하면 얼마나 더 강해질까라거나, 힘을 겨뤄볼 수 있을까 같은, 비생산적인 의문들 정도일 것이다. “하급 정령 수준이에요. 데르온보다는 많이 약할걸요.” 예상대로 그 말에 그는 바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정말로 알기 쉬운 마족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데르온이 내게 물어왔다. 사실 그건 내가 내내 고심하고 있던 부분이기도 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릿속을 장악한 의문을 끌어안은 채로 나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공교롭게도 황궁이 정면으로 보이는 방향이었다. 가장 정경이 좋은 방이라며 여관 주인이 적극적으로 추천했었는데, 그게 바로 이런 뜻이었나 보다. 실제로 멀찍이 보이는 황궁은 제법 아름다웠다. 상아와 붉은 산호를 섞은 듯한 색감. 섬세하게 새겨진 석상과 조각들. 장식마다 두른 금테가 빛에 반사될 때마다 눈부신 느낌을 주었다. 호화로우면서도 고급스러운 건축물은 수도의 자랑이기도 하다고 들었다. 황궁을 그린 그림까지 비싼 값에 거래될 정도였다. 나도 다른 때였다면 느긋하게 감상하고 싶어졌을 것이다.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누군가만 없었다면 말이다.

저 안 어딘가에는 지금도 대공이 살아 숨 쉬고 있을 거다. 그 동굴 안의 수많은 아이들을 죽이고, 내 작은 정령으로 하여금 죽음을 택하도록 만든 원흉이. 그것만 생각하면 잔인한 충동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를 해치우는 건 제법 간단한 일이다. 지금 이대로 찾아가서 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꺾어버리면 된다. 그 추악한 인간은 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버둥거리다가 곧 마지막 숨을 토해내게 될 거다.

인간의 목숨은 고작 몇 번의 손짓에도 허무하게 사그라질 만큼 나약했다. 그래서 지금은 안 된다. 지금 나는 지나치게 머릿속이 차가운 상태였다. 그를 보면 반드시 죽이고 말 거다. 처리해도 아무런 문제는 없겠지만, 이사나에게 대공과 대화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을 주겠다고 했었다. 그 약속을 지키려면 조금은 마음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놈을 그냥 죽이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목이 부러져서 죽는 건 너무 편하잖아. 그자는 살아서 받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다 받은 후에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야 한다. 반드시.

“야, 너 살기(殺氣) 나온다.”

툭 내뱉는 듯한 라피스의 음성을 듣고서야 한없이 뻗어가던 생각이 멈췄다.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나니 내가 꽤 험악한 충동에 기분을 맡기고 있었다는 자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본성이 깨어나 있었던 모양이다. 이젠 새삼 돌아보지 않으면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이 감정을 자연스럽게 여기게 됐다. 나를 빤히 응시하는 아스의 눈빛이 왠지 평소보다 초롱초롱한 것 같아서 괜히 더 죄책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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