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5화
<트로웰은 나쁘지 않아.>
문득 귓가에 희미한 목소리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가슴을 저밀 만큼 서글픈 울림이었다. 흐트러진 호흡 속에 가느다란 흐느낌이 섞여 있었다. 억지로 눌러 참으려 할수록 그 흐느낌은 서러운 듯이 더 크게 차올랐다.
<넌 누구보다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야. 그래서 더 가슴 아파. 이렇게 다정한 널 분노하게 만든 게 인간이라는 사실이. 그리고 나 역시…… 네게 그런 인간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이 현실이.>
두 눈 가득 담은 눈물을 차마 떨구지도 못하고 자신을 향해 억지로 웃으며 울던 그는 대체 누구였을까? 아무리 애써도 떠오르지 않는 얼굴에 트로웰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정령왕은 망각의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였다. 그에게 기억이란 잠시 흐릿해질 수는 있어도 다시 떠올리려고 하면 얼마든지 선명해지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과거의 장면만은 달랐다. 아무리 되짚어 보려고 애써도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 뿌연 잔상이 좀처럼 뚜렷해지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다니 뭔가 이상했다. 단지 알 수 있는 거라곤 그 목소리의 주인이 그때의 자신을 멈추게 만든 존재라는 것뿐.
<난 트로웰이 정말 좋아. 넌 내 가족이야. 네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낯선 장소에서 행복할 수 있었어. 그거 알아? 이곳에서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 준 것도 네가 처음, 나를 일으켜 세워준 것도 네가 처음, 내가 가족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준 것도, 전부 네가 처음이야.>
상냥한 속삭임이 음률처럼 다채로운 빛깔이 되어 쏟아져 내린다. 트로웰은 이미 지난 기억임을 알면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눈이 부신 것 같아 그대로 눈꺼풀을 떨어트렸다. 그때 자신이 무어라 대답했던가. 벌써 한참이나 지나버렸지만 지금이라도 뒤늦은 화답을 해야 했다.
“나도.”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입이 열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엘.”
그건 비밀의 문으로 향하는 열쇠였다. 찰칵, 잠겼던 빗장이 벗겨지면서 보이지 않던 틈새가 엿보였다. 강제로 지워진 기억들, 그와 함께했던 수많은 광경들이 눈앞에서 춤을 추듯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잊혔던 것들이 떠오르자 모든 것들이 선명해졌다. 그러나 거의 동시라고 할 만큼, 잠시 열렸던 세상이 곧바로 닫히고 순식간에 그에게서 멀어졌다. 모든 것이 찰나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엘이라니?”
“응?”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트로웰이 눈을 깜빡이며 돌아보았다. 엘뤼엔이 묘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방금 너, 엘을 불렀잖아.”
“내가? 아니. 그런 적 없는데.”
“……이제 우기기만 하면 속아줄 거라 생각하는 건가? 내가 그동안 확실히 너그러웠나 보군.”
“아니, 난 정말로 그런 적이 없다니까?”
당혹감을 여실히 드러낸 얼굴에 엘뤼엔은 눈을 가늘게 떴다. 노골적인 의심의 눈길에도 마주한 금안은 흔들림이 없었다. 속내를 감추는 데 능숙한 녀석이긴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는 표정이 조금 멍했던 것도 같았다. 엘뤼엔은 얼굴을 찌푸렸다.
“……균열인가.”
“균열?”
“설마 그게 정말로……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한 말은 그냥 잊어버려.”
빠르게 말을 마친 엘뤼엔이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잊으라니, 불가능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네. 망각이 없는데 어떻게 잊으라는 거야?”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트로웰이 뒤에서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 * *
주변의 광경이 한순간에 달라지는 건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 중 하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겪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갑자기 바뀐 시야에 적응하기 위해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단조로운 흑갈색 색조로 뒤덮인 겨울 숲.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 사이로, 그보다 더 많은 바위들이 사방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장소라는 건 바닥을 무성히 뒤덮고 있는 거친 나무뿌리와 낙엽 더미만 봐도 알았다. 꽤 넓은 숲이었는데도 제대로 길이 나 있는 곳이 없었다. 실제로 대부분은 있는지도 모르고 있거나, 알아도 들어올 수 없는 장소일 터였다.
“여기, 이쯤이 맞아?”
천천히 주위를 훑어보는 동안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조금 전 공간이동 마법을 실행한 라피스가 내게 확인을 구하는 질문이었다. 이 여정에 동행한 아스와 데르온이 그 말에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대답을 기다리는 일행을 향해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맞아.”
뱉어낸 숨이 입술 위에서 새하얗게 흩어져 갔다. 가장 기다렸으면서도, 기다리지 않았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황성으로 간다니?”
상황이 달라졌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마자 내가 찾아간 건 이사나였다. 한창 회의가 진행되고 있던 장소에 거침없이 들어가 모두를 쫓아내다시피 나가게 하고는 그와 독대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이사나는 나답지 않은 거친 방식에 당황했고, 이어진 말에는 더 크게 당황했다. 지금까지 그의 계획에 장단을 맞춰주던 내가 느닷없이 황성으로 가겠다고 하니 당황스러울 만도 했다. 마음 같아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대공이 인신제사를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아.”
“……!”
“감시 때문에 그가 진행하는 주술은 멈췄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내 눈을 피해 은밀한 곳에서 야금야금 제물을 만들고 있었어. 전부 내 잘못이야. 내가 너무 방심했어.”
“그걸,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이번 희생자 중에 물의 정령사가 있었어. 나이아스의 고통이 전해졌는데, 그 덕분에 잠깐 그곳의 상황이 보였어.”
이사나의 입에서 긴 숨이 흘러나왔다. 잠시 멈췄던 호흡이 탄식으로 이어지는 소리였다. 그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헤아려 주기에는 내게도 여유가 부족했다. 지금도 전신을 사로잡던 끔찍한 감각이 고스란히 몸 안에 남아 있는 채였다. 방심하면 손끝이 덜덜 떨릴 것 같아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어야 했다.
“미안해, 이사나. 더는 대공을 내버려 둘 수 없게 됐어.”
지금까지 대공을 그냥 놔두었던 건 그가 마왕과 더는 접촉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마왕은 몰라도 그는 인간이니까. 내 시야를 피해 움직일 방법은 없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얌전히 숨어 지내는 모습을 의심 없이 믿었다. 지금까지 저지른 짓만으로도 이미 천벌을 받기엔 충분했지만, 굳이 내가 나설 필요까지는 없었다. 이생에서 그를 단죄하는 건 온전히 이사나에게 맡겨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마왕을 돕고 있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 주술은 인간들 안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악신이 태어나면 이 세계는 그대로 멸망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주술이 완성되기 전에 반드시 막아야 했다. 방해가 되는 대공은 이제 하루빨리 처리해야 할 대상이 됐다. 이 전쟁이 허무하게 끝나 이사나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게 되더라도. 제 손으로 완성하지 못한 복수를 그가 평생의 한으로 삼게 되더라도, 말이다.
“미안해.”
재차 건넨 사과에 창백한 얼굴로 굳어 있던 이사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복잡한 표정을 지우고 차분히 나를 응시했다.
“사과하지 마, 엘.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잖아. 오히려 그동안 내 철없는 욕심을 들어준 것에 감사하기만 해도 모자란걸. 난 여기까지 진행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 게다가 황제로서의 내 역할은 이제부터 시작일 거야. 내 적이 숙부만 있었던 건 아니니까. 이 전쟁은 그저 초석인 셈이지. 차라리 빨리 끝나는 게 나은 건지도 몰라.”
“하지만…….”
“정말 괜찮으니까 난 신경 쓰지 마. 그럼 황성에는 언제 갈 생각인 거야?”
“……조금 후에.”
“그렇구나. 알겠어. 그럼 며칠 이내로 끝날지도 모르겠네. 수장을 잃은 군대가 어떻게 나올지 흥미진진해지는걸? 여러 가지 시안을 감안해서 다음 일정을 짜봐야겠어.”
웃으며 말하는 이사나는 깨끗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무런 아쉬움도, 미련도 담지 않은 눈동자였다. 서운해하는 것보다도 그게 더 안타까워서 나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
“상황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어서 장담하기는 어렵긴 한데.”
“응?”
“난 사람을 해치는 거 잘 못하잖아. 대공도 최대한 제압하는 쪽으로 할 거야. 그의 처분 자체는 네게 맡길게. 네가 바라던 그림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그자와 마지막으로 대화할 시간은 마련해볼 수 있을 거야.”
내내 담담하던 이사나의 표정이 그 말에 조금 흔들렸다. 얻어맞은 사람처럼 당혹감을 드러낸 얼굴을 보며, 나는 그가 내심 바라던 부분을 짚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뭇거리던 이사나가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 내 앞에서 뭘 숨길 수 있겠냐는 듯이.
“……고마워.”
“남이 차리고 있는 상에 재를 뿌리는 셈인데 이 정도는 해야지. 아, 그리고 설명이 조금 부족했는데. 가자마자 바로 일을 진행하진 않을 거야. 오늘 황성으로 가려는 건 대공 때문이 아니거든.”
“그게 아니면?”
이사나의 의아한 시선이 닿았다. 나는 쓰게 웃었다.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펴 보았다. 아까보다는 한결 떨림이 잦아들어 있었다. 이젠 그 앞에 가도 맨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보다도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 * *
“그래서, 여긴 왜 오자고 한 건데?”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음성에 정신이 들었다. 회상에서 깨어나자 다시 현실이 펼쳐졌다. 막사로 가득하던 군부대 대신 울창한 바위 숲이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광경이. 황제의 숲이라고 하던가. 아마도 황궁 어느 부근에 자리 잡고 있는 비밀 장소 중 하나로, 황제만 들어올 수 있는 금역이라는 것 같았다.
그 고요한 정경을 배경으로 라피스가 고개를 기울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긋이 응시하는 눈동자가 노려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그저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안 그래도 불타는 것 같던 시선이 더 강렬해졌다.
“다짜고짜 ‘황궁 안에 있는 비밀 숲에 가야 한다’고 날 닦달한 이유를 말해 보시지. 내가 남들보다 매우 뛰어나기는 해도 트로웰은 아니거든? 남의 생각 같은 건 못 읽는다고. 설명은 똑바로 해야 할 거 아냐.”
“……그래도 용케 알아듣긴 했네. 그렇게 대충 말했는데 제대로 도착하다니. 대단하다, 라피스. 굉장해.”
“대충 말했다는 걸 알기는 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응시하는 시선에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참 황당한 상황이기는 했다. 내게도 공간 이동 능력은 있었고, 황궁까지 이동하는 데 굳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진 않았다. 그런 걸 강요하듯이 부탁했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을 거다. 솔직히 말하면, 오히려 그에게 맡긴 탓에 원래 가야 할 지점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 도착한 참이었다. 정확한 위치를 설명할 수가 없어서 대강 유추한 곳으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건 사족인데, 여기가 황제의 숲이라 불리는 장소라는 것도 그 과정에서야 알았다.
“내가 황궁 내부를 알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보통은 그냥 그렇게만 말하면 절대 이동 못하거든? 하다못해 방위 정도는 알려줘야 할 거 아냐. 넌 부탁하는 입장의 기본자세가 안 되어 있어.”
“음, 난 그런 거 몰라도 그냥 이동할 수 있어서…….”
“그게 지금 이 와중에 할 말이냐?”
“대부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은인. 덕분에 난 대부를 따라올 수 있어서 좋은데. 대부는 다른 사람을 데리고 이동하진 못하잖아. 대부 혼자 가버렸으면 은인은 그것대로 화냈을 거면서.”
옆에서 듣고 있던 아스가 기특하게도 옳은 소리를 했다. 그 뒤에서는 데르온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두 마족은 내가 황궁으로 간다는 언급을 하기 무섭게 따라가겠다고 나선 참이었다. 놔두고 가도 자력으로 따라올 기세라 할 수 없이 데리고 왔는데, 이렇듯 적극적으로 내 편을 들어주는 걸 보니 내심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옮겨야 할 사람이 있다는 말이네.”
그리고 역시 라피스는 똑똑하긴 했다. 지나가는 거나 다름없는 아스의 말에서 정확히 이 사태의 윤곽을 잡아낸 거다. 아스조차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정작 나를 돌아보는 라피스는 태연했다.
“내가 네 꿍꿍이에 한두 번 당해 보냐. 너 혼자 처리하지 못할 상황이니 날 끌어들인 거잖아. 그리고 네가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는 일은 몇 개 안 되지.”
“……미안.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상황을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때 울던 거랑 관계있는 일이야?”
“어…… 그렇긴 한데…….”
“흐음. 내가 뭘 하면 되는데?”
의외로 라피스는 선선한 태도였다. 아무리 싫은 소리를 퍼부어도 의연히 감내하리라, 단단히 각오하고 있었는데 쉽게 넘어가니 어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가는 길은 아는 거지? 여기서 어느 쪽으로 가?”
“일단 직진하면 되긴 하는데…… 웬일로 협조적이야?”
“그게 불만이면 비협조적으로 굴어 주지. 그냥 이대로 돌아가 줄까?”
“하하하, 그럴 리가요. 어서 가시죠, 라피스 님!”
불퉁한 표정을 짓는 녀석을 냉큼 달래며 나는 서둘러 길을 안내했다. 사실 본능대로 방향을 잡아 가는 것뿐이라 제대로 된 길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나마 지금 일행 중에 가파른 경사나 절벽 같은 것에 곤란을 겪는 사람이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거의 다 왔어.”
이윽고 도착한 곳은 바위가 무더기로 쌓여 있는 듯한 형태의 석림(石林)이었다. 그나마 다른 곳은 나무들과 일정한 비율로 섞여 있었는데 이 부근부터는 크고 높은 바위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다 비슷비슷한 모양이라 어느 하나가 더 특별할 것도, 눈에 띄는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도착하자마자 일행들은 미리 짜 맞추기라도 한 듯이 한 바위 앞으로 걸어갔다. 알려주기도 전에 다들 먼저 가는 바람에 오히려 내가 마지막 순서로 따라가야 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라피스가 손바닥을 펴고는 바위의 표면을 천천히 매만졌다. 진지하게 응시하는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