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2화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공 전하께서도 황제는 그냥 제거하라 하셨습니다. 그의 암살은 도울 겁니다. 다만 저희가 따로 진행하는 일들에 대해서도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역시 다른 임무도 맡았군.”
“예. 황제가 데리고 있는 이능자들 말입니다. 그 곁에 어린 이능자들이 몇 있다지요? 카터스 제국의 황태자도 지금 그들 쪽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실은 그자는 오래전부터 저희의 표적이었거든요.”
“황태자를? 하지만 그는…….”
“염려하시는 만큼 제국 간에 분란이 생길 일은 없을 겁니다. 각하께서도 아시겠지만 대공 전하는 꽤 철두철미한 분이시죠. 그쪽 황실도 사정이 꽤나 복잡하더군요.”
“……음.”
“그 여신의 딸이라고 하는 계집아이도 정령사라고 들었습니다. 정령사를 잡아보는 건 처음이라 매우 기대가 큽니다.”
그들을 확보하는 것은 맡겨 달라며, 일리야의 대장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미 카리브디스는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정령사.
척추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정령사도…… 대상에 포함되나?”
“그야 정령술도 이능력이니까요.”
그 당연한 대답에 불안한 기분이 스치는 것은 왜일까. 정령사라면 자신도 알고 있는 이가 하나 있었다. 처음엔 의무로 대했으나 이젠 너무나도 소중하고 소중해진. 그래서 헤어지자마자 벌써부터 그리워진 얼굴이.
<그러고 보니 가까운 곳에도 하나 있었지.>
저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 기억이 착각이 아니라면, 레이에 대한 언급이 나온 직후에 대공이 지었던 표정이었다.
<파이, 그대는 내 편이지? 나를 위해 모든 걸 다 바칠 수 있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아직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나?>
“…….”
그때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었던가. 그가 바쳐야 하는 것에 대공은 어디까지 생각하고, 또 무엇을 계산했을까.
“각하?”
의아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미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 시선이었다. 생각보다 몸이 움직이는 것이 더 빨랐다. 정신을 차렸을 때 카리브디스는 어느새 말 위에 올라타 있었다.
“각하! 지금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각하!”
일리야의 대장이 혼비백산해서 외치는 소리가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다른 자들도 모두 당황해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당장 쫓아가! 놓치면 안 돼!” 바람결에 새된 목소리가 전해졌지만 그것도 곧 아득해졌다.
몇 시간을 족히 걸려 달려왔던 길을 이번엔 반대로 질주했다. 그러고 보니 대공이 일러준 지정 장소가 그의 자택에서 꽤 멀었다. 이제껏 그런 거리 따위는 한 번도 신경 써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이상하리만치 초조했다. 그렇게 멀리 정해야 했을 이유가 따로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나쁜 예감이 들었다.
쉬지 않고 말을 달린 끝에 그는 예정보다 빨리 자택에 도착했다. 늦은 오후에 접어드는 시간, 하루 일과를 거의 마친 고용인들이 저녁 식사 준비에 들어가기 전에 한숨 돌리는 때였다. 그게 아니라도 그의 저택은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주인의 취향에 맞춰 늘 고요한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앞이 온통 술렁거렸다. 사방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창백한 얼굴로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도련님! 도련님, 어디 계세요! 레이 도련님!”
“…….”
들려오는 외침에 카리브디스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어쩌면 지금 자신은 악몽을 꾸는 게 아닐까. 그러나 다시 눈을 떠도 변하는 광경은 없었다. 그가 마주한 건 그토록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이었다.
“고, 공작님!”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집사 루벤이 말에 탄 채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발견하고 크게 헛숨을 삼켰다. 근처를 배회하고 있던 다른 고용인들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그를 발견한 사람들마다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카리브디스는 그런 반응에 굳이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루벤을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물었을 뿐이었다.
“레이가 사라졌나?”
“공작님, 그게…….”
“언제부터?”
“오, 오전부터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잠시 정원에 계시겠다 하셔서 나중에 모시러 가겠다 했는데…….”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루벤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만 같았다. 출타하는 공작을 배웅하고 오전 업무를 마칠 때까지 그의 일상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지시한 간식이 전부 준비된 것을 확인한 후 그는 기분 좋게 레이를 찾으러 나섰다. 그런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숲에 가까울 만큼 큰 정원이다 보니 처음에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보다 멀리 나가 있는 거라고 여겼다. 공작저는 보안이 잘되어 있는 곳이었다. 설마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생겼겠느냐 싶었다. 하지만 몇 시간째 찾아다니게 된 지금, 그게 얼마나 안이한 판단이었는지 그는 뼈저리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저택 안에서 아이가 실종되었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어느 누구에게 무슨 일을 당한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공작님. 모든 게 제 탓입니다.”
덜덜 떠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루벤을 가만히 응시한 후, 카리브디스는 차분히 주위를 훑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있는 사람마다 모두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카리브디스는 그중에서 유독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 여인을 주시했다.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든 그녀가 카리브디스와 눈이 마주치자 숨을 크게 삼키고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앞치마를 꼭 움켜쥔 두 손이 심하게 떨고 있었다. 단순히 겁을 먹은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카리브디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너, 뭔가 알고 있군.”
“저, 저…….”
“리에! 그게 사실이냐? 레이 도련님이 어디 계신지 아는 거야?”
깜짝 놀란 루벤이 황급히 그녀를 다그쳤다. 리에라 불린 하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단단히 겁을 집어먹은 상태였지만 카리브디스에겐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줄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았다.
“똑바로 대답하지 않으면 죽이겠다.”
뚜렷해진 살기에 기겁한 리에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정신을 놓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이대로 미적거리면 그는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고도 남을 터였다. 리에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 짜냈다.
“저, 정확히 본 것은 아닙니다. 그, 그저…….”
“그저?”
“정원에서 대공…… 전하가 지나가시는 것을 본 것 같았습니다. 뭔가를 들고 계시는 걸로 보였습니다. 하, 하지만 이곳에 대공 전하가 계실 리가 없으니 제, 제가 잘못 본 거라고 생각을…….”
들어야 할 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음성을 무시한 채, 카리브디스는 그대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번에 그가 향한 곳은 황궁이었다. 대공이 있는 곳까지 빠르게 걸어가는 그를 제지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전부 무시했다.
콰앙!
만류하는 자들을 물리치고 거칠게 집무실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던 대공이 허리를 펴고 몸을 세웠다. 그 시선에 놀란 빛은 전혀 없었다. 마치 그가 올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이런, 이런. 파이, 그대가 왜 이곳에 있는 거지? 내가 따로 맡긴 일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언제나 부지런하던 그대도 이제 게을러진 건가?”
느긋하게 건네 오는 말을 받아줄 여력 따윈 없었다. 사방에서 역한 냄새가 풍겼다. 평생을 맡으면서도 적응되지 않았던, 그렇기에 그에게서만은 결코 풍기지 않기를 바랐던 향이었다.
“……당신에게서 피 냄새가 납니다.”
“그래?”
“제 아들을, 레이를 어찌하셨습니까?”
냉기가 뚝뚝 흐르는 음성에 대공이 놀란 얼굴을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태도가 평소와 달라서가 아니었다.
“그대의 아들이라니. 그 꼬마에게 벌써 그렇게까지 마음을 주었었나? 유감이로군, 파이. 진즉 알았다면 조금 더 재고해 볼 것을. 물론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겠지만 말이야.”
“……그 아이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너무 상심할 것 없어. 아무리 아끼는 감정이 생겼다곤 하나 얼마 되지 않은 일 아닌가. 어차피 주워 온 아이일 뿐이지. 말했다시피 혼인해서 진짜 자식을 보는 것만 못할 거야. 혹시 선호하는 여인 취향이 있나? 마침 그대에게 혼사가 들어왔는데 말이야…….”
“그 아이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재차 반복되는 질문에 대공이 이어가던 말을 멈췄다. 약간 짜증이 담긴 듯한 눈동자에 기이한 광기가 감돌았다. 카리브디스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처음으로, 그의 진짜 얼굴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파이, 난 그대를 믿었어. 하지만 그대는 그렇지 않은 것 같군.”
“……저도 전하를 믿고 있습니다.”
“아니, 날 믿었다면 내게 모든 것을 맡겼어야지.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모든 것을 버리고 지켜주겠다고 했었지 않나. 설마하니 전부 다 잊었다는 건가?”
“아닙니다. 지켜드릴 겁니다. 이 목숨을 걸고 반드시 지켜드릴 겁니다. 그렇게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전하, 이건 아닙니다. 이런 건 결코…… 옳은 길이 아닙니다.”
내뱉는 목소리가 떨렸다. 지금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진작 그에게 이렇게 말했어야 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이미 늦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모든 게 제 탓이라며, 자책하던 집사 루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게 아니었다. 진짜 탓할 사람은 그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대공에게서 느껴지는 미묘한 균열을 이미 감지했으면서도, 그저 괜찮을 거라고 눈을 감고 외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모든 것들이 손쓸 수 없도록 망가져 버린 거다. 그 탓에 애꿎은 아이가 말려들었다. 아름답고 좋은 것들만 보여 주어도 부족할, 그 착하디착한 아이가.
“후후, 하하하하!”
대공은 배를 움켜쥐고 웃었다. 정말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지금 내게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가?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것 같아? 아니지. 옳은 길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 내 충직한 기사.”
“……전하.”
“하지만 난 기꺼이 그 길을 걷기로 했지. 그대가 내 편이라 늘 호언장담하기에 당연히 내 뒤를 따라와 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던 모양이군. 그래.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난 항상 믿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야.”
“전하, 제발!”
“뭣들 하는가? 내 눈앞에서 저자를 끌어내라! 날 배반한 반역자다!”
가슴 속에서 버석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다리가 많이 달린 벌레들이 피부를 뚫고 튀어나와 온 몸을 기어 다니는 것만 같았다. 망연히 대공만을 바라보고 있는 그를 양옆에서 누군가 붙잡았다. 뿌리치기도 전에 팔목에 차가운 금속이 채워졌다. 마나를 제어하는 구속구라는 사실은 한눈에 파악했다. 그걸 제게 채운 사람의 얼굴이 낯익었다. 애꾸눈의 남자, 일리야의 대장이었다. 그가 레이를 찾아 자택으로 향하는 동안, 그들은 대공에게 상황 보고를 하러 온 모양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일리야의 대장이 비릿하게 웃었다.
“공작 각하. 어리석은 선택을 하셨군요. 레이라는 그 아이는 이미 죽었을 겁니다.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말입니다.”
“너…….”
“지금까지 온갖 잡다한 더러운 일들을 다 맡아왔으면서 왜 그것 하나 참지 못하셨습니까? 고작 피붙이도 아닌 꼬마 아이 하나 진상하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그냥 눈 한 번만 딱 감으면 모든 영광이 그 발밑에 떨어졌을 텐데요. 참으로 아쉽게 됐습니다.”
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말을 듣기 위해 지금까지 대공의 곁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맹세코 자신의 영광과 허영심을 위해 대공을 섬긴 적이 없었다. 그저 하나뿐인 주군을 지키고자 했다. 그를 지탱하는 든든한 기둥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틀어졌을까. 왜 틀어져 버리고 만 걸까.
―내가 도와줄까?
머릿속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카리브디스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몸에서 이상한 울림이 느껴졌다. 어디선가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전신이 붕 뜨는 감각과 함께 머리카락이 크게 휘날렸다. 사방에서 비명이 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말하지 않았나. 틀어진 것은 바로잡으면 돼.
조금 전까지 묵직했던 팔목이 가벼워진 것이 느껴졌다. 채워져 있던 구속구가 사라져 있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서 주위를 잠시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한 건 그 자신만이 아닌 듯했다. 조금 전까지 끌려가는 저를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던 대공이 왠지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막아! 당장 붙잡으란 말이다!”
험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멀찍이서 일리야의 대장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게 조금 이상했다. 분명 저자는 자신을 붙잡고 있었을 텐데 지금은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꽤 큰 부상을 입은 채였다. 깔끔하던 공간도 온통 엉망으로 뒤집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곧 사방에서 한꺼번에 공격이 쏟아졌기 때문에 생각을 진득하게 이을 틈이 없었다. 얼핏 세어본 숫자만도 수십 명이 넘었다. 아무래도 황궁에 있던 모든 경비들이 달려온 듯했다. 이런 곳에서 전력을 다했다간 건물이 무너져 그대로 깔리게 될 거다. 카리브디스는 일단 이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분명 그는 황궁의 집무실에 있었는데, 어느새 한적한 골목길에 서 있었다. 출타가 잦았기에 이곳이 어딘지는 금방 깨달았다. 수도 외각에 위치한 민가였다. 황궁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장소는 아니었지만 결코 눈 한 번 깜빡할 사이에 오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
카리브디스는 머리를 크게 흔들었다.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머릿속이 온통 엉망이었다. 기억이 드문드문 끊긴 듯, 제대로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내가 왜 이곳에 있지? 방금 전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그는 차분히 기억을 되짚어 보려고 노력했다.
무언가를 애타게 찾았던 것 같다. 그걸 간절히 지키려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뭐였는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누굴 찾고 있었던 걸까. 아아, 그래. 주군을 지키려고 했었지. 하지만 그는 이미 망가져 가고 있었다. 단단히 틀어진 것들을 다시 되돌려야 했다. 그러려면 무엇을 해야 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