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11화 (311/608)

제311화

헉, 숨을 삼킨 후에 나는 다급히 물었다.

“대공이 이사나와의 싸움을 뒤로 미루고 싶어 하는 건가?”

“글쎄. 내가 보기엔 이사나를 의식한 게 아닌 것 같은데?”

“이사나가 아니면?”

“당연히 너지 누구겠냐.”

“……어?”

“지금 이쪽엔 정령왕이 있어. 대공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거고. 그 녀석이 지금 이사나를 신경 쓰고나 있을 것 같아? 아예 이 전쟁 자체에 관심이 없을걸? 악신을 각성시키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을 텐데.”

“으음, 하지만 그렇다면 너무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거 아냐? 진군을 막아 봤자 나를 묶을 수 있는 건 아닌데.”

“넌 정령이니까, 계약자 곁에서 떨어지지 못한다고 생각했나 보지. 그게 아니라도 이사나 쪽에 소란을 피우면 네 신경이 그쪽에만 쏠릴 테고. 실제로 요즘 이쪽 일에 네가 제일 바빠진 거 맞잖아.”

듣고 보니 다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이걸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이 황당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 수많은 기습들이, 사실은 전부 내 시선을 교란하기 위해서였다는 건가.

“한마디로 말해서, 지금 그쪽에 내 시야를 피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말이네.”

머릿속이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대공의 상황은 늘 틈틈이 살피고 있었다. 바람의 검을 지닌 탓에 카리브디스와 접촉할 때면 잘 보이지 않긴 했지만, 대체로는 살피는 데 무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그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대공은 나를 견제하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것도, 사실이 아닌 건 아닐까? 어쩌면 지금도 어디선가 내 시선을 피해 여전히 제물을…….

쿠웅―

“……흡!”

그 순간, 갑자기 몸 안에서 뭔가가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바닥이 꺼지고 그대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아찔한 감각이었다. 나는 급히 숨을 삼키고 가슴을 부여잡았다.

“대부!”

“뭐야, 왜 그래?”

깜짝 놀란 아스와 라피스가 내게 황급히 다가왔다. 질병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이 통증을 호소하는 듯한 동작을 취하니 당황한 것 같았다. 물론 가장 크게 당황한 건 나였다.

“으으. 몰라. 왜 이러지?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

“기분이 이상하다니?”

“나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심장이 마비되는 것처럼 뭔가가 억눌리는 느낌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가슴 안을 압박하는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알싸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나쁜 예감에 두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스와 데르온이 크게 숨을 삼켰다. 마치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듯이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어리둥절해하는데 라피스가 얼굴을 찌푸리는 것이 보였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어? 뭐가?”

“울고 있잖아.”

“……어?”

눈을 깜빡이는 순간 뭔가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손을 들어 눈가를 어루만지자 그대로 축축한 느낌이 전해졌다. 방울방울 맺힌 눈물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솟아나고 있었다.

“어, 이거 왜 이러지?”

자꾸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속이 타는 듯이 괴롭고, 역할 정도로 매슥거렸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우는 게 아니라 마치 다른 누군가가 울고 있는 것 같은…….

“아.”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이 기울어진 각도를 따라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차피 멈출 것 같지 않아서 닦아낼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령이…… 울고 있어.”

“뭐?”

“나이아스가 울고 있어. 아파서 괴로워하고 있어. 그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

라피스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아스와 데르온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설명을 바라는 시선이 와 닿았지만 나는 가슴을 장악한 슬픔과 머릿속을 가득 맴도는 누군가의 모습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삐쩍 마른 팔다리, 두 뺨이 파이도록 수척했던 얼굴이 떠올랐다. 이사나가 날 소환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던가? 의식이 없는 작은 꼬마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던 여인. 훗날 그 여인에게 황성으로 찾아오라며 목걸이를 걸어주던 장면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어 이어졌다. 지금 괴로워하는 정령은 그 목걸이 안에 넣어주었던 나이아스였다.

‘아아, 그래. 그 아이가 죽었구나.’

눈앞을 가리고 있던 모든 것들이 선명해졌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간신히 그러쥐어야 했다. 상실감이 차오르면서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라피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아마도 몹시도 창백해졌을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어질 내 말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시금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이번엔 내 의지로 흘리는 눈물이었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힘들었다. 두 번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을 만큼, 괴롭고 끔찍한 기분이었다.

“황성으로 가야겠어. 내가 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아.”

* * *

“공 각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카리브디스는 제게 정중히 인사해 오는 무리를 바라보았다. 약속된 지정 장소에서 만난 자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일색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모두 어디선가 봤을 법한 무난한 인상들뿐이었는데, 실제로 아는 이는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대공은 어디서 이런 자들을 구해 온 걸까. 그가 부리는 자라면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그중에 이런 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카리브디스의 시선이 묘해지는 이유를 알아차린 듯, 집단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은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희에 대해 궁금하신 점이 많으실 줄로 압니다. 각하께서 보시기엔 저희들이 못 미더워 보이시겠지만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저희들은 한 번도 맡은 임무를 소홀히 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시리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전하의 곁에 언제부터 있었지?”

“각하께서 짐작하시는 것보다도 더 오래되었을 겁니다. 공 각하가 전하의 빛이라면, 저희는 그분의 그림자였죠. 항상 공 각하를 동경하고 있었답니다. 오늘 이처럼 모실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

너무 기가 막히면 오히려 웃음이 나오는 것일까. 카리브디스는 나직하게 실소했다.

평생을 대공의 그림자로서,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추악한 일들을 도맡아 왔었다. 천하를 군림하는 자리는 수많은 위협이 도사리는 가시밭길이었다. 항상 양지로만 걸어가는 건 불가능했다. 주군의 고결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대로 제 손에 피를 묻혀야 했다. 그것이 누구의 것이든. 한 치의 흠 없이 무고한 사람이라도 그의 뜻에 방해가 되면 죽였다. 짓밟아 억누르고 뿌리까지 뽑아내어 전부 말살했다. 필요하다면 그 어떤 비겁한 방법도 가리지 않았다. 공작이라는 고상한 위치조차 그 힘을 효과적으로 누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아무리 씻어도 몸에 밴 피비린내가 사라지지 않게 됐다. 타고난 천한 출생은 어쩔 수 없다고, 저만 보면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말에 화가 치미기보다는 공감했다. 그 자신도 청부업자와 제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저더러 저들은 빛이라고 한다. 진짜 그림자는 자신들이었노라고.

“재밌는 말을 하는군.”

그의 전신에서 사나운 한기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검은 복장의 남자들은 그 반응을 의연하게 받아넘겼다. 흐트러짐 없는 분위기를 보고 카리브디스는 머리가 다시 냉정해지는 것을 느꼈다. 과연 스스로 그림자라고 자부할 만큼 살기와 악의에 만성이 된 자들이었다. 반면에 그들에게선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문적으로 자신의 기척과 의도를 철저하게 감추는 훈련을 받았다는 증거였다.

“너희 같은 이들이 얼마나 더 있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주력 인원은 지금 이곳에 있는 숫자만큼만 더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삼십 명 정도라. 꽤 적긴 하군.”

“훈련 과정이 고되어 살아남는 자들이 몇 되지 않았거든요.”

그 말을 듣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카리브디스의 표정이 일순 풀어졌다. 선황이 아직 살아 있었을 때, 그의 견제로 위치가 고립되면서 대공은 점점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됐다. 결국 그는 자신을 지킬 비밀 사병을 만들고자 했고, 어릴 때부터 충직하게 키워낼 생각으로 전국 각지에서 은밀히 아이들을 모아 왔다. 그러나 이후로 그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대공에게 불려갔다는 갔다는 아이는 있는데 생존이 확인된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때문에 한창 악의적인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그도 한때 직접 대공에게 확인하지 않았던가. 당시 대공은 아이들 대부분이 훈련 과정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고 했었다.

“그럼 너희가…….”

그런가. 그게 사실이었던가.

카리브디스는 자기도 모르게 얕은 숨을 내뱉었다. 내내 가슴 한구석을 무겁게 만들었던 찝찝함이 사라지고 안도감이 차올랐다. 대공을 의심했었던 것 같다. 아니, 의심했었다. 그가 책상 위에 펼쳐 둔 한 권의 책. 그 안에 적혀 있던 위험한 주술을 우연히 알게 되었던 바로 그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대공을 위해서라면 지옥이라도 기꺼이 걸어 들어갈 자신이 있지만, 그 주술은 그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고한 사람들의 수많은 피와 신들의 저주 속에서 완성되는 끔찍한 주술이었다. 그런 걸 시도하면 대공은 영혼까지 파괴되어 영원히 구제받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만은 아니길 얼마나 간절히 바랐던가. 그래서 그는 지금 이 순간이 진심으로 기뻤다.

그가 경계심을 내려놓자 남자들의 얼굴에도 미미하게 화색이 돌았다.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소드 마스터인 그가 내뿜는 기세에 긴장하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로 입장과 걸어온 길은 달라도 결국 그들의 목적은 하나. 주군인 대공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 대장의 태도도 조금 더 호의적으로 변했다.

“저희에 대한 언질은 들으셨던 것 같군요. 하긴 전하께서 친히 오른팔이라 칭하실 만큼 신임하시는 분이니 당연하겠지요. 전하께서는 저희들을 ‘일리야’라고 부르십니다.”

“일리야?”

“예, 저희 일리야는 크게 수색조와 사냥조로 나뉘어 있습니다. 저희는 사냥을 담당한 조입니다. 일리야의 실제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어지는 설명은 제대로 듣지 않았다. 그것보다도 카리브디스가 주목한 건 그들이 지닌 이름 그 자체였다. 왠지 낯익은 느낌이 어디선가 들어봤던 것 같았다. 속으로 곱씹어 보던 카리브디스는 곧 그 이름의 출처를 떠올렸다. 대공과 가장 친했던 형제, 세올리즈 황자가 아끼던 사냥개가 그런 이름을 갖고 있었다. 유난히 충직하던 개는 주인이 죽자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고 그대로 굶어 죽었다. 대공이 어떻게든 살려 보려고 애썼으나 끝내 다른 주인에게 눈을 돌리는 일은 없었다.

“……그런가. 일리야인가.”

입 안을 맴도는 맛이 씁쓸했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고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하지만 대공은 여전히 그 시절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걸지도 모른다. 상념에서 벗어난 카리브디스는 다시금 눈앞의 남자들을 천천히 훑어 내렸다.

“그런데 일리야에는 다 너희 같은 불구만 모여 있나?”

처음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대공이 직접 키워낸 병기라는 걸 알고 나니 스쳐 지나갔던 특징들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일리야의 인원들은 전부 하나씩 두드러지는 상흔을 지니고 있었다. 대장만 해도 한쪽 눈이 없는 애꾸였다. 귀가 잘려있거나, 생김새가 기형인 자들도 있었다.

“하하. 그걸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분은 각하가 처음이십니다. 다들 눈치만 보고 끝까지 물어보지는 못하던데 말입니다.”

“훈련 중에 입은 부상인가?”

“아뇨. 대부분은 천성입니다. 후천적인 것이라도 모두 일리야가 되기 전에 생긴 것들입죠.”

“그런가. 불편한 몸으로 훈련까지 견디려면 더 힘들었겠군.”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몸인 것이 저희에겐 행운이었지요. 덕분에 살아날 기회라도 얻은 셈이니까요.”

“……살아날 기회?”

“아,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대공 전하께는 진심으로 충성하는 마음뿐입니다. 제 부모는 한쪽 눈이 없다는 이유로 절 헐값에 팔아넘겼죠. 대공 전하께서 모으시는 건 아무런 흠 없는 아이들뿐이라는 걸 모르고서 말입니다. 여기 있는 자들은 모두 그런 이들뿐입니다. 대공 전하께 저희는 그냥 죽였어도 상관없었을 쓰레기였을 겁니다. 그런 저희에게 가치를 부여해 주시고 구실을 하게 만들어 주신 은혜에 그저 감사하고 있습니다.”

“…….”

사병으로 키우기 위한 것이었으니 신체 건강한 아이들 위주로 선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설명에서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대공은 흠 없는 아이들을 모았다. 소문이 워낙 파다하게 퍼졌던 탓에 관심이 없었음에도 카리브디스 역시 그 조건은 알고 있었다. 어리고, 흠 없이 깨끗한. 미색이 뛰어날수록 좋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자들이 기회를 얻은 건 ‘이런 몸’인 덕분이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살아날 수 있었으니 오히려 행운이었노라고.

“너희가, 제물을 모으는 일을 하고 있었나?”

질문을 한 건 다소 충동적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몹시 두서없고 뜬금없는 말이었다고 생각했다. 상대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여겼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을 것이라고.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그의 기대를 가볍게 배신했다.

“무난한 것들은 교단의 일이고, 저희는 조금 더 특별한 제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능을 가진 자를 제물로 하면 효과가 더 크다는 거 알고 계십니까? 수색조가 대상을 선정해서 감별하고, 저희가 사냥하죠.”

아아. 주군이여.

한순간 시야가 점멸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높은 곳으로 떠올랐다가 빠르게 추락한 것 같았다. 찬물을 맞은 듯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요동치는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억지로 억눌렀다. 다행히 그에게 감정을 감추는 일은 제법 쉬운 것에 속했다. 속내를 잘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뚝뚝한 얼굴을 그리 좋아하진 않았는데, 지금은 그게 고맙게 여겨졌다.

“……난 황제의 암살을 명령받았다. 그러나 너희들이 맡은 임무는 나와는 다른 것 같군. 뭘 하든 상관없지만,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하는 건 곤란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하자 그를 은근히 살피고 있던 일리야의 대장이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한 대답이 합격점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가 은밀하게 다시 감추는 것을, 카리브디스는 놓치지 않고 파악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