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08화 (308/608)

제308화

“그, 그런 게 아닙니다. 라젠 님은 표현법이 다소 거칠다 보니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황족이라 어느 정도는 권위적인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래도 많은 부분에서 공정하신 분입니다. 권력으로 사람을 강제로 굴복시키지도 않으시고, 타고난 신분으로 사람을 가리지도 않으시죠. 어디에서나 이단아 취급을 받던 제게 손을 내밀어 주신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요?”

“네, 제가 아무리 속이 없어도 무작정 두둔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라젠 님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분이라 모시기 편한 상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적으로는 좋은 면이 더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아셀을 잘랐잖아요.”

“사실 그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대신 변명을 드리자면, 그건 라젠 님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일 겁니다. 오래된 나쁜 습관 같은 거라서요.”

“자기가 사과할 일이 생기면 내치는 습관이요?”

“아, 아뇨. 그게 아니라…… 뭐라고 해야 할까요. 정확히 말하면 온전히 의지할 수 없는 사람은 곁에 두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요.”

“……?”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걸 불쾌해하는 반응이라고 여겼는지 아셀이 설명을 서둘렀다.

“원래 라젠 님은 자신에게 충성 서약을 한 사람만 곁에 두시는 분이거든요. 그런데 저는 아니었죠. 아카데미에서 우연히 얽히게 됐는데,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니 제가 일을 돕고 있더군요. 이제까지는 제가 딱히 다른 누군가를 섬길 마음도 없었기 때문에 문제 될 게 없었습니다만, 어제부로 상황이 달라진 겁니다. 제가 언제든 그를 떠나 다른 사람에게로 갈 수 있게 됐다는 걸 인지하신 거죠.”

“아직 완전히 마음을 정한 것도 아닌데…….”

“그분에게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자신 외의 다른 주군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 자체를 견디지 못하시는 거라서요.”

“으음, 그건 좀 이상한데요. 삐뚤어진 소유욕 같은 건가요?”

군신 간에 신의가 있어야 하는 건 맞겠지만 이런 식으로 나만 봐야 한다는 자세는 흔치 않을 거다. 안 그래도 좋지 않은 황태자의 인상에 묘한 설정까지 덧붙여지는 느낌이었다. 그게 표정에서도 드러났는지 아셀이 얼른 대답했다.

“소유욕이라기보다는 경계심이 너무 큰 탓일 겁니다. 이런 발언은 조심스럽지만, 살아온 환경이 그분을 그렇게 만든 거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온 환경이 왜요? 황태자잖아요. 거기다 마법의 재능을 일찌감치 꽃피워서 천재라고 칭송받았다던데. 그럼 어릴 때부터 탄탄대로를 걸은 거 아닌가요?”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긴 합니다. 지지하는 귀족들도 많고, 황후 폐하의 1황자인 데다 황실 특유의 머리색까지 타고나셔서 전통성도 확고하시죠. 더구나 제왕의 별 아래에서 태어나신 분. 날 때부터 다음 제위를 보장받으신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요?”

아셀은 담담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들을수록 황당해지는 내용의 전말은 이러했다. 라온휘젠 황태자의 부친이자 카터스 제국의 현 황제인 나르젠 황제는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제국의 안정을 위해선 대귀족들과 결속을 다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방법으로 혼인을 택했다. 즉, 황후 외에도 수많은 비를 들였다. 그러다 보니 슬하에 태어난 자식들도 당연히 많았는데, 하필이면 카터스 황실은 예로부터 딸이 귀한 편이었다. 대부분 아들만 낳았다는 소리다. 황태자와 동복의 황자들만 두 명이고, 동년배 황자들도 여러 명이라는 말에 나는 조금 당황해야 했다.

황후 못지않은 든든한 가문을 뒷배로 둔 황비들. 그들이 낳은 비슷한 또래의 아들들. 평화를 도모한 황제의 뜻과는 반대로, 그 구도는 시작부터 거대한 파란을 예고했다.

“그들에게 라젠 님의 존재는 그저 눈엣가시에 불과할 뿐이죠. 어떻게든 붙잡고 할퀴어서 밑바닥까지 끌어내려야만 하는. 그 탓에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 일들을 많이 겪으셨습니다.”

“여러 가지 일이라면…….”

“생각하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음식에서 독이 나오는 건 예사고, 암습을 받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 돌발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죠. 아카데미로 수학하러 가신 것도 그런 암투에서 조금이나마 피해 있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그 안에서도 그다지 안전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요. 제가 곁에서 지켜본 사례만도 상당했던지라.”

“으음, 그랬군요.”

“가장 악질적인 경우가 주위 사람을 포섭해서 배신하게 만드는 거였습니다. 신임하던 사람이 별안간 태도를 바꿔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주거나, 심지어 암살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었던 듯합니다.”

아, 그래서 경계심이라고 한 건가.

아셀이 말했던 의미를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 악조건에 연거푸 시달리다 보니 이제는 비슷한 상황이 생길 것만 같아도 지레 겁부터 먹고 피하게 된 거다. 일종의 외상성 신경증 같은 걸까.

“고생이 많았겠네요.”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아셀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서 동조를 얻어내는 것이 퍽 기쁜 얼굴이었다.

“이렇게 된 김에 말씀드리는 거지만, 라젠 님이 반려성을 찾는 것에 집착하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정적들이 그분을 먼저 찾아내어 이용하기라도 하면 곤란해지니까요. 그 전에 찾아서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어쩐지 황태자의 신분으로 가출이라니, 굉장히 무모한 일정을 강행한 것 같긴 했다. 떠받들려 자라서 대책 없는 성격으로 큰 탓인가 했는데 오히려 상당히 절박한 이유였었다. 도도할 정도로 꼿꼿하던 황태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얼굴은 단 한 번도 굽혀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당당하기만 했다. 날 때부터 사람을 부리는 것에 익숙한, 전형적인 지배 계급이라고 생각했다. 거친 풍파를 겪으며 살아온 것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으로는 다 알 수 없는 모양이다.

“지금 이사나의 상황도 그렇고, 황위 다툼이라는 게 참 무섭긴 하네요.”

“모든 권력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니까요. 온갖 추악한 탐욕과 더러운 집착이 향하는 곳이죠. 그래서 전 귀족은 부러워도 황족은 별로 안 부럽습니다. 주어지는 권력이 아무리 크면 뭐합니까. 그보다 더 막중한 의무와 책임이 짓누르는걸요.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셀이 내뱉은 뼈 있는 말에 조용히 공감했다. 끊임없이 목숨을 위협받고, 늘 주위를 살피며 가까운 사람들을 의심해야 하는 환경이라니. 남의 인생을 함부로 재단하고 판단할 수는 없지만, 몹시 고되고 고통스러운 삶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나한테 다른 형제가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인 걸지도…….”

그의 경우, 애초에 그런 상황을 방지하고자 선황 쪽에서 일부러 하나의 후계자만 뒀다고 했었다. 만약 지금 사태에 황자가 더 있었다면 전쟁의 형국이 상당히 다르게 흘러갔을 거다. 형제의 사이가 어땠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보다 훨씬 더 복잡해졌을 건 분명했다. 어쩌면 제국이 분열되어 지나간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겨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황에게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아셀이 곧장 동조를 해 왔다.

“이사나 폐하의 선대이신 카일 황제의 뜻이었죠. 후계자가 될 아들 하나만을 두고 다른 자식을 더 낳지 않다니. 대륙 역사에 다시없을 상당히 파격적인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먹어도 실행하기 쉬운 일은 아닌데, 그걸 정말로 해내셨다는 점에서 더욱 대단한 분이시죠.”

“맞아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카일 황제는 태자 시절부터 대쪽 같은 성정이셨다고 들었습니다. 과감한 판단도 잘하셨고, 결단력과 실행력도 좋으셨죠. 먼 지역까지 잠행을 자주 나가셨다고도 하더군요. 상당히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꽤 잘 아는 것 같네요? 아셀에게는 다른 제국의 일이었을 텐데.”

막힘없이 술술 흘러나오는 정보들에 감탄하기보다 의아한 마음이 앞섰다. 통신 장치가 없는 건 아니지만, 아크아돈은 지구의 현대처럼 정보가 방대하지도 않고 공유가 자유로운 편도 아니었다. 여기서 몇 개월을 이동해야 닿을 수 있는 머나먼 제국에서 사는 그가 이만큼 알 정도면 그야말로 작정하고 조사했다는 의미였다. 물끄러미 응시하는 눈길에 아셀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긴 했습니다. 스왈트 황실에서 벌어진 ‘피의 제전’은 상당히 유명했으니까요.”

“피의 제전?”

“모르십니까? 황태자 책봉을 앞두고 벌어진 황자들의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1황자였던 카일 황자가 이복형제들을 전부 죽였고, 그 피를 밟고 올라 황태자가 되었죠.”

“……아.”

“애초에 그전부터 황자들 간 알력 다툼이 대단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게 태자 책봉을 앞두고 크게 터져버린 거죠. 그 당시 카일 황제의 상황이 지금의 라젠 님과 꽤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유심히 알아봤었습니다. 훗날 카일 황제가 후계자를 하나만 둔 것도, 그 사건이 큰 영향을 미친 거라고 생각합니다.”

“으음.”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다고 했었지. 그저 지나치듯 들은 이야기라 크게 관심을 기울이진 않았는데 그게 누군가에게는 현실이라고 생각하니 굉장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설명하는 아셀도 조금 서글퍼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셀은, 라젠 황태자가 같은 전철을 밟을까 봐 걱정하는 건가요?”

“……아니라고는 말씀드리지 못하겠네요. 라젠 님은 가끔 극단적이 되실 때가 있거든요. 심지어 카일 황제는 성군이었죠. 그런 그가 피를 택했을 정도라면, 라젠 님도 그러지 마시라는 법이 없으니까요.”

“혹시 황태자도 그 사건을 알고 있어요?”

“피의 제전 말입니까? 물론 알고 계십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상당히 유명한 이야기였으니까요. 평소 알려진 카일 황제의 성정과 어울리지 않는 사건이다 보니 어느 모임마다 두고두고 거론됐습니다. 특히 4황자였던가, 5황자였던가. 막내 황자를 죽인 부분이 자주 화제에 올랐죠.”

“막내 황자요?”

“네, 아마 이름이 세올리즈 황자일 겁니다. 나이도 어리지만 권력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던 황자였습니다. 아주 어릴 때 신전으로 보내져서 그곳에서 쭉 자랐다고 하더군요. 카일 황제가 유일하게 친근하게 대하던 형제이기도 하고요. 그런 황자까지 무참히 죽인 거라 카일 황제의 인품을 논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저도 그 점은 그분답지 않은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라, 잠깐만. 신관이라는 막내 황자는 낙마 사고로 죽은 거 아니었나? 분명히 그렇게 들었었다. 게다가 그 사실을 내게 알려줬던 카이테인은 관련 사건 자체를 대공의 소행으로 의심하는 분위기였었다. 신관인 데다가 내 정체를 알고 있는 그가 일부러 거짓 정보를 알려줄 이유가 없으니 대외적으로 그렇게 알려져 있다는 뜻이었다.

“……그 황자를 카일 황제가 죽인 거라구요?”

“그리 알고 있습니다. 직접 살해했는지까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죽음에 관여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 일로 유카르테 황자, 지금의 대공이 크게 상심했을 겁니다. 그가 가장 아끼던 형제였다고 하더군요.”

“……!”

“그래서 대공이 섭정을 하기 시작했을 때, 다들 스왈트 제국에 내란이 일어날 거라고 앞서 짐작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가 곧 숨겨두었던 발톱을 드러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된 거네요.”

“예, 생각했던 것보다 그 시기가 더 빨라서 당황하긴 했지만요.”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던가. 꽤 많은 경우, 가장 가까운 당사자가 오히려 진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한다. 왠지 이것도 그런 종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사나는 이 부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후계자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다른 자식도 기꺼이 포기할 만큼 이사나를 지극히 사랑한 아버지였다. 스스로 치부로 여겼을 사건을 아들에게 솔직히 털어놨을 것 같진 않았다. 어머니가 대공을 도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큰 충격을 받았던 게 바로 그 증거다. 그만큼 이사나에게 대공에 대한 인상이 악당으로만 박혀 있었다는 의미였으니까.

‘으음, 이건 이사나에겐 알리지 않는 게 낫겠는걸.’

모르는 게 약이라고, 굳이 들어서 좋을 게 없는 이야기다. 일전에도 너무 실의에 빠진 나머지 식음을 전폐했다고 들었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는데 다시 괴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함께 이야기를 들은(다들 이쪽 대화에는 관심이 없어서 제대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일행들에게도 주의를 줘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저기, 엘. 심각한 대화를 하는 중에 미안한데, 잠시 저쪽을 봐야 할 것 같아.”

“응?”

때마침 시벨리우스가 말을 건네 왔다. 왠지 난처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마자 나는 헉하고 숨을 삼켰다. 언제 온 건지 이사나가 서 있었다.

“화, 황제 폐하.”

마찬가지로 당황한 아셀이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서로 대화에 너무 몰입해 있느라 그가 들어왔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가장 들키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들켰다는 낭패감이 엄습했다. 그게 괜한 우려가 아닐 만큼, 이사나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그가 떨리는 눈동자로 아셀을 응시했다.

“지금 그 이야기, 더 자세히 들어볼 수 있을까?”

* * *

투둑.

차가운 감각이 두 뺨에 떨어졌다. 손을 들어 훑어 내리자 축축한 감각이 묻어나왔다. 고개를 들기 무섭게 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았다. 그 물방울의 정체가 뭔지, 소년은 잠시 고민해야 했다. 여러 가지 추론 끝에 가장 합당한 결론에 이르렀다.

―주인님. 울어요?

그래. 이건 눈물이었다. 소년이 건넨 질문에 그를 품안에 끌어안고 있던 남자가 움찔거렸다. 아주 약간의 간격을 두고, 숨을 토해내는 듯한 답변이 이어졌다.

―응, 울고 있어.

―왜 울어요?

―천사님이 죽었거든.

―천사가, 죽어요?

―응. 죽어 버렸어.

꼭 끌어안는 손길이 강해졌다. 숨이 조금 막히는 것 같아서 소년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부질없이 떠나 버렸어. 그렇게 가면 안 되는 아이였는데. 나 때문에. 내가 지키지 못했어.

소리 내어 힘들다고 불평하지 못한 건, 어딘지 허탈하게 느껴지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처연하고 처절한 얼굴이. 너무나도 슬퍼 보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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