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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307화 (307/608)

제307화

꿀꺽, 마른 침을 넘긴 아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부드럽게 미소 지은 이사나가 잠시 후 팔을 들어 뭔가를 풀어냈다.

‘어? 저건…….’

나는 한눈에 그게 뭔지 알아봤다. 언제였던가, 샴페인 용병단과 함께 다니던 시절 지나가던 길에 들린 마을에서 우연히 구입했던 호신용 마법 팔찌였다. 내가 사서 이사나의 팔에 채워줬던 것을, 이번엔 이사나가 같은 방식으로 아셀의 팔에 채웠다. 당황한 아셀이 눈을 크게 뜨는 것과 동시에 이사나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 받은, 내가 소유한 것 중에서 가장 아끼는 것이다.”

“폐, 폐하.”

“마음을 정하는 대로 언제든 와도 좋다. 그때까지 그 팔찌는 그대에게 맡기겠다. 돌려줄 것을 지니고 있으면 그대도 목표를 정하기가 좀 더 쉬워지겠지.”

“황공, 황공합니다, 폐하!”

아셀이 급히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한쪽 무릎을 꿇는 건 이 세계에선 황제나 주군 앞에서만 취하는 자세였다. 이사나가 황제이니 당연하다고 볼 수 있는 예의이긴 했지만, 지금 이 순간엔 후자의 의미로 와 닿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보인 게 나만은 아니었는지 분위기가 상당히 묘해졌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직후, 들뜬 공기를 종식하는 서릿발 같은 음성이 내려앉았다. 이 모든 상황을 경직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던 라온휘젠 황태자였다. 다들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황태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를 돌아보지 않는 건 이사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아셀뿐이었다. 충격과 배신감을 담은 채 그 모습을 노려보던 황태자의 눈동자가 이내 차가운 한기를 안고 이사나를 응시했다.

“아셀은 제 보좌관입니다. 제 앞에서 제 사람을 데려가시겠다니, 아무리 황제라 하셔도 농담이 너무 지나치신 것 같군요. 폐하께서 저를 우습게 보신다는 건 잘 알겠습니다.”

“귀빈께서는 말씀을 가리십시오. 황제 폐하 앞에서 이 무슨 무례한 언사입니까?”

이사나의 뒤에 서 있던 친위대장 케이가 사나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다른 친위 기사들도 모두 날카로운 기세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황태자의 일행들 쪽의 분위기도 급변했다. 서로 험악한 분위기가 오가는 가운데, 이사나가 먼저 손을 들어 올렸다.

“계속 말하세요, 황태자.”

투지가 달궈진 상태였기에 다들 조금씩은 흥분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사나 만은 주위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여전히 초연했다. 그 담담한 얼굴에 더 화가 난 듯 황태자의 눈썹이 크게 씰룩거렸다. 입을 꾹 악물었는데, 그래도 저보다 윗사람 앞이라서인지 용케 이를 갈지는 않았다.

“폐하께 순진한 사람을 골리시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그를 골린다고요?”

“너무 감쪽같이 속이셔서 저도 잠시 착각할 뻔했습니다. 마지막 조건은 수락하지 마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럼 정말 진심이라 생각했을 텐데요.”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 나야말로 이유가 궁금하군요.”

“……황제의 이름으로 공증하면 적어도 이 스왈트 제국에선 유니콘이란 존재가 형식적으로나마 인정받을 겁니다. 하지만 온 대륙이 폐하를 비웃겠지요. 고작 사람 하나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런 수모를 감수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수모라…….”

“그냥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제게 유감이 많아 그저 분탕질을 치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마치 철부지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말투였다. 제국의 황제를 대한다고 할 수 없는 불손한 태도에 친위대의 기세가 험악해졌다. 하지만 다음으로는 황태자의 표정이 구겨졌다. 이사나가 피식 웃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상당히 가소롭다는 듯이.

우와, 이사나도 저런 식으로 웃을 줄 아는구나. 저렇게 노골적으로 상대의 속을 긁는 그를 보는 건 처음이라 놀랍기보다도 재밌다는 감정이 앞섰다. 물론 당하는 황태자는 전혀 재밌지 않겠지만.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해라고 하셨습니까?”

“태자의 입장에서는 이 상황이 불쾌하게 여겨질 수 있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입장은 분명히 해 두죠. 첫째, 난 태자에게 별다른 유감이 없습니다. 아셀이 내게 가치 있다 판단했고, 그 능력을 높이 샀기에 그가 좀 더 마음껏 활약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 주고 싶은 것뿐입니다. 둘째, 아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니콘을 인정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종족이니 공증하는 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게 무슨…….”

“태자는 세상을 좀 더 넓게 볼 필요가 있을 것 같군요. 애초에 이 세계엔 수많은 종족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서 인간의 수명은 고작해야 백 년 남짓이죠. 우리가 새긴 기록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다루었다고 재단하는 건 인간의 오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 그래서 폐하께서는 정말로 유니콘을 인정하신다, 이겁니까?”

“물론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제 보니 아무래도 폐하께서 뭔가 이상한 문학에 심취해 계셨나 봅니다. 곁에서 보필하는 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해질 정도군요. 무조건 옳다고 따르는 것이 진정한 충심은 아닐 텐데 말입니다. 폐하야말로 주변을 좀 더 돌아보셔야겠습니다. 아무래도 주위에 간신들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으니 말입니다.”

“이 무례한!”

듣다 못한 케이와 친위 기사들이 검집을 움켜쥐었다. 황태자의 일행들도 그를 보호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서로의 기세가 맞부딪치는 일초즉발의 순간이었다.

“아아, 더는 답답해서 못 봐주겠다.”

흘러가는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시벨리우스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다소 큰 목소리였기 때문에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로 집중됐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어. 저런 멍청한 소리를 계속 듣고만 있는 것도 슬슬 지치고 말이야. 야, 분홍 머리. 이사나가 왜 저렇게 확신하고 있는지 내가 그냥 증거를 보여 줄게. 그럼 되겠어?”

“증거……라고?”

그의 거침없는 하대와 호칭에 눈을 부릅뜨던 황태자가 다음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곧 그대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시벨리우스의 전신에서 새하얀 빛이 일기 시작하더니, 그의 몸이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슨……!”

터져 나온 빛이 순식간에 시벨리우스의 몸을 집어삼켰다. 찰나만큼 짧은 시간, 눈꺼풀을 움직이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주위가 좀 더 밝아진 느낌이 든다 싶었는데 하늘에서 하얀빛의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나풀나풀 팔랑거리는 은빛은 신기하게도 날개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다들 멍한 얼굴로 손을 들어 떨어지는 빛의 날개를 받아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기다리고 있던 본 막이 열렸다. 모두의 눈앞에 화사한 백마가 내려앉았다. 푸드득, 가볍게 펄럭이는 거대한 날개 사이로 달빛을 머금은 듯한 은백색 갈기가 출렁거렸다. 이마에 돋아나 있는 긴 황금색의 뿔은 어둑해진 공간에서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

“…….”

사위에 깊은 침묵이 흘렀다. 황태자 측은 물론, 친위 기사들 역시 멍하니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이사나도 아직 그의 본 모습을 본 적이 없긴 했다.

“진짜 유니콘이다…….”

누군가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니콘의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황태자를 향해 돌아섰다. 숨도 못 쉰 채 굳어 있는 그를 향해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전해졌다.

―자, 유니콘 실물이다. 이제 만족해?

“……마법이, 아니군.”

중얼거리는 황태자의 호흡이 거칠게 떨렸다. 제법 재능 있는 마법사라고 하더니, 시벨리우스의 모습이 마법으로 꾸며낸 형상이 아니라는 건 알아보긴 한 것 같았다. 그러나 스스로 말하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마법이 아니면 그가 진짜 유니콘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테니 그럴 만도 했다.

―당연히 아니지. 보면 몰라?

“어떻게…….”

―어떻게는 뭐가 어떻게야? 내가 유니콘이니까 유니콘인 거지.

“정말…… 유니콘이 존재한다고…….”

―그러게 아까 이사나가 말했잖아. 인간의 짧은 지식으로 세상의 모든 걸 재단하려 들지 말라고 말이야.

느긋하게 대꾸한 후 그가 어느 한 쪽을 응시했다.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그곳엔 아셀이 서 있었다. 그는 얼빠진 얼굴로 서서 눈물을 줄줄 쏟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몇 번이나 확신을 거듭했으면서도 막상 실제로 유니콘의 본 모습을 확인하고 나니 충격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시벨리우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픽 웃었다(말 주제에 그 모습이 꽤 멋있었다).

―아셀, 타.

“네, 네?”

뜻밖의 제안에 놀란 아셀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시벨리우스가 기분 좋은 듯 가벼운 투레질을 했다.

―오랜만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김에 산책 좀 해야겠어. 너도 데려가 줄게.

“그, 그래도 됩니까?”

―되니까 타라고 하지. 영광인 줄 알아. 내 등엔 아무나 태우지 않거든.

푸르르, 가볍게 갈기를 흔든 그가 씩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두어 번 가벼운 준비 운동을 마친 순백의 날개가 양쪽으로 활짝 펼쳐졌다. 바람을 등지고 선 그는 온몸으로 빛을 내뿜는 것 같았다.

―따라 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던 경치를 보게 해 주지.

여전히 울고 있는 상태에서도 아셀은 입가에 가득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는 흐르는 눈물을 제대로 닦아내지도 않은 채 시벨리우스를 향해 힘껏 달려 나갔다.

어둠을 뚫고 빛으로.

갓 날개를 펼친 새가 처음으로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것처럼.

“예, 시벨리우스 님!”

* * *

눈으로 보는 것만큼 명확한 증명은 없다. 시벨리우스가 본신을 드러냄으로써, 오랫동안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취급받던 아셀의 주장이 드디어 사실로 인정받았다. 그의 얼굴 또한 해묵은 떼를 벗겨낸 듯이 환해졌다. 그래서일까. 밤새 시벨리우스와 산책을 다녀온 아셀은 이전의 그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였다. 그저 표정이 조금 더 밝아진 것뿐인데, 눈빛이며 분위기며 전에는 느낄 수 없던 존재감을 풍기기 시작했다.

비유하자면 평범하기 짝이 없던 나무에 어느 날 갑자기 화려한 꽃이 피어나며 색이 더해진 것 같았다. 나무 자체는 그대로였지만, 이제는 누구도 그 나무를 보며 평범하다고 할 수 없을 거라는 건 분명했다. 아셀은 그 길로 황태자를 찾아가 오랫동안 긴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입장을 배려해서 일부러 도청하지는 않았는데, 결과가 꽤 의외였다.

“그 황태자가 사과를 했어요?”

“예, 지금까지 오해했던 부분이나 경솔한 발언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하셨습니다.”

“흐음. 쉽게 인정할 줄은 몰랐는데 놀랍네요.”

황족에게 사과를 받는 건 감사인사를 듣기보다 더 힘든 종류일 거다. 고루하다고만 생각했던 황태자가 처음으로 다시 보였다. 물론 그런 판단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그런데, 그 짐은 다 뭐예요?”

문득 느껴지는 위화감에 나는 천천히 아셀의 모습을 훑어 내렸다. 그는 등에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다. 물통이며 비상식량까지 야무지게 다 챙긴 모습이 진군할 때 흔히 보던 복장이었다. 단지 지금은 군대가 며칠째 한 장소에 주둔하고 있어서 진군할 계획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난처한 표정으로 웃었다.

“실은, 그거랑은 별개로 전하의 보좌관 자리에서는 해임되어서 말입니다.”

“……헐.”

“정말 염치없지만 한동안 이쪽에서 지내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대로 혼자 귀국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요.”

“…….”

나와 일행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게 바로 오늘 아침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참, 진짜 황당하네. 아카데미 졸업하려면 아직 1년은 더 남았다면서요. 당장 여기서 살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하루아침에 사람을 자를 건 뭐래요? 심지어 미안하다고도 했다면서! 황태자 그 사람, 속이 진짜 좁아터졌네요.”

설마 아셀을 해임할 줄이야. 그런 일들이 있었으니 한동안 어색해질 거라는 예상은 했었다. 그래 봤자 예전보다 서먹해지는 정도였지, 이런 식으로 곧장 관계를 단절하고 내보내는 결과까지는 아니었다. 아셀은 황태자를 위해 퇴학까지(어쩌면 사형까지) 각오하고 이 먼 여정을 함께 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서운해도 이런 식으로 쉽게 내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 맨몸으로 쫓겨난 건 아니라서 여비는 넉넉하게 받긴 한 것 같지만. 그런 거로 지난 헌신이 보상될 리가 없었다.

내가 한참을 투덜거리는 동안 내 앞에 자리 잡고 앉은 아셀은 어색하게 눈만 굴리고 있었다. 겉과 많이 다른 텐트 내부 환경에 아직도 적응하지 못한 건지 주위를 살피는 눈길에 긴장이 가득했다. 그나마 처음에 비해선 많이 나아진 반응이었다. 막 이 안에 들어왔을 땐 너무 놀라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었다. 엉성한 천막 안쪽에 대궐처럼 안락한 공간이 펼쳐져 있으니 충격이 클 만도 했다.

“하아, 정말 굉장합니다. 주술로 만들어진 집이라니. 여러분은 늘 상상하던 것 이상을 보여 주시네요.”

“……지금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닐 텐데요?”

딴소리 관두고 대화에 집중하라는 뜻에서 나는 아셀을 지긋이 응시했다(다른 일행들은 모두 멀찍이에서 그런 우리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열심히 현실도피를 시도하던 그가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이런 모습들을 보였으니 할 말은 없습니다만. 생각하시는 것만큼 라젠 님이 그렇게 모질고 나쁜 분은 아닙니다.”

“갑자기 실직한 주제에 무슨 소리예요. 이 상황에서 황태자 편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아셀, 너무 착하게만 살면 안 돼요. 부당한 일엔 화내도 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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