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6화
황태자 일행은 그들이 사라진 방향에서 조금 더 걸어 들어간 곳에서 멈춰 있었다. 보급품 중 중요도가 낮은 일부를 보관하는 용도로, 엉성하게 판자를 둘러쳐 둔 곳이었다. 그 밑으로 땔감용 나무 더미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너 요즘 뭘 하는 거지?”
“뭐가 말입니까?”
“무슨 말인지 이미 알고 있잖아.”
낮게 울리는 황태자의 목소리는 으르렁거리듯이 사나웠다. 추궁하는 듯한 어조며, 탐색하는 시선이 아셀을 달갑지 않게 훑어 내리고 있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는 알 만했다. 아무래도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교류가 문제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불타는 듯이 형형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황태자와는 다르게 그를 응시하는 아셀의 표정은 차분하기만 했다. 그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가만히 있는 것도 무료하고 해서 이곳 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네 본분은 나를 보좌하는 걸 텐데?”
“제가 맡은 일을 소홀히 한 적은 없습니다. 전하를 보필하고 남는 시간에 하는 겁니다. 제 자유 시간까지 참견받을 이유는 없습니다만.”
“그래서 그 시간에 황제의 환심을 사기로 했나? 요즘 같이 어울려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하더군.”
“너그러우신 황제께서 제 미천한 생각들에 관심을 기울여 주시는 것뿐입니다. 그걸 감히 어울려 다닌다고 할 수는 없지요. 이곳에 결례가 되는 표현은 삼가 달라고, 전부터 당부 말씀드렸는데 또 잊으셨군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콰앙!
황태자의 인내심은 길지 않았다. 마침내 소리를 높인 그가 주먹으로 옆에 세워진 판자를 내리쳤다. 그리고 그건 비극적인 사태로 이어졌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쌓여 있던 땔감들이 우르르 터져 나온 것이다. 임시로 얼기설기 묶어 둔 것이다 보니 강하게 내리쳐진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것 같았다.
“전하!”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세리엄과 호위들이 급히 몸을 나섰다. 황태자도 꽤나 놀란 듯 눈을 깜빡이다가 곧 낭패한 얼굴을 했다. 나뭇가지와 줄기들이 볼품없이 굴러다니면서 바닥이 엉망으로 변해 있었다. 다시 정리해 두려면 꽤 시간이 걸릴 모습이었다.
“젠장!”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자 황태자는 울분을 터뜨렸다. 모두 우왕좌왕하기만 할 뿐 이렇다 할 수습을 하지 못했다. 가볍게 혀를 찬 아셀이 허리를 굽혀 흩어진 가지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버려 둬, 아셀.”
신음을 삼킨 황태자가 한 손으로 피로해진 얼굴을 쓸었다. 그러나 아셀은 그에게 한번 시선을 던졌을 뿐,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냥 내버려 두라고 했어!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거냐?”
더는 무시하기 힘들었는지 아셀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사고를 쳤으면 수습을 해야지요. 이걸 어떻게 그냥 내버려 둡니까? 전하께서는 이만 막사로 돌아가 계십시오. 전 다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내버려 두면 누군가가 와서 발견하고 치우겠지! 네가 할 필요 없는 일이야!”
“아뇨. 전하는 모르시겠지만 이곳에 쌓아둔 땔감은 내일 쓸 것들입니다.”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야?”
“이 현장을 발견할 사람이 내일 아침에나 온다는 소리입니다. 밤새 이대로 방치되면 서리를 맞을 거고, 그럼 못 쓰게 되겠죠. 겨울에 마른 장작 구하기가 쉬운 일인 줄 아십니까?”
“이따위 나무 조각 따위가 뭐라고!”
타박하는 목소리만큼이나 반박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홧김인지 황태자가 자신의 옆쪽에 기울어져 있던 마른 나무줄기 하나를 홱 뽑아 들었다. 판자 안쪽에 깔린 탓에 가려져 있던 마른 몸뚱이가 흙먼지와 함께 딸려 올라왔다. 그런데 그 순간, 아셀의 입에서 요란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내내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던 황태자가 움찔해서 물러설 정도로 날카로운 비명이었다. 세리엄과 호위들도 모두 깜짝 놀라 검을 움켜잡았다.
“아셀?”
“그, 그거 저리 치우십시오!”
“뭐?”
“손에 들고 계신 그거 말입니다! 히이익! 제발! 제발 저 멀리 던져버리세요! 부탁입니다!”
점점 더 거세지는 비명에 황태자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그 손에 쥐어진 비틀어진 나무줄기를. 다른 이들의 시선 역시 그것에 고정되었다. 이미 생명이 다해 바짝 마른 나무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이 연약해서 몽둥이로도 쓰일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두의 얼굴에 황당해하는 표정이 떠올랐지만 나는 아셀이 저러는 이유를 이해했다. 나무줄기 한쪽에 짙은 사념이 서려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그 나무에서 자살이라도 한 모양인데, 이후에 말라비틀어진 걸 땔감으로 여겨 가져온 듯했다. 하필이면 골라도 그런 걸 집어 든 거다.
마찬가지로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챈 시벨리우스가 옆에서 나직하게 혀를 찼다. 방어 주술을 익힌 후로 아셀은 웬만한 사념엔 영향을 받지 않게 됐지만, 그래도 아직은 초보자이다 보니 일정 이상 강한 힘에는 여전히 취약했다. 수련에 성취를 이룰수록 나아지는 부분이니 갈수록 횟수가 줄어들긴 하겠으나 꽤 오랫동안은 벗어나기 힘들 터였다. 시벨리우스가 미리 경고했기 때문에 본인도 이 점은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막상 상황이 닥칠 때 혼란에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하기야 공포 영화라는 걸 알고 봐도 귀신이 나타나는 장면에선 깜짝 놀라게 되니까. 단순히 정신력을 탓할 수만도 없는 문제였다.
무슨 환각을 본 건지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황태자가 그런 아셀과 나무줄기를 한동안 번갈아 바라보더니 이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그가 팔을 힘껏 들어 나무를 멀찍이 내던졌다. 묵직한 것이 바닥에 닿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아셀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치, 치우셨습니까?”
“그래, 버렸다.”
핏기 없이 창백하던 얼굴에 겨우 혈색이 돌았다. 그러나 안심한 표정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황태자의 손에 시선이 닿자 그의 얼굴이 재차 얼어붙었다.
“전하, 손을…….”
“이번엔 또 뭐지?”
“손을 씻으셔야겠습니다. 지, 지저분한 게 묻었습니다.”
묘한 표정을 지은 황태자가 다시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약간의 먼지가 묻긴 했지만 씻어내야 할 정도로 지저분한 상태는 아니었다. 물론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때의 이야기다. 실제로는 사념 덩어리의 일부가 그 손에 옮겨붙어 있었다. 그게 대체 무슨 환각을 보여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셀의 얼굴이 토할 것처럼 일그러지는 걸 보면 꽤 구역질 나는 광경인 듯했다. 그래도 이성이 돌아오긴 했는지 조금 전처럼 속수무책으로 혼란에 빠지진 않았다. 환각이 주는 효과는 여전할 텐데도 견디는 걸 보니 나름대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황태자는 복잡한 시선으로 파리해진 아셀을 응시할 뿐이었다.
“너, 병증이 다시 도진 모양이군.”
“예, 예?”
“또 이상 증세를 보이고 있잖아. 한동안 괜찮은 것 같더니. 역시 아직은 치료가 더 필요한 모양이다.”
“아니, 이건…….”
“이만 막사로 돌아가자. 네가 좋아하는 술을 준비하게 하지. 마시고 잠들면 좀 나아진다고 했었지? 술동무가 되어 주진 못하겠지만, 자리를 지켜주는 것 정도는 해 줄 수 있어.”
아셀이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황태자는 이미 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당황해서 머뭇거리던 아셀이 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동요의 눈동자가 가라앉고 표정이 차분해졌다. 그가 시선을 들어 황태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닙니다.”
“차라리 넌 이쯤에서 그냥 귀국하는 편이…… 뭐라고?”
말을 이어가던 황태자가 멈칫해서 돌아보았다. 평소와는 다른 점을 느꼈는지 조금 굳은 얼굴이었다. 아셀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정신병이 아닙니다.”
“…….”
“전 아픈 게 아닙니다, 전하.”
어둠속으로 침잠하는 밤. 고요한 공기를 가르고 당당한 선언이 울렸다. 한 치의 주저함 없이 올곧게 서 있는 아셀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당신은 아픈 게 아니니까, 물러서지 말고 당당해지라고 했던 내 말을 기억한 게 분명했다. 그가 이제는 참지 않고 맞서 싸우기를 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일들은 생각만큼 즐거운 전개로 흘러가진 않았다. 황태자는 한동안 아셀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다,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땅이 꺼질 듯한 무거운 울림에 아셀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래. 넌 늘 그렇게 말하긴 했지. 항상 그 빌어먹을 혈통 때문이라고.”
“네, 맞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말해야 네 마음이 편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솔직히 이것만큼은 맞춰 주기가 힘들군. 우긴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전하, 저는…….”
“넌 총명한 녀석이야, 아셀. 스쳐 지나가는 것도 전부 세세히 기억할 정도로 뛰어난 기억력에, 쓸 만한 직관력과 통찰력을 가졌지. 천재에게는 하나둘씩 결함이 있기 마련이고, 난 그걸 나쁘게 보지 않아. 벌써 몇 번이나 말한 걸로 아는데. 왜 아직도 그 사실에 집착하는 거지?”
“……저는, 정말 병이 아니라서…….”
“그렇게 말하려면 좀 더 능숙하게 병증을 숨기는 법을 익히도록 해. 그럼 믿는 시늉이라도 해 줄 수 있을 테니.”
“…….”
그건 마치 거대한 벽이 세워지고 그 앞에서 떠밀쳐지는 듯한 광경이었다. 흐려진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져 가는 게 선명히 보였다. 주먹을 움켜쥐고 입술을 악문 아셀을 두고 다른 일행들이 어색한 표정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두둔해 주거나 위로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나마 그를 이해해 주는 것 같았던 세리엄조차도.
나는 속으로 크게 숨을 삼켰다. 지금까지 그가 어떤 상황에서 홀로 견디며 싸워왔는지 알 것 같았다. 맞부딪치는 게 싫어서 쉽게 체념했던 게 아니었다. 주위에서 강제로 체념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거다. 터져 나오려는 화를 억지로 참아 누르는데 옆에서 부들거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시벨리우스가 주먹을 꾹 움켜쥐고 있었다. 표정은 여느 때처럼 담담했지만, 눈빛이 이미 차갑게 식어있어 감정을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옆에서 거드는 사람이 더 크게 화를 내면 진정하게 되나 보다. 그 살벌한 기운을 보고 났더니 오히려 나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게다가 화가 난 건 그 하나만이 아니었다.
“네가 등장할 시기 같지 않아?”
웃으며 돌아보자 뒤쪽에 서 있던 소년과 시선이 마주쳤다. 황태자가 아셀을 다그치고 있을 때쯤 다가오던 기척이 있었는데, 그 주인공이 때마침 시기적절하게 장소에 이른 참이었다.
“이사나.”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이사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를 호위하고 있는 친위대들도 거의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누구냐!”
그제야 이쪽의 기척을 감지한 황태자의 호위들이 주변을 경계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날카롭게 쏘아보던 시선은 우리 쪽을 확인하곤 곧 당혹감으로 변했다.
“화, 황제 폐하.”
황태자와 아셀의 표정도 굳어졌다. 이사나는 잠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결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늦은 시간에 꽤 재밌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군요.”
“폐하께서 이곳까지 무슨 일로…….”
“안에 있는 게 답답해서 잠시 걷던 중이었습니다. 근방에서 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와 봤는데…… 오길 잘한 것 같네요.”
많은 의미를 담은 시선이 아셀을 향했다. 그가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자 이사나의 표정이 더 가라앉았다. 그 모습을 경계하듯 지켜보던 황태자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가 무어라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아셀, 진로를 고민 중이라고 들었다. 내 곁에서 일해 보지 않겠나?”
“……!”
서론을 통째로 무시한 전개였다. 벼락을 맞은 듯이 눈을 부릅뜬 황태자 일행들 사이에서 오직 아셀만이 침착했다. 마치 그가 그렇게 말할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송구합니다, 폐하. 곁에서 일해 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말 그대로의 의미다. 아셀, 그대가 가진 능력이 탐난다. 내 사람이 되어, 이 제국을 위해 일해 보지 않겠나?”
“기다려 주십시오, 폐하! 지금 이게 무슨……!”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불쾌한 표정을 지은 황태자가 급히 나서려는데 아셀의 대답이 먼저 이어졌다. 황태자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일말의 재고도 없이 거절해야 할 그가 마치 응하는 듯한 대답을 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셀의 시선은 이사나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조건이 뭐지?”
“먼저, 아카데미에 남아 있는 학기가 있습니다. 모두 수료하고 온전히 졸업하고 싶습니다.”
“허가한다.”
“제가 폐하께 어떤 간언을 드려도 무사할 거라는 확답이 필요합니다. 그에 관한 면책권을 주십시오.”
“허가한다.”
“폐하를 곁에서 모셔도 흠이 되지 않을 직위와 작위도 필요합니다.”
“물론 허가한다.”
“……마지막으로, 유니콘 일족이 실존한 종족이라는 것과 제 가문이 그 핏줄을 이었음을 황제의 이름으로 공증해 주십시오.”
“……!”
빠르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연이어졌다. 전부 황태자 일행에게서 터져 나온 반응이었다. 대화가 이어지는 내내 굳어 있던 상태였지만 그들 모두 마지막 조건에서는 아예 넋을 잃은 모습이었다. 황제의 이름으로 공증한 문서는 그 자체로 효력을 가진다. 한마디로 아셀의 뜻은 명백했다. 유니콘의 혈통을 정식으로 인정받겠다는 의미였다.
“아셀, 너……!”
미쳤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 쏟아졌다. 이사나의 얼굴도 더불어 찌푸려져 있었다. 내내 의연하기만 하던 아셀의 안색이 처음으로 창백해졌다. 하지만 이사나가 얼굴을 찌푸린 건 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였다.
“아까부터 당연한 것들만 조건에 넣는군. 욕심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예?”
설마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 몰랐다는 듯, 아셀이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그에게 뭔가 소리치려고 했던 그들 일행 또한 모두 아연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아니면 내 입장을 배려하는 건가? 내가 그런 배려를 받아야 할 만큼 못미더운 황제로 보이나?”
“다, 당치 않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면 더 마음껏 요구해라. 난 내 사람을 얻는 값을 아낄 만큼 옹졸한 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