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5화
“각 출신 지역별로 분류한 후에 그 안에서 가족별로 다시 묶고, 또 그 안에서 나이와 성별 순으로 나눠 서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규모를 파악하는 게 빠르니 배급량을 정하기도 더 수월해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을 파악하기도 쉬워질 거고요.”
“흐음. 그렇지 않아도 난민 중에 첩자가 섞여 들어오는 걸 우려하고 있던 중이었죠. 그 부분까지 파악해 두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저 혼란한 틈에는 불순물이 끼기 쉬울 거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성정을 대변하는 듯이 침착한 대답이었다. 그를 응시하는 이사나의 시선이 깊어졌다. 길어지는 침묵이 불편했는지 아셀이 힐끔 고개를 들었다가 이사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때까지 무표정하던 이사나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얼마 전에 꽤 흥미로운 보고가 올라왔더군요. 이번 전쟁의 전사자와 부상자들에게 주어져야 할 보상과 유족들의 복지 방향을 다룬 내용이었죠. 발의한 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외국에서 온 귀빈이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그 발의를 한 사람이 그대입니까?”
“화, 황송합니다. 제가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아닙니다.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시한 방향이 적절한 것 같아 그대로 시행하라고 지시해 둔 참입니다.”
“황공합니다.”
아셀이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수줍음을 감추지 못하는 반응에 이사나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아셀. 이렇게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 말씀을 더 편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지, 아셀. 그대의 도움에 감사한다. 카터스 제국이 출중한 인재를 키워냈군. 혹시 앞으로도 필요한 일에 자문을 구해도 되겠나?”
“과, 과찬이십니다. 저 같은 자의 머리라도 괜찮으시다면 얼마든지.”
“고맙다.”
빙긋 웃은 뒤 이사나는 나와 가벼운 시선을 교환한 후 이내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아셀의 표정이 멍했다.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하던 그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엘 님. 폐하께서 제게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왜요?”
“황족이 저 같은 사람한테 고맙다고 말씀하시다니. 저런 분은 처음 뵈었습니다.”
도움을 준 입장에서는 당연히 받아야 하는 인사였다. 엄청난 보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고작 그 한마디에 이렇게까지 감동하다니. 이럴 땐 확실히 이곳이 신분제가 존재하는 계급 사회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나는 쓰게 웃다가 그가 더 기뻐할 만한 말을 건넸다.
“아셀이 꽤 마음에 든 것 같던데요.”
“예, 예?”
“이사나 말이에요. 말 편하게 하라고 해서 바로 편하게 하는 경우는 거의 못 봤거든요. 자기 사람이 아니면 대부분 지나칠 정도로 예의를 차리는 편이라서요. 아셀에겐 쉽게 마음을 여는 걸 보니 굉장히 좋게 본 것 같아요.”
아무리 다른 나라 사람이라도 까마득히 높은 존재에게 호의를 받는 건 기분 좋은 일일 거다. 예상대로 아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생각보다도 감동이 컸는지 조금 먹먹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로 자신이 붙었는지 아셀은 조금 더 이쪽 일에 과감하게 관여하기 시작했다. 진영 안의 상황을 살피는 것을 넘어 평소 염두에 두고 있던 생각들을 정리해서 이사나에게 직접 제안서 같은 걸 보내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런 날은 둘만의 자리를 마련해 한참 동안 긴 대화를 나누곤 했다. 교류를 굳이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내가 따로 알아보지 않아도 소식이 알아서 들려올 정도였다.
“요즘 아셀과 자주 어울린다며?”
한번은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이사나가 전에 없이 흡족한 얼굴로 웃었다.
“이곳과 다른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참신한 관점이 많아. 덕분에 내가 알게 모르게 지니고 있던 고정관념을 전환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
“그렇구나. 잘됐네.”
“응, 그리고 아셀이 별점도 봐줬어.”
“별점?”
아아, 그러고 보니 점성술사라고 했었지. 언젠가 듣고 꽤 놀랐던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일행이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친 별점 덕분이었다고 들었다. 황태자씩이나 되는 자가 무작정 신뢰해서 길을 맡길 정도면 상당히 뛰어난 점성가라는 소리였다. 실제로 제대로 찾아왔으니 그 실력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내 별은 남쪽에 있대. 남쪽 별 아래 태어나는 사람은 대체로 성정이 온화하고 인내심이 강한 편이랬어. 별의 위치는 대지의 축복을 받는데, 내가 태어난 날짜는 바람의 기운이 강하게 깃드는 시기라 오히려 물의 기운을 불러들인다나 봐.”
“허어? 그거 뭔가 상당히 그럴듯한데?”
“그렇지? 내가 자라면서 큰 사건을 겪었던 시기랑 그 해의 강수량과 곡식 수확량 같은 것들도 맞췄어. 우리 제국에선 점성술이 보편적이지 않아서 제대로 접해 볼 기회가 없었는데 정말 굉장한 것 같아. 다음에는 애정운이랑 자녀복도 봐준대. 거사를 치루기에 가장 적합한 기일도 알아봐 준다고 했어.”
“하하, 정말 많이 친해진 모양이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어.”
선뜻 답하는 이사나에게선 여느 때와 같은 수줍음이 보이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머뭇거리는 법 없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하는 그를 보는 게 처음이라 내심 신기한 기분까지 들었다.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물론 이 상황을 몹시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툴툴거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알리사였다. 이사나가 아셀과 어울리는 일이 잦아지자 그녀는 노골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냈다. 단지 친한 친구를 뺏겼다는 시기심만은 아니었다. 갑자기 나타나 물밀 듯이 영향력을 미치는 그가, 그간 전우로서 쌓아온 자신의 자리를 위협한다고 여긴 것 같았다. 이건 어느 정도는 내 탓도 있었다. 전투에 공헌할 때마다 알리사에게 공로를 전부 몰아준 것이, 그녀의 입장에서는 제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는 자책감을 남기게 된 모양이었다. 그에 비해 아셀은 자기 능력으로 이사나의 눈에 든 셈이라 경쟁심이 피어난 것이다.
차마 대놓고 방해하러 가지도 못하고 텐트 안에서 씩씩거리기만 하는 알리사를 보고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품에는 이 상황과 무관한 아스만 애꿎게 안겨 있었다. 마음의 안정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알리사에게 강제로 선택된 희생양이었다.
“……알리사아. 나 답답해.”
“조금만 참아. 귀여운 걸 안고 있어야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아.”
“나, 안 귀여운데. 많이 컸는데.”
“나한테는 그래도 귀여워.”
“……그럼 언제까지?”
“내 기분이 완전히 좋아질 때까지!”
저항의 시도가 수차례 반복되었으나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얼굴이 급격하게 흐려진 아스가 내게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보내왔다. 옆에서 시벨리우스와 데르온이 이쪽을 돌아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라피스는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으니 예외로 치겠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을 응시하는 아스의 눈빛이 점점 살벌해진다고 느껴지는 게 비단 나만의 착각은 아닐 거다. 이러다 일 터지겠다 싶어 나는 급히 알리사를 달래기 시작했다.
“알리사, 늘 말했다시피 넌 중급 정령사야. 네 나이엔 이루기 힘든 성취라는 거 알잖아. 그것도 충분히 대단한 거야. 내가 꾸며내는 눈속임은 아무나 감당할 수 있는 건 줄 알아? 너라서 받쳐줄 수 있는 거라고.”
“알아. 하지만 이사나 씨는 아셀과는 중요한 논쟁을 해도 나하고는 그런 얘기 안 하는걸.”
“으음, 그건 네가 아직 어려서 그런 게 아닐까? 그리고 아셀과 너는 입장이 조금 다르니까.”
“뭐가 다른데? 내가 여자라서?”
“아니. 아셀은 수족으로 삼을 상대로 보고 있지. 알리사 너는 친구이자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고.”
운명이 내정한 연인이기도 하다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다행히 그 표현이 나쁘지 않았는지 잔뜩 구겨져 있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친구이자 가족이니까 중요한 일들도 함께 나눠야 하는 거 아니야?”
“소중하니까 할 수 없는 것들도 있어. 그리고 말했다시피 넌 아직 너무 어려. 이사나는 네가 참전하는 것도 계속 반대하는 입장이었잖아. 그래서 더 깊게 관여하는 건 바라지 않는 거야.”
“……내가 더 크면 이사나 씨도 날 좀 더 의지할까?”
“아마도 그러지 않겠어?”
“그때가 되면 나한테만 털어놓는 이야기 같은 것들도 있겠지?”
“그거야 당연하지.”
고개를 끄덕였더니 알리사의 얼굴이 한층 더 편안해졌다. 확실하지도 않은 추측성 대답만으로도 마음에 안정을 얻다니. 새삼 이사나가 그녀에게 끼치고 있는 영향이 굉장하구나 싶었다. 이런 솔직한 기분을 이사나한테도 털어놓으면 좋을 텐데. 정작 본인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면서 뒤에서만 끙끙거리는 게 안타깝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어쨌든 그 덕분에 아스는 자유를 맞았다. 풀려나자마자 후다닥 달아나 내 뒤에 달라붙는 아이를 잘 다독여준 다음 나는 알리사에게 당부를 건넸다.
“아무튼 알리사, 아셀과도 잘 지내줘. 앞으로 계속 얼굴 볼 사이가 될지도 모르는데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
“으으음, 생각해 볼게. 근데 그 사람이 정말로 이쪽으로 넘어오려고 할까?”
“글쎄, 어떨지 모르겠어. 그러면 좋을 텐데 말이야.”
“엘, 너야말로 그 녀석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네?”
그때까지 듣고만 있던 시벨리우스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굉장히 의외라는 표정이라 나는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성격도 괜찮고, 열심히 살아가는 자세를 가진 것 같아서 좋아. 시벨, 넌 안 그래? 몇 세대 거친 후손이긴 하지만 그래도 형님의 핏줄이잖아.”
사실 나로서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게 시벨리우스의 반응이었다. 아셀은 유니콘의 피를 이은 후계자였고, 더구나 거두어 가르치고 있으니 나름대로 밀접한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시벨리우스는 마치 낯선 타인을 말하듯 아셀을 언급했다. 그는 어려운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글쎄. 핏줄이라곤 해도 벌써 많이 흐려졌는걸. 거의 인간이나 다름없어.”
“그래서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솔직히 말하면, 그래.”
“그렇지만…….”
“녀석이 처했던 상황이 안타깝기는 해. 하지만 그것뿐이야. 애초에 나는 동족이라 해서 딱히 애틋한 감정이 들지 않아. 오히려 싫어하는 편이라면 모를까. 아셀 녀석도 마찬가지야. 오히려 인간에 가깝기 때문에 그나마 호의를 베푸는 건지도 모르지.”
“…….”
말문이 막히는 바람에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가 일족을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새삼 그 마음의 깊이를 확인한 기분이었다. 그건 생각보다 더 깊고 어두운 심연이었다.
“엘, 나는…… 핏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결국 떠나버리면 끝나는 관계인 건 똑같잖아. 그럼에도 버림받은 쪽은 더 비참해지지. 그런 불공정한 관계에 집착하고 싶지 않아.”
그 말을 부정하지 못한 건 한때 나도 같은 생각에 시달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착할수록 비참해지는 기분만 확인하는, 그런 불공평한 관계. 나 또한 절절할 정도로 잘 알았다. 가끔은 지금 이 순간이 꿈일까 봐 소스라치게 두려워질 만큼, 지독하게 아프고 괴로웠던 나날들이 있었다. 그래서 더 슬퍼졌다. 그로 인한 공허함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 내가 그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벨리우스의 얼굴에 음울한 그늘이 드리운 것을 보면 그리 편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대체 어디까지 가시는 겁니까?”
“……!”
때마침 바깥에서 들려온 음성 덕분에 자연스럽게 대화가 중단됐다. 양반은 아니라더니, 공교롭게도 아셀의 목소리였다. 시기가 시기였던지라 시벨리우스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싫어서라기보다는 마치 먹을 걸 훔쳐 먹다 걸린 아이의 낭패감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면 이런 때도 반응하지 않았을 텐데. 말은 그렇게 했어도 실제로는 머리로 다짐하는 만큼 매몰차게 외면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그는 의외로 마음이 약한 구석이 있었다. 가짜 엘이 나타나 한창 갈등을 빚고 있을 때에도 내게 끝까지 모질게 굴지는 못했었지. 그때 일이 떠오르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런 상황과는 별개로 아셀이 이곳에 있는 건 의아했다. 우리가 쓰는 막사는 시벨리우스가 편법으로 만드는 것이다 보니 대체로 진영에서 벗어난 장소에다 세우는 편이었다. 인적이 매우 드문 곳이었고, 아셀 일행이 머무는 막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기도 했다.
느껴지는 기척은 다섯 정도. 황태자 일행 전원의 숫자에 해당했다.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걸 보아 이곳 자체가 목적인 건 아니고 그저 지나쳐 가는 길인 듯했다. 어디 단체로 마실이라도 나가는 걸까. 슬슬 날이 저물어 어두워지는 때였다. 산책을 나가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시간이다 보니 의아한 기분이 더 커졌다.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슬쩍 문을 열어 보았다. 멀찍이에서 빠르게 걸어가고 있는 무리가 보였다. 짐작대로 황태자와 아셀 일행이었다.
식후 운동과 같은 가벼운 분위기를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표정들이 꽤 심각했다. 황태자는 어딘지 화난 것처럼 보였고, 그 뒤를 허둥지둥 따르는 아셀과 나머지 사람들은 매우 난처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전하, 대체 어디까지 가시는 거냐니까요?”
재차 이어지는 아셀의 부름에도 황태자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들은 이내 더 으슥한 쪽으로 삼켜져 보이지 않게 됐다.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그들의 뒤를 쫓아가 보기로 했다. 그런 내 옆에 누군가 냉큼 따라붙었다. 시벨리우스였다.
“그냥.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쳐다보기만 한 건데 묻지도 않은 변명이 흘러나왔다. 정작 그러는 본인이 더 복잡한 표정이라 나는 일부러 별다른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 위로 안도의 한숨이 닿는 것도 모르는 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