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4화
“이사나, 많이 바빠?”
“음? 아아, 아냐. 괜찮아, 엘. 어서 와.”
말을 걸고서야 내 방문을 깨달은 이사나가 손에서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가 탁자 위를 허둥지둥 정리하는 동안 나는 권하는 의자에 앉아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실 둘러본다고 해 봤자 서너 평 남짓의 작은 공간에 큰 탁자와 의자, 침낭이 전부인 구조라 달리 볼 것도 없었다. 이사나의 막사에 들른 게 오늘이 처음은 아니지만 올 때마다 너무 단출한 것 같다는 생각은 버릴 수 없었다. 일반 병사들이 쓰는 막사 구조와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다 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까. 누가 보더라도 이런 곳이 황제의 막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거다. 단지 이사나 본인이 바란 일이라 누굴 탓할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원래는 시벨리우스가 그가 쓸 텐트도 만들어 줄 예정이었으나 이사나 쪽에서 거절했다. 성이나 저택에 들르게 될 때는 주인의 체면을 생각해서 좋은 방을 쓰지만 이동 중 사용하는 막사만큼은 가장 단출한 것을 원했던 탓이다. 적어도 이번 전쟁에서만큼은 편하게 지내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숙부와 본격적으로 겨루고 있는 만큼 여러 가지로 생각이 많을 시기였다. 아마도 그 나름대로 복잡한 심경을 털어내는 방법인 듯 보였다.
“미안해. 안이 너무 지저분하지?”
“아니야. 근데 무슨 서류가 이렇게 많아?”
“그냥 회의 가결안들을 정리한 거랑 이것저것. 그나마 아직까지는 보고서만 검토하는 정도라서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야. 지금 진짜 고생하는 건 형님과 클모어에 있는 누님일 거야. 전쟁 예산이며 뭐며 산더미처럼 몰려들고 있을 테니까.”
“흠, 이건 그 형님이 보낸 거네?”
마침 눈앞에 놓여 있는 문서 말미에 공작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무심코 집어 들어보다가 실수했다는 생각이 스쳤다. 기밀문서일지도 모르는데 내가 함부로 들여다봐선 안 될 거다. 나는 황급히 종이를 다시 내려놓았다.
“미안, 이사나. 나도 모르게…….”
“응? 뭐가?”
“문서 내용, 볼 뻔해서.”
“그게 왜? 그냥 봐도 괜찮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엘인데.”
아무렇지 않게 돌아오는 대답에 숨이 저절로 멈췄다. 나는 잠시간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어…… 그냥 봐도 된다고?”
“응.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엘이 봐서 안 되는 게 어디 있겠어. 그게 사적인 것이든, 공적인 것이든. 내 허락 같은 거 없어도 보고 싶은 건 전부 다 봐도 돼.”
“그, 그래도 돼?”
“당연하지. 엘이잖아.”
“…….”
“엘?”
“아…… 아냐. 아무것도.”
얼른 웃어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타인의 것이 내게 그냥 용인된다는 것. 일전의 세상에서는 꿈도 꿔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곳에선 내게 그냥 주어지는 권한 같은 건 없었다. 형제들에게는 당연히 허가되는 거실도, 그들이 제 방처럼 들락거리는 부엌과 부모님의 침실도. 심지어 욕실과 화장실까지.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감히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금역들뿐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몹시 생경하게 느껴졌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한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와는 처한 입장도 상황도 달라지긴 했지만 내 본질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이런 내가 누군가로부터 무한한 신뢰를 받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감격스러웠다. 단지 인간 세상을 여행해 보고 싶어서 바랐던 소환 계약이었는데 이렇게 따스한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속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을 감추기 위해 나는 얼른 문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령왕이라 표정을 능숙하게 갈무리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내가 인간이었다면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개졌을 게 뻔했다.
“어, 으음. 중군으로 돌아오라는 내용이구나. 원래는 이쪽에 잠시만 들리려고 했던 거였지?”
“응. 생각보다 이쪽 일정이 길어지니까 형님이 불안해진 모양이야. 요즘엔 중군 쪽도 돌발 습격이 꽤 잦은 것 같거든. 테일즈 성 방벽이 단단해서 큰 피해는 없는 것 같지만.”
“중군은 아직도 테일즈 성에 있는 거야? 그럼 합류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나?”
“이쪽도 진군이 느려져서 문제는 없을 것 같아.”
“아, 하긴.”
느려지다 뿐인가. 최근엔 거의 멈춰 있는 거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 탓에 며칠 안으로 중군에게 따라잡힐 거라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오히려 그쪽까지 덩달아 느려졌다고 하니 그럴 일은 없을 모양이다. 결국 전체적으로 일정 자체가 늦춰지는 셈이다. 전쟁이란 게 본래 계획한 일정에 맞아 떨어지는 경우가 더 드문 편이니 딱히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긴 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으려니 갑자기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뭔가 놓치고 있는 것 같은…….’
“그런데 엘, 내게 무슨 할 말 있는 거 아니었어? 그냥 놀러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응? 아……!”
무언가가 떠오를 것 같았는데 때마침 들려오는 목소리가 생각을 가로막았다. 그러고 보니 잠시 넋을 잃는 바람에 이곳에 찾아온 용건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본래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있잖아, 이사나. 아카데미 학생이면 우수한 인재라는 말이겠지?”
“음, 아무래도 그렇지. 보통 수재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니까.”
“그럼 그 인재들 중에서 일자리를 찾는 사람이 있다면 어때? 성격도 좋고 이상도 매우 바람직한데, 본인의 나라에서는 뜻을 펼칠 수 없는 상황이라거나.”
“흠, 가능하다면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을 것 같아. 나랑 맞는 사람이면 곁에 두고 하려는 일들을 다 지원해 줄 수도 있을 거고.”
“역시 그렇지!?”
“응, 근데 엘이 말하는 사람이 혹시 아셀이란 사람이야?”
“헉! 그걸 어떻게 알았어?”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눈이 부릅떠졌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운을 떼어보려는 참인데 이렇게 곧바로 알아차리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당황한 나를 보며 이사나는 당연한 질문을 한다는 듯이 웃었다.
“그거야, 엘이 요즘 접할 만한 사람 중에서 아카데미 학생은 황태자와 그 보좌관밖에 없잖아. 설마 황태자는 아닐 테니까 보좌관 쪽이겠거니 했지.”
“허어…….”
“그리고 아셀이란 사람은 유니콘의 후예랬지? 엘이 신경 쓸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느긋하게 답하는 그에게서 평소 접해 보지 못한 위엄이 느껴졌다. 소년의 성장은 무섭다더니(?) 원래 이사나가 이렇게 눈치가 빠른 편이었나 싶다. 아니면 내가 너무 파악하기 쉬운 건가? 혼란스러운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이사나가 질문을 건네 왔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진로 고민을 하고 있어? 좀 의외인걸. 황태자가 그를 꽤나 아낀다고 봤거든. 내가 잘못 판단했던 건가?”
“으응? 어, 아냐. 그건 네 판단이 맞아. 황태자 쪽에선 아셀을 쭉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
“그럼 좀 이해가 안 되는데. 이변이 없는 한 그 황태자가 카터스 제국의 차기 황제가 된다는 건 기정사실이야. 탄탄대로인 길을 눈앞에 두고 망설이는 이유가 있어?”
“그게 생각만큼 탄탄대로는 아닌가 봐. 유니콘은 평범한 사람이 볼 수 없는 걸 보잖아? 아셀도 그렇거든. 지금은 제어할 수 있게 됐지만 예전엔 그러지 못해서 그동안 여러 가지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
“흐음. 그렇구나. 대강 어떤 사정인지는 알겠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이사나는 그대로 생각에 잠겨 들었다. 제법 흥미가 생겼는지 꽤 진지하게 숙고하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이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워 보여서 나는 또 놀라야 했다.
항상 수줍은 어린아이 같기만 하더니, 언제부터인가 그는 황제의 얼굴을 하는 날이 더 많아지고 있었다. 갑자기 훌쩍 커버린 기분이랄까. 그러고 보니 그 사이 키도 더 크고 어깨도 넓어졌다. 골격도 많이 단단해졌고, 전에는 없던 근육도 붙었다. 예전엔 어디를 가도 나보다 동생처럼 보였는데 이젠 형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미처 알아보지 못한 차이가 제대로 살펴보니 확실하게 보였다. 지금까지 몰랐던 게 이상했을 만큼.
“이사나. 너 키가 더 컸네.”
“어, 그런가? 안 그래도 요즘 다리가 좀 아팠어.”
반가운 화제였는지 이사나의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이런 모습은 또 영락없는 소년이라 나는 피식 웃었다.
“성장통인가 보다. 이런 속도면 라피스 키도 금방 따라잡겠는걸?”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난 많이 크고 싶거든. 적어도 아버님만큼은 컸으면 좋겠어.”
“아버지 키가 몇이셨는데?”
“정확히는 모르지만 라피스 님보다 더 크셨던 것 같아. 그런데 아버님은 어릴 때부터 풍채가 좋으셨다고 했거든. 그에 비해서 나는 작은 편이라…….”
“뭐, 지금 잘 자라는 걸 보면 괜찮을 것 같은데?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응. 고마워, 엘.”
언제나처럼 부드럽게 웃는 얼굴도 분위기가 한층 깊어지니 예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와 닿았다. 확실히 그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보다 더 많이 자라도 내가 그를 동생 취급하고 과보호하는 건 변하지 않을 것 같지만,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자중해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게 몹시 흐뭇하게 여겨지면서도 아주 조금은 섭섭했다.
* * *
아셀과 이사나의 관계는 이후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서로 두드러지게 관심을 표하는 일도 없었고, 이전보다 특별히 접점이 더 늘어나지도 않았다. 어차피 나는 추천을 한 것일 뿐 결정은 전적으로 그들이 내려야 할 몫이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까, 서로 의식할 계기를 마련해 준 것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별다른 진전이 없는 걸 딱히 아쉽게 여기진 않았다.
그런데 사실은 이미 그때부터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이른 아침부터 자잘한 소음이 들려 왔다. 나가 보니 진영 앞으로 몇백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모두 무장하지 않은 일반인들이었다.
“저기, 무슨 일이에요? 저 사람들은 누구죠?”
가까운 곳에 있던 병사를 붙잡고 물었더니 그가 순순히 상황을 알려주었다.
“근방에 있던 난민들입니다. 이곳에 황제군이 주둔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모양입니다.”
“아.”
대강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는 금방 파악됐다.
공성에서 패전하는 일이 반복되자 대공군은 악수를 쓰기 시작했다. 황제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진로 안에 있는 마을이란 마을의 곳간과 식량고를 모두 짓밟고 불태워서 아무도 쓰지 못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그 탓에 기존 마을에서 살던 주민들이 대거 쫓겨나 난민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그렇게 발생한 난민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황제군을 찾아오곤 했다. 군대 때문에 잃은 식량을 군대로부터 구해야 하는 게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으나 그들의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전쟁 중에 꾸준히 식량을 보급하고 있는 곳은 군대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때마다 황제군은 항상 곤경에 빠졌다. 굶주린 난민들은 질서 없이 몰려들 때가 많았고, 규모와 형태도 일정하지 못했다. 황제군은 최대한 그들을 수용하려고 했지만 항상 통제가 잘 되지 않았다. 군대가 써야 할 식량을 전부 내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늘 적정한 수준을 정해야 했는데 그것 역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난민이 찾아오는 날은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는 날이나 다름없었다. 그날이 바로 오늘인 듯했다.
‘오늘도 정신없겠네.’
심지어 이번에 몰려온 난민들은 지금까지 중에서 규모가 가장 컸다. 한 차례 거대한 폭풍이 일겠구나, 내심 혀를 찬 후 나는 상황을 살펴볼 겸 근처를 기웃거렸다. 그런 나를 맞이한 건 생각보다 꽤 정돈되어 있는 쾌적한 현장이었다. 당장 시장통을 방불케 하는 대규모의 아비규환이 일어나 있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 다들 질서 있게 줄을 잘 맞춰 서 있었다. 이게 웬일인가 했더니 병사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현장을 지휘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가만히 지켜보니 그저 순서대로 줄만 세우는 것이 아니었다. 두서없이 섞인 집단을 특정 기준에 맞춰 분리하고, 그 안에서 또 세분화해서 체계적으로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들 틈에서 의외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아셀?”
“아! 엘 님, 나오셨습니까?”
한창 병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아셀이 날 발견하고 방긋 웃었다. 내가 알리사의 호위라는 걸 알아본 자들도 정중하게 경례해 왔다. 마주 경례해 준 다음 나는 아셀에게 얼른 다가섰다.
“여기서 뭐 해요?”
“아아,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곤란을 겪으시는 것 같기에 조언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줄 세우게 한 게 아셀 생각이었어요?”
“이렇게 하면 좀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싶어서요.”
“허어……?”
“이분 정말 굉장합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이분 말씀대로 하니까 금방 질서가 잡히지 뭡니까?”
곁에 있던 병사가 자기 일을 자랑하듯이 말했다. 벌써 꽤 친해졌는지 아셀을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친근했다.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셀이 넉살이 좋아 사람들과 금방 친해지는 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왠지 그들 사이에선 그보다 좀 더 깊은 유대감 같은 게 느껴졌다. 적어도 오늘 처음 말을 섞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알고 보니 요사이 아셀이 진영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병사들의 일을 돕고 있다는 것 같았다. 원래 아셀은 외부인이라는 입장을 의식해서인지 이곳의 사정에는 어떠한 관심도 보이지 않았었다. 사람들과 두루 친하게 어울려도 보이지 않는 선을 두고 거리를 지켰다. 그가 어떤 식으로든 이쪽 일에 관여하는 건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갑자기 달라진 태도 변화가 무엇 때문인지 모를 수가 없었기에 기대심이 차올랐다.
“나쁘지 않군요. 무슨 기준으로 나눈 겁니까?”
그때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본 곳엔 무장한 기사들을 대동한 금발의 소년이 서 있었다. 이사나와 친위대들이었다. 그 또한 난민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상황 파악을 위해 나와 본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등장에 주위가 술렁거렸다. 아셀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으나 곧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와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