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3화
“휘유. 알리사 님의 인기는 볼 때마다 놀랍네요. 이렇게 되면 중군으로 빠지는 것도 힘들긴 하시겠어요.”
아셀이 감탄하며 중얼거린 말에 곁에 있던 라온휘젠 황태자가 말없이 눈을 부라렸다. 그가 이곳 분위기를 헤아려 자중하는 것과는 반대로, 일행들(특히 아셀)에게서 그의 기분은 별로 배려받지 못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는 표정이 역력한 얼굴을 앞에 두고도 아셀은 기죽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잖습니까. 억지로 묶어둔 것도 아니고, 본인의 참전 의지가 확고하신데요. 사람들의 믿음과 신뢰를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겠죠. 아직 어려도 책임감이 남다른 분이세요. 역사에 기록된 반려성들의 행적을 봐도 모두 어릴 때부터 남다른 기재를 발휘하셨죠. 평소 전하께서 바라시던, 실로 그린 듯한 반려성 아닙니까?”
“……나도 알고 있다. 반려성의 정계 활동을 나쁘게 보진 않아. 이게 그녀가 태어난 본국에서의 활동이었다면 나도 문제 삼지 않았을 거다.”
“뭐, 알리사 님은 이미 여기서 작위도 받으신 것 같던데요. 그럼 이미 이 제국 사람이라고 쳐도……아아, 알겠습니다. 잘 알겠으니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무서워서 무슨 말씀도 못 드리겠네.”
곧바로 혀를 내두르는 아셀을 라온휘젠 황태자가 지긋이 응시했다. 그 눈빛에 서려 있는 추궁의 기색을 읽은 아셀이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아셀, 너. 요즘 이곳에 지나치게 호의적이 된 것 같은데. 내 기분 탓인가?”
“제가 그랬습니까? 뭐, 좋은 사람들을 만났으니까요. 그리고 호의적이 되면 좀 어떻습니까. 적국도 아닌데요.”
“적이 될 수도 있는 나라지.”
“헉! 제정신이십니까? 누가 들으면 어쩌시려고요!”
기겁한 아셀이 냉큼 두 손으로 라온휘젠의 입을 틀어막았다. 일국의 태자를 대하는 것치고는 꽤 거침없는 행동이었지만 하는 쪽도 당하는(?) 쪽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심지어 다른 수행원들도 다들 그러려니 하는 걸 보니 한두 번 있는 일들이 아닌 모양이었다.
“조심 좀 해주십시오. 저희는 배려를 받아 이곳에 있는 겁니다. 내전이 한창인 군대에 타국의 손님이 눌러앉아 있다니,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 아무도 우리를 나쁘게 대하지 않아요. 이사나 폐하가 그만큼 신경 써 주시고 계신 거잖습니까. 호의에 굳이 먹칠을 하실 건 뭡니까?”
“……아라드었으이까 이어 이워(알아들었으니까 이거 치워).”
오래 그러고 있을 생각은 없었는지 아셀은 바로 손을 떼어냈다. 황태자는 매우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대체 뭐가 문제지?”
“뭐가 말입니까?”
“아셀, 넌 내 보좌관이야.”
“……정확히는 임시 보좌관이죠. 아카데미에 있을 동안만 한시적인 보좌니까요.”
“졸업한 이후에도 달라지는 건 없어. 내가 궁으로 돌아갈 땐 너도 함께일 거다.”
“그건 태자 전하의 희망 사항이고요. 황궁에 제 소문이 어떻게 나 있는지 다 아시잖습니까. 황태자의 측근에 정신병자가 있다는 말 들으시려고요?”
“병증은 이제 다 나았잖아. 많이 좋아졌다고 들었는데? 그럼 된 거 아닌가?”
뭐가 문제냐는 태도에 아셀의 얼굴이 잠시 굳어졌다. 그는 복잡한 얼굴을 했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건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건 제가 그런 의혹을 받는 사람이라는 거죠. 황궁에서 평판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시는 분이 왜 이러십니까. 심지어 저는 귀족도 아닌 평민입니다. 지금이야 학창 시절의 한때로 치부하니까 내버려 두시는 것뿐이지. 절 정식으로 곁에 두는 걸 폐하께서 가만히 두고 보시겠습니까?”
“폐하는 상관없어. 내게 필요한 사람은 내가 정할 거다.”
“정말 못 말릴 고집이네요. 그럼 이것도 알아두십시오. 제가 있을 곳도 제가 정합니다.”
“아셀, 너…….”
“전하, 보는 눈이 많습니다. 다음에 말씀하시죠.”
한창 당겨진 실처럼 팽팽해진 두 사람 사이에 다른 이가 끼어들었다. 둘의 분위기가 험악해짐에 따라 조마조마한 시선을 보내고 있던 세리엄이었다. 그 말에 얌전히 입을 다문 황태자가 잠시간 아셀을 노려보았다. ‘나중에 두고 보자.’ 그 눈빛에 담긴 의미가 멀리서 지켜보는 내게까지 선명히 와 닿았다. 그리고 아셀은 이번에도 시선을 회피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 고개를 돌리던 아셀이 나를 발견했다.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자 잠시 멍하게 있던 얼굴이 뭔가를 깨달은 듯 급격히 굳어지더니 천천히 창백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가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서둘러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을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에, 엘 님.”
“네. 왜요, 아셀?”
“혹시 저희를 계속 보고 계셨습니까? 언제부터 지켜보신 건지 여쭤 봐도 됩니까?”
“아셀이 알리사를 보면서 휘파람 불 때부터요?”
“……처음부터 보셨다는 말씀이시군요. 저희가 나눈 대화도 다 들으셨다는 말씀이시구요.”
“미안해요. 딱히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이 정도 거리는 아무리 작게 말해도 들려서 어쩔 수 없네요.”
“대체 청력이 얼마나 좋으신 겁니까…….”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리면서도 그는 딱히 불쾌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워낙 기상천외한(그의 입장에서는) 일들을 많이 보여줘서 그런가. 이미 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하기를 포기한 것 같기도 했다.
* * *
“황태자가 아셀을 많이 아끼는 것 같던데요.”
“뭐어. 겉으로는 딱딱해 보여도 사실은 잔정이 많으신 분입니다. 제 사람들을 잘 챙기려고 하시죠.”
“그런데 아셀은 그게 부담스럽고요?”
장난스럽게 건넨 말에 아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던 그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엘 님께도 제가 그렇게 보였습니까?”
“지금 황태자의 곁에 있는 것도 자의가 아닌 것 같았어요.”
“으음, 그 정도입니까? 그렇지는 않은데……. 제 의지로 보좌하고 있는 건 맞습니다. 아카데미 생이긴 하지만 전 신분도 낮고, 정신 병력까지 있어서 좋은 일자리가 들어올 가능성이 희박하거든요. 하물며 태자 전하를 곁에서 모시다니 과분한 영예죠. 무척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흠, 그냥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그…… 좋은 기회가 왔는데 굳이 거절할 사람도 없잖습니까?”
“뭐, 그것도 그렇네요. 그런데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틀리지 않아요?”
“네?”
“아셀, 정신병 아니잖아요.”
숨을 크게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나로선 당연한 지적을 한 건데 아셀에겐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난 내내 증거를 확인하고 경험했으면서도 아직 실감하기에 부족했던 걸까. 그는 불시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얼굴을 했다.
“뭐, 원래 나는 정신 질환이 있어도 치료만 잘 받으면 괜찮다고 생각하긴 하는데요. 아셀은 애초에 그냥 정신병이 아니에요. 본인도 이제 전부 알고 있잖아요. 왜 스스로 질환이 있는 것처럼 말해요?”
“어, 으음, 그래도 주위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으니까요.”
“그래서 아셀도 그런 취급에 그냥 순응하려고요? 사실이 아닌데도? 그건 이상하지 않아요?”
“…….”
“그러지 말아요. 당당하게 행동해요. 혹시 누가 뭐라고 그러면 상대를 무식한 사람 취급해요. 그쪽이 뭘 몰라서 그러는 거니까.”
“……그래도 되는 걸까요.”
“당연하죠.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아까 전에 황태자가 병증이 다 낫지 않았냐고 했을 때 왜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나은 게 아니라 애초에 아픈 게 아니었다고 정정해 줬어야죠.”
아셀이 다시금 숨을 크게 삼켰다. 성가신 잔소리에 불쾌해진 건가 했는데 표정을 보니 그건 아니었다. 나를 응시하는 그는 무척 후련하게 웃고 있었다.
“엘 님은 정말 여러 가지로 절 놀라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뭐가요?”
“저, 실은 그때 그렇게 말하고 싶었었거든요. 제 마음 속을 들여다보신 건가 해서 찔끔했습니다.”
“푸하핫! 그랬어요?”
“민망하니 너무 웃지 마십시오. 노파심에 묻는 건데, 설마 속마음을 읽는 능력도 있으신 건 아니죠?”
“안심해요. 그런 능력은 없으니까.”
내 가족한테는 있지만.
뒷말을 삼키며 씩 웃어 주자 아셀은 노골적으로 안도감을 드러냈다. 나중에 트로웰을 만나게 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궁금해질 만큼, 짓궂은 기대심리를 자극하는 표정이었다.
“아셀은 꿈이 뭐예요?”
“꿈이요?”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에 하고 싶은 일이요. 황태자의 보좌관은 임시직이라면서요. 따로 정해둔 진로가 있나요?”
“음, 저는 그냥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을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정책은 없겠지만, 적어도 불합리한 상황을 겪는 사람들이 갈수록 줄어들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 약자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런 나라를 만들어 가는 일에 일조하고 싶습니다.”
“멋지네요. 그럼 정계로 가긴 해야겠어요. 지금처럼 황태자와 계속 함께하는 게 좋지 않아요? 황태자 쪽에서도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는데.”
“글쎄요. 그게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긴 합니다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제국엔 이미 훌륭한 대신들이 많거든요. 제가 그들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희미하게 웃는 그의 얼굴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수많은 복잡한 감정을 속으로 삼킨 사람의 얼굴이었다. 황태자와 대화할 때도 꼭 저런 표정을 지었었다. 대답은 겸손하게 했지만 실상 그는 거대한 벽 앞에 마주 서 있는 걸지도 몰랐다. 오직 그만에게만 적용되는 높은 현실의 벽이.
그러고 보니 그를 곁에 둔다는 이유만으로 황태자의 평판을 우려할 정도였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에 대한 소문이 나쁜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 스스로 당당해진다 해도 사람들 사이에 들어찬 선입견을 부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쌓아온 선입견이라면 더욱더. 언젠가는 나아지겠지만 그때까지는 그가 향하는 곳마다 가시밭길이 펼쳐질 거라는 게 훤히 보였다. 그 전에 아셀이 먼저 지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불쑥 묻고 말았다.
“거기서 할 일이 없으면 이쪽은 어때요?”
“예?”
“여기 스왈트 제국이요. 이사나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태산이거든요. 지금도 정신없는 상황이지만 전쟁이 끝나면 더 바빠지질 거예요. 곁에서 도와줄 사람이 많이 필요해요. 서로 나이도 비슷하고, 내가 보기엔 둘이 꽤 잘 맞을 것 같은데.”
“아…….”
충동적으로 건네긴 했는데 막상 말을 뱉고 보니 정말 나쁘지 않았다. 황궁에 돌아가게 되면 이사나는 곁에 둘 자와 쳐낼 자를 구별해야 한다. 이미 중앙 귀족 대부분이 대공에게 넘어가 있는 상황이니 앞으로 새롭게 시작할 제국에서 그의 곁에 남을 수 있는 자는 몇 되지 않을 거다. 비워질 공백만큼 그 자리를 채워줄 새로운 인재가 있어야 했다. 친위기사들은 좋은 사람들이긴 하지만 정책을 꾸려 가는 부분에서 의지할 수는 없을 거다. 클모어 공작이 열 일 제치고 수도에 머물러 있을 수만도 없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곁에 붙어 그를 도울 수 있는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게 외국에서 온 사람이라도 뭐 어떤가 싶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아셀을 살펴보았다. 아카데미에 다닐 정도면 꽤 수재라는 소리고, 황태자가 눈여겨봤을 정도면 성적도 제법 좋은 것 같다. 저만하면 성품도 무던하니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이상향을 들어봐도 이사나가 바라는 제국에 걸맞은 인재가 될 것 같았다.
‘보면 볼수록 괜찮은데?’
아셀은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심은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제안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내전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재건하는 일에 흥미 없어요?”
그러나 이 말에 눈빛이 반짝이는 것만은 막지 못했다. 자기도 모르게 화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든 그가 이내 화들짝 놀라 빠르게 표정을 수습했다. 내가 기척에 예민해서 그렇지, 평범한 사람은 잘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한순간의 변화였다. 흥미가 생겼으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평온해진 얼굴을 보니 외교를 해도 잘할 것 같았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냥 이런 길도 있다는 거니까 한번 생각은 해봐요. 꼭 태어난 나라에서만 죽을 때까지 살라는 법은 없잖아요. 꿈을 펼치고 싶다면 더 넓게 생각해 봐도 좋지 않겠어요?”
“…….”
수면에 파문이 이는 것처럼, 그의 녹색 눈동자가 천천히 일렁거렸다. 내가 던진 것이 작은 돌인지 커다란 바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어떤 형태로든 감화를 준 것만은 분명했다.
왠지 좋은 예감이 들었다.
* * *
옛말에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아셀과 헤어진 길로 나는 곧장 이사나를 찾아갔다. 손뼉이란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한쪽에 여지를 주었으니 다른 한쪽에도 연결 고리를 만들어 둘 필요가 있었다.
도착했을 때 이사나는 마침 사람들을 물리고 혼자 있는 상태였다. 그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창 일에 열중해 있었다. 발밑에는 이미 검토한 것으로 보이는 서류 더미가 한가득 놓인 채였다. 그럼에도 탁자 위에 아직도 처리하지 못한 수많은 서류들이 쌓여 있었다. 그 모습이 언젠가 엘뤼엔의 궁처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탑처럼 쌓인 서류 더미가 거대한 공간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보기만 해도 숨이 턱하고 막히던 그 아찔한 광경을 말이다. 이런 걸 보면 높은 자리도 정말 아무나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정령왕에겐 문서 작업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야. 속에서 깊은 안도감이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