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2화
혀를 차는 남자, 카류안의 음성에 아쉬움이 짙게 묻어났다. 유카르테는 얼마 전의 상황을 상기했다. 어느 날 카류안이 격렬하게 진노한 적이 있었다. 그가 이성을 잃고 화를 내는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마신에게 봉인되었다가 탈출해 왔을 때도 그렇게 흥분한 상태는 아니었다.
바로 그날이 세르피스가 죽은 날이었다. 그녀가 쓸 만한 수족이긴 했지만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을 정도는 아닐 텐데. 이상할 정도로 감정적이 된 그가 의외라고 생각했었다. 역시나 사정을 알고 보니 다른 이유가 있었다. 새로운 마왕이 나타났다던가. 마신 카노스가 그를 버리고 다른 왕을 세운 것이다.
이미 모든 계획이 발각된 상황이니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다. 카류안이 마왕이란 자리에 딱히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 정도에 만족하는 자였다면 이런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는 새 마왕이 세워졌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유카르테의 시선엔 그가 이상할 정도로 그 부분에 집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 점을 솔직하게 지적할 수는 없었지만.
“서두를 생각은 없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리니 달갑지 않군. 재료의 질을 높여야겠다. 이제부터는 순도 높은 피만 가져와라. 양질의 힘이 깃들어 있는 피로만 말이야.”
“흠, 이능자의 피만 모으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하지만 불순물이 섞인 건 안 돼.”
“……그러니까 이능자 중에서도 조건을 갖춘 걸 찾아야 한다는 거군요. 요즘 감시자들이 늘어 곤란하다고, 바로 조금 전에 말씀드린 걸로 압니다만. 당신께서 제 고초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으시다는 건 아주 잘 알겠습니다. 제게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투덜거리는 유카르테의 말에 카류안은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저렇게 말해도 그가 어떻게든 해낼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는데도 느긋하게 웃기만 하는 카류안을 보며 유카르테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농담이 아닙니다. 마법이든, 검기든, 어릴 때는 이능력이 발현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서 찾아내는 게 어렵단 말입니다. 설령 일찍 능력이 발현하더라도 그 단체의 보호를 받기 때문에 빼돌리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불가능하다는 말은 하지 않는군.”
“그거야, 빈틈이야 어디든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 정도도 노리지 못해서야 감히 대업을 꿈꿀 수 있겠습니까?”
“하하, 역시 넌 마음에 들어.”
“그것참 감사한 말씀이시군요. 마음에 드신 만큼 처우도 개선해 주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물론. 네 노고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지금 고생하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달콤한 포상이 널 기다리고 있을 거다.”
“포상도 좋지만 말입니다…….”
“전하, 카리브디스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때 고요한 공간을 가르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려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문 유카르테는 천천히 열리는 문을 차분한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당연히 잠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 듯,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던 카리브디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시간에 깨어 계셨군요.”
“아아. 잠이 별로 오지 않아서. 무슨 일이지?”
질문을 건네는 유카르테의 표정은 태연했다. 이미 카류안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냄새는 물론 공기의 온도까지, 조금 전까지 그가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유카르테 그 자신조차 꿈을 꾸었다고 여겨질 정도이니 들킬 염려는 할 필요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궁을 경비하는 중에 잠시 돌아보러 들렸을 뿐입니다. 오늘따라…….”
“느낌이 좋지 않아서?”
웃으며 묻는 말에 카리브디스는 머쓱한 얼굴을 했다. 유카르테는 속으로 살짝 혀를 찼다. 기실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누가 소드 마스터 아니랄까 봐 그는 귀신같이 감이 좋았다. 밀회는 항상 모두가 잠든 새벽 중 은밀하게 이뤄지는데도, 그때마다 카리브디스가 약속한 듯이 방문했다.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적의 습격을 우려했을 뿐이지만,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는 유카르테의 입장에서는 마치 일부러 훼방을 놓는 것처럼 느껴져 그리 달갑지 않았다.
“그대는 지나치게 성실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대답하는 점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야.”
무뚝뚝한 남자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카르테는 이마를 짚은 채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짜증이 치밀긴 했지만 그건 곧 어쩔 수 없다는 감정으로 바뀌었다. 혼란과 파국만이 가득한 시대, 그래도 제 편에 서서 충성을 맹세한 우직한 신하였다. 저도 인간인지라 자신을 위하는 사람에겐 관대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혹자는 그런 그를 향해 따르는 개를 예뻐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고 비아냥댔지만, 그게 문제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올곧게 자신을 따르는 존재를 아끼는 것이 뭐가 문제라는 말인가? 어차피 그렇게 비아냥거리는 자도 저와 같은 입장에 서면 별반 다르지 않을 게 분명했다.
“휴식은 제대로 취하고 있는 건가? 잠은? 설마 또 관사에서 대충 지내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요즘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가능한 한 자택으로 귀가하고 있습니다.”
“그래? 좋은 변화로군. 잘된 일이긴 한데, 어쩐 일로 생각을 바꾼 거지? 내가 항상 권했지만 제대로 지킨 적 없었잖아.”
“……기다린다고 해서.”
“뭐? 아아.”
무슨 말이냐고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유카르테는 그 대답 안에서 생략된 존재가 누군지 바로 파악했다. 얼마 전 카리브디스가 양자로 들였다는 소년에 대한 것이리라.
‘아이가 기다리니 저택으로 돌아간다는 건가?’
유카르테는 묘한 시선으로 카리브디스를 바라보았다. 어릴 때부터 곁에 두고 지켜봐 왔기에 그에 대해서 모르는 부분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대부분 그가 알고 있는 모습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소년에 관해서만은 항상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양자로 들인 것도 갑작스러웠는데 생각보다 정을 더 깊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평생 다른 곳에 눈을 돌린 적이 없었건만, 역시 그도 나이가 든 것일까. 가져본 적이 없던 평범한 일상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껏 쉼 없이 내달려오기만 했으니 그럴 만한 시기였다.
딱 한 번 마주쳤을 뿐이지만 아이의 모습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했다. 이름이 레이라고 했던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던 얼굴이 제법 귀엽게 생겼었다. ……그리고 그 주위를 춤추듯 맴돌고 있던 작은 정령의 모습도. 정말이지 여러 가지 의미에서 꽤나 흥미로운 아이였다.
“그래. 그러고 보니 가까운 곳에도 하나 있었지.”
“예?”
“아니, 아무것도.”
돌아보는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피어났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듯한 유카르테의 모습을 보고 카리브디스는 움찔했다.
“파이, 그대는 내 편이지? 나를 위해 모든 걸 다 바칠 수 있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아직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나?”
“……? 네, 물론입니다.”
“그래. 몹시 기쁘군. 하지만 염려하지 마라. 지금의 그대가 나로 인해 무언가를 잃는다면 훗날 몇십 몇백 배로 넘치도록 보상해 줄 테니까.”
“당치…… 않습니다. 그런 걸 바라지는 않습니다.”
“욕심이 없는 건 변하질 않는구나.”
대견한 아이를 칭찬하듯, 유카르테가 웃으며 카리브디스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카리브디스는 다시 움찔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기쁨이나 설렘 따위의 감정으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앞에 서서 곧 다가올 추락을 연상하는, 그런 아찔한 느낌과도 비슷했다.
왜일까. 그와 닿을 땐 늘 따뜻하고 포근한 기분이 들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피부에 닿는 감각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차가운 얼음이 예고 없이 몸 안을 파고든 것 같았다.
겨울이긴 하지만 실내의 온도는 늘 같았다. 혈색이나 호흡이 평소와 다름없는 걸 보면 실제로 그의 체온이 낮아진 것은 아닐 터였다. 그저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탓이리라. 아니, 어쩌면 그동안 어린아이의 뜨거운 체온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최근엔 그보다 레이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으니까. 카리브디스는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가늠해 보았다. 이런 식으로 납득하기 위한 이유를 찾으려는 것 자체가 자신답지 않다는 건 미처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변명을 거듭했다. 아무래도 전시다 보니 요즘 지나치게 예민해진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그저 단순한 착각일 뿐이다. 순간적으로 감각이 어긋나 두뇌가 판단 이상을 일으킨 거다. 처음 이 방문을 열었을 때, 어디선가 피 냄새가 난다고 느꼈던 것처럼.
“…….”
두리번거리려는 충동을 견디느라 목에 힘줄이 섰다. 카리브디스는 복잡한 기분을 속으로 감추며 꾹 움켜쥔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그저, 자신의 착각에 불과해야 했다.
* * *
며칠째 교전이 벌어졌다.
첫 접점은 황제군이 스텔스 영지를 떠나 다시 진군하기 시작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서 일어났다. 그것도 상당히 뜬금없는 방식이었다. 기마병으로만 이뤄진 소수의 부대가 불쑥 나타나더니, 그대로 밀고 들어와 후미를 친 것이다. 그리곤 당황한 황제군이 대열을 정비하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후퇴해서 달아났다. 그 일련의 과정에 들어간 시간이 불과 몇 분밖에 되지 않았다. 신속하게 치고 빠지는 적의 작태에 얼이 빠진 황제군은 추격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처음엔 한 부대의 돌발 행동인가 싶었으나 그게 아니란 건 금방 다시 알게 됐다. 몇 시간 후 똑같은 방식으로 또 다른 부대가 나타나 습격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선두를 노렸고, 마법사와 궁수들을 포함한 원거리 부대의 공격이었다. 그들 부대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가 제대로 대응하기 시작하자 흔적도 없이 달아났다.
그날 이후로 시작된 같은 패턴의 공격이 지금까지 수도 없이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기습이라곤 해도 교전 시간 자체가 워낙 짧았고, 인지한 이후로는 우리 쪽도 충분히 대응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상자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상대는 멈추지 않고 이 무의미한 짓을 계속했다. 아무래도 신경을 예민해지게 만들어 분위기를 흐리려는 목적인가 싶었다.
어떻게 보면 꽤 효과적인 전술이긴 했다. 평범한 인간들의 정찰 범위에는 한계가 있고, 이능력자라고 해도 매시간 능력을 써서 주위를 살피지는 못한다. 언젠가는 반드시 빈틈이 생길 텐데, 이런 실수들이 겹쳐 피해가 속출하면 군 전체의 사기가 크게 떨어질 터였다.
단지 저들이 실수한 게 있다면 이 부대 안에 탈 인간 급의 존재가 여러 명 있다는 사실을 계산하지 못했다는 점이랄까. 특히 내 경우엔 매시간 주위를 살피고 있어도 피로감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이건 내 일부와 같은, 숨 쉬는 거나 다름없는 능력이라 딱히 계약자의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다. 게다가 이 능력을 드러내놓고 활용할 수 있는 적당한 핑계거리도 있었다. 알리사가 예지력으로 읽어냈다고 하면 되니까.
처음엔 긴가민가해도 정확하게 맞히는 일이 반복되면 믿고 안심하게 된다. 습격 방향은 물론, 부대의 형식, 숫자와 규모까지 알아맞힌다면 더욱더 그렇다. 그래서 수차례의 교전에도 불구하고 황제군의 분위기는 내내 평온했다. 어느 정도 상황에 적응하고 나서는 그들의 습격을 역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적들이 오는 쪽 방향에 따로 매복한 부대를 두고 양쪽 방향에서 친다거나, 반대로 습격해 오기 전에 앞서 기습을 가하는 식이었다. 덕분에 우리 쪽 피해는 미미한 반면, 적들의 피해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어느 면에서 봐도 상대만 헛발질하는 꼴이었다.
“후퇴! 후퇴해라!”
불리해진 전황을 느낀 적들이 신속하게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번 교전은 두 차례 연속으로 이어졌다. 1차 습격을 막아내기 무섭게 다른 방향에서 제2차 습격이 일어난 것이다. 아무래도 습격 간격을 좁혀 허를 찌르려는 작전이었던 것 같은데, 유감스럽게도 이 또한 이미 파악해 둔 바라 그다지 큰 타격은 없었다. 적들은 위풍당당하게 달려들던 기세 그대로 고스란히 당하기만 했다.
“추격하지 마라! 그냥 달아나도록 내버려 둬!”
기세를 타 쫓아가려는 병사들을 지휘관들이 진정시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사방이 아직 혼란한 가운데 알리사가 나를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어때?’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질문을 읽은 나는 대답으로 고개를 살짝 저었다. 우리끼리의 은밀한 신호를 받은 그녀가 옆에 있던 마커스 백작에게 뭔가 말을 전달했다. 아마 이제 더는 공격이 없을 거라는 이야기일 터였다. 예상대로 마커스 백작이 모두를 향해 소리쳤다.
“적들이 완전히 물러갔다! 경계를 풀어도 좋다!”
“와아아!”
그제야 완전히 안심한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단숨에 긴장이 풀리면서 날카로웠던 공기도 한층 차분해졌다. 사방에서 알리사를 향한 찬가가 울려 퍼지는 건 이미 일상이 된 일이라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스피어의 딸이시여!”
“알리사 님!”
여기저기서 연호하는 소리에 알리사도 익숙하게 손을 들어 화답했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는 곳마다 환성이 더욱 커지는 게, 마치 유명한 아이돌의 콘서트를 지켜보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처음 이런 현장을 목격했을 때 이사나가 당황하던 얼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서면으로 보고를 받아왔으니 이곳의 분위기는 대충은 알고 있었겠지만, 실제로 확인한 기분은 사뭇 다른 듯했다.
그러니 얼결에 합류한 라온휘젠 황태자 일행이 받은 충격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틈만 나면 알리사에게 접근해 안전한 장소를 권하던 황태자는 병사들 사이에서 그녀의 인기를 실감한 이후로는 말을 아끼게 됐다. 완전히 물러난 건 아니었지만 분위기를 파악하는 눈치 정도는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