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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301화 (301/608)

제301화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부는 날이었다. 세찬 공기가 지날 때마다 들판은 온통 몸살을 앓았다. 고개조차 제대로 기울이지 못하는 풀꽃은 거대한 횡포에 차마 맞서지 못하고 납작하게 엎드리는 쪽을 택했다.

널찍한 언덕에 서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던 남자는 풀꽃의 꼴이 꼭 지금의 저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굴욕적이지는 않았다. 명예도 권력도, 스스로 원했던 건 하나도 없었다. 그가 바랐던 건 처음부터 온전한 평화였다.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너그럽고 고요하게 살고 싶었다. 단지 그것을 가장 이해해 주길 바란 사람에게서 이해받지 못했을 뿐이다.

흉포해진 바람은 집요하게 그를 할퀴려 달려들었다. 그 거친 풍랑 안에서 저를 구해내기 위해, 그의 소중한 친우가 무엇을 각오했는지 알고 있었다. 고작 엎드리는 것으로 모두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면 오히려 싸게 먹히는 일이었다.

“형님!”

멀찍이서 들려오는 음성에 남자는 빙긋 웃었다. 한참 떨어진 언덕 아래, 금발의 소년이 힘차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세즈.”

“또 이런 곳에 계셨어요?”

걸을 때마다 소년은 치렁치렁한 의복에 발이 걸려 휘청거렸다. 발등까지 덮는 하얀색 의상은 활동성을 몹시 제한한 형태로, 실외에서는 특히 거추장스러웠다. 남자도 소년과 같은 의복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뒤뚱거리는 걸음을 우습게 여기지 못했다.

“오늘 식사에서도 독이 나왔다지요? 죄송해요. 제가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별말을 다 하는구나. 네 탓이 아니다.”

“그래도 벌써 다섯 번째잖아요. 정말 너무해요. 왜 매번 형님을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거래요? 형님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윗대로부터 쌓아 둔 감정이 많아서 그런 거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분을 너무 원망하지 말거라.”

“형님은 항상 그렇게 느긋한 말씀만 하신다니까요. 이렇게 맹한 분이라는 걸 그분이 얼른 알아보셔야 하는데. 그럼 지금까지 애썼던 게 허무해서 고개를 들고 다니지도 못하실걸요.”

노골적으로 빈정거리는 말에도 기분 상하지 않았다. 소년이 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미천한 모친의 몸에서 가장 약하게 태어난 막내. 그렇기에 더 애틋하고 마음이 쓰였다. 동복의 형제만큼, 아니, 그보다도 더 아끼며 챙겨 주었다. 소년 또한 자신을 귀여워하는 형을 따르고 신뢰했다. 그가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소년은 기분 좋은 얼굴로 응석을 피웠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이 시리고 황량한 곳에서 유일한 한편. 어느 순간일지라도 선뜻 뒤를 맡길 수 있는 존재였다.

그래서 소년이 건네주는 과일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

삼키는 순간 곧바로 속이 타들어가는 고통이 느껴졌다. 울컥 터져 나오는 핏물을 한 손으로 받아낸 채, 그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주위에서는 앓는 소리가 가득했다. 그와 함께 과일을 나눠 먹은 자들이 모두 똑같은 증상을 호소하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혼란한 가운데 유일하게 멀쩡히 서 있는 건 그가 아끼는 소년뿐이었다. 소년은 고요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형님.”

“세즈, 너…….”

몸에서 힘이 빠르게 빠져나갔다. 비틀거리며 주저앉는 중에도 그는 소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독한 통증이 온몸을 뒤덮고 있는데 이상하리만치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소년의 배신을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많이 놀라셨죠? 실은 그동안 형님의 음식에 독을 탔던 것도 저였어요. 가급적이면 누가 한 일인지 모르시게 하고 싶었는데 매번 운 좋게 피해가시더라고요. 결국 이렇게 되고 마네요.”

“네가 어째서…….”

“아시면서 물으시는군요.”

그 말에 포함된 의미를 해석하지 못할 만큼 그는 아둔하지 않았다. 물론 파악했다고 해서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의문을 읽어낸 듯, 소년이 서글프게 웃었다.

“저만 죽는 건 괜찮아요. 하지만 제 사람들을 지켜야 했어요. 그분의 뜻에 따른다는 증거를 보여야 했죠.”

몰랐던 사실에 남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소년에겐 별다른 지지 세력도, 기반도 없었다. 자신에게나 ‘그’에게나 어느 면에서도 보탬이 되거나 위협이 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 역시 소년을 측은하게 여기며 아낀다고 알고 있었다. 그가 시린 칼을 뽑아 드는 건 늘 자신을 향할 때뿐이었다. 그의 성정이라면 소년만큼은 내버려 둘 줄 알았다. 건드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

“그분은 형님과 관계된 일이라면 한없이 잔인해질 수 있는 분이죠.”

그 의문을 읽은 듯이 소년이 대답했다. 탓하는 어조는 아니었지만 남자에게는 그것이 원망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어째서 그 점을 알아주지 않았냐고. 그가 미리 알아챘더라면 이 모든 비극을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걱정하지 마세요, 형님. 이제 모든 게 끝날 거예요.”

이윽고 소년이 장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눈앞에 드리워지는 새파란 칼날을 남자는 내심 허탈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평생 무위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소년이었건만, 검을 쥔 폼이 어색하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검술을 익힌 숙련자에게서나 볼 수 있는 여유가 소년에게서도 느껴졌다.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를 이루고 있던 것들이 조금씩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 자신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못했던가. 보이는 일부에 안주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었던 걸까.

‘죽어도 할 말이 없군.’

자신만 굽히면 된다고 생각했다. 너무 안이한 판단이었다. 결국 그 안일함 때문에 주변의 모두가 비극을 택했다. 평생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천신처럼 빛나던 친우는 그를 살리기 위해 심판이 기다리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이슬처럼 순결하고 깨끗했던 소년은 이제 그 손에 형제의 피를 묻힐 것이다. 자신이 다른 길을 택했다면, 어쩌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인지도 몰랐다. 이제 와서는 무엇 하나 의미 없는 생각일 뿐이었지만.

소년이 점점 가까워졌다. 평소와 완전히 다른 표정, 서늘한 살기를 느끼면서도 그는 눈을 떼지 않았다. 저항하거나 몸을 피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중독된 상태에선 멀리 달아나지도 못할 터였다. 무엇보다 소년에게 보이는 마지막 모습을 그런 볼썽사나운 형태로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당당하게 죽음을 맞으리라. 그가 그렇게 각오를 다졌을 때였다. 소년과의 거리가 이제 호흡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몸을 굽힌 소년은 그 검을 찔러 넣는 대신 손잡이를 돌려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반대로 돌아간 검날이 자연스럽게 소년 쪽을 향했다.

“……무슨……!”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한 남자가 눈을 부릅떴다. 명석한 두뇌는 이번에도 그 의미를 단번에 파악했다. 그러나 그가 행동을 옮기는 것보다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 더 빨랐다. 소년이 그에게 손잡이를 쥐어준 상태 그대로 스스로의 몸에 검을 찔러 넣은 것이다.

푸욱!

피부가 꿰뚫리는 소리와 함께 살을 파고드는 뭉툭한 감각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순식간에 뚫고 들어간 검 끝이 소년의 등 뒤에서 튀어나왔다. 경악한 남자가 눈을 부릅뜨는 것과 동시에 몸을 굽힌 소년이 각혈했다.

“세즈!”

그의 앞에서 소년의 몸이 급격하게 허물어졌다. 남자는 황급히 팔을 뻗어 소년을 받아냈다. 필사적으로 끌어안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신뢰하던 소년이 그에게 독을 먹였고, 배신한 줄 알았던 소년이 이번엔 제 몸을 찔렀다. 돌아가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굳어 있는 그와는 달리 창백한 얼굴의 소년은 매우 평온해 보였다. 그가 손을 들어 제 형제의 뺨을 쓸었다. 그게 뺨 위에 묻어 있는 제 피를 닦아내는 행위였다는 걸, 남자는 조금 늦게 깨달았다. 눈이 마주치자 소년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것……봐요, 형님. 금방……끝나는 거 맞죠?”

“세즈…….”

“형님이 드신 독…… 한 시간 안에 해독제만 먹으면……괜찮아져요. 제 주머니……허억! 주, 주머니…… 안에 있어요.”

“……! 무슨!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세즈, 왜! 대체 왜 이런 짓을!”

“이렇게 해야…… 크윽, 제가…… 형님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것처럼 보일 테니까요.”

“……!”

“죄송……죄송해요, 형님. 형님과 모두를……살릴 수 있는 방법이……이런 것밖에……떠오르지 않아서…….”

맑게 웃는 소년의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하얗게 질려 있던 안색이 파리해지면서, 눈동자에 점차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 현상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사신의 낫이 소년을 향해 기울어지고 있었다.

“안 돼. 세즈, 안 돼.”

남자는 식어가는 소년의 손을 부여잡고 머리를 흔들었다. 태어나 지금 이 순간만큼 무언가를 간절하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 날 때부터 고귀한 혈통. 모두를 지배하는 위치에 있는 신분. 그 무릎은 고귀한 것이라 신과 황제 앞이 아니고서는 꿇지 말아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소년이 살아날 수 있다면 시궁창을 기어 다니는 벌레에게라도 엎드려 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아, 마신이여, 죽어가는 당신의 종을 돌아보소서! 약해서 이용당할 수밖에 없었던 제 동생을 불쌍히 여겨 살려주소서!

“해독제…… 꼭 드세요. 형님은…… 살아남으셔야 해요. 바, 반드시……저를, 위해서라도…….”

“안 돼, 세즈! 제발!”

“못난 아우를……용서……하시길.”

소년의 호흡이 잦아들었다. 천천히 감긴 눈에서 도르륵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남자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제 품 안에서 싸늘하게 식어 가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붙잡고 흔들어도,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다시 그 눈이 떠지는 일은 없었다.

파사삭-

그리고 그를 이루고 있던 것들도 완전히 부서져 흩어졌다.

“허억!”

꺼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비명에 가까운 호흡이 터져 나왔다. 두 눈을 부릅뜬 그를 가장 먼저 반긴 건 새카만 어둠이었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한 공간에 겨울 특유의 시린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창문 밖에 비치는 희미한 달빛을 보고서야 그는 현실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쁜 꿈을 꾼 모양이지?”

“…….”

아니, 어쩌면 이 또한 악몽의 연속일지도 모르지.

귓가에 들려오는 음성에 남자―유카르테는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식은땀을 많이 흘렸는지 축축하게 묻어나는 물기가 기분 나빴다. 자주 겪는 일인데도 좀처럼 이 감각엔 익숙해지지 않는다. 평소대로라면 일단 씻으러 갔을 텐데, 그걸 조금 뒤로 미뤄야 한다는 사실도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불쾌감을 표시하는 대신 내색 없이 몸을 일으켰다. 상대는 초대를 받지 않아도 아무 때나 방문이 허락된 손님이었다. 그 시간이 모두가 잠든 새벽이라거나, 자신이 악몽에서 깨어난 직후라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날의 꿈인가?”

“뻔한 걸 뭘 물으십니까.”

“흐음. 매번 그렇게 시달려서야 힘들겠군.”

마음에도 없는 위로에 유카르테는 피식 웃었다. 힘들겠군, 이라니. 그가 힘들다는 것이 어떤 건지 알고는 있을까? 아마 세상에서 가장 그와 어울리지 않는 문장일 것이다. 필요하기에 건네는 말일 뿐, 실질적으로 공감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나마 그런 말을 해 주는 것도 그뿐이었다. 그래서 그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불구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뛰어들었다. 좀 더 빨리 택했어야 했다는 안타까움은 있을지언정 그 일을 후회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특히 오늘처럼 잊지 못할 기억이 선명히 되살아나는 날에는.

“불편하긴 하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적당히 자극이 되어 줘서 괜찮습니다. 제게 그날의 다짐을 잊지 않게 해 주거든요.”

“내가 높이 사는 것도 바로 너의 그런 점이지. 쓸모없는 것들은 늘 금방 나약해지거든.”

그건 물론 지난 경험을 다분히 내포한 말이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몇백 명의 계약자가 그를 거쳐 갔다고 했던가. 그중 대다수가 계약 조건을 끝까지 견뎌내지 못했다. 죄의식에 사로잡혀 자결하거나, 반대로 너무 심취하는 바람에 분별력을 잃고 날뛰다 죽음을 맞이하거나. 소극적인 형태이든 적극적인 형태이든, 몇 년 이내에 결국 미쳐버린다는 결과는 같았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꾸준히 계약을 유지하고 있는 건 유카르테가 유일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자신이 어느 정도는 미쳐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완전히 미쳐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이번 준비 분입니다.”

머리맡에 있는 은밀한 공간을 연 그는 이 순간을 위해 마련해두었던 것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 손에 들려 나온 건 여러 개의 유리병이었다. 안에 담겨 있는 검붉은 액체가 움직이는 진동에 맞춰 찰랑거렸다.

“이번엔 평소보다 더 많이 마련해 봤습니다.”

“흐음.”

마개를 열자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라도 한 번에 정체를 알아챌 수밖에 없는 냄새였다. 그러나 병을 받아든 남자는 아무런 내색 없이, 당연하다는 듯 그것을 입에 가져갔다. 꿀꺽꿀꺽 삼키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리는 동안 그 광경을 지켜보는 유카르테의 표정도 변함이 없었다. 하나씩 비워지기 시작한 유리병이 완전히 동 나는 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입가를 닦아낸 남자는 어딘지 불만족스러워 보였다. 유심히 지켜보던 유카르테의 얼굴이 실망으로 흐려졌다.

“효과가 없습니까?”

“아주 조금 낫긴 하군. 하지만 이걸로는 안 되겠어.”

“역시 금제가 문제입니까? 곤란하군요. 이 이상 재료 양을 늘리는 건 저도 어렵습니다. 슬슬 눈치채는 자들이 생기고 있는 중이라서요.”

“알고 있다. 세르피스를 잃은 게 새삼 아까워지는군. 아직은 때가 아니었는데 말이야. 숨어 있는 마신관들을 좀 더 찾아낼 수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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