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300화 (300/608)

제300화

침착함을 가장한 얼굴과는 다르게 손끝이 초조한 듯 떨리고 있었다. 억지로 치켜들고 있는 목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 있는 것도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저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본인에겐 기억을 지우는 최면을 안 걸었나 보네요. 정말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단한 사람이네.”

범인도 기억이 지워졌다면 찾아내도 자백을 받아내는 게 곤란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럴 염려는 없었던 모양이다. 어이없어서 중얼거린 나를, 백작이 굳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하긴, 계약이 정말로 성사되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겠죠. 자신이 모든 상황을 주관하고 있다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갖고 싶기도 할 테고요. 범인들이 종종 그런 심리 때문에 범행 장소로 돌아온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무슨……말을…….”

“이게 무슨 소린지는 본인이 더 잘 알지 않아요?”

“무, 무례한 자로군. 자네는 이제 보니 알드레프 경을 호위하는 자가 아닌가? 귀족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감히 무슨 자격으로 내 앞에서 멋대로 발언하는 거지?”

희게 질린 백작이 주제에서 벗어난 부분을 파고들었다. 그의 입장에선 효과적인 압박 수단이었다. 이 세계에서 평민은 귀족에게 허락 없이 말을 걸거나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한다. 같은 귀족들끼리도 작위의 고하에 따라 발언 기회에 차등이 있는 세상이니 피지배 계급의 위치야 뻔했다. 이럴 때는 아군 중에 귀족이 있어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귀족은 어떤 경우에서도 같은 귀족의 입장을 먼저 헤아리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정말 평민이었다면 일단 입을 다물고 사과부터 하는 것이 순리였을 거다. 이 순간에도 자긍심을 지키려는 백작이 추하게 느껴져서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논점을 흐리려고 해 봤자 소용없어요. 이미 당신이 범인이라는 증거는 명백하니까요. 그 얼굴에 묻은 액체, 당신과 계약한 마녀의 피거든요.”

“……! 폐하! 저자가 귀족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이 행태를 가만히 지켜만 보시는 겁니까?”

경고에도 굴하지 않는 것에 당황한 백작이 황제인 이사나를 향해 항의의 시선을 보냈다. 물론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사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기만하고 있는 건 당신입니다, 백작. 언제까지 그대의 죄를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폐, 폐하…….”

“마녀와의 계약에서 무슨 소원을 빌었습니까? 친딸을 죽여서까지, 그대가 원하던 것이 대체 뭐였습니까?”

“따, 딸을 죽여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숨죽인 채 대화를 듣고 있던 백작 부인이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손수건을 떨어트렸다. 그때서야 부인의 존재를 상기한 듯, 백작이 화들짝 놀라 두 손을 내저었다.

“부인. 아무 일도 아니오. 아무래도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소.”

“하지만 방금 전 폐하께서 당신이 친딸을 죽였다고…….”

“그러니까 오해라고 하지 않았소. 아이들과는 조금 전 같이 식사하지 않았소? 우리 딸들은 모두 무사하오.”

“모두 무사해? 율리아는 딸이 아닌가 봐요?”

오가는 대화를 참지 못하고 끼어들자 백작이 사나운 시선을 던졌다. 이번에야말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적의를 고스란히 드러낸 얼굴이었다.

“자네……!”

“왜요? 자신이 저지른 죄를 확인하는 게 두렵나요? 율리아는 친딸이 아니라서 죽인 거냐고 묻고 있잖아요.”

“율리아……라고요? 그게 누구죠?”

점점 감정이 격해지려는데 백작 부인이 느린 어조로 물었다. 어딘지 멍해 보이는 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듯했다. 율리아에 대해 물었을 때, 이곳 사람들이 보인 것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바논 백작이 낭패감을 드러내는 사이 나는 냉큼 대답했다.

“셋째 딸 율리아요. 기억나지 않으세요?”

“셋째라니. 그 아이의 이름은 아네스…….”

“아뇨, 아네스는 막내죠. 제대로 기억해 보세요. 부인의 딸이 몇 명이에요?”

“제 딸은…… 세 명…….”

“정말요? 정말 세 명이에요? 딸의 이름들은 다 알아요?”

“이름……멜리나와 아밀라, 율리아와 아네스…….”

“그래요. 그 율리아 말이에요. 부인의 셋째 딸이잖아요.”

“셋째 딸…….”

중얼거릴수록 부인의 눈빛은 텅 비어 갔다. 바논 백작이 초조한 얼굴로 그녀를 다독였다.

“부인! 다 헛소리요! 저런 말을 귀담아듣지 마시오!”

“네에? 하지만 여보. 셋째 아이는 율리아가 맞는걸요.”

“……!”

백작 부인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더니, 곧 의아하다는 눈으로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백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부, 부인?”

“어머, 그러고 보니 요즘 율리아가 왜 안 보이죠? 그 아이, 왠지 오랫동안 보지 못한 것 같아요. 백작님, 율리아를 보지 못하셨나요? 그 아이가 어디에 있을까요?”

여상하게 묻는 백작 부인의 눈빛은 조금 전처럼 탁하지 않고 뚜렷하기만 했다. 바논 백작이 가만히 숨을 삼켰다. 그의 동공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고 있었다.

부인의 그 반응은 내게도 의외였던지라 나는 반사적으로 데르온을 바라보았다. “최면이 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가 담담한 표정으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아마도 카류안이 세르피스의 몸을 통해 최면을 걸었을 거라고. 그래서 세르피스가 죽자 그 효과가 현저히 약해졌고 그 상태에서 연거푸 자극을 받으니 깨지기 시작했다는 것 같았다.

“아까 식사할 때도 율리아는 보지 못했어요.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닐까요? 그 아이에게 가 봐야겠어요.”

“부인…….”

“네? 어머, 내 정신 좀 봐. 지금은 손님들이 계셨죠.”

황급히 돌아서던 백작 부인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새삼스럽게 깨달은 얼굴을 했다.

“큰 실례를 했어요. 중요한 얘기 중이셨던 것 같은데, 제가 방해를 한 것 같네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급히 사과를 건네는 백작 부인을 나는 복잡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이사나와 다른 일행들도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는 잠시 자리에서 물러나도 괜찮을까요? 저희 셋째 딸인 율리아가 아픈 건 아닌지 방에 들러봐야 할 것 같아요.”

“상관은 없지만, 이제 율리아가 기억나시나요?”

“기억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당연히 기억한답니다. 어미가 제 딸을 기억하지 않을 리가 있나요.”

“……그래요. 그럼 율리아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는지도 아시겠네요.”

“마지막이요? 그럼요. 그 기특한 아이가 가문을 위해 집중 기도를 하겠다고 했었어요. 후계자가 될 남동생이 생겼으면 좋겠다고요. 그렇죠, 백작님? 그때 당신도 함께 기도하러 가셨잖아요.”

“아, 으응, 그랬었소.”

“그때 소원을 들어주는 마녀를 불러 보겠다고도 하셨죠. 그런 건 미신일 게 분명한데도, 둘 다 어찌나 진지하던지. 전 차마 말리지도 못했다고요.”

천진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바논 백작이 난처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네요. 시기상으로 보니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바로 생긴 거 같아요. 신께서 율리아의 기도를 들어주셨던 건가 봐요.”

“그, 그렇군요, 부인. 확실히 그렇소.”

“……그런데 이상해요, 백작님. 왜 그 이후로 율리아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죠?”

말하면서 위화감을 깨달은 걸까. 우아하게 웃고 있던 백작 부인의 얼굴이 천천히 굳었다. 점차 입술 끝이 내려가고,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져 갔다.

“맙소사.”

그녀가 경직된 모습으로 천천히 남편을 돌아보았다. 마치 모든 사실을 처음 깨달은 사람처럼. 그녀가 새삼스러운 눈길로 백작의 얼굴을 훑어 내렸다.

“……백작님. 당신 얼굴에 묻어 있는 그 붉은 액체가 마녀의 피라는 게 무슨 말이에요?”

“부인.”

“당신이 율리아를 죽였다고 하는 말은 뭐죠?”

“부인…….”

바논 백작이 창백한 얼굴로 백작 부인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 손이 닿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뒤로 물러나는 것이 더 빨랐다. 주춤거리며 뒷걸음치는 아내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듯 바논 백이 신음을 흘렸다.

“백작님. 설마……당신이…….”

“부, 부인. 오해요.”

“뭐가 오해라는 거죠? 그럼 율리아는 어디에 있나요? 백작님과 기도하러 간 이후로 그 아이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그게 벌써 몇 개월 전의 일이에요. 몇 달 동안이나 율리아를 못 봤다고요! 그런데 전 지금까지 한 번도 그걸 이상하다고 여겨본 적도 없었어요!”

백작 부인은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율리아에게, 제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습윤해진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두려움을 담고 남편을 응시했다. 애처로울 정도로 가련한 모습에 백작은 더 다가가는 대신 뻗은 손을 움켜쥐었다.

“……제발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오. 그건 모두를 위한 일이었소.”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요?”

“소원을 이루는 것엔…… 대가가 필요했소.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었소.”

“……!”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사실상 백작이 자신의 범행을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좀 더 뻔뻔하게 버틸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쉽게 자백하니 당황스러웠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아내가 최면에서 풀려난 게 생각보다 그에게 큰 충격을 준 것 같았다. 백작 부인은 금방이라도 비명을 지를 것처럼 입을 벌렸다. 본인이 집요하게 추궁했으면서도 막상 눈앞에 닥쳐온 현실을 믿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부릅떠진 그녀의 두 눈에서 순식간에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짓을…… 어떻게 당신이 율리아를…….”

“부인, 내 말을 들어보시오. 나도 그러고 싶었던 게 아니오.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소. 내겐 율리아보다 그대가 더 중요했소.”

“그게 무슨 말이죠? 왜 그런 식으로 말하나요?”

“정말 몰라서 묻는 말이오? 그대가 그동안 얼마나 불안정했는지 모른다는 거요?”

“……!”

“그대는 늘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었잖소. 딸만 잉태하는 자신을 마치 저주받은 여자인 것처럼 여겼었지! 아네스를 낳고서는 완전히 정신이 나가서 그대의 손으로 그 아이를 직접 죽이려고까지 했소! 그 충격으로 자결을 몇 번이나 시도하기까지! 나, 나는 도저히 그대를 잃을 수 없었소!”

“그런 이유로…… 고작 그런 이유로 율리아를…….”

“아니! 고작이 아니오! 내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요! 결국 다 잘되었지 않소? 그동안 말하지 못했지만, 그대 배 속에 있는 아이는 아들이오. 율리아가 희생해 준 덕분에 그대가 아들을 얻었소. 그렇게 소원하던 아들을 잉태했단 말이오! 이제 그대는 자결할 이유도, 자신을 원망할 필요도 없소.”

바논 백작이 간절한 얼굴로 다가섰다. 하지만 백작 부인은 그가 다가선 만큼 더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눈물을 흘린 채 고개를 젓는 아내를 보고 백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인……!”

“다 잘되었다고요? 내 딸이 죽었는데, 그 죄 없는 아이가 죽었는데. 아들을 얻었으니 잘 되었다고요? 그게 어떻게 다 잘 되었다고 할 수 있죠?”

“……어차피 그 아이는 곧 떠날 아이였소. 온전한 우리 딸이라고 할 수도 없었소. 신관의 문장을 받았으니까.”

“그래서 죽어도 괜찮았다고요? 그게 진심으로 하는 말이세요?”

“괜찮았다는 건 아니오. 하지만 신관이 되면 가문과 인연이 끊어지는 건 사실이잖소. 그 아이는 장차 우리 가문에 해를 끼치는 존재가 될 수도 있었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이 되오! 마신관이잖소!”

돌연 백작이 분개한 얼굴로 소리쳤다. 움찔한 백작 부인이 입을 다무는 틈을 타, 그가 곧장 우리 쪽을 돌아보았다. 그가 바라본 사람은 이사나였다.

“황제 폐하, 당신은 절 이해해 주시겠지요? 제가 한 일은 당신께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내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요?”

이사나가 굳은 얼굴로 반문하자 백작이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신관들이 폐하를 얼마나 오랫동안 괴롭혀 왔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 자가 하나라도 사라지면 폐하께는 오히려 좋은 일 아닙니까? 저는 황제 폐하의 충신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딸을 죽인 게 합당했다고 주장하는 겁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변명이라고 하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백작.”

“아뇨! 폐하께선 기뻐하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폐하만은 마땅히 저를 칭찬해 주셔야 합니다! 제가 죽인 건 제 딸이 아닙니다! 그저 마신의 조종을 받아 움직이는 그의 꼭두각시일 뿐이었습니다!”

싸늘하게 식은 이사나의 시선을 보고도 백작은 굴하지 않았다. 궤변이 계속해서 이어지는데 오직 백작 자신만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사나가 파리해진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뭔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백작? 그대는 본 황제 또한 마신의 신도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군요. 난 마신의 교단 전체를 적으로 삼은 게 아닙니다.”

“하하, 이제 와서 새삼 마신의 자녀인 척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는 이미 마신을 떠나 다른 신에게 의탁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소리를…….”

“폐하께서 형벌의 교단을 찾아가 도움을 받으셨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니라 하셔도 이제 폐하는 다시는 마신의 품으론 돌아가지 못하실 겁니다! 대체 어느 마신관이 폐하를 지지하겠습니까?”

이사나가 입을 다물었다. 그저 기가 막혀 그런 것이었지만, 흥분한 백작은 자신의 말에 눌렸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의 눈빛이 더 강렬하게 살아나면서 번들거렸다. 그간 그를 보고 침착하고 차분하다고 평가를 내렸던 걸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광기에 사로잡힌 자의 얼굴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의 잠꼬대 같은 소리를 얌전히 들어주고만 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나는 그가 또 헛소리를 잇기 전에 입을 열었다.

“진짜 어이없는 사람이네. 그런 식으로 죄책감을 전가하면 좀 나아요?”

“뭐라고?”

부릅뜬 백작의 눈에서 섬뜩한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전신에서 살기가 일기 시작했다. 그 딴에는 나를 겁주려는 생각 같았는데, 우습지도 않은 시도였다. 나는 그의 살기를 가볍게 흘려보내곤 반대로 그쪽에 압력을 가했다.

“큭, 크윽!”

주위에 수분을 조금 더한 것만으로 백작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아마 온몸이 무겁게 가라앉는 기분일 터였다. 그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비틀거리더니 곧 무릎을 땅에 떨어트렸다. 엎드려진 채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백작을 나는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딸이 마신관이니까 죽을 만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딸을 죽인 죄를 감추려고 마신관을 미워하게 된 건 아니고요? 마신을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이 마녀와 계약은 어떻게 했대요? 세르피스는 누가 봐도 마족처럼 보였을 텐데.”

“자, 자네가 뭘 안다고……!”

“다른 건 몰라도 당신이 미쳤다는 건 알겠네요. 그 외에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요. 그리고 방금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을 들었는데 말이죠. 어느 마신관이 이사나를 지지하겠냐고 했어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자 백작이 몸을 움찔했다. 그리고 나는 카노스의 선견지명에 마음껏 감탄했다.

“그거 참 유감이네요. 마침 내가 이런 걸 가지고 있거든요.”

장갑을 벗고 손등을 보였더니 백작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이럴 때 쓰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얼결에 받아둔 한 수가 제대로 진가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경악한 듯 입을 벌린 그가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기 시작했다.

“마신의…… 문장…….”

“이제 당신이 무슨 멍청한 망상을 했는지 잘 알겠죠.”

바논 백작이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얼굴을 했다. 지탱하고 버틸 힘마저 잃었는지 완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였다. 저항할 의지를 잃은 그에게 남은 건 그가 저지른 죄의 대가뿐이었다. 나는 의견을 구할 겸 이사나를 돌아보았다. 눈짓을 가볍게 주고받은 후, 이사나가 백작 부인을 응시했다. 충격으로 무너졌을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는 용케 버티고 서 있었다.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했지만 더는 울고 있지 않았다.

“백작 부인. 바논 백작은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천륜을 저버리고 친딸을 죽인 값은 참형을 내려도 부족합니다.”

“……그렇겠지요, 폐하.”

“그에게 할 말이 남아 있습니까?”

백작 부인이 말없이 남편을 돌아보았다. 백작은 마지막 희망에 매달리듯 그 눈길을 간절히 응시했다. 하지만 그녀는 바로 시선을 피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폐하. 제발 제 눈앞에서 저 사람을 치워주세요. 다시는 마주치지 않게 해 주세요. 아니, 배 속의 아이와 함께 제게도 참형을 내려주세요. 전 도저히 이 아이를 무사히 낳아 기를 자신이 없습니다.”

“부, 부인!”

“제가, 저 자신을 비롯해서 저 사람까지 괴물로 만들었습니다. 모두 제 탓입니다. 저도 죄인입니다. 그러니 제발, 저도 죽여 주세요. 제발.”

백작 부인의 눈에서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이사나는 한동안 무거운 눈으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 죄인이라 하면서 부인은 또 죄를 지으려 하는군요. 남은 자녀들은 돌아보지 않습니까?”

“……하, 하지만…….”

“난 연좌제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백작의 죄질은 죽어 마땅할 정도로 무겁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부인과 자녀들까지 처벌하진 않을 겁니다. 부인은 살아서 아이들을 무사히 키워내는 걸로 속죄하길 바랍니다. 단, 태어날 아들은 아무런 작위도 계승하지 못합니다. 바논 백작가의 작위는 장녀인 멜리나 영애가 계승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

울고 있던 백작 부인이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바논 백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폐, 폐하.”

“멜리나 영애와는 종종 이야기를 나눠 봤었죠. 그 나이 대의 영식들보다 식견이 넓고 꽤 총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라면 백작가를 잘 이끌어 나갈 겁니다.”

흔들리던 눈동자에 눈물이 더 차올랐다. 백작 부인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태어날 아들이 있는데 작위를 멜리나가 계승하다니! 귀족의 법도에 그런 일은 결코……!”

바논 백작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마신관을 탓하고 원망할 때보다 더 흉해진 얼굴이었다. 그 굳어진 얼굴을 보니 백작 부인이 아들에게 그렇게까지 집착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녀의 성별이 아무래도 좋다고 달랬던 건 대외적인 가면일 뿐, 실상 후계를 이을 아들을 가장 바라고 있던 건 바논 백작 그 자신이었을지도 몰랐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폐하! 제국 법에 작위와 가문을 계승할 자격을 지닌 건 오직 남성뿐입니다! 그런 건 불가능합니다!”

그가 소리 높여 이사나에게 항의했다. 백작 부인의 어깨를 다독이고 있던 이사나가 싸늘하게 식은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아까부터 역겨워서 들어주질 못하겠군요. 제국 법이라고 했습니까, 백작? 황제인 내가 고칠 수 없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앞날이 어떻게 되었든, 이제 곧 숨이 끊어질 그대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앞으로 내가 열어 갈 세상에 그대는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일 텐데요.”

백작이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거렸다. 늘 온화하던 이사나가 제게 차가운 경멸을 보낸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하는 듯했다.

“케이.”

이사나의 부름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더니, 친위대 대장인 케이가 안으로 들어섰다. 열려 있는 틈으로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나머지 친위 기사들이 보였다. 그 뒤편에는 백작저의 하인들이 몰려 있었다. 그들 틈 속에 라온휘젠 황태자와 그 일행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무장한 차림의 케이가 제 앞에 서자 바논 백작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다가온 운명을 감지한 자의 절망이 그의 얼굴에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냉소적으로 내려다본 이사나가 명했다.

“죄인을 끌고 나가세요.”

* * *

바논 백작은 유카르테 대공과 공모해서 황제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죄명을 받았다. 다만 남편의 계획을 눈치챈 백작 부인이 사전에 미리 막아낸 덕분에 연좌제는 적용되지 않는 걸로 했다.

후일담을 말하자면, 바논 백작은 지하 감옥에 갇혔다가 나흘 후 자결했다. 정확히는 자결한 게 아니라 자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시벨리우스가 저택의 사념들을 전부 이용해서 그에게 환각 주술을 걸었기 때문이다. 죽은 율리아가 반복해서 그에게 나타나는 주술을. 밤낮에 관계없이 수시로 악몽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그 아이가 당한 고통과 절망만큼, 충분히 절감하고 시달릴 수 있도록.

그가 죽고 난 후 작위는 황제의 명에 따라 장녀인 멜리나에게 돌아갔다. 보통 여성은 작위를 받아도 임시적인 권한만 지닐 뿐, 남편이나 아들에게 넘겨주게 되어 있었다. 작위와 영토가 온전히 정식으로 여성에게 부여된 건 스왈트 제국 역사상 이번이 최초였다. 그것도 하급 작위도 아니고 백작 작위였다. 귀족 세계가 들썩일 어마어마한 파장이 예상됐지만 이사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나중에 언뜻 들어보니 예전부터 생각해두고 있었던 일이었다고 했다. 아마 클모어의 카웰 공작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혼자 동분서주하던 에이프릴을 보면서 느낀 바가 있었던 듯했다. 분명한 건 개혁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사나 황제 폐하, 보기보다 강단 있으신 분이네요.”

그리고 그날 이후로 왠지 아셀은 시종일관 들뜬 얼굴을 하고 다녔다. 이전만큼 이사나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고, 눈이 마주치면 수줍게 볼을 붉혔다. 알고 보니 그는 점성술과 천문학 외에도 아카데미에서 제도법을 공부하고 있었다는 듯했다. 돌아가신 부모님은 학자였는데, 어머니 쪽이 더 학업에서 뛰어난 성취를 이뤘는데도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 결과에 위화감을 느낀 것을 계기로 아셀은 평소 여성들의 사회 진출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물론 카터스 제국도 스왈트 제국만큼이나 남성 위주의 사회라 부딪치는 벽이 많았다. 한 번은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작위 계승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었는데, 학우들 앞에서 조롱을 받았다고. 그때 그가 쓰린 속을 삼키며 물러나야 했던 일을 이사나가 거리낌 없이 실행해버린 거다. 그의 입장에선 이사나가 동경의 대상이 될 만도 했다.

“알리사 님이 이사나 폐하께 끌리는 이유를 알 것만 같습니다.”

헤실헤실 웃는 그는 알리사가 자신을 견제하는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건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더불어 라온휘젠 황태자의 눈빛이 묘해지고 있다는 것도. 왠지 삼파전을 넘어 사파전으로까지 넘어갈 것 같다고 예상되는 건 내 착각만이 아니겠지. 장차 저들이 이룰 관계도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한편 그 상황과는 별개로 시벨리우스와 아셀의 주술 수업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꾸준히 훈련을 거듭한 결과, 아셀은 환각을 완전히 다스리지는 못해도 환후만큼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선까지 제어할 수 있게 됐다.

“이제 대충 기본 형태는 잡혔네.”

수업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내려진 긍정적인 평가에 아셀의 얼굴이 환해졌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피곤해.”

“예,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도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아셀을, 시벨리우스가 잠시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내색하진 않아도 쑥스러워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피식 웃어준 다음 아셀을 돌아보았다.

“수고했어요, 아셀.”

“아닙니다. 엘 님. 저어, 그런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뭔데요?”

“새로 합류한 까만 머리 소년과 그의 부하라고 하는 남자 말입니다. 마족 맞지요?”

“아아, 네. 맞아요.”

그러고 보니 아셀에게 그 둘을 정식으로 소개한 적은 없었다. 숨길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자 아셀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 괜찮습니까?”

“마족이라 무서워서 그래요? 둘 다 좋은 사람들이에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아니, 그게 아니라…… 시벨 님 말입니다. 유니콘은 마족과 적대적인 관계 아닙니까?”

“그런 것도 알아?”

관심 없는 태도를 유지하던 시벨리우스가 그를 돌아보았다. 아셀은 머뭇거리며 뺨을 긁었다.

“그냥 그랬다고 들었던 것 같아서요.”

“흐응, 그건 유니콘 일족이 이 땅에서 머물 때도 널리 알려진 부분은 아니었는데. 의외네.”

“그럼 그게 정말이었군요? 실은 유니콘에 대해 기록한 자료들은 전부 조사해 봤었거든요. 거기서 한 줄 정도로 언급되어 있었던 내용인데 왠지 잊히지 않더라고요. 실제로 시조님이 마족에게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요.”

“……뭐?”

마지막 말은 생각지 못했던 거라 나와 시벨리우스가 동시에 아셀을 바라봤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눈길에 당황한 듯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죽었다고? 마족한테?”

“저, 정확한 건 아닙니다. 저도 그냥 그렇다는 일화만 들은 것이라…… 시조님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 정확히 기록된 건 없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사실만 확인되었을 뿐이거든요.”

“……그래.”

시벨리우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놀람을 다스렸는지 언제나와 같이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꽤 동요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죽음의 경위보다는, 죽음 그 자체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군. 형님은 이미 죽었구나.”

혼잣말에 가까운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아셀의 시조라는 말에 당연히 이승엔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면 유니콘은 수명이 긴 일족이었다. 시벨리우스는 어딘가에서 그가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았다. 왠지 기운이 빠진 듯한 뒷모습이 안쓰러워서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멍하니 돌아보던 얼굴이 나를 확인하곤 흐린 웃음을 머금었다.

지워진 지난 4천 년의 세월에서, 그가 잃은 것이 하나 더해졌다. 그게 가슴 아파서 나는 입술을 악물었다. 생각에 잠긴 시벨리우스의 모습 위에 세르피스의 사체를 쓸쓸하게 내려다보던 데르온의 모습이 겹쳐졌다. 언젠가는 그 위에 내 모습도 겹쳐지게 되지 않을까. 소중한 것이 늘어날수록 무섭다. 앞으로는 잃어갈 일만 남은 것 같아서. 내가 그걸 의연하게 감당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시벨리우스를 꽉 끌어안았다. 놀란 듯 움찔거리던 그가 내 등을 가만히 토닥이기 시작했다. 위로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뒤바뀐 기분이었지만 곧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됐다. 마침 방에 들어오던 아스가 우리를 발견하곤 그대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아스도! 아스도 안아줘! 아스도오!”

“야, 이 자식!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갑자기 덮쳐드는 향해 아스를 향해 시벨리우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덮친 건 아스만이 아니었다. 이사나와 알리사도 같이 들어오던 중이었는지 우르르 달려와 체중을 실었다. 단숨에 감당할 무게가 는 시벨리우스가 앓는 소리를 내질렀다. 왁왁거리며 정신없는 틈에 내 뒤쪽에서도 뭔가 더해지는 감각이 들었다. 고개를 들었더니 어느새 데르온이 조신하게 내 등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빙긋 웃었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 나갔다.

“잘들 논다.”

침대에 누워있던 라피스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사방 가득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에 흠뻑 빠져들었다. 아마 이 순간은 언제 다시 기억해도 즐거우리라.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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