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9화
“일이 이렇게 돼서 안타깝네요.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요.”
“결과는 그녀 스스로 택한 겁니다. 엘 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데르온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카류안에게 이용당한 것도, 이런 죽음을 택한 것도. 결국은 전부 그녀가 약했던 탓이죠. 고통을 이겨내고 맞서나갈 의지도 없었던 겁니다. 싸우기보다 편한 쪽을 택한 자에게 동정의 여지는 없습니다.”
단호하게 내뱉는 음성에 씁쓸함이 느껴지는 건 내 착각만은 아닐 터였다. 이윽고 세르피스에게서 시선을 거둔 데르온이 나를 돌아보았다.
“엘 님. 괜찮으시다면 세르피스의 사체는 제가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주군께 여쭈면 엘 님의 허락을 먼저 받으라고 하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난 상관없어요. 데르온 뜻대로 해요. 근데 어떻게 하려고요?”
“비록 이렇게 끝났더라도 일단은 공작이었으니까요. 마계에 가져가 묻어주려 합니다. 그 몸속에 품은 마력만이라도 고향에서 흩어져, 그 땅을 이롭게 하는데 쓰이게 하고 싶습니다.”
‘마족들 사이에선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고향 땅에 묻히면 마신의 품에 안긴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은 거의 혼잣말에 더 가까웠다. 그 말 속에서 나는 그가 세르피스를 마계로 데려가려는 진짜 이유를 깨달았다.
<난 아마 마신의 품으로 갈 수 없겠지.>
죽어가면서 세르피스가 중얼거렸던 말을 떠올린 거다. 동정의 여지가 없기는 뭐가 없어. 역시 슬픈 거잖아. 가슴이 아릿해졌지만 나는 표정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무심함을 가장하고 있는 데르온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공감한다 말해도 본인이 아니면 그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괴로움을 감당하는 건 오롯이 데르온의 몫이었고, 그는 자신만의 추모 방법을 찾은 거였다. 그걸 말없이 지지해 주는 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위로가 될 것 같았다.
* * *
아스가 최종 허가함에 따라 세르피스의 육신은 마계로 돌아갔다. 그녀를 수습하고 묻는 모든 과정은 데르온 혼자서 진행했다. 그는 시신을 안아 들고 훌쩍 사라졌고, 반나절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조금 개운해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무덤은 그녀가 다스린 서쪽 영토에 만들었다는 듯했다. 비석도 꽃도 없는 초라한 봉분이었다지만 한때 동료였던 자를 향한 예우로는 충분했다.
이건 그냥 지나가는 얘기인데. 세르피스의 사망으로 비워진 서공작의 자리는 당분간 아스에게 귀속된다고 했다. 당분간이라고 한 이유는 그가 이미 마왕이기 때문이다. 마계는 왕과 4인 공작이 서로 대칭해서 균형을 이루는 체제라서, 한 사람이 두 개 이상의 작위를 차지할 수 없게 되어 있다고 한다. 운 좋게 두 개가 되면 더 강한 쪽 자리가 우선 승계되고, 나머지 다른 쪽은 몇 년 이내에 다른 자에게 넘어간다는 모양이었다.
“데르온도 작위가 두 개잖아요. 하나가 사라지는 건가요?”
“네. 북쪽이 동쪽보다 우선 승계이니, 동공작의 자격은 곧 사라질 겁니다. 아마 지금 동쪽 마족들 중에서 가장 강한 마력을 지닌 자에게 넘어갈 것 같습니다.”
“흠, 그렇군요. 그런데 작위를 계승한 건 어떻게 알아봐요? 마왕이나 북공작처럼 눈에 띄는 표식도 없잖아요.”
“일단 마력으로 알아볼 수 있긴 합니다만. 표식도 있습니다.”
“있다고요?”
데르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걷어 보였다. 옷에 가려져 있던 피부가 드러나자 몰랐던 문신이 보였다. 검은 덩굴장미가 나선 고리처럼 팔을 휘감고 있는 듯한 문양이었다.
“이것과 같은 문양이 북쪽엔 가슴에, 서쪽엔 다리에, 남쪽엔 등에 새겨져 있습니다.”
“와, 꽤 예쁘네요.”
“그렇습니까? 이것 외에 신체적인 변화도 생기긴 합니다. 하지만 그 부분은 북공작 말고는 알아보기 힘든 편이라, 그냥 있으나 마나 합니다.”
“뭔데요?”
“북쪽은 보시다시피 머리색이 달라지고, 서쪽은 피부가 희어진다고 합니다. 동쪽은 반대로 더 짙어진다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공작이 되기 전의 저를 알았던 자들도 차이를 잘 모르겠다고 했으니까요.”
“헤에.”
“아, 그리고 남공작은 눈동자 색이 다릅니다. 조금 더 흐리고 회색빛이 섞인 붉은색이죠.”
“아아.”
그래, 그러고 보니 루카르엠의 눈동자 색이 다른 마족에 비해 조금 흐리다 싶었지. 하지만 정말 조금이었다. 아아주 조금! 딱히 특징이라고 여겨지지도 않을 만큼 무난한 차이였는데 그게 남공작의 표식이라니. 다른 공작들의 특징도 그 정도 수준이라면 차이점이 없다고 여겨질 만도 했다.
“그러고 보니 말인데요.”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남공작의 자리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입안까지 빙글빙글 올라온 말을 그대로 눌러 삼켰다. 내가 눈치가 없어도 그에 대한 언급을 꺼내면 분위기가 처참해질 거라는 사실만은 알았다. 카노스가 워낙 엉뚱한 신이다 보니 앞으로 일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결과를 짐작할 수가 없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루카르엠이 다시 돌아올 것 같진 않았다. 이미 정체와 목적이 다 드러났는데 여전히 위장하고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다들 말은 안 하지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동공작은 북공작이 됐고, 나머지 공작들은 새로운 자들로 채워질 거다. 사실상 마계 지도부가 완전히 세대 교체를 하는 셈이었다.
나는 힐끔 데르온을 살폈다. 그는 어딘지 상념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의 대화로 과거를 상기하게 된 것 같았다. 그 모습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짧은 시간 많은 상황이 달라졌다. 특히 그는 얻은 것만큼이나 많은 것들을 잃었다. 지금 데르온이 어떤 마음으로 이 모든 것들을 감당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문득 하루아침에 일상이 달라지는 상상을 해 봤다. 내가 아는 정령왕들이 한꺼번에 전부 사라지고, 다른 자들이 그 자리를 채우는 상상을. 그건 굉장히 참담하고 선뜩한 기분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동료들과도 적응하게 될 거다. ……하지만 예전과 완전히 같지도 않을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너무 빤히 응시한 걸까. 데르온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을 그는 다른 뜻으로 해석한 듯했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네? 뭘요?”
“세르피스의 계약자를 찾으라고 하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아.”
그 말을 듣고서야 나는 바로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그 문제가 남아 있었다. 지금 가장 우선해서 해결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다른 일행들의 눈에도 빛이 감돌았다. 담소를 나누는 동안 흩어져 있던 시선들이 차츰 하나로 모여들었다. 라피스는 그저 눈동자만 굴리는 반면 시벨리우스는 제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의자에 앉아있던 아스도 발장난을 멈추고 얌전해졌다.
이 자리엔 이사나와 알리사도 함께 했다. 두 사람은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아스와 데르온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참이었다. 그런 김에 나는 지금까지의 일들도 전부 알려 주었다. 저택을 조사하게 된 전말부터 시작해서 아스가 마왕이 된 것까지. 모든 과정을 전해 들은 두 사람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 백작의 셋째 딸이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졌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바논 백작가는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이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았던 만큼 벌어진 틈이 더 크게 느껴졌다. 행복했던 꿈일수록 깨어났을 때의 상실감이 더 크듯이.
“정말 이곳에 계약자가 있을까요?”
“확인해 보죠.”
데르온이 품 안에서 붉은 병을 꺼내 들었다. 세르피스의 피가 담긴 병이었다. 방 안에 있던 일행들이 모두 그의 행동을 주시했다. 데르온은 병의 마개를 연 다음, 담겨 있는 피를 자신의 오른쪽 손바닥 위에 떨어트렸다. 그리곤 흥건히 젖은 손바닥 위에 무언가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린 후 주문을 외웠다. 주문의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데르온의 손바닥에 고인 핏물이 살아 춤추는 듯 꿈틀거린 것이다. 벗겨지듯이 천천히 분리된 핏물은 허공 위에서 둥글게 뭉쳐져 형태를 만들어갔다. 완성된 모양은 붉디붉은 금붕어였다.
금붕어의 비늘엔 동그란 무늬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 결을 따라 빛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붉은 열기를 품었다가 금세 새카매지는 모습이 마치 타들어 가는 담뱃불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데르온이 입을 열었다.
“있군요. 가까운 곳입니다.”
“……!”
가장 기다리면서도 동시에 기다리지 않던 소식이었다. 이사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데르온은 손을 뻗어 금붕어를 띄워 보냈다. 잠시간 공중을 배회하던 금붕어가 흐느적거리듯 어딘가로 헤엄쳐가기 시작했다.
“저걸 따라가시면 됩니다.”
가장 먼저 발걸음을 내디딘 사람은 이사나였다. 홀리듯이 금붕어의 뒤를 따라가는 그를 따라, 나와 다른 일행들도 걸음을 옮겼다. 금붕어는 문 밖을 넘어 복도를 쭉 따라 이동했다. 그러는 동안 몇몇 사람이 스쳐 지나갔지만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금붕어는 계단에 이르렀고, 저택의 2층으로 올라가 화사한 복도를 가로질렀다. 향하는 방향이 점점 뚜렷해지는 것이 느껴져서 몸이 바짝 긴장했다. 워낙 자주 탐색하고 다닌 덕분에 이미 저택의 구조는 손바닥을 들여다보듯이 훤했다. 이 길 끝에 나오는 방은 하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복도 끝에 있는 거대한 아치형의 문 앞에 이르러 금붕어가 이동을 멈췄다. 나는 흘러나오는 탄식을 감추지 못했다. 그 안에 있는 건 바논 백작 부인의 방이었다.
“하.”
설마.
손끝이 얼어붙는 감각에 몸이 살짝 떨렸다. 백작 부인이 막내딸을 죽이려고 했었다는 이야기가 얼핏 떠올랐다. 후계자가 될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였던가. 갓 태어난 아이의 목을 졸랐다고 했었다. 자기도 모르게 무심코 한 행동 같았지만 그 자체가 이미 광기에 사로잡힌 거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는다며 투정부리던 소녀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주술을 실행한 자는 강렬한 소망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소원이 뭐였는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설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완성되지 않는 문장들이 앞부분만 맴돌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머릿속이 온통 어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원치 않는 딸. 간절한 후계. 소원을 들어주는 주술. ……그리고 임신 중인 아이. 생각이 꼬리를 물면 물수록 점차 방향이 확실해지는 것 같았다. 그건 결코 달갑지 않은 방향이었다.
얼굴이 창백해진 건 이사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볍게 한숨을 삼킨 후, 이사나가 그대로 문을 열었다. 다른 남자의 부인, 심지어 지체 높은 가문의 여인의 방을 함부로 열고 들어가는 건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었다. 평소의 이사나라면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지금은 그도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문이 열리자 안쪽에 있던 사람이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금갈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청순한 외모의 귀부인이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뜻밖에도 방 안에는 다른 사람도 함께 있었다. 그녀 옆에 있던 남자가 우리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바논 백작이었다.
“폐, 폐하?”
“황제 폐하께서 여긴 무슨 일로…….”
당황한 부부는 노크도 없이 무단 방문한 황제를 탓하지도 못했다. 이사나는 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멈춰 있는 금붕어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백작 가족의 시선도 덩달아 그쪽을 향했다. 그들이 공중에 떠올라 있는 금붕어를 발견하고 흠칫하더니 기괴한 것을 보는 얼굴을 했다.
“폐, 폐하? 저게 대체 무엇인가요?”
백작 부인이 멍하게 중얼거릴 때였다. 멈춰있던 금붕어가 쪼르륵 다시 헤엄쳐가기 시작했다. 긴 꼬리 비늘이 허공위에서 우아하게 흐트러졌다. 금붕어와 백작 부인의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금방이라도 서로 닿을 것 같았다.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지만 시선을 떼선 안 된다는 생각에 나는 오기를 내어 집중했다. 드러날 진실이 아무리 끔찍하다고 해도 여기까지 와서 약해질 수는 없었다. 사건은 반드시 밝혀져야 했다. 억울하게 죽은 율리아를 위해서라도.
“꺅!”
“부인!”
금붕어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백작 부인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숙였다. 그러자 바논 백작이 곧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가 한 손을 휘둘러 금붕어를 쳐냈다. 아니, 정확히는 쳐내려고 했다. 그 직후 벌어진 광경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금붕어가 바논 백작의 손에 닿는 순간, 마치 풍선처럼 펑 터지는 것이 아닌가!
“꺄악! 백작님! 얼굴에 피가! 세상에!”
바논 백작은 그 자리에서 붉은 피를 전부 뒤집어썼다. 정면에서 터진 까닭에 앞머리부터 얼굴 전체가 온통 피투성이가 됐다. 당황한 그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굳어 있는 동안 백작 부인이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허둥지둥 얼굴을 닦아냈다. 그런데 아무리 닦아도 얼굴 가득 흥건한 핏자국이 사라지지 않았다. 수건에 묻어나는 것도 없었다. 경직된 백작 부인의 손길이 점점 잦아들었다. 그녀가 깨끗한 손수건과 지저분한 백작의 얼굴을 연신 번갈아 바라보았다.
“…….”
“…….”
사방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게 기이한 현상을 목격한 공포 때문이든, 지독한 진실을 깨달아서든.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뒤쪽에서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던 데르온이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찾았군요. 계약자.”
* * *
「찾았군요. 계약자.」
숨을 크게 삼켰다가 내쉬었다. 데르온이 내뱉은 한마디를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건 바논 백작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계약’이라는 단어가 언급되자 그가 얼굴을 닦아내다 말고(그래 봤자 닦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흠칫 굳었다. 돌아보는 얼굴에 동요가 서린 것이 느껴졌다. 애써 억누르고 있었지만 눈꺼풀에서도 경련이 일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더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세르피스의 계약자를 찾아냈다. 백작 부인이 아니라는 사실엔 안도감이 일었지만 기분은 똑같이 처참했다. 범인이 바논 백작이었다. 아버지가 딸을 죽인 거다.
“백작, 당신이었습니까…….”
“폐, 폐하?”
이사나의 시선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가 중얼거린 말에 바논 백작이 움찔했다. 어리둥절해하는 얼굴 위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왜 그런 짓을 한 겁니까?”
“폐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 닦이지 않는 액체는 무엇이며, 무슨 일로 이러시는 겁니까? 부디 제가 알아듣게 설명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가 겁먹은 듯한 어조로 물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난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이미 그 질문의 의미를 깨달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