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8화
“한심하기 짝이 없군. 그래도 공작 중 하나인데 이렇게 자질이 떨어져서야. 이럴 줄 알았으면 세르피스가 아니라 데르온을 곁에 둘 걸 그랬어.”
“데르온은 내 부하야. 안 줘.”
“그렇게 말하니 더 갖고 싶은걸?”
“너…….”
“주군, 도발입니다. 응하지 마십시오.”
눈빛이 사나워진 아스를 향해 데르온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잔뜩 좁혀졌던 아스의 미간에 힘이 살짝 풀렸다. 그 과정을 느긋하게 지켜보던 카류안이 비실비실 웃었다.
“내가 잃어갈 것이라 했던가? 말해 두지, 꼬마야.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만큼 다시 채울 테니까. 아니, 그보다도 더 많이. 이전보다 좋은 것으로 말이다.”
“…….”
“지금은 네가 날 이긴 기분일 테지. 하지만 이 또한 결국 과정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깨달을 날이 올 거다. 그때까지 짧은 승리를 마음껏 만끽해 보아라.”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저주를 거는 것 같았다. 입가에 붉은 피를 줄줄 흘린 채, 광기에 젖어 웃고 있는 얼굴이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기괴했다. 하지만 아스는 그에게서 조금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디 할 테면 해보라는 듯이.
「곧 다시 보자꾸나.」
마지막 음성은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듯했다. 모두의 표정이 굳는 걸 보니 다들 같은 현상을 느낀 것 같았다. 아스 역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순간 눈을 부릅뜬 카류안이 갑자기 경련하듯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가슴이 심하게 들썩거리고 온몸에서 땀이 비 오는 것처럼 흘러내렸다.
“헉! 허억! 커헉헉!”
오래지 않아 뒤틀린 듯한 경련이 끝나고 그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막혔던 숨이 트여 간신히 호흡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그때까지도 겨누고 있던 날을 치우지 않던 아스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망갔네.”
중얼거린 한마디의 의미는 금방 알았다. 카류안이 의식 장악을 푼 모양이었다. 그로 인한 변화는 명백했다.
“아아아! 흐아아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카류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더니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부상으로 인한 통증을 이제야 느끼는 것 같았다. 카류안, 아니 세르피스로 돌아온 그녀는 사지를 덜덜 떨며 몸부림쳤다. 온몸으로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으큭, 으흐흑, 크흐으윽!”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거칠게 내뱉던 그녀의 비명이 점차 흐느끼는 소리로 바뀌어 갔다. 질끈 감은 두 눈에선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게 신체의 고통 때문인지, 카류안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진 서러움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곧 다가온 죽음 때문인지. 마음을 읽을 수 없는 탓에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매우 고통스럽고 처연해 보였다. 그러나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아스의 시선은 담담하기만 했다.
“널 어떻게 할까?”
나직하게 건네진 말에 세르피스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녀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아스를 올려다보았다.
“너와 카류안의 연결은 완전히 끊어졌어. 저항하지 않겠다면 살려줄 수도 있어. 나한테 항복할래? 하지만 널 거두진 않을 거야.”
“…….”
세르피스의 눈동자에 빛이 서렸다. 그녀는 가만히 숨을 들썩이다가 천천히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를 찾는 듯한 그 행동은 데르온을 발견하자 멈췄다. 쿨럭, 짙은 기침이 울리고 그녀가 검붉은 핏덩이를 토해냈다.
“한 가지 묻고……싶은……게…….”
“말해.”
데르온이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시하지 않고 받아준 것이 기뻤는지, 불안정하던 세르피스의 표정에 약간의 안도감이 떠올랐다.
“데자크…… 죽을 때…… 나…… 원망했어?”
이어진 질문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데르온도 마찬가지였는지 조금 움찔했다. 그는 복잡한 얼굴로 세르피스를 바라보았고, 세르피스는 다시 피를 토했다. 내상이 저렇게 심하도록 다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다른 작용이 있는 것 같았다. 카류안의 의식이 빠져나가면서 무슨 짓을 한 건지도 몰랐다.
데르온은 망설이는 얼굴로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아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한숨을 토하며 입을 열었다.
“안됐지만, 널 원망할 겨를도 없었다. 느긋하게 죽어가기엔 시간이 부족했으니까.”
내뱉어진 말은 어깨가 움츠러들 만큼 냉정했다. 그러나 세르피스는 오히려 웃었다. “그거…… 다행이네. 그거면 충분해.” 달싹거리는 입술 사이에서 쉬어버린 목소리가 간신히 흘러나왔다. 얼굴 옆으로 흐트러진 그녀의 긴 흑발 위에 피와 섞인 눈물이 스며들었다.
“대답은 결정했어?”
아스의 질문에 세르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싹 닿은 날에 피부가 쓸릴 텐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녀가 천천히 아스를 눈에 담았다.
“이상하네. 굉장히…… 먼 길을…… 걸은 것 같아.”
“…….”
“이렇게나 모든 기억이 뚜렷한데…… 왜 전부 다 낯선 것 같지? 그래도 그건…… 알겠어. 난 아마…… 마신의 품으로는…… 갈 수 없겠지.”
말하면서 그녀는 다시 피를 토했다. 세르피스가 서러운 기분을 삼키는 표정으로 두 눈을 감았다.
“죽……여. 이제 그만…… 날 쉬게 해줘.”
“그게 답이야?”
“그래.”
“응, 알았어.”
토해지는 처절한 감정에 비해, 돌아오는 답은 너무나 가벼웠다. 이어진 끝 또한 그랬다. 아스가 낫을 휘둘렀고, 그 즉시 달싹거리던 호흡이 멎었다. 불과 1초였다. 찰나의 간격일 뿐이었는데, 잠깐 사이에 살아 있던 육체에 죽음이 내려앉았다. 동시에 아스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가 작은 빛을 뿌리며 파스스 부서져 내렸다. 그의 팔과 손가락 사이에서도 무언가가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부서진 그것들은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게 아니라 아스의 이마에 모여들고 있었다.
새하얀 빛 가루들이 그 위에서 천천히 하나의 문양을 새겨나가기 시작했다. 두 개의 가죽 날개가 양쪽으로 펼쳐진 듯한 그림. 내 손등에 있는 것과 동일한 형태의 마신의 문장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나는 안쪽까지 전부 하얗게 칠해진 형태였고, 아스의 이마에 새겨진 건 테두리만 있는 형태라는 차이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순간이었다. 잉크가 떨어진 듯 테두리 안에 붉은 색이 생겨나더니, 순식간에 퍼져나가 그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마치 그가 방금 죽인 세르피스의 핏물이 스며들기라도 한 것처럼.
왕좌의 증거.
나는 이 순간 아스가 마왕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빈 옥좌를 차지하고 새로운 군주로 등극했음을.
“경하드립니다, 주군!”
그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데르온이 격정에 차오른 얼굴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스는 가만히 그를 돌아보기만 했을 뿐, 얼굴에 어떠한 감정도 표현하지 않았다. 그의 발밑엔 여전히 세르피스의 사체가 있었고, 그녀의 갈라진 몸에서 흘러나온 피로 바닥이 흥건히 젖어가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동안 나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스가 마왕이 된 건 축하할 일이 분명한데, 마음껏 기뻐할 만한 현장이나 분위기가 아니었다. 세르피스가 악한 짓을 하고 다닌 건 사실이지만, 그녀의 의지가 전부 반영된 건 아닌 것이 분명했다. 마음만 먹었다면 그녀의 죽음을 말릴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살려두기엔 그녀의 죄가 너무 크다든지, 카류안에게 다시 찾아갈지도 모른다든지, 그런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윽고 아스가 들고 있던 무기를 거둬들였다. 역할을 마친 낫은 손잡이 부분부터 천천히 흐트러지기 시작하더니, 완전히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손을 가볍게 털어낸 아스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전투에서 승리하고 상대를 죽이기까지. 마왕의 증표를 얻어낸 순간까지도 무심하기만 하던 소년은 내 앞에 멈춰 서자 왠지 조금 난감한 표정이 됐다.
“대부, 미안. 싸워버렸어.”
“…….”
고개를 푹 떨군 소년에게서 생각지 못한 사과가 흘러나왔다.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는 시선 가득, 내게 혼날까 봐 염려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조금 전까지 그 얼굴을 차지하고 있던 냉정한 위엄도, 마왕의 권위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내가 아는 소년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으, 으음. 어디 다친 곳은?”
“없어. 근데 나, 대부 곤란하게 했지?”
“아냐, 괜찮아.”
불안한 표정으로 묻는 아이에게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놀라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아스는 마계의 정점에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부드럽고 온화하게만 자랄 수도, 그래서도 안 됐다. 쓸데없는 살육은 막아야겠지만, 전투의 승리로 거둔 정당한 권리마저 참견할 순 없었다.
“왕이 된 거지?”
내 질문에 아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화났다고 생각하는 건지 여전히 힐끔거리며 우물거리는 모습이었다. 나는 아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굉장하다. 역대 최연소 마왕 아니야? 우리 아스 대단하네.”
“정말?”
“그럼 정말이지. 잘했어, 아스. 정말 잘해 냈어. 네가 자랑스러워.”
끌어안고 어깨를 토닥여주자 긴장으로 굳어 있던 소년의 얼굴이 비로소 밝아졌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내 또다시 시무룩해졌다.
“어떡하지, 대부. 사실은 아직 자랑하면 안 돼. 시간이 더 있어야 할 것 같아.”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권능이 없어졌어.”
“권능?”
“왕의 권능. 마계 심장부와 연결되는 감각이야. 그게 있어야 왕성도 복원할 수 있거든. 아까 전엔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제 안 돼. 봐봐, 문장 다시 사라졌지?”
그 말에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아스의 이마를 확인했다. 정말로 그렇게 선명하던 붉은 문장이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처음에 나타났던 하얀 테두리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헉, 정말이네? 왜 그러지? 자격을 받았으면 끝난 거 아니야?”
“응, 원래는 그게 맞아. 아마 내가 어려서 그런가 봐. 아직 성체가 아니라서.”
“그럼 진짜 왕이 되려면 성체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마족은 성체가 되려면 10년이 걸린다고 했었다. 인간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금 당장은 까마득하게 먼 훗날이었다. 얻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미 자격을 가진 상태에서 대기하는 기간만 강산이 바뀔 정도라니. 그 암담한 세월을 생각하니 내가 더 억울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데르온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실례지만 정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주군은 이미 성체입니다.”
“네? 아직 열 살이 아닌데도요?”
“사실 태어난 햇수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 나이가 성체의 기준이 된 건 그때쯤 힘을 각성하기 때문이거든요. 마족은 힘을 각성하면 그때부터 성체입니다. 주군처럼 이렇게 빨리 각성한 사례가 지금까지 전무했을 뿐이죠.”
“아, 그런 거였어요? 그럼 왕의 문장은 왜 사라진 걸까요?”
“짐작하기엔 주군의 기운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라 그런 것 같습니다. 신체가 아직 성장하는 중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 부분이 해결되면 문제없을 거라고 봅니다.”
“흠, 신체 발달이 완전히 끝나야 한다는 거죠? 그건 언제인데요?”
“각자 개인 차이는 있지만 마족의 발육은 대체로 1년 전후로 완전히 끝납니다. 주군은 평균보다 빠른 편이니 몇 개월 정도면 될 겁니다.”
“정말요? 그렇대, 아스. 그럼 조금만 기다리면 되겠다.”
“응.”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아스가 귀여워서 나는 다시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시벨리우스는 영 마뜩지 않은 표정이었다.
“성체면 이제 귀여운 척은 적당히 하지? 본인도 그러고 있는 거 민망하지 않냐?”
“아스는 원래 귀여워.”
“웃기지 마. 아깐 살벌한 기세로 거대한 낫을 휘둘러댄 주제에. 자기 이름을 자기가 부르는 건 또 뭐야? 정신 공격으로 세상을 압살할 작정이냐?”
“아스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으아아! 그런 거 하지 말라고!”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스를 보고 시벨리우스가 발작하듯이 몸을 벅벅 긁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약점을 고스란히 노출하다니, 오히려 더 하라고 부추기는 꼴인데 본인만 그걸 모르는 것 같다. 그에겐 안된 일이었지만 이미 시작하기도 전에 끝난 승부였다. 시벨리우스가 말로 아스를 이길 가능성은 앞으로도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젠장, 아무리 봐도 아직 꼬마인데! 저게 벌써 마왕이라니!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마족이 성체가 됐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어? 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어 가려고!”
“그만큼 내가 대단하다는 증거지.”
탄식하는 시벨리우스 옆에서 라피스가 느긋하게 자화자찬했다. 빈틈없이 공로를 챙기는 그를 향해 시벨리우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보냈다.
“그렇게 숨 쉬듯이 잘난 척하는 거, 질리지도 않냐?”
“그게 질릴 수도 있다는 게 더 놀라운데?”
“……됐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아무튼 이건 뿌듯해할 일이 아냐. 마족은 힘이 생기면 꼭 쓸데없는 욕심을 부려댄다고. 꼬맹이, 너! 넘치는 힘에 미쳐 가지고 천마대전을 다시 일으킨다느니, 인간들의 땅을 정복하겠다느니, 그따위 야망은 품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앞으로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 전 마왕의 전철은 밟지 말란 말이야. 알았어?”
“아스는 안 그래. 퍼런 엘프는 참 보는 눈이 없구나.”
“퍼런 엘프라고 하지 말랬지!”
무의미한 공방이 시작되면서 옥신각신 떠드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동안 데르온은 죽은 세르피스의 시체 앞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다가가 봤더니 작은 유리병에 피를 담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의 피로 계약자를 찾는다는 목적을 잊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당부하지 않아도 알아서 준비하는 모습을 보니 경험해 보지 못한 성실함이 느껴져서 감동스러웠다.
“다 한 거예요?”
그가 유리병 입구를 봉하는 것을 보고 묻자, 데르온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병을 품속에 완전히 갈무리한 후에도 그는 세르피스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은 채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숨을 쉬지 않는 아름다운 얼굴을, 차게 식어버린 몸을 응시했다.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데르온을 살펴보았다. 그와 세르피스는 같은 신분이었고, 함께 움직이던 동료였다. 서로 친근한 관계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관계가 전부라고 믿진 않았다. 북공작에 대해서도 늘 투덜거렸으나, 막상 그가 죽자 한동안 공허한 눈을 하지 않았던가. 세르피스를 대하는 자세도 크게 다를 것 같진 않았다. 서로 알아온 시간만큼 지금 이 순간에 차오른 감정이 매우 복잡할 터였다. 마지막 그녀의 모습이 덧없이 스러지는 것 같았기에, 아마도 그래서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