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95화 (295/608)

제295화

거기까지만 듣고도 라피스는 대강의 상황을 파악한 듯 보였다. 가볍게 혀를 찬 그가 더 말할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시벨리우스 역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셀만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상태였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인 후, 라피스가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타락하는 천사의 피를 삼켜 어둠을 꽃 피우다.」 고대 야만족인 세이렌이 사용하던 흑주술 중 하나야.”

“세이렌? 인어의 모습을 한 일족이라는…….”

“맞아, 인어.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일족은 타인의 육신과 정기를 훔쳐서 살아. 축복받지 못한 일족이라 신관의 성력에 유독 집착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마신관의 힘을 탐냈어. 그들 일족과 가장 상성이 잘 맞는 힘이었거든. 성인은 사로잡기 어려우니까 주로 어린 신관들을 노렸는데, 원하는 만큼 성력을 얻어내기 힘들어지자 그 주술을 만들어냈어. 결국 그로 인해 마신의 분노를 사 일족 전체가 멸망했고.”

그러고 보니 인어가 있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블루 엘프 종족의 탄생 설화라고만 생각했는데, 실제로 존재한 일족이었던 모양이다. 공교롭다고 해야 할지. 내게 그 이야기를 들려줬던 사람이 신관인 카이테인이었다. ‘그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상당히 흥미진진해 했을 텐데.’ 이런 순간에도 어이없을 정도로 태평한 생각이 지나갔다. 아마도 현실도피에 가까울 테지만.

“마신의 성력은 파괴와 저주를 일으키는 힘이라 기본적으로 어둠에 속해. 그 주술은 바로 그 어둠을 악의적인 방향으로 강화하는 방법이야. 그리고 그 과정엔 소유주인 신관의 심리 상태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쳐.”

“심리?”

“배신감과 절망. 이 두 가지 감정에 사로잡힌 채 죽어야 해. 모든 것을 다 잃은 절망감에 자신의 신을 원망하고 증오할 때까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피를 흘려야 하지. 말 그대로 타락하는 천사가 되는 거야.”

“……!”

“그래서 그 주술은 보통 가까운 사람을 이용하게 되어 있어. 과거 세이렌들은 부귀와 젊음을 약속하고 마신관의 지인을 꾀어내, 의식에 참여하도록 했지.”

“참여라니…….”

“그래야 더 큰 배신감을 느끼고, 더 많이 절망할 테니까.”

“그럼 단순히 상황을 은폐하는 정도가 아니라…….

“살해 과정에도 동참하는 거지.”

듣고 있는 것이 괴로워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처음 이 저택에 왔을 때 느꼈던 감정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거머리처럼 눌어붙어 있는 붉은 사념 덩어리들을 보며 끔찍하고 처참하다고 생각했었다. 누군지 몰라도 여기서 죽은 사람은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 살해당했을 거라고.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을 재확인한 것뿐인데 왜 이렇게 충격을 받는 걸까. 나는 삼킨 숨을 길게 토해냈다. 무심코 한 행동이었는데 생각보다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도움이 됐다. 새하얗게 물들었던 시야가 천천히 맑아지면서, 함께 아득해지던 감각도 다시 되돌아왔다. 어느 정도 진정하고 났더니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살인자를 찾아야겠어.”

나직하게 뱉은 말에 시벨리우스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피스는 뜻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저택 사람들이 죽은 아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왜인 것 같아?”

“기억을 지우는 주술, 또는 암시에 걸린 거 아니겠어?”

“정말 이 일의 배후에 마왕이 있는 걸까?”

“글쎄.”

“그거, 모르면 내가 대답해도 돼?”

“……!”

돌연 들려온 음성에 나는 흠칫 놀라서 돌아보았다. 내 옆쪽에 놓인 서랍장, 그 위에 한 소년이 앉아 있었다. 새카만 흑발을 길게 늘어트린,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년이었다.

“어…….”

“암시라면 그자일 가능성이 높을 거야. 카류안은 최면술을 잘 쓴다고 했거든.”

소년은 저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을 느긋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알던 것보다는 조금 더 낮은 목소리였고, 훨씬 더 매끄러운 화법을 사용했지만, 티 없이 맑은 눈빛은 그대로였다.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아스?”

“대부, 안녕.”

멍해진 나를 향해 소년, 아스모델이 방긋 웃었다. 시선을 조금 돌렸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 데르온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가볍게 묵례를 건넸다.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눈앞의 상황에 너무 집중하고 있느라 방 안에 다른 기척들이 새로 더해졌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두 마족이 드디어 돌아온 거다. 나는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세상에…….”

잠시 보지 못하던 사이에 젖살이 통통했던 소년은 훌쩍 커지고, 더 아름다워져 있었다. 그동안 훈련한 결과인지, 육체에 넘쳐흐르던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산처럼 고요해졌음에도 오히려 존재감은 더 강렬해진 것 같았다.

마음이 벅차올라 뜨거워졌다. 두 팔을 내밀었더니 아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뛰어 내려와 덥석 안겨들었다. 하나뿐인 대자의 사랑스러운 체온이 품 안 가득 전해졌다. 복잡하던 머릿속을 단숨에 잊을 만큼 다정한 감각이었다.

“보고 싶었어.”

* * *

자정을 넘긴 하늘은 짙은 먹물에 잠겨 들었다. 흩뿌려진 빛의 잔해가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오려는 것처럼 광채를 뿜어내도 폭포수처럼 뒤덮은 어둠을 떨쳐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오늘 밤은 구름마저 짙었다. 새카맣게 물든 공간에선 밤을 지배하는 달마저 맥을 못 추고 자취를 감췄다. 온전한 암흑이었다.

빛을 잃은 대지엔 그 대신 고요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몰려드는 수마에 몸을 맡긴 지 오래였다. 이따금씩 울리는 풀벌레 소리가 아직도 잠들지 않은 자들을 책망하는 듯했다. 정작 그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었지만.

“여기에 이렇게 그리면 되는 건가?”

“응. 근데 저쪽 선 삐뚤어졌어.”

“윽, 다시 그려야겠다.”

한밤중의 작전은 은밀하고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거사를 치르는 장소로는 저택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으슥한 창고를 택했다. 라피스와 시벨리우스, 아스와 데르온. 네 사람만이 이 자리에 동행했다.

나는 들고 있는 종이에 적힌 대로, 바닥에 여러 형태의 그림과 문자를 써내려 갔다. 이미 완성된 원형의 테두리에는 각 방위에 맞춰 촛대를 하나씩 놓아두었다. 촛대 아래엔 끝을 가볍게 태운 사각형의 무명천을 받쳐 둔 상태였다.

“여기까진 다 됐고. 그다음은…… ‘물이 담긴 그릇을 중앙에 둔다.’ 좋아, 이것도 완료.”

미리 준비해 둔 그릇을 원형 안에 배치한 후, 물을 채웠다. 그러고 나니 어느새 필요한 조건을 거의 다 채워 가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단계만 완성하고 나면 완벽했다. 그 사이 어둠은 더 짙게 내려앉은 상태였다. 계획을 실행하기에도 알맞은 시각이었다.

“이제 그거 차례인데…… 정말 괜찮겠어, 아스?”

“응, 괜찮아. 날 믿어, 대부.”

곁에 다가온 아스가 생긋 웃었다. 그가 완성된 진 앞에 자리 잡고 앉는 것을 나는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몸을 굽힘에 따라 결 좋은 긴 흑발이 그의 어깨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네 개의 촛대에서 위태롭게 타오르고 있는 촛불의 노란 빛들이 아스의 얼굴 위에 짙은 음영을 그려냈다.

한동안 바닥에 그려진 그림들을 훑어 내리던 아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입술에 가져갔다. 무언가 짓이겨지는 소리가 들린 순간, 그의 손가락을 타고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피부를 깨물어 상처를 낸 것이다.

공기 중에 피 냄새가 섞이기 시작했다. 아스는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을 그대로 그릇 속에 담갔다. 안에 담겨 있던 맑은 물이 그의 피를 삼키고 순식간에 검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보기만 해도 괴로운 광경이었지만 차마 그만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 모든 과정은 이 순간을 위한 거였으니까.

「소원을 들어주는 마녀.」

바로 그 의식을 완성하기 위해서.

“마녀는 아마 세르피스일 겁니다.”

표정만큼이나 무뚝뚝하던 데르온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깜짝 선물처럼 나타난 두 마족과 감격스럽게 해후한 이후. 서로 마주 앉아 본격적으로 지난 안부를 묻던 자리에서였다.

못 본 사이 더 훤칠해진 아스는 이제 어디를 봐도 어린이로 보이진 않았다. 이미 짐작한 것처럼 알리사의 키도 따라잡은 것 같았다. 그는 제 이야기를 털어놓기보다 이쪽의 상황을 더 궁금해했고, 그건 데르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창 심각하던 우리들의 분위기. 더불어 마왕의 존재까지 언급된 상태였으니, 회포를 풀기보다 이쪽의 상황을 더 우선시할 만도 했다. 나는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했고, 데르온은 두고 볼 필요 없이 마왕이 관여한 일이라고 단정했다. 또한 그것을 전제로 떠돌아다니는 미신의 주체인 ‘마녀’의 정체까지 어렵지 않게 짐작해 냈다.

“세르피스. 누군지 알 것 같아요. 데르온이랑 같이 다니던 그 여자 말이죠?”

“네, 맞습니다. 서(西)공작 세르피아네스. 저와 같은 계급의 고위 귀족입니다.”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데르온을 처음 대면했을 때, 그에겐 일행이 한 명 있었다. 화려하게 나풀거리는 흑발을 발끝까지 늘어트린, 매우 매혹적인 분위기를 지닌 여인이었다. 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엉뚱하고 담담해서 호감을 주었던 데르온과는 달리, 여인 쪽은 우리를 향한 적의를 숨기지 않아 편하게 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 동료인 데르온을 내버려 두고 혼자 달아나는 바람에 나를 꽤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때 그렇게 가 버린 매정한 마족 여성의 이름이 바로 세르피스였다고 들었다. 당시의 일이 생각났는지 데르온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서공작의 자리는 주술에 가장 능한 자가 차지합니다. 세르피스는 역대 서공작 중에선 가장 능력치가 떨어지긴 합니다만, 이론만큼은 누구와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사장된 흑주술을 많이 알고 있었죠. 타락하는 천사의 주술이란 것도 그녀가 전해 준 지식일 겁니다.”

“마왕은 마신에게 봉인되었다가 탈출했잖아요. 지금도 금제에 걸려 있는 상태고요. 그걸 알면서도 돕는 걸까요?”

“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만. 제가 마지막으로 세르피스를 봤을 때 그녀는 카류안에게 흠뻑 빠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마신을 저버리고 카류안을 택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렇지 않아도 기울어졌던 저울추가 완전히 한쪽 바닥에 닿았다. 드러나는 모든 부분들이 마왕과의 관계성을 시사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는 마왕의 짓이 아니라고 하는 게 오히려 더 당황스러울 것 같았다.

결국 그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거구나.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에 쓴 한숨이 흘러나왔다. 대공만 견제하고 있다가 보기 좋게 농락당한 기분이다. 신계 쪽에선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어디까지 대비해 두고 있는 걸까? 하다못해 엘뤼엔에게만이라도 이 상황을 전해 둘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막힌 통신로가 새삼 갑갑하게 느껴졌다.

“일단 세르피스가 하는 일부터 막아야겠어요.”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아마 그녀를 잡으면 공범자가 누군지도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다음으로 이어진 말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마녀’는 이 저택 안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의 모든 내막을 알고 있는 증인이기도 했다. 내가 직접 용의자를 추려내기보다 그녀를 추궁하는 쪽이 더 빠를지도 몰랐다.

“그녀가 순순히 자백할까요?”

“자백을 받아낼 필요도 없습니다. 그녀의 피로 찾을 수 있습니다.”

“……! 정말요?”

“서로 계약을 맺었을 테니까요. 위험부담이 큰 일엔 의심이 앞서기 마련이죠. 상대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해서라도 세르피스 쪽에서 먼저 그자에게 계약을 제안했을 겁니다. 제가 그 흔적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무미건조한 데르온의 목소리가 이 순간엔 마치 천사의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막막하기만 하던 여정에 드디어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마음이 들뜨는 걸 진정하기 위해 나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결말의 과실을 알았을 뿐, 아직 실제로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당장 세르피스를 찾기도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방법을 고심하는 내게 데르온이 제안했다.

“그 미신이라는 걸 활용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미신이요?”

“소원을 들어주는 마녀를 부르는 의식 말입니다. 아마 소환 주술이겠지만. 우리 쪽에서 그녀를 찾아다니기보다, 그쪽에서 우리를 찾아오도록 유도하는 겁니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하지만 기쁜 마음은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다. 홀가분해지기도 잠시, 나는 곧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 심란해졌다.

“하지만 그걸 하려면 마신관의 피가 필요한데요…….”

그랬다. 이 계획엔 반드시 성립해야 하는 전제가 있었다. 바로 의식을 완성해야 한다는 것. 그걸 위해선 일단 마신관이 있어야 했다. 그것도 신의 문장을 지닌 ‘진짜’ 마신관이. 그 주술은 마신의 성력을 품은 피에만 반응할 테니까.

진짜 마신관이 얼마나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인데, 그 피는 또 어디서 구할 것인가. 세르피스를 직접 추격하는 것만큼이나 이쪽 역시 만만치 않은 난제였다. 내게도 마신의 문장이 있긴 하지만 애초에 이 육체는 임시적으로 구성된 거라 눈속임에 가깝다. 만져져도 실제 사람의 피부가 아니고, 피가 흘러도 진짜 피는 아니었다. 당연히 같은 효과를 낼 리가 없었다.

“괜찮아, 대부. 내 거 쓰면 돼.”

낙담하고 있는 내게 명랑한 아스의 목소리가 닿았다. 나는 당황해서 돌아보았다.

“내 거라니. 아스, 네 피를 말하는 거야?”

“응. 마족의 유체는 마신의 축복을 받아. 그래서 성력도 깃들어 있어. 마신관이랑 비슷해.”

“……!”

그건 또 몰랐던 부분이었다. 안 그래도 예뻐 죽을 것 같은 아스의 얼굴이 더더욱 천사처럼 보였다. 감격해서 와락 끌어안자 아스가 품속에서 까르륵 웃었다. 키가 커지고 분위기가 변했어도 사랑스러운 성격은 여전했다.

“그럼 다음 할 일이 정해졌네.”

그 모든 과정을 한심하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던 라피스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오늘따라 그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저택 안에서 뒹구는 일상을 내내 지루해하더니, 지금 상황이 즐거운 것 같았다. 뒤따라 일어난 시벨리우스도 단단히 각오를 굳힌 얼굴이었다.

“본격적으로 마녀 사냥을 해 보자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