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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294화 (294/608)

제294화

좀처럼 풀리지 않는 답에 잠시 약해졌던 마음은 그날 오후에 다시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홀 한쪽에 있는 거대한 벽난로, 그 안에서 우연히 발견한 작은 책 한 권이 원인이었다. 고급 가죽 커버가 씌워진 책이 타다만 채로 남아 있었다. 마신의 성서라는 건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것도 어린이용으로 제작된.

「율리아」

표지 안쪽엔 또박또박한 필체로 세 글자의 단어가 적혀 있었다. 율리아. 낯익은 이름의 주인이 누군지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바논 백작의 셋째 딸이다. 무정한 아버지가 딸의 책까지 불쏘시개로 쓴 모양이다. 쯧쯧, 그냥 가볍게 혀를 차고 넘길 수 없었던 건 그 다음 장에 적힌 글귀 때문이었다.

나의 신. 나의 주인. 나의 아버

사랑해요, 카노스 님.

영광스러운 신전에 들어갈 날만을 기

홀로 영광 받으시길.

당신의 종, 율리아가 기도합

“으음…….”

종이 끝부분이 타들어 가 내용이 끊기긴 했지만, 상당히 정성스럽게 작성한 기도문이었다. 적어 내려간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마신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셋째 딸이 신관이 되고 싶어 했던 게 진심이긴 했던 것 같았다.

듣기만 했을 땐 놀랍기는 해도 크게 와 닿지는 않았는데, 막상 이런 신실한 기도문을 확인하고 나니 가슴 안에서 무언가가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내가 카노스와 개인적인 친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곳에 숨겨져 있는 진실을 파헤쳐야겠다는 생각이 더 확고해졌다. 사실이라면 사실 그대로, 아니라면 아니라는 증거라도.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리지 못하면 영원히 찝찝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일단 이 율리아라는 소녀를 만나서 얘기를 해 볼까.’

직접 만나서 분위기를 살피면 뭔가 감이 잡힐지도 모른다. 대놓고 독대를 청하는 건 수상하게 여겨질 테니 우연을 가장해서 만나 봐야 할 것 같았다. 어떤 식으로 접근해 볼지는 이제부터 고심해 봐야겠지만. 그렇게 결심을 굳히고 막 계획을 구상할 때였다.

“어, 형이다.”

명랑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더니 하인 복장을 한 소년이 보였다. 지난번에 우연히 마주쳤던 소년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성서를 품속에 갈무리해 넣었다. 타다 남은 걸 벽난로에서 꺼낸 걸 알면 소년이 곤란해할 것 같았다.

“안녕, 또 보네.”

“안녕하세요. 뭐하고 계세요?”

“응, 그냥 용건 없이 배회하는 중이었어. 너는?”

“저는 화구를 옮기고 있어요. 막내 아가씨가 그림을 그리신다고 하셔서요.”

“……그래?”

그 말대로 소년은 종이와 붓을 비롯한 갖가지 미술 용품을 한가득 끌어안고 있었다. 마침 막내딸한테 가는 거라니 잘됐다. 노골적인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마주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감추며 소년에게 다가섰다.

“혼자 들기엔 짐이 많은 것 같네. 내가 들어다 줄게.”

“또 도와주시려고요? 이건 많이 무겁지 않아서 저 혼자서도 괜찮은데.”

“어차피 지금 별로 할 일도 없거든.”

이미 한 번 도와준 전례가 있어서인지 소년은 별다른 의심 없이 선선히 짐을 나눠주었다. 이래서 사람은 평소에 선행을 베풀어야 하는 건가 보다. 왠지 악용하기 위해 포석을 깔아둔 것 같아서 미묘한 기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딱히 나쁜 짓을 하려는 건 아니니까. 문제는 없을 거다. 아마도.

“한나 아줌마. 화구들을 가져왔…….”

나와 소년은 가벼운 잡담을 나누면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막상 방에 들어가려 하자 묘한 상황이 펼쳐졌다. 문을 열기 무섭게 안에서 튀어나온 여인이 두 손을 내저었기 때문이다.

“한나 아줌마?”

“쉿!”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소년을 향해 한나라고 불린 여인이 속삭였다. 숨을 죽이도록 종용하는 태도의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문틈에서 새어나오는 소리 덕분이었다.

“으아아아앙!”

그건 서글프게 흐느끼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였다. 아마도 이방의 주인인 율리아의 것이 분명한. 소년도 그 소리를 듣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한데 그냥 돌아가야겠다. 보다시피 상황이 별로 좋지 않구나.”

여인은 이쪽은 제대로 돌아보지도 않고 곧바로 문을 닫았다. 눈앞에서 매몰차게 닫히는 문을 보고 소년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어색하게 웃었다.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 있나 봐요.”

“……흠.”

판단을 내리기까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자리에서 물의 기억―정령의 눈―을 사용했다. 문 너머에 있는 정령들의 시야를 빌리자 일시에 모든 주위가 투명해진 듯한 착각이 일었다. 훤히 드러나 보이는 방 안, 침대 위에 엎어져 울고 있는 작은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한나라고 했던 여인이 옆에 앉아 열심히 달래고 있었다.

“아가씨, 이제 그만 우세요. 그러다 탈진하시겠어요.”

“흐으윽! 어어엉!”

“마님을 만나지 못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거 아시잖아요. 요즘 입덧이 많이 심하시니까요. 아가씨를 피하시려고 거절하신 게 아니에요.”

아무래도 백작 부인과 만나기로 했다가 일정이 취소된 모양이다. 그게 저렇게까지 울 일인가 싶었지만, 소녀의 나이가 아직 아홉 살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납득했다. 아무래도 어린아이다 보니 서운함을 더 크게 느끼는 것 같았다.

“그치만! 언니들은 어머니 방에 찾아가도 만나주시잖아! 어머니 쪽에서 언니들 방에 방문하는 일도 많고! 티타임도 같이 하신단 말이야!”

“그, 그거야…… 두 아가씨는 사교계에 데뷔하실 시기잖아요. 특히나 멜리나 아가씨는 곧 수도에 있는 학교로 올라가실 예정인걸요. 그래서 마님이 특별히 신경 쓰시는 것뿐이에요.”

“거짓말! 어머니는 날 미워해! 내가 딸이라서 그런 거지? 아들이라고 많이 기대했는데 낳고 보니 딸이어서! 그래서 날 죽이려고도 했었다면서! 다 알아!”

“세상에, 아가씨! 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기겁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듣고 있는 나도 당황스러운 내용이었다. 딸이라서 죽이려고까지 했었다니. 백작 부인이 그렇게까지 자녀의 성별에 집착하는 편이었나? 그러고 보니 현재 잉태 중인 아이가 꼭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긴 했었던 것 같다. 어감상 하나쯤은 아들이어도 좋겠다는 느낌이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 제국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가벼운 의미는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스왈트 제국에서 귀족 작위는 아들을 우선으로 승계된다. 딸이 받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거의 드문 편으로, 직계 가족에 아들이 없으면 사촌의 아이라도 입양해 오는 편이었다.

백작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부인의 입장에선 아무도 재촉하지 않더라도 후계자에 대한 압박이 컸을 거다. 심지어 백작가이니 초조해질 만도 했다.

“아가씨, 그땐 마님이 제정신이 아니셨어요. 바로 정신을 차리시곤 얼마나 자책하셨는데요. 지금도 항상 미안해하시고 계세요. 너무 미안해서 아가씨 얼굴을 보시는 게 힘드신가 봐요.”

“거봐! 역시 날 피하는 거 맞잖아!”

“그, 그게…… 아이고, 제가 실언을 했네요. 아니에요, 아가씨, 마님이 정말 그러시다는 게 아니라, 그냥 제 생각이 그렇다는 얘기였어요. 마님은……!”

“몰라! 전부 다 미워!”

울음소리가 조금 전보다 더 커졌다. 달래려는 시도가 오히려 서러움만 재확인시켜 준 꼴이었다. 나는 가볍게 혀를 차곤 연결을 차단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려고 온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생각지 못한 정보를 얻은 건 나쁘지 않았다.

“형, 죄송해요. 여기까지 도와주셨는데.”

“아냐, 죄송하긴. 네 탓도 아닌걸. 이거 다시 원래 장소에 돌려놓으러 가야 하지? 그럼 가 볼까?”

“네.”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년을 다독인 후 우리는 걸어왔던 길을 그대로 밟아 돌아가기 시작했다.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는 내내 소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정말 운이 나빴어요. 아네스 아가씨는 평소에 정말 밝은 분이시거든요. 울거나 투정부리는 일도 별로 없으신데 갑자기 왜 기분이 나빠지셨는지. 시기가 너무 안 좋았나 봐요.”

“뭐, 그럴 수도 있…… 근데 아네스라니?”

“아, 막내 아가씨 이름이에요.”

“……음?”

나도 모르게 걸음이 정지했다. 우뚝 멈춰서는 나를 소년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형, 왜 그러세요?”

“저기, 방금 막내 아가씨 이름이 아네스라고 한 거 맞아? 율리아가 아니라?”

“율리아? 그게 누군데요?”

아무렇지 않게 돌아오는 반문에 얼빠진 쪽은 나였다. 너무 태연한 얼굴이라 한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의심했을 정도였다. 나는 조금 당황스러운 기분으로 물었다.

“셋째 아가씨 이름이 율리아라고, 네가 전에 그러지 않았어?”

“아, 네 맞아요. 셋째 아가씨 이름은 율리아죠.”

“……막내는 아네스라며?”

“네, 막내 아가씨 이름은 아네스예요.”

“셋째가 막내 아니야?”

“그렇죠. 백작님의 딸은 셋이니까요.”

“그럼 율리아는 뭔데?”

“율리아가 누군데요?”

“…….”

이거 좀 뭔가 이상한데.

대화가 매우 난해한 방향으로 튀고 있는데 소년은 그걸 전혀 깨닫지 못하는 눈치였다. 맑고 곧은 눈동자를 보아 장난을 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왠지 뒤통수가 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품 안에 넣어둔 어린이용 성서의 감촉이 새삼스럽게 와 닿았다.

당신의 종, 율리아.

애정이 담뿍 담겨 있던 글귀도.

나는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은 후, 멀뚱하게 서 있는 소년을 향해 말했다.

“있잖아. 내가 여기 아가씨들 이름을 하나도 모르거든. 네가 차례대로 알려주지 않을래?”

“아가씨들 이름이요? 으음, 첫째 아가씨는 멜리나고요, 둘째 아가씨는 아밀라예요. 셋째 아가씨는 율리아, 막내 아가씨가 아네스죠.”

“……바논 백작의 딸이 넷이라고?”

“아뇨, 세 명인데요?”

“으음, 그래. 네 기억에 문제가 있다는 건 잘 알겠어. 그냥 다른 식으로 물어야겠다.”

“네?”

“……혹시 율리아가 마신의 문장을 갖고 있었어?”

질문을 듣는 순간 소년이 눈을 크게 떴다. 이어지는 대답에 나는 입술을 악물어야 했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 * *

필요한 용무를 끝마치고 귀환하는 발길이 천 근처럼 무거웠다. 평소엔 거의 걸어서 다니는 편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 나는 곧장 언령을 사용했다. 공간을 이동해서 도착하자 방 안에 있던 일행들이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엘?”

“에, 엘 님?”

안에선 시벨리우스와 아셀이 한창 주술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라피스는 그 뒤편의 침대에 누운 채로 책을 읽고 있었다.

“웬일이야? 공간 이동은 잘 안 쓰더니 왜 갑자기…….”

반기며 몸을 일으키던 시벨리우스가 갑자기 사납게 얼굴을 굳혔다.

“너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바로 걱정하는 걸 보니 지금 내 표정이 상당히 엉망이긴 한 모양이다. 황급히 다가온 시벨리우스가 분주히 내 모습을 살피기 시작했다. 괜찮다는 뜻에서 고개를 젓긴 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힘없는 모습이긴 했다. 오히려 불안하게 만들었는지 시벨리우스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근데 공간 이동도 할 줄 아시는 건가요…….” 소심하게 중얼거리는 아셀의 목소리는 그대로 묻혔다. 그 사이 라피스는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가 침대에서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는 것을 보며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라피스. 전에 얘기하다 만 거 다시 제대로 설명해줘.”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마신관의 피를 증폭시킨다는 어둠의 주술, 그거 말이야. 그게 뭐라고?”

“…….”

무심하게 응시하던 붉은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나를 살피던 시벨리우스의 시선 역시 멈췄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일렁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율리아 아가씨요, 오른쪽 팔에 마신의 문장이 나타났대요. 정말 굉장하죠?”

“백작님이 조만간 신전에 서신을 보내신다고 하셨어요. 마님이 그때까진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는데, 형은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근데 제가 방금 무슨 얘기를 했죠?”

재잘거리던 소년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마지막 순간 나를 돌아보던 텅 빈 눈동자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설마 하는 심정에 저택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접근해 같은 방식으로 질문을 건네 봤다. 그랬더니 전부 똑같은 반응이 돌아왔다.

모두가 율리아를 알지만, 동시에 아무도 알지 못했다.

눈앞을 가리고 있던 모든 것들이 선명해졌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벌어져서 머릿속이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마음이 짓이겨지는 것처럼 참담했다.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에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억지로 참고 견디지 않으면 큰 사고를 칠 것 같았다. 이 갑갑한 울분을 쏟아야 할 곳이 필요했다. 방에 돌아온 건 그 장소를 제대로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뭔가 알아냈나 보지?”

라피스가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걸터앉았던 침대에선 어느새 몸을 완전히 일으킨 상태였다. 그가 소파 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을 눈으로 좇으며, 나는 살짝 심호흡했다.

“백작한테 딸이 하나 더 있었던 것 같아.”

“흠.”

“그런데 아무도 그 아이를 기억 못 해. 흔적은 남아 있는데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어. 마치 기억의 한 부분만 도려내진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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