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엘퀴네스-293화 (293/608)

제293화

“그러니까, 이 저택 안에서 누군가가 살해당했다는 거군요?”

그런 고달픈 시간을 겪어온 탓인지 수업에 임하는 아셀의 태도는 경건한 수준을 넘어서 비장할 정도였다. 집중하다 못해 반짝거리는 눈빛은 원하던 것을 성취하는 기쁨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덕분에 사람이 죽은 무거운 사건을 굉장히 즐거운 표정으로 말하는 기괴한 상황이 연출됐다. 그래도 곧바로 표정을 다듬는 걸 보면 본인도 그 사실을 깨닫긴 한 모양이었다.

“사실 이번엔 저도 뭔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으스스하고 광범위한 형태로 묻어 있는 건 처음 봤거든요. 그동안은 조금 심해 봤자 일부가 더러운 정도였죠. 그런데 온 사방에 피 칠갑이라니.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르실 겁니다.”

“알아요. 오자마자 구토했었잖아요.”

“크흠, 부끄러운 기억이니 그건 잊어 주세요. 조건반사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썩은 피 냄새가 너무 역해서 견디기가 어렵더라고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냄새도 느껴요?”

“네, 두 분은 안 그러십니까?”

“난 그 정도로 영향을 받지는 않거든요. 아마 시벨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치?”

“응.”

확인을 위해 돌아봤더니 옆에 있던 시벨리우스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피스는 끼지 못하는 대화가 짜증 난다는 이유로 밖으로 나간 지 오래였다.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요?”

“그 냄새가 사념이 일으키는 환각의 일종이라는 거예요. 아마 그런 걸 환후라고 하죠? 혹시 보이는 장소에서만 냄새가 느껴지지 않아요?”

“아, 정말 그러고 보니…….”

중얼거리는 아셀은 큰 깨달음을 얻은 얼굴이었다. 그는 부럽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정말 좋으시겠네요. 솔직히 말하면 보는 것보다 냄새를 견디는 게 더 힘들거든요. 다른 건 그나마 괜찮은데, 쉰 냄새라든가 토사물 냄새 따위가 날 때면 한시도 그곳에 있기가 싫어지죠. 거의 재앙이나 다름없어요.”

“……윽, 그건 정말 말만 들어도 괴롭네요.”

토사물 냄새라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린다. 고초가 컸을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설마 이런 고역도 있었을 줄이야. 과연, 그 상황에 처하지 않은 사람이 아무리 구체적으로 상상해 봤자 실제 경험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제까지가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다면, 나는 이번엔 경의를 담아 아셀을 응시했다. 그런 환경에서 용케 삐뚤어지지 않고 참하게 잘 컸구나. 평민 출신인 그가 제국의 태자를 보좌할 정도면 정말 많이 노력하며 살았을 거다. 그런 걸 생각하니 더 대견하게 보였다.

“그런데 그런 악취보다도 이 저택의 피 냄새가 더 괴롭습니다. 얼마나 지독한지, 술을 마셔도 제대로 가시질 않더라고요. 내내 피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기분이었어요.”

회상하는 동안 아셀은 진저리가 난다는 얼굴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악령이 스며 있는 흔적인 줄만 알았는데, 죽은 사람의 원념이었다니. 사연을 알고 보니 더 끔찍하기만 합니다. 대체 어린애를 어떻게 죽였기에 이런 참혹한 형태를 남긴 걸까요?”

“아마 그다지 고운 방법은 아니었을…… 근데 어린애라고요?”

“네, 피해자가 어린애 아닙니까?”

“글쎄요, 나도 거기까지는 몰라요.”

피해자에 관한 조사는 이제 막 시작된 참이다. 아직 실종자의 존재 여부부터 파악하는 단계에 불과했다. 당연히 나이는커녕 성별도 몰랐다.

“아셀은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본 것 같아서요.”

“봤다니. 피해자를요?”

어리둥절해져서 바라봤더니 아셀이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오물, 그러니까 사념이라는 것 말입니다. 그게 묻어 있는 곳에 가면 유령 같은 게 나타날 때가 많거든요. 가는 곳마다 각각 다른 형태를 보이는데, 여기선 그게 어린아이 모습이었어요. 지금까지는 악령이 사람의 모습을 흉내 내는 거라고만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혹시 그게 피해자의 모습은 아닐까 싶어서요.”

“……! 그거 일리 있네요.”

비록 찌꺼기에 불과하긴 하지만 사념 자체는 영혼이 남기고 간 흔적이다. 환각을 일으킬 때 생전의 모습을 투영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법했다. 나나 시벨리우스는 사념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알 수 없던 부분이었다. 시벨리우스도 이채 어린 얼굴로 거들었다.

“그렇게 치면 원념을 남기는 것이기도 하니까, 반대로 가해자의 모습을 투영하는 걸 수도 있어. 영혼이 본 마지막 기억이 각인되었을 테니까.”

“오오, 그것도 그렇네. 근데 어린애가 가해자일 가능성은 별로 없지 않을까?”

“직접적으로 죽이진 않았더라도, 원인 제공을 했을 수는 있겠지. 적어도 살해 현장에는 있었을 거야.”

“흠.”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유력한 정보를 얻게 될 줄은 몰랐다. 진실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단 아는 대로 다 말해 줄래요, 아셀? 그 아이의 모습이 정확히 어떻게 생겼어요?”

“생김새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신장이나 체구를 봤을 땐 많아 봤자 아마도 십 대 초반쯤, 머리가 길었던 걸 보아 성별이 여자애라는 것 정도일까요?”

“얼굴은 본 적 없어요?”

“예, 아쉽게도. 자고 있을 때 스쳐 가는 다리를 보거나, 웃음소리를 듣는 정도라서요.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보면 재빨리 달아나는 편이라 제대로 본 건 뒷모습뿐입니다.”

……그거 거의 공포 영화 수준 아닌가.

담담한 어조와는 달리 내용을 짚어볼수록 오싹하기만 한 연출이라 식은땀이 저절로 흘렀다. 아셀은 이미 익숙한 일이라서 그런지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안 무서웠어요?”

“무섭죠. 얼마 전엔 긁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나더라고요. 무심코 위를 올려다봤는데 천장에 붉은 손바닥 자국이 빠르게 찍히기 시작하더군요. 그 자국에서부터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서 제 정수리와 이마를 흥건히 적셨어요. 소름 돋아서 꼼짝도 못 하고 있는데 얼굴 옆에서 작은 손이 기어 나와서는 제 뺨을 더듬더라고요.”

“헉…….”

“결국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더니 바로 사라지긴 했어요. 그래도 그 촉감은 지워지지 않았지만요. 너무 끔찍해서 그날은 미친 듯이 술을 퍼마셨죠.”

그 결과는 아실 테니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아셀이 해탈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마무리 지었다. 나는 그가 폐인처럼 이불 속에 숨어 있던 모습을 다시금 상기했다. 방금 전 고백한 공포 체험이 바로 그 직전에 경험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싫은 기억이었을 텐데 떠올리게 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원인을 몰랐을 땐 그저 두렵기만 했지만 이제 정체를 아는걸요. 오히려 제 경험이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쁩니다. 뭣하면 지금 복도에 나가서 제대로 환각을 겪어보고 올까요? 이번엔 얼굴을 보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헉, 아뇨!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요.”

“전 정말 괜찮은데……. 아, 그러고 보니 그 여자아이 말입니다. 레이스와 자수 장식이 달린 드레스를 입고 있었습니다. 머리카락 색은 어두운 금발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밝은 갈색에 가까웠던 것도 같네요.”

“레이스와 자수 드레스? 일하는 아이는 아닌가 보네.”

묵묵히 대화를 듣고 있던 시벨리우스가 지나가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내가 주목한 건 그 다음 부분이었다. 고급스러운 의상. 십 대 초반의 소녀. 그리고 갈색에 가까운 어두운 금발이라……. 거기까지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미간이 좁혀졌다.

“……지금 막, 굉장히 싫은 생각이 들었는데.”

“뭔데, 엘?”

아셀과 시벨리우스가 나란히 응시해 오는 것이 느껴졌다. 대답을 기다리는 시선에도 입이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다 한숨을 내쉬었다.

“바논 백작의 딸들. 머리색이 모두 금갈색이었지.”

* * *

바논 백작가의 꽃들이라 불린다는 세 자매는 조용하고 수줍음 많은 성격이었다. 같은 여자인 데다가 또래이기도 하니 알리사와 잘 어울리게 될 줄 알았는데, 그다지 친하게 지내진 않았다. 함께하는 시간이라고 해 봤자 백작 부인의 주관으로 간간이 여인들만의 티타임 시간을 갖거나 가벼운 담소를 나눌 때 정도였다. 그렇다고 무례하게 대한다거나 감정이 상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서로 친근하게 대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거리가 잘 좁혀지지 않는 쪽에 속했다. 물과 기름처럼, 타고난 성정 자체가 달라서 어울리지 못하는 부류. 딱 그런 느낌이었다. 거기까지가 내가 알고 있는 그녀들의 전부이기도 했다.

“백작 영애들?”

짙은 오렌지로 물들인 듯한 눈동자가 크게 깜빡거렸다. 느닷없는 것을 물어본다는 듯이 쳐다보는 알리사를 향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리사. 네가 보기엔 그 자매들 어때?”

“그건 갑자기 왜?”

“그냥. 여자는 같은 여자가 더 잘 본다고 하잖아. 네가 내리는 평가가 궁금해서.”

“흠.”

알리사는 대놓고 수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생각을 정리하는 듯 고심했다. 무난한 평가가 나올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이어진 알리사의 대답은 첫마디부터 강렬했다.

“일단 첫째는 여우야. 그것도 완전 불여우.”

“정말?”

“정말. 그 여자, 그렇게 안 보이면서 사실은 야욕이 엄청난 거 알아? 이사나 씨한테 엄청 추근거려. 그 여자가 백작 부인을 부추긴 건지, 부인 쪽에서 주도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두 사람끼리 이사나 씨를 찾아가서 티타임도 청하고 그러더라고. 내가 목격한 것만 벌써 다섯 번이 넘어.”

“그랬단 말이야? 전혀 몰랐어.”

“엘 님은 요즘 계속 혼자 돌아다녔잖아. 당연히 모를 수밖에. 아무튼 그 여자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이사나 씨가 미혼이라고 탐내는 게 너무 눈에 보인다고. 근데 더 웃긴 게 뭔지 알아? 이사나 씨한테 추근거리는 횟수만큼 라온휘젠 황태자한테도 똑같이 한다는 거야.”

“헐?”

“황태자의 머리색을 보고 대충 정체를 눈치챈 것 같더라고. 양손의 저울처럼 아주 돌아가면서 기웃거리는데, 균형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맞추더라. 얼마나 꼴 보기 싫던지. 그래서 기웃거리는 거 발견할 때마다 자리에 같이 끼어들어서 훼방을 놔주고 있는 중이지.”

“푸핫, 너답다. 잘하고 있어. 그럼 둘째는?”

“둘째는 푼수야. 걘 잘생긴 남자는 다 좋아하는 것 같아. 라피스 님 쫓아다녔다가, 시벨 씨 쫓아다녔다가, 태자 쪽 쫓아다녔다가 하루 종일 아주 정신없어.”

“그, 그래?”

“특히 라피스 님을 엄청 따라다녀. 얼마 전엔 연서를 보내려고 했다가 백작님한테 걸려서 혼난 적도 있어.”

“……헐.”

전부 다 금시초문인 이야기들뿐이었다. 같은 시간을 머물렀는데 경험하고 목격한 부분이 이렇게나 다를 줄이야. 아예 별세계에 있다가 온 기분이었다.

“첫째는 한창 사춘기니 그렇다 치고. 둘째는 10대 초반 아닌가. 아직 어린애잖아. 그 나이에 벌써 연서 같은 걸 쓰나?”

“무슨 애 늙은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그 나이 때 귀족들은 약혼도 하고 결혼도 하거든?”

“으음. 하긴 알리사 너도 10대 초반이지.”

그리고 운명이라는 거창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두 남자의 신경전 한복판에 존재하는 몸이기도 하다. 지금 이들의 관계가 그나마 평화로울 수 있는 것도 알리사가 아직 어리기 때문일 거다. 새삼스러운 사실을 떠올렸더니 알리사의 눈매가 단번에 사나워졌다.

“생일 지났으니 이제 열네 살이거든? 그럼 중반으로 봐야지.”

“그래도 아직 꼬마네.”

“그래서 뭐. 불만이야?”

“아하하, 아냐. 그럼 마지막으로 셋째는 어때? 이제 열 살쯤 됐나?”

“아직 아홉 살일 거야. 걔야말로 정말 어린애지. 그래도 내가 보기엔 셋 중엔 걔가 제일 나아. 애교도 많고,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잘 웃거든. 막내라 그런지 백작 부인만 졸졸 따라다니는 어리광쟁이이긴 하지만. 성격은 좋은 것 같아.”

“그래?”

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환각 속 소녀의 나이는 많아 봤자 십 대 초반. 그녀가 가해자라는 전제하에 일단 명백히 아가씨 티가 나는 첫째는 제외(알리사는 그녀를 제일 싫어하는 것 같지만). 용의선상으로 두기엔 둘째와 셋째가 해당되긴 했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주목한 건 막내인 셋째였다. 딱히 특별한 이유랄 건 없었다. 그 소녀가 마신관이 되고 싶어 한다고 했던 것 때문이다.

“……소원을 이뤄주는 마녀. 그건 마신관을 노리는 거라고 했지.”

처음 들었을 때부터 그 이야기가 계속 마음에 밟혔다. 어린 여자아이가 저택의 사념에 관여되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 후부터는 자연스럽게 백작의 셋째 딸부터 떠올랐다.

마신관을 꿈꾸고 있는 귀족 영애. 신전과의 교류도 적극적일 거고, 그만큼 알고 지내는 신관들도 많을 가능성이 크다. 어린 신관 지망생에게는 다들 쉽게 마음을 열었을 것이다. 만약 그들 중에서 진짜 문장을 가진 신관이 있었다면?

백작의 셋째 딸은 고작 아홉 살에 불과한 어린아이다. 별거 아닌 소문에도 쉽게 현혹되고도 남았고, 호기심에 떼를 쓰기도 충분한 나이였다. 어쩌면 그로 인해 마신관이 마왕의 함정에 걸렸고, 그 아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죽게 된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평범한 묘사가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알리사가 내린 평가는 셋째가 가장 무난했다. 예민하지도, 음침하지도 않았고, 구김살 없이 명랑하고 사랑스러운 성격인 듯했다. 처참한 살해 현장을 목격했을 아이가 그렇게 멀쩡하게 잘 지낼 수 있을까? 사실 스왈트 제국에서 금갈색 머리는 비교적 흔한 편에 속했다. 굳이 바논 백작의 딸들이 아니라도 좀 더 파고들면 용의자가 될 만한 사람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는 소리다. 물론 그 환각 자체가 허상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전혀 엉뚱한 쪽을 짚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소원을 들어주는 마녀가 정말 마왕과 관계된 것이 맞는지, 그조차 아직 확인된 정보가 아니기도 하고.

“하아, 정말 모르겠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이어질수록 모든 것이 원점으로 회귀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두 팔 사이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어차피 지나가는 곳일 뿐인데 그냥 아무것도 관여하지 말고 가만히 있을 걸 그랬나? 괜히 시작해서 머리만 아파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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