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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291화 (291/608)

제291화

마지막까지 난해하기 그지없었던 세리엄의 말은 그를 따라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 곧바로 해소됐다. 문을 열자마자 찌를 듯이 후각을 자극하는 강렬한 냄새 덕분이었다. 톡 쏘는 시큼한 악취의 정체는 너무나 뻔해서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덮은 채 잔뜩 웅크리고 있는 인물의 정체 역시.

“……아셀.”

한동안 부를 일이 없어 잊고 있던 이름을 오랜만에 입에 담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의식이 없는 건 아닌데 주위를 잘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취했으면 그럴 만도 하지. 나는 신음을 흘리면서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요 며칠 안 보인다 싶긴 했지만 설마 이런 꼴이 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얼마나 술을 마셔댄 건지 수많은 빈 병들이 바닥을 이리저리 구르고 있었다. 가볍게 세어본 숫자만 봐도 열 병이 순식간에 넘어섰다.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알코올 향이 오히려 부족하다 여겨질 정도였다.

“미쳤군.”

뒤에서 따라 들어오던 시벨리우스가 혀를 찼다. 그 역시 방 안의 상태를 보고 질린 것 같았다. 나는 구석에 박혀 있는 이불더미 쪽으로 향했다. 그 속에 숨어 있는 아셀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치자 겁먹은 동물처럼 움츠린 아셀의 모습이 보였다.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은 상태에서도 그는 한 손에 술병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아셀?”

가까이에서 불러서인지 이번엔 반응이 있었다. 어깨가 움찔거리더니 그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지저분하게 늘어진 머리카락 아래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이 드러났다. 생기가 돌던 두 뺨이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홀쭉해져 있었다. 항상 단정하고 총명하던 눈빛은 탁하다 못해 퀭했다. 황태자의 보좌관이 아니라 거리의 낭인에 더 가까운 행색이었다.

“아셀. 내 말 들려요? 아셀?”

“히이익!”

가볍게 흔들었더니 그가 기겁하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부릅떠진 녹색 눈동자에 곧장 눈물이 차올랐다.

“시, 싫어! 이거 놔! 이거 놔아아!”

“네? 윽, 저기, 잠깐만요. 아셀?”

“놔아아!”

그냥 어깨를 잡았을 뿐인데 생각보다 돌아오는 반응이 거셌다. 발작을 일으키듯 저항하는 것에 당황한 나는 손을 떼어내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기 무섭게 아셀은 그대로 이불 속에 숨어들었다. 이번엔 아예 엎드린 채 귀를 틀어막은 상태였다. 그러고도 여전히 덜덜 떨고 있는 그에게서 중얼중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교단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도문을 읊고 있는 듯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나는 아연한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셀의 상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대체 술을 얼마나 마시면 멀쩡하던 사람이 이렇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굳은 얼굴로 돌아보았더니 눈이 마주친 세리엄이 복잡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안 들을 겁니다. 그 녀석이 유독 술을 좋아하긴 하는데, 요즘은 자중을 못 하더라구요. 웬만하면 내버려 두는데 이러다 죽을 것 같아서요. 저런 상태라도 고칠 수 있습니까?”

“으음, 네, 치료는 가능해요.”

“정말이요? 하아, 다행이다.”

일그러져 있던 세리엄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펴졌다. 그는 안도한 얼굴로 크게 숨을 내쉬었다.

“태자 전하나 다른 사람한테는 말도 못 했습니다. 감기에 걸려서 자고 있다고 핑계 대는 것도 한두 번이지, 저러다 훅 갈까 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고생하셨겠네요. 이제 괜찮아질 거예요.”

나를 찾아오기까지 세리엄이 느꼈을 번민과 고뇌가 충분히 이해됐다. 보좌관인 아셀의 행실은 곧 그가 모시고 있는 황태자의 체면으로 이어진다. 그런 그가 이렇게 망가져 있는 모습을 황태자의 경쟁자 측에 있는 내게 선뜻 내보이기가 망설여졌을 것이다.

나는 이불이 감싸진 상태에서 아셀의 머리 쪽에 손을 올렸다. 닿는 감촉을 느낀 그가 흠칫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얼굴을 마주보지 않은 상태라 그런지 이번엔 아까처럼 저항하려고 하진 않았다. 치유의 힘을 불어넣자 경련하는 것처럼 진동하던 몸에서 떨림이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다시 손을 떼었을 땐 아셀의 호흡이 완전히 안정되어 있었다. 내내 중얼거리던 기도문 소리도 그친 뒤였다. 이불을 들춰보았더니 곤히 잠든 그의 모습이 보였다. 알코올 기운이 날아가면서 그대로 잠에 빠져든 것 같았다. 얼굴의 붉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아셀을 부축해서 침대에 눕히도록 했다. 한달음에 다가와 부축을 도운 세리엄이 아셀의 안색이 멀쩡한 것을 보고는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괜찮아진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어떻게 인사를 드려야 할지.”

“아니에요. 근데 왜 이렇게 술을 마신 거예요?”

이럴까 봐 이 방에 있던 사념도 정화해 뒀었다. 백작저에 도착한 첫날, 요란하게 토악질을 하던 아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신없이 술을 들이켜는 게 상당히 심상치 않아 보여서 이 방의 정화는 특히 더 신경 썼다. 하지만 딱히 도움이 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건 녀석이 깨어나면 직접 물어보십쇼. 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세리엄이 곤란한 듯이 얼굴을 씰룩거렸다. 황급히 회피하는 시선에서 어느 말에건 답하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보였다. 하지만 나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태자 전하가 상당히 활동적인 분이신가 봐요. 방에만 있는 게 답답하셨나 보죠?”

지나가듯이 건넨 말에 세리엄이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예? 그게 무슨…….”

“아셀은 어지간하면 밖에 안 나가고 싶어 했을 텐데. 그가 억지로 움직인다면 태자 전하와 관계되어 있을 것 같아서요. 어딜 그렇게 다닌 거예요? 어차피 눈이 많이 와서 저택 밖으로는 나가지도 못하잖아요.”

“어…… 그냥 별건 아닌데. 실내 정원이나 서재 같은 곳을 가셨을 뿐입니다. 저택의 주인에겐 허가를 받았어요. 예의에 어긋나는 일도 하지 않았고요.”

“나가면 얼마나 있다 돌아와요?”

“낮 시간은 거의…….”

아이고, 그러니까 애가 이 지경이 되지. 나는 나직하게 혀를 찼다. 활동 시간의 대부분을 다른 장소에서 보내다니, 방을 정화해 둔 의미가 전혀 없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이쪽의 상황을 진작 들여다볼 걸 그랬다. 저택 안에서만 있어야 하니 달리 방 밖으로 나갈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대저택의 실내 활동 반경을 내가 너무 우습게 봤던 모양이다.

“밤에도 나갔던 것 같은데?”

이번에 말을 꺼낸 사람은 시벨리우스였다. 안 그래도 당황하고 있던 세리엄이 흠칫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그건 어떻게…….”

“윽, 밤에도 나갔어요?”

밤에는 사념의 영향력이 더 강해진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영향을 받기 시작하는 시간인데 하물며 ‘보이는’ 아셀에겐 더 괴로운 시간일 터였다. 나나 시벨리우스는 그런 기운에 휘말리지 않을 만큼 강하기라도 하지만, 인간인 아셀은 그렇지도 않을 테니까. 그의 입장에선 거의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었을 거다. 알레르기나 공포증을 가진 사람에게 강제로 그 현상을 일으킨 거나 다름없었다. 나도 모르게 비난하듯이 바라보았는지 세리엄이 열심히 변명했다.

“정확히 말하면 밤에 나간 건 아니고. 그 시각쯤에 돌아온 겁니다. 전하가 한번 책에 집중하시면 시간이 기우는 걸 잊을 때가 있으셔서…….”

“그냥 돌아오기만 했어요?”

“어, 으음, 그러다 보니 식사나 간식거리를 챙겨드리느라 주방도 잠시 다녀오긴 했지만. 새벽의 실내 정원도 보고 싶다 하셔서 거기도 좀 들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런 건 딱 한두 번 정도였거든요. 정말입니다.”

그야말로 알차게 돌아다녔구나. 여기서 횟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이제 와서 지난 일을 타박해 봤자 소용없겠지.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쨌든 밤에 돌아다녔다는 말이죠. 어쩐지, 단순히 만취한 것치고는 상태가 좀 심하다 싶긴 했네요. 혹시 술을 취할 때까지 마시기 시작한 것도 그 후부터인가요?”

“그렇긴 한데…….”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세리엄은 이런 질문이 오가는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얼굴을 뒤로한 채 나는 시벨리우스를 돌아보았다.

“지금이야 우리가 있다지만 항상 이런 식이면 굉장히 괴로울 것 같은데. 영안을 닫게 하는 방법은 없나?”

“시도할 순 있지만 잘못하면 장님이나 폐인이 될 수도 있어. 차라리 방어 주술을 배우는 게 나을 걸?”

“방어 주술? 그런 것도 있어?”

“원래 주술은 이쪽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거거든. 마법의 형식이 섞이면서 좀 더 다양화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음기를 다루는 힘이지. 방어 주술 자체는 공격 주술에 대항하는 기술이긴 한데, 일단 그걸 익혀 두면 음기에 저항하는 힘 자체가 강해져. 적어도 사념에 영향을 받거나 사로잡히진 않게 될 거야.”

“아하, 대충 알겠다! 게임으로 치면 패시브 스킬이나 스탯을 찍는 거구나?”

“으음,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기본 체력을 올린다는 개념으로 보면 돼.”

시벨리우스가 묘하게 반가워하는 얼굴로 웃었다. 이곳에서는 생소한 단어나 용어를 쓸 때마다 그가 짓곤 하는 표정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엘’의 흔적을 발견할 때 짓는 얼굴이다. 그러고 나서 본인도 아차 싶었는지 반사적으로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모르는 척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그럼 시벨, 아셀한테 그 방어술이란 걸 가르쳐 줄 수 있어?”

“응? 저 녀석한테?”

“싫어?”

“으음. 그리 내키진 않지만…… 알았어. 꼴을 보니 내버려 두면 조만간 비명횡사할 것 같은데. 여기서 모른 척하면 두고두고 꿈자리가 사납겠지. 불쌍한 꼬마 하나 살리는 셈 칠게.”

“잘 생각했어. 세리엄 씨, 일단 지금은 시간이 늦었으니까 우린 돌아가 있을게요. 수고스럽겠지만 아셀이 깨어나면 연락해 주시겠어요?”

진군 중에는 수련할 틈을 내기 쉽지 않을 테니 한동안 이곳에서 더 머무는 쪽으로 상황을 만들어 봐야 할 것 같다. 눈을 좀 더 내리게 해볼까? 일정을 대충 짜보면서 세리엄을 돌아보는데 당연히 돌아와야 할 대답이 없었다. 그가 왠지 얼빠진 사람처럼 우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세리엄 씨?”

“……당신들, 진짜였네. 정말로 아셀을 이해하고 있는 거군요.”

“네?”

엉뚱한 소리에 잠시 당황했다가 나는 곧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처음 만났을 때 우리를 사기꾼 취급하더니, 그때 했던 말을 드디어 믿기 시작한 모양이다.

“되게 묘한 기분이네요. 지금까지 아셀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요. 다들 비웃거나 미친놈 취급했죠. 솔직히 말하면 나도 다르지 않았어요. 아셀을 좋은 녀석이라고 여기긴 하지만, 정신엔 약간 문제가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는 횡설수설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솔직히 자꾸 이상한 게 보인다고 하고, 엉뚱한 곳에 가 있기도 하고, 툭하면 못 견딜 때까지 술을 마셔 대지를 않나. 매번 이상 행동을 하는 게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잖아요. 왜 그런 애들 있잖습니까? 자기 자신한테 도취해서 본인이 특별하다고 착각하는 거. 점성술사 중에는 그런 애들 좀 많거든요. 아셀도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녀석이니 당연히 그렇거니 했죠. 태자 전하도 아셀 편을 들어주긴 했지만 내심은 나와 같았을걸요.”

“아셀이 점성술사였어요?”

“몰랐습니까?”

“지금 처음 들었으니까요.”

아셀에 대해선 황태자의 보좌관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사실 눈앞의 세리엄은 아예 뭐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산적 같은 인상이나 덩치를 보면 기사 같기도 한데, 그런 것치곤 특유의 절도나 기세가 느껴지진 않았다. 그래도 꽤 몸을 단련한 걸로 봐선 수준급의 전사인 것만은 분명…….

“아, 난 학자입니다. 태자 전하가 다니시는 아카데미에서 연금술을 가르치는 강사로 일하고 있죠. 무단으로 나왔으니 지금은 잘렸겠지만.”

“…….”

내가 보내는 시선의 의미를 알았는지 세리엄이 바로 대꾸했다. 그를 두고 고심했던 것 중에서 가장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이었다. “되게 안 어울리네요.”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그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흠흠, 어쨌든 말입니다. 그동안 아셀의 말을 믿는다고 한 사람치고 제대로 된 녀석이 없었거든요? 아셀을 비웃으려는 의도거나, 이용하려거나. 대다수가 둘 중 하나였죠. 당신들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네요. 뭐, 아무리 그래도 유니콘 같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여전히 믿을 수가 없지만.”

눈앞에서 정체를 부정당한 시벨리우스가 얼굴을 가만히 찌푸렸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은 합니다. 특히 당신이요.” 세리엄이 나를 차분히 응시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묻고 싶은 게 많은 표정이었으나 그는 말을 아꼈다. 호기심을 느끼면서도 진실을 확인하는 걸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선까지만 밟는다는 점에선 현명한 사람이었다. 생긋 웃어주자 그는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었다.

“아무튼 오늘은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일러두신 대로, 아셀이 깨어나면 연락드리죠.”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가벼운 인사를 마친 뒤 나와 시벨리우스는 몸을 돌렸다. 이윽고 완전히 문을 나서는 우리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셀, 넌 진짜 특별한 쪽이었나 보다. 어쩌면 저 사람들이 네가 찾던 장소인지도 모르겠다. 저 엘프가 정말 유니콘이라면 네 시조의 동생이라는 말도 맞다는 거잖아. 네게 피를 나눈 혈육이 생긴 거구나. 정말 잘됐다.”

세리엄이 잠든 아셀을 향해 중얼거린 말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듣지 못했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으나, 내가 알아듣기엔 충분했다. 시벨리우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슬쩍 시벨리우스를 바라보았더니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지 눈동자가 깊어진 걸 보아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았다.

“근데 시조님의 동생이면 촌수가 너무 멀지 않냐? 네가 저 엘프한테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거냐? 작은 시조 할아버지? 작은 조상님?”

“…….”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엔 얼굴을 왕창 찌푸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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