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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 엘퀴네스-290화 (290/608)

제290화

“엘, 왜 그래? 뭔가 고민이라도 있는 거야?”

상한 심기가 유치한 다툼으로 번지지 않은 건 시기적절하게 시벨리우스가 말을 걸어온 덕분이었다. 그의 얼굴에 염려가 깃들어 있는 걸 보니 지금 내 모습이 이상해 보이긴 한 모양이다. 세 시간이면 확실히 긴 시간이긴 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똑바로 앉았다. 안 그래도 주시하고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더 뚜렷해졌다.

“둘 다 내 얘기 좀 들어봐. 오늘 우연히 알게 된 건데 말이야.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이상한 주술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 같아. 소원을 들어주는 마녀를 소환하는 주술이래.”

“그냥 듣기에도 구린 냄새가 진동하는데?”

“그치? 더 수상한 거 말해 줄까? 주술을 완성하려면 마신관의 피가 필요하대.”

느긋하게 듣고 있던 라피스와 시벨리우스가 그 말에 표정을 바꿨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바로 이해한 얼굴이었다.

“대공 쪽이 움직이고 있는 건가?”

“아마도. 왠지 느낌이 그래.”

“최근까지 수상한 동향은 없었다고 하지 않았어?”

시벨리우스가 묻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노스와 헤어진 이후로 대공 쪽의 움직임은 계속 주시해 왔던 참이다. 마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고 난 뒤로는 더 유심히 살폈다. 지금까지 대공의 행적에 딱히 눈에 띄는 부분은 없었다. 그는 악랄한 명성과는 달리 상당히 얌전하게 지내고 있었다. 한 번은 아이들을 데리고 제사를 지내기에 기겁해서 날아갔었는데, 정말 말 그대로 기도만 하다가 끝나서 허무해했던 적도 있었다. 마왕으로 의심되는 자와 접촉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계획을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한 만큼,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가 라온휘젠 황태자를 이쪽으로 보냈을 때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까.

마신관이 관련되기만 하면 무조건 대공 쪽을 연상하는 건 지나친 노파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기가 이렇다 보니 그 외의 다른 해석은 떠오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올 게 왔다는 기분이라 별로 충격이 크지도 않았다. 어차피 대공이 그저 가만히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고, 눈속임을 할 거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한 범위였다. 시벨리우스와 라피스도 그 자체는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소환 주술이라……. 본인들의 몸이 묶이니 아예 인간들 쪽에서 불러내도록 미끼를 깔았나 본데.”

라피스가 중얼거리는 말은 처음 내가 떠올린 생각이기도 했다. 마녀의 정체는 마왕을 돕는 마족이거나, 마왕 본인일 가능성이 크다. 대공을 통하지 않고 그가 직접 제물을 취하는 방식을 쓰는 걸지도 몰랐다. 다만, 뭐라고 해야 할까. 단지 그렇게만 생각하기엔 왠지 모를 위화감이 있었다. 그게 지금까지 나를 번민하게 만든 이유기도 했다.

“시벨, 마족을 소환하려면 마신관의 힘이 필요해?”

“음, 있으면 더 유리하긴 해. 이정표 역할을 해 주니까.”

“이정표?”

“보통 본인의 힘으로 차원을 건널 수 있는 마족은 별로 없거든. 소환하는 쪽에서 문을 열고 길을 내주는 건데, 그래도 통과하는 게 어렵다고 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안 보이는 캄캄한 공간에 들어서는 기분이라고 하더라고. 근데 마신관의 힘은 희미하게라도 느낄 수 있다는 것 같아. 그게 있으면 방향을 잡기가 쉬워지는 거지.”

“그럼 차원을 건널 일이 없다든가, 이정표가 필요하지 않은 경우엔 딱히 없어도 되는 건가?”

“응, 그렇지.”

“흐음, 그렇구나…….”

“왜?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어?”

“걸린다면 걸린다고 해야 하나. 좀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서.”

“어떤 점이?”

아까부터 거듭했던 고민을 다시 떠올리니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의식에 들어가는 재료 말이야. ……왜 하필이면 마신관의 피일까?”

저런 조건이 들어가면 사람들은 당연히 마신의 교단을 찾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실종자가 생길 경우 주변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했던 방식보다 발각될 위험이 더 큰 셈이다. 덕분에 대공과의 연관성을 짚어볼 수는 있었지만, 은밀하게 진행하는 작전치고는 상당히 부실하다고 여겨지는 게 사실이었다. 혹시 소환 주술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필요조건이라 어쩔 수 없었던 건가 했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도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그러고 보면 주술이 유행한 지 꽤 된 것 같은데, 실종자가 있었다는 말은 없었던 것 같다. 내게 소문을 전해 줬던 소년은 그런 미신이 유행하고 있는 걸 한심하게 여기고 있었다. 만약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면 한데 묶어 같이 언급했을 텐데, 그런 말이 전혀 없었던 걸 보면 별다른 사건은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굳이 문제 삼을 이유도 없어진다.

‘혹시 전제를 잘못 세운 건가? 어쩌면 대공이 관여한 일이 아닌 걸지도.’

모든 유행이 꼭 누군가의 의도로 발생하는 건 아니다. 때론 아무런 의미 없이 그저 번지기 시작하는 유행도 있다. 믿기지 않지만 그런 경우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결론을 내리고도 찜찜한 마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옆에서 시큰둥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고민할 게 뭐 있어? 그 자체가 목적인 거지.”

입을 연 사람은 라피스였다. 나는 어리둥절해하면서 그를 돌아보았다.

“그 자체라니?”

“마신관의 피 말이야. 애초에 대놓고 언급해 놨잖아. 때론 가장 단순한 곳에 해답이 있는 법이지.”

“어…… 그치만…… 왜 마신관의 피를……?”

“마왕에게 마신의 금제가 남아 있다며. 마신의 저주는 같은 힘으로 상쇄할 수 있잖아. 마신관의 성력은 잘만 활용하면 마족의 마기보다도 마신의 힘에 더 가까워지거든. 지금의 마왕에겐 매력적인 먹이겠지.”

대수롭지 않게 이어지는 대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어안이 벙벙한 기분이었다. 설마하니 거기까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비정하지만 가장 그럴듯한 해석이긴 했다. 나는 몇 번이나 입을 벙긋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으음, 근데 그런 이유라면 굳이 이런 식으로 찾을 필요가 없지 않아? 마신관이 필요하면 그냥 신전으로 가면 되잖아. 대공 주변에 넘치는 게 마신관들일 텐데.”

“글쎄, 대공을 섬기는 신관이 과연 진짜 신관이라고 할 수 있나? 그중에서 몇 명이나 제대로 문장을 유지하고 있을까? 처음부터 없는 놈들도 많을 것 같은데.”

“……!”

이번에도 나는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카노스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지금 대공 곁엔 그의 신관이 하나도 없다고.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들만 남았다고.

그땐 능력이 약한 하급 신관들밖에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데, 이제 보니 그마저도 아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들 안에는 진짜 자격을 가진 신관이 하나도 없는 거다. 처음부터 자격이 없는 자였거나, 혹은 자격이 있었는데 상실했거나.

“맙소사.”

왜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을까. 신관에겐 매우 엄격한 잣대가 요구된다고 했었다. 신의 이름을 사사로이 이용하면 자격을 잃거나 죽는다고. 대공의 저지르고 있는 죄가 그렇게나 크고 추악한데, 옆에서 수족처럼 움직이고 있는 마신관들이라고 그 죄에서 자유로울 리가 없었다. 그들이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신관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럼 지금 그들이 찾고 있는 건…….”

“문장을 가진 진짜 신관이지. 넌 애초에 마신관은 다 대공과 한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 틀에서부터 벗어나는 게 어때? 어딘가에는 제대로 된 마신관도 분명히 있을 거란 말이지. 곧 발견될 예정이라든가.”

“발견될 예정이라니?”

“신관의 문장은 열 살 전후로 나타나니까. 어제까지 없었다가도 갑자기 생길수도 있잖아.”

“…….”

설명을 듣고 있으려니 속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갑갑해졌다. 숨을 크게 내쉬어 봐도 전혀 나아지지 않아서 나는 가슴 위를 여러 번 문질렀다. 얽혀 있던 이야기들이 하나둘씩 정리되어 가는데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물었다.

“저기, 근데 실종자가 있다는 얘기는 없었거든. 설마 마신관 쪽을 노린다고는 상상도 못 했지만, 어쨌든 사제들이 사라지거나 죽었어도 문제가 됐을 텐데. 바로 알려지지 않았을까?”

“알려질 리가 없지. 죽은 게 사제니까.”

“……어?”

“멀쩡한 사제가 그런 수준 낮은 미신에 휩쓸릴 리가 있냐. 대부분은 주변인들이 시도하고 있을걸? 그리고 그 주술을 시도하는 놈들의 목적은 하나지.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그게 무슨 의미겠어?”

“설마…….”

“인간 중엔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타인의 희생쯤은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놈들이 많지.”

조소하듯이 중얼거리는 라피스의 말에 나는 가만히 숨을 삼켰다.

“소원을 이루는 대가로…… 사제의 죽음을 은폐하고 있다는 거야?”

확인을 구하긴 했지만 듣지 않아도 대답은 알 것 같았다. 이미 머릿속에서는 그것 외의 다른 결론이 나지 않았다. 설령 은폐하고 싶지 않더라도 마왕 쪽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비극적인 결말인 건 변하지 않을 테지만.

“사제 쪽도 아무의 요청이나 들어 주는 건 아닐 텐데. 그럼 결국 가까운 사람들로 인해 죽게 된다는 거잖아. 이 나쁜 자식.”

“바로 그걸 노리는 거야.”

“뭐?”

멍한 기분으로 고개를 들자 라피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까 말했잖아. 마신관의 성력을 활용하면 마신의 힘에 가까워지게 할 수 있다고. 그게 그 방법 중 하나거든.”

“방법이라니. 아는 사람 때문에 죽는 거 말이야?”

“뭐, 비슷해. 거기에 몇 가지가 더 첨가되겠지만.”

“무슨…….”

“……타락하는 천사의 눈물을 삼키는 어둠의 주술.”

대화를 이어받은 건 시벨리우스였다. 그가 고요한 어조로 중얼거렸고, 라피스가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뭔데?”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어 있는 시벨리우스의 표정을 보니 상당히 질이 나쁜 주술이라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똑똑!

그들을 더 재촉하지 못한 건 마침 밖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수많은 말들을 눌러 삼킨 채 일단 찾아온 사람부터 확인했다. 그런데 문을 열자 전혀 뜻밖의 사람이 서 있었다. 당황스러움에 방금 전까지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기분마저 사라졌다. 나는 잠시간 눈을 깜빡거리다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빤히 훑어보는 눈길에 상대가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의외의 인물이었으니까.

“음, 그러니까……세리엄 씨였던 가요?”

그는 라온휘젠 황태자의 일행 중 한 명인 세리엄이란 남자였다. 짙은 잿빛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다소 호전적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까지, 전부 내가 알고 있는 그의 모습과 같았다. 다만 그가 우리를 찾아올 이유가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 역시 매우 민망한 듯 심란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뒷머리를 긁적거린 채,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하고 연신 눈을 피하기 바빴다.

“여긴 무슨 일이세요?”

“으음, 저기……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는데…….”

“부탁이요? 저한테요?”

저 사람이 나한테 부탁할 만한 일이 뭐가 있지? 갑자기 찾아온 것도 당황스러운데 용건은 더욱 뜬금없어서 어리둥절해졌다. 첫 만남 이후로는 제대로 대화를 섞어본 적도 없는 사이였던지라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엘,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때 시벨리우스가 다가오다가 세리엄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세리엄 역시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했다. 눈에 띄게 낭패감을 드러낸 그를 향해 시벨리우스가 냉담한 시선을 던졌다.

“너 뭐야? 엘한테 무슨 용건이야?”

“아, 저기…… 그러니까…… 아씨, 이런 거 진짜 성미에 안 맞는데.”

“뭐야?”

“아니, 그냥 혼잣말이오! 아니, 입니다! 저기,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상황이 좀 급한데, 도움 좀 청해도 됩니까?”

결심을 굳힌 듯, 내내 망설이던 세리엄이 빠르게 소리쳤다.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기에 나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켜 보였다. 나한테 하는 말이 맞다는 표시로, 그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무슨 도움이요?”

“저기…… 그거 말입니다. 그때 하셨던 그거.”

“그때요?”

“그…… 치료……하는 거요?”

“……!”

슬쩍 눈치를 본 그가 자신 없이 말끝을 올렸다.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아무래도 일전에 황태자를 치료해줬던 걸 기억하고 찾아온 모양이다. 그 한마디를 똑바로 하기가 어려워서 이렇게 질질 끌었다니. 어처구니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얼마나 다급하면 나를 찾아왔겠나 싶어 마음이 한층 차분해졌다.

“혹시 누가 다쳤나요?”

“으음, 그게 말입니다. 다쳤다기보다는, 아니, 다친 건 다친 거긴 한데 외상은 아니랄까. 그렇다고 내상이라고도 할 수 없고. 그것참.”

“네?”

이해하기 어려운 화법에 고개가 저절로 기울었다. 시벨리우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봐, 아까부터 대체 뭐하자는 거야?”

“후우, 미안해. 아니, 미안합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어서요. 하지만……그래요. 여기까지 와서 숨기고 감출 일은 아니지.”

크게 한숨을 내쉰 세리엄이 두 손으로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매우 씁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혹시 해독도 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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